|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Ⅰ. 들어가는 말
신약성서를 보면서 신약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해서 이시대에 맞게끔 전해주어야 하는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가 중요하게 해야 할 작업중 하나는 텍스트인 신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과 텍스트가 쓰여진 사회 문화적 배경지식에 대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맞게끔 재구성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 문화라는 말 자체에는 거대한 범위와 의미가 있어서 다루는 범위는 사회구조, 가족제도, 그 밖의 경제와 문화를 연구하고자 한다.
Ⅱ. 사회구조
1.로마의 사회 구조
1) 자유인1)
고대 로마 시절부터 로마 사회는 귀족 계급과 평민 계급이라는 두 부류로 구분되어 있었다. 귀족 계급은 그 조상이 공화정이 창설되었을 때, 원로원 의원을 지낸 사람들이었다. 이 계급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부자라도, 어떤 직책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평민 계급이었다. 처음에는 귀족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모든 관직을 차지했었으며, 평민들의 압력이 있게 되자 관직을 차지하거나 귀족 계급에 속한가문과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점점 확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당시 로마에는 법적으로 원로원 계급, 기사계급, 평민계급의 세 개의 집단이 있었는데, 부는 이들 계급의 기초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기사 계급에 들어가려면 400,000세스테르티우스가 있어야 했다. 400,000세스테르티우스가 있어야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건국 초기에 이 사람들은 말 한 필을 타고 전쟁에 나갈 수 있을 만큼 부자 평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로원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백만 세스테르티우스가 필요하였다. 이 상위 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수는 극히 적었다. 어떤 학자는 원로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로마 제국 인구 전체의 1%에 해당하는 2,000명을 넘지 않았으며, 기사 계급은 원로원 계급의 10분의 1 미만이었다고 추산한다. 이들은 글자 그대로 특권 계급이었다.
2) 노예2)
노예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급에 속하였지만 수가 매우 많았고 신약 시대에는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해방 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해방 노예들은 그들의 전 주인에게 계속해서 매여 있었다. 자유인은 병들거나 상해를 입었을 경우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이 자신이나 가족 외에 아무도 없었지만, 해방노예들은 대개 전 주인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세기에 노예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노예의 주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플리니우스는 자기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였다. 일을 시킬 때 족쇄를 채우지 않았으며, 유언을 하도록 허락하였고, 요양차 프랑스 리비에라에 잇는 친구의 별장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상반되는 예로 자기 노예의 혀를 자르고 그를 십자가에 매단 남자도 있었고, 마르티알리스는 마음에 들지 않게 머리 손질을 해 주었다는 이유로 계집아이 노예를 매로 때린 한 귀족 부인을 소개하기도 했다.
1세기 중엽에는 스토아 철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노예의 신분이나 처우가 개선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사람들은 모두 운명에 지배되는 것이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견지했다. 세네카는 출생의 우연이나 정치적인 불운을 제외하고는 노예와 자유민 두 신분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세네카는 자기 노예들에게 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하도록 했으며 그들과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기도 하였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과 기독교의 전파로 로마인들은 점차 노예들에게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한 인간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의 철폐를 주장하지 않았다. 노예는 사회에서 매우 필요한 존재였고 사회의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부분이어서, 당시 어느 누구도 이런 사회구조에 역행하여 노예제의 폐지를 논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노예를 같은 인간으로 대우해 주라고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3) 후견제도(보호자-피보호자:Patron-Client)
이 제도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후견인과 열등한 신분에 있는 예속자 사이에 호의(은혜)를 베풂(보호와 도움)과 감사(보은)의 행동(충성과 헌신)을 주고받는 행위로서, 상호 의존적 관계, 즉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고대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사회제도는 고대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권력과 의존이라는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도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이고 사적인 삶을 형성하는 일에도 주된 역할을 해왔다.3)
공화정 초기에는 보호자의 원조가 병에 걸렸거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지참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보호자는 그의 보호자를 위해 선거 지원을 하고, 그를 위해 힘든 일을 하며 길을 갈 때 호위해 주고, 그의 사회적인 지위가 향상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보호자 피보호자 제도는 세습되었으며, 보호자들은 계속해서 피보호자들을 원조하였고, 이것은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가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4)
4) 로마시민권5)
고대 로마에서는 한 도시에 하나의 시민권만 허락되었다. 그러나 1세기에는 이러한 규례가 바뀌어 이중 시민권이 인정되었다. 즉, 자신들의 본국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도 로마 시민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로마 시민권 제도는 속국 사람에게는 로마 제국에 충성을 다하게 하는 도구(때론 돈으로 팔기도 함)로서의 정책적 일환일 뿐 아니라 하나의 법아래 있다는 의미로 제국의 통일성을 고려한 조치로서 제국의 단일성을 상징 하였다.
특히 로마의 시민권은 로마법에 예속되어 심문 없이 매질이나 고문을 당하거나, 십자가의 형벌과 같은 잔악한 벌과 불법적 감금을 당하는 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할 권한을 가지고 있어 지방이나 주 통치자들의 판결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로마 시민인 부모나 로마시민, 로마 시민과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외국인에게서 출생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군인들에게는 제대 후에 시민권을 주었으며, 또 새로운 자치구가 수립될 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수여하기도 했다. 때론 노예가 자유민이 될 때나 로마 제국에 특별한 봉사(전쟁에 참여)를 했을 경우에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는 황제나 영향력 있는 황제의 친구에게 부탁함으로써 황제가 시민권을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5) 여인들
로마에서는 고대에 행해지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여자는 그대로 염두해 두지도 않았다. 인구 조사를 할 때도 여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여전히 여자들은 수로 세지 않았다. 로마의 여자들은 자기 개인적인 이름도 없었다. 그들의 이름은 단순히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의 여성 형을 갖다 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율리아(Julia)는 율리우스(Julius)에서 따온 것이다. 딸이 둘 이상 될 경우, 둘째에게는 세쿤다(Secunda, "둘째“), 셋째에게는 테르티아(Tertia, "셋째”),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로마의 제정 치하에서 여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인 자유를 만끽하였다. 많은 여자들이 그들의 남편이 죽고 난 후 물려받은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물건을 사기도, 재산을 팔기도 했으며(이런 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시절 이후에야 법적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자기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으며, 글자 그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분명 여자들은 자유가 있었지만 1세기의 남자들은 여전히 여자들을 이류의 사람들로 간주하였으며, 항상 교육과 관용이 필요한 사람으로 남자 특히 남편과 관련하여 그들의 존재가 결정되는 존재로 생각하였다.6)
2. 예루살렘의 사회 구조
1) 부자
①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
예루살렘은 헤로데 왕조의 통치자들 아래서 왕도로서의 영광을 누렸다. 이들의 화려한 궁정생활은 당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7) 거룩한 도시에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세워졌고, 헤로데는 예루살렘에서 4년간에 걸쳐 화려한 축제 경기들을 개최하였다.8)
왕에게는 율법에 따라(신 17:17)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미쉬나 산헤드린에 따르면 24명 혹은 48명의 부인이 왕에게 허락 되었다. 헤롯 대왕(기원전 37-4)은 10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의 마리암메만이 왕비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헤롯 왕궁 외에도 왕자들을 위한 소규모의 궁정과 헤롯의 형 페로라스의 궁정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궁정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9)
요세푸스는 헤로데의 영토를 분할 받은 상속자들의 수입을 계산하였는데, 이들의 정상적인 수입으로는 방대한 지출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호화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헤로데가 그의 왕국을 분할 할 때 감행했던 재산 몰수로 인하여 엄청난 재화가 헤로데에게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주전 12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에게 양도한 구브로(키프로스,cyprus)의 구리광산 때문에 그는 또 다른 수입을 얻었다. 또한 선심공세나 뇌물도 항상 통치자의 수지계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10)
② 자산계층 : 대상인, 토지 소유자, 세금청부업자, 대금업자11)
왕가에 속한 사람들 다음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누렸던 자산계층이다. 이들은 화려한 잔치를 열기를 즐겼다. 예컨대, 유월절 축제 때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만찬에 초대하였고, 특별한 잔치 행사 때에는 예루살렘 전체 주민을 초대했다고 한다. 잔치 다음으로 여인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많았다. 게다가 귀족층들의 딸이 결혼할 때 엄청난 금액의 지참금을 주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 최고 재판소이며 행정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이기도 했다.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고데모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100 리트라(로마 파운드)정도의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예수의 무덤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제사장 귀족도 자산계층에 속했다. 수많은 종과 하녀들을 고용했고, 제사장의 귀족들은 성전금고에 깊이 관여했고, 후손들을 성전금고 관리인으로 임명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막대한 수입원을 가늠할 수 있다.
2) 빈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는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사람들과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구호금에 의존했던 사람들로 구별된다. 생활비를 벌수 있는 사람들은 노예와 날품팔이꾼을 들 수 있다. 노예들은 주로 예루살렘에서 가노(家奴)로 일했다. 날품팔이꾼들은 노예들보다 훨씬 많았는데 예루살렘의 한 부자는 날품팔이꾼들 가운데 한 사람을 고용하여 그를 사환으로 삼아 자기가 탄 말의 고삐를 잡게 하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날품팔이꾼들은 먹여주는 것 이외에 평균 1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다. 비둘기 포수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은 날마다 네 마리를 잡아 두 마리는 제물로 바치고 나머지 두 마리로 살아갔다. 비둘기 한 마리의 가격이 8분의 1데나리온이었을 경우 하루 소득은 4분의 1 데나리온이다. 소득은 극히 적은 액수였고 일거리를 구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도 있었다. 구호금으로 생활하는 주민들은, 주로 율법학자들 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사례비에 의존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의 할당 금에 의존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성전 금고에서 출연한 구호금에 의존하였다.12)
3) 사회적 계급
① 상층계급
㈀ 제사장 계급 : 신약시대 중에서도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은 신정체제였기에 제사장 계급은 가장 중요한 귀족 계급이었다. 대제사장은 몇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속죄일에 어느 피조물도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에 일 년에 단 하루 속죄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을 수 있다. 둘째,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셋째, 자신이 상을 당한 경우에도 제사를 거행할 수 있다. 넷째, 성물을 분배할 시 가장 먼저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밖에도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퇴임 후에도 계속 대제사장직을 칭호를 유지했고 명성도 잃지 않았다. 잠시 하스몬 왕조에서 정치적, 군사적 권세를 한 번에 입는 세습직이 되었으나, 헤롯 때에 와서 전통적 특권이 무시되고 평범한 제사장 출신도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제사장 계급에서 대제사장을 제하고 성전경비대장, 주간 당직 제사장들의 통솔자, 일직 제사장들의 통솔자, 성전감독자, 창고책임자의 다섯 종류 고위직이 있었다. 이들은 고위 제사장들과 고위 레위인 들로 구성된 사제귀족에 속한 사람들이 차지했다. 레위인은 제사장 가운데 하급 성직자에 속했고 제의 자체를 섬길 수는 없었고 단지 성전음악을 담당하거나 성전 문지기 역을 맡았으며 그 밖에 성전의 여러 사소한 일을 맡을 뿐이었다. 레위인도 세습이었으며 임직 연령은 30세였다.13)
㈁ 평민 귀족: 유대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되었고, 고위 제사장 그룹과 서기관 그룹과 장로 그룹의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기에서 장로들은 평민 귀족을 대표하는 평민 가문의 수장들이었다.14)
㈂ 서기관: 기원전 마지막 시기에 새로운 상급 계층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계층이다. 1세기 유대 사회에서 70년 성전이 붕괴되기 까지 과거의 귀족 계급과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자라났다. 이들의 출신은 매우 다양하다. 제사장 귀족뿐 아니라 평범한 제사장들과 하급성직자, 상인, 수공업자, 심지어 훗날 유명한 학자가 된 힐렐과 같은 날품팔이꾼도 있었다. 서기관들은 전문 지식을 갖춘 학자로서 사법, 행정, 교육 기관에서 지도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고위 제사장들과 귀족 가문을 제하고 산헤드린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산헤드린의 바리새파는 전적으로 서기관으로 구성되었다.15)
② 하층계급
예루살렘에서 사회적 하층계급이란 지배층의 권력과 특권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배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무리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천대받은 직업: 운송업자들은 도둑질과 같은 직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천대를 받았다. 배달을 맡긴 물건들을 착복 받을 유혹을 받는 운송업들이었기 때문이다. 목동은 자신의 가축을 남의 땅 안으로 몰고 다녔을 뿐 아니라, 가축의 소산물을 착복하였기 때문에 천대받았다. 소매상인은 고객들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유혹받는 직업이었고, 의사는 부자를 우대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홀대한 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으며, 푸줏간 주인은 금지된 찢겨진 고기를 식용으로 몰래 판다고 의심받았다. 개똥수거자나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들은 악취로 인해 혐오감을 일으키는 직업이기에 천대받았고, 금세공, 절구석공, 직조인등은 여인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직업들이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세리의 경우 살인범과 강도와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16)
※ 천대받은 직업들: 나귀 몰이꾼, 낙타 몰이꾼, 뱃사공, 마부, 목동, 소매상인, 의사, 푸줏간 주인, 개똥 수거자,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 금세공업자, 아마빗 제조자, 절구석공, 행상인, 직조인, 이발사, 빨래꾼, 매혈자, 목욕탕업자, 도박꾼, 고리대금업자, 비둘기 경주진행자, 휴경년 과일장수, 세리
㈁ 유대인 노예: 당시 유대 사회에 노예들이 있었는데, 이들 유대인 노예역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무리에 속했다. 유대인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는, 도둑질을 한 남자의 경우, 극빈자들이 자발적으로 남자 노예가 되는 경우, 12살 미만의 여자 아이로 한정된 여자 노예의 경우가 있었다. 유대인 노예의 기간은 만6년(출21:5-6,신15:16-17)이었고, 6년이 차기 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해방되거나 속전이 지불되었을 경우 자유를 얻었다. 여자 노예의 경우 주인이 죽거나 12세가 되면 노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방인 노예보다 나은 대접을 받았는데 법적으로 유대인 노예는 주인집의 아들들과 동등하게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가족을 부양할 책임도 있었다.
㈂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민족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 노예보다도 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여겨졌다. 이들은 유대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받은 후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따로 세워 유대인들과 심한 갈등 상황에 있었다. 헤롯 시대에 잠시 긴장이 완화 되었으나, 헤롯이 죽은 후 코포니우스 총독 시대에 사마리아인들이 유월절에 성전 회당과 성소 전체에 사람의 뼛가루를 뿌려 성전을 부정하게 만듦으로 갈등이 다시 깊어졌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부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이방인들과 동등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 비합법적인 이스라엘인: 유대 사회의 비합법적인 이스라엘인들은 비합법적인 사제 자녀, 개종자(proselyte) 그리고 해방노예가 속한다. 이중에 비합법적인 사제 자녀란 한 사제가 혈통이 다르거나 결혼이 금지된 여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녀를 말한다. 또 개종자란 완전한 개종자와 반쪽 개종자로 나뉘는데 할례와 침례를 받고 희생제물을 바침으로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사람들을 완전한 개종자라 하고, 유일 신론을 고백하고 의식율법의 일부만 준수하는 사람들을 반쪽 개종자라 한다. 이들 중에 반쪽 개종자는 법적으로 여전히 이방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방인 해방노예들은 유대인의 노예로 일하다가 훗날 자유인이 된 이방인 사람들을 말한다.17)
4) 여인들
유대 상류 사회와 특히 율법에 신실했던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여성들이 공적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특히 집 밖에 나설 때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용모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비천한 계급의 여인들은 상류 사회의 여인들보다 조금 개방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생계를 위해 경제적 활동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골은 도시보다 훨씬 활동이 자유로웠다. 양육, 농사일에 직접적으로 여인들이 참여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층 계급이나 시골에서 여인이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 였다. 이 당시 여인들의 공통점은 공적인 삶에서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과 부모 혹은 남편이 그들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부부 관계에서도 이들은 불평등한 관계에 있었다. 특별히 유대 사회는 남편에게서만 이혼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더 심한 경우는 과부가 되어도 남편에게 얽매이는 것이었다. 남편이 남자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때(신25:5-10, 막12:18) 죽은 남편의 형제들이 형사취수혼을 거부해 주지 않으면 여인은 재혼 할 수 없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여인들은 소외를 받고 있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부인들은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의 뜰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18)
Ⅲ. 가족제도
1. 가족 개념 : 가정은 초기 기독교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가장 기초적인 사회 단위이다.
로마19) | 유대20) |
- 남편, 아내, 자녀, 친척 노예 - 경제적인 상호의존 - 공동되는 종교의식에 의해서 신을 숭배하는 일과 연결되어 짐 - 절대통솔권인 부권(patria potestas 파트리아 포테스타스)을 통해서 아내와 자녀들의 생활을 관장. ▶법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사형 및 노예로 팔수 있었음 ▶자녀들의 결혼 및 일생의 직업을 설계 ▶부권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계속 | -아버지, 아내, 자녀, 며느리, 종들을 포함하는 대가족 형태 -가족의 대표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책임지고 의식을 관장하는 제사장이므로 권위를 인정받고, 존경을 받아야 함. -가장은 가족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 율법을 지도, 가문, 지파, 민족의 전통을 보존 전수해야 했음 -아내는 돈을 내고 사온 것이라 율법상 남편의 소유(출 20:17), 비 인격적으로 다룰수 없었음. |
1) 로마의 가족 붕괴21)
원인 | -1세기 겪은 수 차례의 내전으로 인한 가족구조의 파괴되었다. |
결과 | -출생률의 감소로 이어졌다. 높은 영아 사망률과 맞물려 로마인들은 자녀를 갖지 않으려고 했다. 1세기 상류층이 급격히 적어짐에 따라22) 아우쿠스투스 황제는 정책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바꾸어 보기 위해서 결혼하고, 세 아이를 둔 남자만 정치적인 관직에 오를수 있도록 하였고, 재산을 상속 받을수 있도록 하였지만, 명목상의 결혼과 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요직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기에, 예외조항을 만들지 않을가 없었다. |
2. 결혼23)
로마 | 유대 |
-남편에게 부여된 신부를 다스리는 힘에 정도에 기초함 -가문의 정략에 의한 것 * 지참금 아내의 지참금을 투자하거나 소유지일 경우에는 그것을 적당하다고 생각될 때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혼할 경우 지참금은 아내에게 돌아갔고 아내의 간통 사실이 있을 경우 남편은 아내의 지참금 중 일부를 가질 수 있었다. 혼인을 성사시켜야 할때가 되었을 때 그 딸의 처녀성을 입증하려하였다. 만약 결혼전 성관계를 가진 여자는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는 종신토록 더렵혀진 자로 낙인이 찍혔다. 결혼 때에 처녀성을 보장하기 위해 일부 소녀들은 열 살이나 열 한 살 때부터 남편이 될 사람의 집에서 살기도 하였다.
- 결혼적령기 > 여자 : 열네살 이전 > 남자 : 스물 다섯 이전 *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 남편과 아내의 나이 차로 인해서 젊은 과부의 수가 많았다. 소녀의 나이와 상관없이 관계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24) | -로마의 결혼 풍습과 유사함 양가의 계약이었으며, 이 계약으로 인해 두가지 경우에 효력을 나타냄. 유대인에게 결혼은 정상적이었으므로 결혼하지 못하면 수치로 여겨졌다.26) |
3. 이혼과 재혼27)
로마 | 유대 |
-결혼이 정략적이었으므로 동거 이상의 의미가 없음 -이혼은 배우자 어느 한편이 시작해서 결혼생활을 그만하겠다는 의사표시만 하면 이혼 성립 -이혼 사유는 -1세기 까지 이혼의 권리를 부부모두가 가짐 | - 유대인 남자들의 특권으로 남자가 권한이었음. (막10:11-12, 마5:32, 19:8).28) -이혼의 경우 이혼 사유를 밝힌 증서를 여자에게 주어야 했는데, 이것이 악용되어 아내를 버리는 도구가 됨. |
4. 자녀교육29)
로마 | 유대 |
-결혼의 불안정으로 자녀를 갖는 문제에 대한 양면성이 나타남. 귀여움을 받는 삶의 단계가 아닌 빨리 그 과정을 거쳐 성숙해야 하는 치열한 시기였다. |
|
공통점 : 3단계의 교육30) 체계에 있어서 암기가 중요했음. 초등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었으므로 교육수준은 높았음. | |
-초급교육 -중급교육 -고등교육 | -피상적으로 그리스-로마교육을 따랐지만 내용은 다름 -목적 : 종교적인 것(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 -가정 : 종교교육의 중심으로,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초보적인 교육을 담당함. -초등학교(베스 세페르: 읽기학교, 서기관의 집) -중등학교 -고등교육 |
| -의무적으로 무역을 공부함 |
Ⅳ. 그 밖의 경제와 문화
1. 치장31)
로마 | 유대 |
-육체의 쾌락에 관심을 집중하였기에 개인적인 치장과 위생에 신경을 씀 -화장품, 염료 향유와 그 밖에 미용 도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함. | -탈무드에 사용에 대해 상당히 언급되고 있으며, 고고 학자들은 심지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마사다 요새로 피신한 열심당원들도 머리 빛, 향수, 거울과 그 밖에 화장에 필요한 도구들을 가지고 갔음을 발견 |
1) 목욕32)
로마 | 유대 |
-공중목욕탕이 발달하였고, 로마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공중목욕탕의 활성화로인한 문제들 | - 그리스도인들이 목욕할 때 바른 행동과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2세기 말경, 클레멘스는 목욕도중 술취하는 사람들 비난하였고, 음욕과 음탕함이 동반되는 남녀혼탕을 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다. 남자들은 건강만을 위해 목욕, 여자들은 청결과 건강을 위해서만 목욕해야 한다고 말했다. 흥분과 쾌락을 위한 목욕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
2) 머리 치장33)
로마 | 유대 |
-로마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몸치장을 하기 시작함 -여자 -남자 | -유대여자들은 땋은 머리와 가발로 정교한 머리 모양을 했으며, 안식일에 머리를 풀어 놓는 것을 금함. 왜냐하면 건물을 세우는 것과 건물을 헐어버리는 것에 대한 금지를 어기는 죄에 해당하였기 때문. 바울이 언급한 머리모양(고전 11:14~15)으로 짐작해보면 여자들은 보통 머리를 길게 함. -딤전 2:9, 벧전 3:3은 여자들이 머리를 땋게 장식물로 치장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관심을 보이는 것을 경고함.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져 있는 유대인의 모습을 보면 동양사람들은 로마인들에 비해 머리를 턱수염을 기르도 했지만, 1세기에 와서 랍비들은 로마인들과 자주 접촉하는 유대인들에게 수염 자르는 것을 허락, 말끔히 다니는 유대인이 등장함. -탈무드에는 이발사와 헤어드레서에 대한 언급이 자주 있는데 이들은 화장품도 팔고, 손톱과 발톱을 손질해 주었고, 간단한 의술을 행함. |
-얼굴면도와 겨드랑이 털을 뽑는 사람들도 있었음. -여자들도 면도를 하거나 겨드랑이와 다리에 난 털을 뽑았고, 탈모용 크림을 사용함. -머리 색깔은 주로 갈색, 검정색, 금발이 있었음. |
3) 화장품34)
로마 | 유대 |
-창백한 피부색을 만드는 화장품을 여성들이 선호함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흰색 분을 사용하고,효과를 얻었고, 종종 화장을 두껍게 한 사람들은 비가 올 것 같은 조짐이 보일 때에는 외출하기를 자제함. -흰색의 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도에 사는 부자들임이 부자임을 뽐내기 위한 과시용일 수 있음. | -유대 여자들도 화장품을 사용함. 부분적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눈 주위, 입술 주변에 화장을 하면 유대 지방의 건조한 기후에 민감한 부위가 마르는 것을 방지,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음. |
2. 하루일과35)
로마 | 유대 |
-자연적인 스케줄(계획되지 않은 스케줄)에 따라 일을 함 -1세기에 이런 패턴의 하루 생활이 로마전역에 일반적으로 시행됨 -로마의 시인인 마르티 알리스가 기술한 로마인이 하루 생활을 토대로 재구성을 해보면 ?하층계급에 속한 로마인들은 동틀 무렵에 부자 깨워서 보호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하루종일 보호자들을 돕는데 필요한 소량의 돈을 받는다 ?법정과 그 밖의 관공서는 오전에만 일을함. 못했던 사업은 다음날에 함. ?정오가 되어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오후에 가벼운 운동과 목욕을 하고 저녁식사를 함 ?저녁식사는 오후 세시경에 함. 왜냐하면 어둠이 깔린 로마의 거리는 치안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 공휴일, 황제가 제정한 공휴일에는 오락과 극장쇼로 하루를 보냄. ?농장과 시골 마을은 다룰수 있었으며 파종기나 추수때 그러했다. | -로마인들보다 더 늦은 시간에 저녁식사를 함. 사도행전 20:7~8에 묘사된 늦은 저녁 식사는 대부분의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이상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
3. 경제생활36)
로마 | 유대 |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로마시대의 생활의 중심부로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음. -개방적 도시 문화로 인해 각 도시를 이어주는 도로와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하고 있었음 -속주에서의 세금을 통해서 운영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우쿠스투스 황제때처럼 인구조사(눅2:1)를 통해 세수의 자원을 정확히 파악하기 원했다. | -유대인들은 로마에 내는 세금 이외에 소득의 10분의 3을 종교세로 냈다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매년 반세겔의 성전세를 냈다(마 17:24~27) -이들은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착취당했다. |
4. 오락37)
로마 | 유대 |
-연극 -운동경기 -원형극장에서 하는 행사나 서커스를 좋아했으며, 가장 대표적으로 콜로세움이 유명하다. 원형 경기장에서 연극, 검투사의 싸움, 야생 동물의 쇼를 볼수 있었다. 특히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싸움은 사회적으로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 -공적인 자리(연회나, 결혼식, 장례식)에서 항상 음악을 사용하였고, 고전 14:7~8은 당시 유행하던 세가지 악기인 아울로스(플루트 같은 피리), 키타라(일종의 하프), 트럼펫을 기록하고 있다. 트럼펫은 주로 전쟁에서 전령이 무엇인가 선포할 때 쓰이던 것이고 나머지 악기들은 일상생활에서 쓰인 악기였다. -목욕탕문화와 연회문화가 있었다. 이것은 로마의 부유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
|
5. 식사38)
신약 시대의 식사 문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저녁 식사였다. 헬라인들은 이 저녁 식사를 심포지움이라는 만찬으로 발전시켰는데, 음악이 곁들여지고, 초대된 손님들은 연회장이 선정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로마 | 유대 |
-식사준비와 식사 제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중요한 사회 활동으로 만듬. | - 식사할 때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란의 한 이유가 됨(고전11:18~22). -유대인들이 횡와식탁문화를 도입함. -이런 문화를 이해한다고 했을 때 |
로마 사회의 식당은 식탁을 중심으로 침상 세 개가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식사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어서 횡와식탁이라고 불렀다. 이 중 주인과 가장 가깝게 비스듬히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상석이었다.
6. 의복39)
-분명 차이가 나지만 로마 제국의 전체에 걸쳐 많이 다르지 않았다. | |
-남자 -여자 | -유대전통의복 속옷과 겉옷, 두루마기로 구성40) |
7. 주거와 도시생활41)
로마 | 유대 |
-계층에 따라 다양한 주택에서 살았다. -보통 사람들은 큰 공동주택에서 살았는데, 초라하게 지어지고, 보수도 엉망이었다. 왜냐하면 비싼 땅값으로 인해 투자한 재산에 대한 이익을 챙기는 주인들때문이었다. -공동주택 14,000채, 단독주택 1,000채 이것을 비교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공동주택에 살았음을 짐작할수 있음. | -로마와 별반 다르지 않음 -비가 거의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 구성 및 용도42) |
-삶의 질 |
|
신약에 처음으로 언급된 집은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데 소와 양들이 둘러서 있는 구유에 누운 아기 앞에 무릎을 꿇는 동방박사들과 아기예수와 그의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집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셨던 집의 규모를 알수 있는 단서가 두어개 있다. 막 2:1~2은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집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일수 있을 정도로 큰 집이었으나, 나중에는 그 집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막 2:15에는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셨다는 기록을 통해서 그의 라는 단어만으로는 예수님의 집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기대어 누웠을 정도면 상당히 큰 집이었을 것임을 틀림이 없다. 막 6:3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테크톤(tekton)은 나무와 돌을 가지고 건물을 짓는 사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건축 계획과 예산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아(눅 14:28~30) 요셉의 직업을 물려 받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집이 있었다는 언급이 몇군데 있다. 행 2:1~2에서 등장하는 다같이가 그리스도인 집단 전체를 가르킨 다면 그 집에는 120명 이었더 것이다(행 1:15). 온 집이라는 말 자체도 그 집이 상당한 규모가 큰 집이었음을 암시하는데 많은 군중들이 곧 바로 모여든 것으로 보아 이집은 그들이 나중에 만난 성전의 행각을 읨할 수도 있다(행 3:11,7:49은 성전을 집이라고 한다). 백부장 고넬료와 피장 시몬의 집은 그들의 권력이나 경제력을 반영한다. 베드로가 시몬의 집 지붕에 기도하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시몬의 집은 유대식으로 지었을 것이다(행 10:9).
8. 예루살렘의 경제적 상황43)
물이 부족한 산악도시인 예루살렘은 농업이 발달하기 적합하지 않았고, 따라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경제 전반을 염두에 둘 때, 단연코 농업이 가장 중요한 경제 요소였다.
팔레스타인의 농업 | -주로 농업경제 |
예루살렘의 수공업 | -수공업은 예루살렘의 전형적인 산업형태이다. -주후 70년 이전 예루살렘은 건축업이 발전하였고, 거대한 건축사업을 좋아했던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 덕분에 예루살렘에는 여러 화려한 건축물이 세워졌고, 이로 인해 건축업과 그에 수반되는 공예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대규모 건축으로 수 많은 건축노동자들이 필요했으며, 건축물 장식을 위해 건축공예법이 활발했음을 짐작할수 있음. -그 밖에 진설병 제조자, 흥향 제물 제조자, 성전 휘장 관리인, 금대장장이, 성전 급수 책임을 맡은 우물 감독, 성전의사, 성전이발사 등이 있었다. |
예루살렘의 상업 | -예루살렘은 지형적으로 상업의 유리한 위치에 있지 못한 이유로 -상업은 존중받는 직업: 제사장들과 대제사장 가문도 상업에 종사할 정도였음. -안전한 도로망이 없어, 교역로에 도둑이 잦음.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더함. -예루살렘에서 거래하려면 시장세를 내야했음. -곡물시장, 과일시장, 가축시장, 목재시장, 노예시장이 있었고, 상거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안식일 성수규정이나 이방인과의 거래에 관한 규정들 외에도 몇 가지 특별규정이 있었다. 특히 정결하지 못한 가축이나 고기의 유입을 엄격히 감독하였고, 물가는 시골보가 훨씬 비쌈. -가축수입에 관련,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의 내용을 통해 기원전 2세기 초의 가축수입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예루살렘에는 세속적 가축시장과 제물용 가축시장이 있었다. 희생제물용 가축거래는 성전 과장에서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근거로 막 11:15의 보도가 뒷받침한다. 또한 레위기 규정을 따라서 가축수입을 했고, -가옥건축을 위해서 석재와 목재를 수입 |
예루살렘 여행 | -예루살렘에 오는 여행자들에게 세금을 받음으로 예루살렘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침 |
9. 화폐제도44)
신약의 화폐의 가치: 금, 은, 동(마 10:9).
렙돈(헬) | 가장 가치가 낮은 청동화폐 막 12:42 과부의 두 렙돈 로마 동전 앗사리온의 1/8, 고드란트의 1/2 | 드라크마(헬) | 데나리온과 거의 같은 가치 헬라의 은전, 1/4세겔에 해당 |
고드란트(롬) | 앗사리온의 1/4, 두렙돈 청동화폐 | 디드라크몬(헬) | 데나리온과 거의 동일한 가치 1/4 세겔 가치 |
앗사리온(롬) | 데나리온의1/16 | 세겔(유대) | 4개의 드라크마에 해당되는 은전 |
데나리온(롬) |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의 은전 (마 20:1~15)=16앗사리온 셋돈(마 22:19을 지불할 때 사용함 | 스타트(헬) | 4개의 드라크마에 해당되는 은전 |
므나(헬 | 1/60 달란트/ 100드라크마해당/ 화폐의 종류는 아님(눅 19:11~27) | 달란트 | 6,000드라크마 혹은 60므나, 신약에서 가장 값비싼 돈의 가치 |
이름 | 값어치 | 관련 성서구절 |
앗사리온 | 1/16데나리온 | |
고드란트 | 1/64데나리온 | |
렙돈 | 1/128데나리온 | 막 12:42; 눅 12:59; 21:2 |
데나리온(또는 드라크마) | 하루의 품삯 | 마 18:28; 20:2,9-10,13; 22:19; 막 6:37;12:15; 14:5; 눅 7:41; 10:35;(15:8-9); 20:24;요 6:7; 12:5; 계 6:6 |
디드라크마 | 2데나리온 | |
스타테르 | 4데나리온 | |
미나 | 1,000데나리온 | |
달란트 | 6,000데나리온 |
Ⅴ. 나가면서
성서의 내용을 전해야 하는 우리는 성서의 내용을 보면서 사회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서의 내용은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문화적인 접근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를 보는 독자의 입장으로 메시지를 제시할 때 그 메시지를 받는 대상이 누구였으며, 그들의 견해가 어떻게 달랐으며, 이런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관점을 어떻게 형성했는지에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를 소망해 본다.
▶ 참고자료
-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오광만 역, 생명의 말씀사, 2001.
- 심상법. 『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5.
- 요아힘 예리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 1992.
-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2005.
- 대한성서공회연구성경. I-Pad.
- 대한성서공회(http://www.bskorea.or.kr)
- 정창교. 『신약의 배경』. 강의안, 2014.
1)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2001. pp.333-334.
2) 위의 책. pp.343-345.
3) 심상법.『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5), pp.146-147.
4)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2001. p.342.
5) 심상법. 『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5. pp.153-154.
6)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2001. pp.346-348.
7)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170.
8)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125.
9)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170.
10)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125-131.
11)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171.
12)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151-163.
13)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p.173-181.
14) 위의 책. pp.181-182.
15) 위의 책. pp.182-183.
16)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382-392.
17)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p.186-190.
18)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450~470.
19) 벨. 위의 책. p.399
20)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p.118~119.
21) 벨. 위의 책, p.400~403
-22) 대플리니우스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의 조카요 그가 입양한 소 플리니우스에게도 자녀가 없었다. 소플리니우스가 유일한 자식이었기 때문에 소플리니우스의 죽음은 곧 그를 낳아 준 아버지의 가계뿐만 아니라 그의 양아버지의 가계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23) 벨. 위의 책. pp.403~407.
24) 어떠한 비문의 내용을 보면 “슬프게도, 이제 내가 떠 온 내 남편은..... 정말이지 나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내가 일곱 살 때 그는 나를 껴안았다. 이제 내 나이 사십, 나는 죽음의 그늘하에 있다.”
-25)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1993. p.78.
-26)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120.
27) 벨. 위의 책. pp.407-411.
28) 퍼거슨, 위의 책, p.79.
29) 벨. 위의 책. pp.417-419.
30)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1993. pp.113~114.
31) 벨. 위의 책. p.427.
32) 벨. 위의 책. pp.428~429.
33) 벨. 위의 책. pp.430~432
34) 벨. 위의 책. pp.432~433.
35) 벨. 위의 책. pp.351~354.
36) 퍼거슨. 위의 책. pp.84-99
37) 퍼거슨. 위의 책. pp.99-110
38) 벨. 위의 책. pp.354-364.
39) 벨. 위의 책. pp.372-376.
-40)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p.115~117.
41) 벨. 위의 책. pp.365-372.
-42)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117.
43)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p.161~170.
44) 대한성서공회. I-Pad. 이해자료, 성서속위 단위.
첫댓글 긴급-치료비 후원을 부탁드려요
이달7일과14일 대학병원 진료가 예약되어 있는데
후원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어요 합병증 검사를
해야 인슐린과 거기에 맞는 약을 타는데 걱정입니다 꼭 도와주셔서
치료를 받아가며 살도록 부탁드려요
병원에서 6개월 마다 합병증 검사를 하고 약을 사는데
혈관,근육 신경 녹내장 간과 신장암.복부CT를 해야합니다
검사료는 비보험이 많아서 9월에는 약도 사야하고 많은돈(50만)정도가 듭니다
먹을것 쌀과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