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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인종 1) | 3월 8일 (양4월 28일) |
1세 | 서울 건천동에서 덕수 이씨의 12대손으로 태어남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 부근) |
1552년(명종 8) | 8세 | 어머니의 고향인 충청도 아산군으로 이사함 | |
1565년(명종 20) | 21세 | 보성군수 진의 딸 상주 방씨와 결혼함 | |
1567년(명종 22) | 2월 | 23세 | 맏아들 회 출생 |
1571년(선조 4) | 2월 | 27세 | 둘째 아들 울 출생 |
1572년(선조 5) | 8월 | 28세 |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를 다쳐 실격함 훈련원 : 군사들의 인사, 고시, 훈련 등에 관여하는 관청 별과 : 나라의 경사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임시로 보는 시험 |
1576년(선조 9) | 2월 | 32세 | 식년무과에서 병과에 합격함 식년무과 : 3년마다 정기적으로 무관을 뽑기 위해 실시한 시험 |
12월 | 함경도 권관의 직책으로 국경수비대의 임무를 맡음 권관 : 변경의 수비를 맡은 작은 진보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 | ||
1577년(선조 10) | 2월 | 33세 | 셋째 아들 면 출생 |
1579년(선조 12) | 2월 | 35세 | 한성으로 돌아와 훈련원의 봉사가 됨 봉사 : 종8품의 벼슬로 훈련원 내의 최하위직에 속함. 이순신은 인사관계를 주로 담당함 |
10월 |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이 됨 병마절도사 :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 | ||
1580년(선조 13) | 7월 | 36세 | 전라좌수영 관내에 있는 발포에서 부대장격인 수군만호가 됨 발포 : 전라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수군만호 : 수군 조직은 수사 밑에 첨사와 만호라는 직책이 있었음. 만호는 종4품 |
1582년(선조 15) | 1월 | 38세 | 군기 경차관(조사관)인 서익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수군만호에서 파직됨 |
5월 | 함경도 훈련원 봉사로 재임용됨 | ||
1583년(선조 16) | 7월 | 39세 |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이용 휘하의 군관이 됨 |
11월 |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함 참군 : 훈련원의 관직으로 정7품 | ||
11월 15일 | 아버지 이정의 사망으로 인해 관직을 쉬고 충청도 아산에서 3년상을 치름 | ||
1586년(선조 19) | 1월 | 42세 | 사복시 주부에 임명됨 사복시 주부 : 사복시는 궁중의 가마·말·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이며, 주부는 사복시에 속한 종6품 벼슬 |
1월 | 여진족의 침략으로 인해 16일 후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천거됨 조산보 : 함경도 경흥군에 있던 보로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음 | ||
1587년(선조 20) | 8월 | 43세 | 함경도 두만강 부근에 위치한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임함 녹둔도 둔전관 : 녹둔도의 농장을 관리하고 개척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벼슬. 녹둔도는 함경도 선봉군 조산리에 있는 섬으로 두만강 부근에 있어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음 |
8월 | 여진족의 기습을 받게 되어 격퇴하였으나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함 백의종군 : 장졸이 상관의 명령을 어기거나 실수를 했을 경우, 계급을 박탈하고 일개병졸로 강등시킨 다음 평민의 옷인 흰옷을 입고 나라를 위해 싸우게 함 | ||
1588년(선조 21) | 6월 | 44세 | 충청도 아산군 백암리로 낙향 |
1589년(선조 22) | 2월 | 45세 | 전라도 감사 이광 휘하의 조방장이 됨 조방장 : 부관에 해당하는 군관의 직책 |
12월 | 전라도 정읍현감이 됨(태인현감을 겸무함) 현감 : 지방행정관청의 장으로 읍장이나 면장 정도의 자리.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 중에는 가장 낮은 직책으로 품계는 종5품 | ||
1591년(선조 24) | 2월 | 47세 | 진도 군수로 임명되나 부임전 가리포 수군첨사로 전임 발령됨 군수 : 각 군의 우두머리로 종4품에 해당하는 지방 관직 가리포 : 지금의 완도 |
2월 13일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고 얼마 후 전라좌수영에 부임함 수군절도사 : 각 도 수군을 총지휘하기 위하여 두었던 정3품 외관직 무관 | ||
1592년(선조 25) | 4월 13일 | 48세 | 임진왜란 발발 |
5월 7일 | 옥포해전 승리 옥포 : 경상도 거제군 이운면 옥포리 | ||
5월 8일 | 적진포해전 승리. 가선대부로 승진 가선대부 : 종2품 아래의 직책 | ||
5월 29일 | 거북선의 활약으로 사천해전 승리. 왼쪽 어깨에 적의 탄환을 맞아 부상당함 | ||
6월 2일 | 당포해전 승리. 자헌대부로 승진 당포 : 경상도 통영군 산양면 삼덕리 자헌대부 : 정2품의 벼슬 | ||
6월 5일 | 당항포해전 승리. 기밀문서인 일본 수군편성표를 노획함 당항포 : 경상도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 ||
6월 7일 | 율포해전 승리 율포 : 경상도 거제군 장목면. 밤개라고도 함 | ||
7월 8일 | 한산도해전에서 적선 59척을 격파하였으나 조선군은 4척만 불타는 대승을 거둠. 정헌대부로 승진 정헌대부 : 문 ·무관에게 주던 직책으로 정2품 위의 직책 | ||
7월 12일 | 안골포해전에서 이억기와 수륙작전을 펼쳐 승리함 안골포 : 경상도 창원군 웅천면 안골리 | ||
8월 24일 | 여수를 출발해 전장으로 나감 | ||
9월 1일 | 부산포해전 승리 | ||
1593년(선조 26) | 7월 15일 | 49세 |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이동함 |
8월 15일 |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됨 삼도수군통제사 :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삼남지방의 수군 총사령관 | ||
1594년(선조 27) | 3월 4일~5일 | 50세 |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31척을 격파함 |
9월 29일~1일 | 장문포해전에서 적선 2척을 격파함 장문포 : 경상도 거제군 장목면 장목리 | ||
10월 1일 | 영등포해전에서 육군과 연계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합동 작전을 실시함 영등포 : 경상도 거제군 장목면 | ||
1597년(선조 30) | 1월 | 53세 | 정유재란 발발 |
1월 21일 | 왜군이 거짓으로 꾸민 밀서를 그대로 믿은 조정에서 출동 명령을 내리나 이를 어기고 출동하지 않음 | ||
1월 27일 |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됨 | ||
2월 24일 | 한성으로 압송됨 | ||
3월 4일 | 모진 고문을 받고 옥에 투옥됨 | ||
4월 1일 | 투옥된 지 28일 만에 출옥하여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함 | ||
4월 11일 | 어머니의 사망 | ||
7월 15일~16일 | 원균이 이끈 삼도수군이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원균 전사함 | ||
8월 3일 |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군사 120명과 전선 12척으로 전열을 정비함 | ||
8월 29일 |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을 옮김 벽파진 : 전라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 ||
9월 16일 |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둠. 당사도로 진을 옮김 셋째 아들 면이 충청도 아산에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함 당사도 : 전라도 부안군 암태면 | ||
1598년(선조 31) | 2월 | 54세 | 통제영을 해남 우수영에서 고금도로 이동함 고금도 : 전라도 완도군 고금도 |
7월 16일 | 명나라의 수군도독 진린이 이끄는 수군 5천명과 합세함 | ||
11월 17일 | 노량해협에 왜군의 함대가 출몰함 | ||
11월 19일 |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나 유탄을 맞고 선상에서 전사. 우의정 관직을 받음 맏아들 회도 선상에서 전사함 | ||
11월 26일 | 일본군 부산포에서 완전 철수함. 전쟁 종결 | ||
1599년(선조 31) | 2월 11일 | 충청남도 아산 금성산 아래 안장함 | |
1604년(선조 37) | 10월 |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됨 녹훈 : 훈공을 장부에 기록함. 추증 : 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 | |
1614년(광해군 6) | 충청남도 아산시 음보면 어라산 아래로 이장함 | ||
1643년(인조 21) | 충무라는 시호를 받음 | ||
1706년(숙종 32) | 충청남도 아산에 현충사 건립 | ||
1793년(정조 17) | 7월 1일 | 영의정에 추증됨 | |
1795년(정조 19) | 《이충무공전서》완성. 규장각 문신 윤행임에 의해 편찬, 간행 됨 |
본문 |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