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44-가야와 태후 허황옥 1>
加耶(가야)와 普州太候(보주태후) 許黃玉(허황옥) 1
☯ 코살라 제국 시절의 인도 열국과 소왕국 가야(加耶, GAYA)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 산맥 기슭과 갠지스 강을 끼고 그 유역(지금의 인도 북부 힌두스탄 평원)에 아리안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의 장마와 겨울의 극심한 가뭄 등 악천후를 극복하며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꽃피운 홍산문명(鴻山文明)과 황하문명(黃河文明)에 상응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강력한 대제국 코살라국이 갠지스 강의 상류를 넓게 장악한 후, 그 수도(首都)를 사위성이 있는 아유타(阿踰陁)에 두고 수많은 열국들을 호령하였다. 아유타의 영문(英文) 표기는 [AYODHYA]라고 하는데, 원주민들은 아요디아라고 읽지 않고 우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발음 그대로 [아유타]라고 발음한다.
아유타의 동남쪽에 가야(加耶, GAYA)라는 소왕국이 있었으니, 겨우 고기잡이로 생업을 잇는 포구 마을이었다.
《인도 열국 코살라제국과 소왕국 가야의 위치》
가야의 남쪽 가까운 곳에는 부처가 8년간이나 고행(苦行)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드가야[BUDDH GAYA]가 있다. 여기서, 가야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부처의 가르침[불교]을 열심히 믿고 있었다.
가야(加耶)는 여름에는 계속되는 장마로 갠지스 강이 넘쳐 큰 바다를 이루고, 또 11월에서 4월까지 6개월간은 물 한 방울 구경 못하는 가뭄으로 강물이 줄어든다. 이 때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물길을 따라 얕은 웅덩이로 모여들게 되는데, 이런 웅덩이를 인도 말로 가라(加羅)라고 한다. 즉, 가라란 언제나 물고기가 있는 웅덩이를 뜻하며, 쌀과 물고기는 가야인(加耶人)들에겐 생명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가야(加耶)는 나라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쌍어문(雙魚紋: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마주 보는 모양)의 문양을 만들어 썼다.
《쌍어문》
《쌍어 신앙 집단 이동 분포》
☯ 신분제도 파기 가야인들, 코살라정부군에 쫓겨 망명길로
당시 인도에는 [카스트]라 하여 4개의 계급이 있었으니, 버르마[브라만], 크리슈나[크샤트리아], 보르샤[바이샤], 수드라 등이 그것이다. 버르마는 승려 계급으로, 신(神)을 모시며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귀족 계급이다. 그 밑에 크리슈나라고 하는 무사 계급, 보르샤라고 하는 평민 계급, 그리고 수드라라고 하는 노예 계급이 있었다.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전통적인 신분 계급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가야의 왕실은 이 악명 높은 신분 제도를 없애고, 만민평등(萬民平等)을 선언해 버렸다. 그러자 많은 노예를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던 중앙의 귀족들은 이러한 가야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유타(阿踰陁, AYODDHYA) 정부군은 가야(加耶)를 응징하기 위하여 대군을 일으켜 기어코 가야를 초토화시켜 멸망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야인(加耶人)들은 미리 사태를 짐작하고 서둘러 가야를 탈출해 그들을 지도하는 왕과 버르마[사제(司祭)]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동안 인도 사회에서 천대받던 수드라는 물론이고, 보르샤, 크리슈나 등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들의 왕을 존경하여 따라 나섰다.
가야인들은 코살라 제국군의 추격을 피해 동쪽으로 향하다가, 결국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킴[SIKIM]을 통과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정든 고향 땅 인도를 벗어나 남만[중국] 땅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 중국 보주에 망명 가야여인 왕정군이 전한의 황후가 되어 득세
가야인(加耶人)들은 웅천[양자강(揚子江)] 상류, 보주(普州)에 자리 잡고 살았으니, 지금의 중국 쓰찬[사천(四川)]지방의 안악(安岳)이 바로 그곳이다.
처음엔 그들 나름대로 가야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원주민(原住民)들과 마찰 없이 잘 지냈다.
마침 이 지역을 순찰하던 전한(前漢)의 중앙 관리는 우연히 가야(加耶)의 한 여인을 발견하고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녀를 데리고 서울 장안성(長安城)으로 가, 한(漢)나라 원제(元帝)에게 바치니, 그녀가 바로 왕정군(王政君)이다. 가야인 여인이 한 원제의 황후(皇后)가 되자, 가야(加耶) 집단(集團)은 일개 망명 집단에서 그 위치가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다.
☯ 왕정군 황후의 조카 왕망, 황제도 됐지만 인기정책으로 몰락
왕정군 황후는 그녀의 조카 왕망(王莽)을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여 대사마(大司馬) 벼슬을 주어 출세시켰다. (서기전 45년). 그 후 전한(前漢) 정부(政府)를 쥐고 흔들며 우여곡절을 겪은 왕망은, 서기전 1년에 25세의 애제(哀帝)가 죽고, 왕정군(王政君) 태후(太后)가 불과 9살의 유간(劉衎)을 한평제(漢平帝)에 오르게 하자, 정권을 장악하고 국고를 마구 털어 백성들의 인심을 한 몸에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아직 초기 단계의 불교를 종교(宗敎)로 전파하지는 못했으나,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계급제도를 없앴던 것처럼 가야인으로서 가난한 농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다. 중국인들은 그를 안한공(安漢公)으로 부르며 존경하였다.
평제가 죽자 불과 5년 만에 왕망은 가황제(假皇帝)가 되었고, 3년 후 진황제(眞皇帝)가 되었으니, 서기 8년 11월의 일이었다.[ 전한(前漢) 종지부]
그는 즉각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땅 없는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으나, 땅을 빼앗긴 지주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또, 노예 매매 역시 금지함으로써 갑자기 노동력이 줄어 사회는 극심한 경제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기에 편승한 그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짤렀다.
드디어 후베이[호북(湖北)] 대홍산(大洪山)에서 녹림병(綠林兵)들이 일어나고, 산둥 태산(泰山)에서 적미병(赤眉兵)이 일어나 전국적인 반란으로 번져 갔다. [서기] 23년. 소위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운 지 불과 15년 만에 왕망(王莽)은 반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보주(普州) 일대에 자리 잡았던 가야인들도 한인(漢人)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생명을 보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가야인들은 제각기 살길을 찾아서 양쯔강을 따라 또 다시 탈출극을 연출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우창[무창(武昌)]지구를 제2의 망명 처로 삼고 다시 모여 살았다. §
《 가야인들의 제2의 망명 길 》
2020.4.28 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