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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Malta)
몰타는 시실리 남쪽 90 km , 아프리카의 리비아 북쪽으로 290 km 떨어진 지중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몰타 군도는 몰타(Malta), 고조(Gozo), 까미노(Camino) 그리고 작은 바위 무인 도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몰타는 장경이 약 27 km , 폭이 약 14 km 이며 고조(Gozo)섬은 각각 14 km , 7km 이다. 한국의 강화도 보다
약간 큰 320 km²의 면적에, 유럽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이 섬에는 40만의 인구가 상주한다.
시실리로부터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이 섬에 한 무리의 수렵과 채집을 하는 사람들이 건너왔다.
혈거(穴居)가 아닌 개방된 마을에 영구적으로 정착한 것은 약 7000년 전 부터이다. 이 사람들은
경작 기술과 상당한 수준의 다양한 자원과 조직을 가지고 건너 왔다. 그들은 가축과 곡물 심지어 토기 등을
가지고 왔으며 토기들은 스텐티넬로 期(stentinello period : BC 5600~4000, 시실리의 신석기 ; 註)의 것이다.
수도 발레타(Valletta)
1530년 성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 섬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받아 몰타 섬으로 철수 해 오면서
'발레타' 반도가 전략적 요충지로서 요새화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1557년 기사단 장으로 선출된
발레트(La Vallette)는 도시 설계를 위해 외부로 부터 군사분야 건설 기술자를 초치하였으나 투르크의
대규모 공격으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1565년, 투르크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요새 도시 건설 플랜은 다시 시작되었으며. 교황 비오 4세(Pius IV)는 공병을 보내주었다.
신도시 건설 정초가 최초로 놓인것은 1566년 3월 28일이었다. 항구 남쪽 비토리오사(Vittoriosa)에서
발레타로 기사단 본부가 옮겨 온 것은 1571년으로 당시의 건물은 후기 르네쌍스 와
만네리즘(Mannerism)양식으로 명명되었다. 17세기 들어서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들어섰다.
-수도이며 요새 도시인 발레타(Valletta) 전경(자료)-
** 반도에 위치한 도시는 3면이 천연 해자인 해안이고 도시 정면인 서쪽은 깊은 해자와 견고한 성벽
그리고 성문 양편으로는 튼튼한 옹성이 구축되어 있다.(참조 : 아래 사진) (세계문화유산)
성문으로 부터 시작하는 공화대로(Republic Street)는 반도 끝까지 곧게 뻗어있다.
대로 양편에 보이는 팬타곤은 왼 편이 성 요한 기사단(St. John's Cavalier),
오른 편이 성 야고보 기사단(St. James Cavalier)건물이다.
-성문 보호용 옹성(좌)-
**윗 사진과 대조로 이해 가능 함
-성문 보호용 옹성(우)-
-성문 입구로 부터 이어지는 대로(Republic Street)변 풍경-
** 오른 편에 일부가 보이는 4각형의 현대식 건물이 국회 의사당이고 그 뒤로 보이는 고린트식 기둥의 열주는
로얄 오페라 하우스 유적지 극장(Royal Opera House Ruins Theatre)이다.
-국회 의사당-
**2015년 개원한 신축 의사당 건물은 도성 정문과 함께 렌초 피아노(Renzo Piano)의 설계이다.
역사적인 의미의 반영 뿐만이 아니라 최신의 기술이 응용된 건물이다. 창문은 하루 동안에도
시간에 따라 매력적인 그림자가 드리우도록 설계되었다. 건물은 두개의 불록으로 지어젔는데
북쪽 건물은 의사당이고 남쪽 건물은 의원 사무실, 수상 과 각 정당 대표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로얄 오페라 하우스 유적지 극장(Royal Opera House Ruins Theatre)-
** 코린트식의 열주만이 남아 있는 유적지에 합판으로 벽을 세우고 무대장치를 가설하여
오페라나 연극등의 공연 장소로 유적지의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장 드 발레트(Jean de Vallette)의 동상-
**장 파리소 드 발레트(jean Parisot de Vallette : 1495-1568)는 1565년 오스만 트루크의 침공(Great Siege)시,
몰타를 사수한 영웅이다. 프랑스의 귀족이 었던 그는 프로방스 기사단 (Langue de Provence)의 일원으로
1557년부터 몰타 기사단의 제 49대 기사단 장을 역임하였다. 이 동상은 2012년 롬바르드(Lombard)은행이
기증한 것이다. 발레트는 한 손에 검, 다른 한 손엔 발레타의 설계도를 들고 있다. 발레타 시의 정초를 놓았던
그는 이 도시에 그의 이름을 남기고 1568년 8월 21일 성 요한 공동 대성당(St. John's co-Cathedral)
지하 유택으로 영면에 들어갔다.
-성 요한 공동 대성당(St. john's co-Cathedral)-
**성당 정면에 서있는 구조물은 축제를 위해 임시로 가설한 탑이다. 성당 외벽은 보수중이다.
성 요한 공동 대성당은 몰타 기사단에 의해 1573~1578년에 지어진 바로크 전성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트루크의 대 침공(Great Siege)직후로 외부는 간결하지만 인테리어는 화려하다. 세계문화유산인 이 성당은
전 세계의 아름다운 성당 21개 중에 하나이며 죽기 전에 꼭 보아야할 곳에 선정된 곳이다.
-본당 내부-
** 간결한 외부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내부 장식은 지극히 화려하며 칼라브리안 예술가
(Calabrian artist ; 이태리 남부 지역 장인-註)에 의해 찬란하게 금빛으로 채색되었다.
호흡이 멈출 듯한 황홀함에 여행객의 눈으로는 인테리어 부분 부분 모두가 보물 같이 보인다.
-대성당 대리석 바닥-
**대성당 마루 바닥은 채색 대리석이 상감 기법으로 놓여져 있다. 이 대리석 판은 몰타 기사단의
375명의 기사와 장교의 묘지석이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제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앞서도 설명된 바 대로 기사단 장 장 드 발레트(Jean de Vallette)와 동료들이 지하에 묻혀있다.
-성소 주변의 인테리어-
** 원래 이 성당은 성 요한 기사단의 수도원 성당이었으나 최초의 수도가 있던 임디나(Mdina : 발레타 서쪽)의
주교좌 성당인 임디나 대성당(Mdina Cathedral)과 대등한 위치가 되어 1820년 공동 대성당이 되었다.
-제대 중앙의 조형물-
** 일반적인 성당의 제대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 성당만큼은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모습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필자도 성 요한이 사도 요한이 아닌
세례 요한이며 "성 요한 기사단"이 사도 요한이 아닌 예수와 동 시대의 사람인 "세례 요한"의 이름을 택한 의미를
다시 음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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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chapel)이라 불리는 소 성당 -
**규모가 큰 성당에는 여러 성인들에게 봉헌된 소 성당들이 있어 이 소성당에서 개별 미사를 드리기도 한다.
몰타 기사단은 8개의 각기 다른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성 요한 대성당에는 8개지역 즉
프로방스(provence), 오베그(Auvergne), 프랑스(France), 이태리(Italy), 아라곤(Aragon), 잉글랜드(England),
독일(Germany), 그리고 카스틸레(Castile)의 언어권 별로 8개의 소 성당(=예배당)이 특색있게 지어져 있다.
-대리석 조각이 특히 아름다운 소성당-
** 제대를 장식한 아름다운 무늬의 대리석 기둥들은 한개의 원석에서 재단된 똑 같은 무늬의 보석(?)이다.
-역대의 기사단장의 초상화와 천사상-
-소성당의 부분-
-소성당의 부분-
**하나같이 티 없이 맑고 우유빛 나는 대리석 조각품은 보석으로 보인다.
-궁형 천정의 벽화-
**유럽 본토에서도 종종 보이는 기법으로 이곳에도 프레스코화의 입체감이 강조되도록 인물들이
프레임 밖까지 연장되어 그려져 있다. 여기서는 왼편 인물은 손과 무릎이 프레임에 그려져 있고
오른편은 그림자가 프레임에 그려져 있어 입체감을 더해준다.
-세례 요한의 참수(The Beheading of St. John)-
** 기도실(Oratory)이라는 방에 걸려있는 이 그림은 초기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죠(Caravaggio)의
1608 년 작품으로 작가의 서명이 들어있는 유일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서명도 핏빛이라고 한다.(자료사진)
-축제 준비 중인 골목길-
-큰 항구(Grand Harbour)가 내려다보이는 골목길-
-상부 바라카 정원(Upper Barrakka Gardens)-
** 상부 바라카 정원(Upper Barrakka Gardens)은 요새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맞은편 큰 항구와
그 뒷쪽에 형성된 3개의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이다. 1560년 기사들의 오락 공간으로 건설되었는데
1661년 아취를 세우고 지붕을 덮었으나 1775년 승려들의 반란시에 지붕은 제거하였다. 1800년 프랑스 점령 말기에
대중에 공원으로 개방하였다. 발코니 아래에는 예포 포대가 위치하고 있다. 언덕 아래쪽 출입구 근처에는
하부 바라카 정원(Lower Barrakka Gardens)이 위치하고 있다.
-큰 항구(Grand Harbour) 파노라마-
** 정면에 마주 보이는 요새가 리넬라 요새(Fort Rinella) 이며
오른쪽에 보이는 요새가 성 안젤로 요새(Fort St, Angelo)이다.
-8문의 19세기식 대포로 편성한 예포 포대-
** 군함이 외국 항구에 입항할 때는 공포탄으로 예포를 쏘면서 항구로 들어간다.
예포의 의식은 장전된 포탄을 모두 발사하여 무장을 해제 했다는 의미이고 육상포대도 예포를 쏘는데
이는 적대적인 의향이 없으며 입항을 허가한다는 의미이다. 이 의식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예포 발사-
** 매일 정오 12시와 오후 4시에 1발의 예포를 발사한다.
-밤 과 낮-
** 숙소에서 보이는 항구 풍경이다.
- 시립 도서관-
** 정문앞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석상이 자리 잡고 있다.
-카페 꼬르디나(sice 1837)-
-성요한 기사단의 기사들의 모습-
** 기념품점 쇼윈도에 전시된 모형이다. 성 요한 기사단의 십자가는 화살촉 4개가 대칭으로
촉끝을 마주 대하고 있는 형태이다.
-기사단 장 궁전-
** 현재는 수상의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기사단 장 궁전 정문의 초병 과 정원-
-기사단 장 궁전의 화랑-
**기사들이 사용하던 장갑과 무기들이 많이 장식용으로 배치되어 있기도 하지만 무기 박물관은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기사단 관련 그림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기사단 장 의자-
-접견실-
-대사의 방-
-경호원 막사(Main guard)-
** 성 요한 기사단이 1603년 기사단 장 개인 경호원들의 숙소로 지은 건물로서 성 조지 광장(St. George's Square)을
사이에 두고 기사단 장 궁전과 마주하고 있다. 광장에서 뿜어지는 분수(Magic Fountain)의 물이 광장을 덮으면
건물은 물에 비치어 물위에 지어진 듯이 보인다. 사진은 분수의 물이 아직 광장을 완전히 채우지 못한 상태이다.
이 건물은 현재 검찰청 부속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독립 광장의 조형물-
**척박하고 작은 섬나라 몰타의 역사는 외부로부터의 피침의 역사였다. 고대 카르타고의 지배로부터 로마,
시실리 왕국의 지배, 십자군의 점령, 오스만 터키의 침공, 나폴레옹의 지배 이후 영국의 속령으로부터
독립하기 까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 구조물들은 고난의 한 장(章)을 말해 주는 듯하다.
특히 앞 부분에 설치한 불규칙한 크기의 예리한 창끝 같은 철책은 처절한 저항의식의 표현 같이 보인다.
-트라이톤 분수(Triton fountain)-
**세 마리의 반인반어(半人半魚)인 트라이톤(海神)이 수반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분수로 몰타의 수도인
요새 도시 발레타(Valletta)의 메인 게이트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분수 앞은 버스 터미널이다. 자료 사진을 보면
물을 뿜는 분수는 아름답다. 몰타에는 흐르는 강이 없고 민물 수자원이 거의 없어 해수의 탈염 시설에 의존하는 형편으로
관광호텔도 급수가 끊기는 경우도 있어 분수가 늘 물을 분출하기도 어려울것 같다. 이 분수는 1959년 완공되었다.
-발레타의 관문-
** 발레타를 드나들면서 차상에서 찍은 이 쌍 아취의 제원을 찾지 못했다. 아취 위에 새겨진
연도를 표시하는 로마 숫자 MDCCCXLXIII(= 1868)과 MDCCXX I(= 1721)밖에는 해석할 길이 없다.
임디나(Mdina)
중세에 임디나는 지방 정부와 행정의 중심일뿐 아니라 군의 집결 장소이기도 했다
1530년 기사단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기사단의 갤리 선(galley)의 정박에 필수적인 항구에 그들의 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임디나를 떠났다. 1571년 발레타 시가지가 건설되어 몰타의 수도가 되자
임디나는 구도시가 되었다. 신도시로 이주한 주민도 있으나 많은 수의 귀족들은 옛 도시에 남아 그들 조상의
집과 재산을 지켜왔다. 결과적으로 다행스럽게도 14~15세기의 건물과 궁전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임디나 성채 와 성 바오로 대성당(St. Paul's Cathedral)-
** 고지대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임디나 성채와 성 바오로 대성당(St. Paul's Cathedral)
-임디나 성채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지대-
-라바트(Rabat)시의 성 바오로 교구 성당(St. Paul's church)-
**임디나(Mdina)의 위성 도시인 라바트(Rabat)의 교구 본당인 이 성당은 사도 바오로가 AD 60 년,
전교 여행 도중 선박의 난파로 표착하여 3개월을 생활하던 '바오로 동굴' 위에 지어진 교회이다.
-성 바오로 카타콤(St. Paul's Catacombs)-
**로마 지배 당시에는 성 내에는 묘지를 쓸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성 밖에 지하 묘지가 성행하였다.
라바트(Rabat)인근에는 여러개의 지하묘지(Catacombs)가 흩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성 바오로 카타콤 과
성녀 아가다(Agatha) 카타콤이 유명하다.
-카타콤 에서 출토된 유물 # 1-
-카타콤 에서 출토된 유물 # 2-
-카타콤 에서 출토된 유물 # 3-
-카타콤 에서 출토된 유물 # 4-
-카타콤 내부 # 1-
** 젊은 여성 연구원이 홀로 작업을 하고 있다.
-카타콤 내부 # 2-
**통로 보다 높게 조성된 원형의 단은 아가페 테이불(Agape Table)로 부르는데 장례 의식을 행하는 장소이다.
-카타콤 내부 # 3-
-카타콤 내부 # 4-
-각 가정의 자기만의 개성과 특징을 보여주는 독특한 문패와 장식물-
-임디나 요새의 정문 (Main Gate)-
-요새 주변의 깊고 넓은 해자-
-요새에서 내려다본 해안가 파노라마-
-요새에서 내려다본 해안가 파노라마---
** 4 컷 이어 붙임.
-요새 내의 좁은 골목길-
-대문 노크용 문고리(Door Knocker)-
** 방문객이 주인을 부를 때 문을 두드리는 문고리의 모양은 다양하고 작품적이다.
왼편은 두 남녀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괴물이 물고 있는 막대에 걸린 띠를 붙들고 있다.
아래에는 또 다른 괴물이 두 사람의 다리를 잡아 주고 있다. 두 사람의 운명은 1차로 언제 어느 괴물이
먼저 놓아 버릴지 모르는 두 괴물에 달려 있고 언제까지 띠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그렇게 시각적으로 암시 하는것 같다.
오른편은 해마에 의지하고 삼지창을 든 포세이돈이 주제이다.
-성 바오로 대성당(St Paul's Cathedral)-
** 현재의 대성당은 1693년 대 지진으로 파괴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구 교회를 대체하여
신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 1702년 10월에 봉헌하였다. 몰타의 전통에 따르면 대성당은
'복된 동정녀 신의 어머니(Blessed virgin Mother of God)'에게 봉헌되지만 이 개념은 무슬림 시대에
해체되고 노르만(Norman)의 지배 후에는 성 바오로(St. Paul)에게 봉헌 되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성당 내부-
-성당 내부-
- 발레타의 어제 와 오늘-
F I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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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사진들의 크기는 가로 760 픽셀 또는 740 픽셀 인데 이곳에 옮길때는 700픽셀로 자동 축소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감안하시기 바람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