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朴烈·1902∼1974)의 연인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가네코 후미코
23살의 짧은 삶을 산 그녀는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 △한국 부강(구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에서의 생활(1912∼1919) △박열과의 만남과 동거(1922) △관동대지진 때 치안법 위반으로 체포(1923) △천황 암살혐의 추가(1924) △옥중 자서전 집필 시작(1925) △박열과 옥중 결혼(1926)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메 자살(1926.7) △박열 고향인 경북 문경읍 팔령리에 유골 안장(1926, 11) 등의 생애 마디를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부강에서의 7년 생활은 그녀 특유의 반항적 기질, 조선인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아나키스트로서의 사상 무장 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학계는 보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그녀의 옥중 수기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원제: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를 바탕으로 부강 7년 생활을 재조명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모두 버림받았던 무적자(無籍者) 후미코에게는 미리 입국해 부강에서 생활하고 있던 할머니와 고모부부가 있었다. 이 가운데 고모부부는 자식이 없었고, 따라서 그녀를 이와시타(岩下) 후미코라는 이름으로 입적시킨 후 일본에서 부강으로 데려왔다. 이와시타는 고모부의 성(姓)이다.
이때 옥중 수기에 의하면 부강은 경부선 철길을 중심으로 고지대에는 부유층이 주로 살면서 '야마노테'(山の手), 그외 들이 발달한 낮은 지대는 '시타마치'(下町)라고 불렸다. 후미코 고모의 집은 이중 야마노테에 위치했다. 이 땅은 경부선 보선공이었던 고모부 이와시타 게이자부로(岩下敬三郞)가 미리 사둔 땅이었다.
후미코는 1912년 일본인만 다니는 부강심상학교에 입학했고, 대부분 과목이 甲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고모는 '밥상에 젓가락을 잘못 놨다'는 등 갖가지 하찮은 이유로 후미코를 구박했다. 이름도 이와시타 후미코에서 가네코 후미코로 바뀌었고, 이는 이와시타 가문입적을 취소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후미코를 부강으로 데려온 것은 양육보다는 쌀씻기·램프닦기·변소청소 등 노동착취에 목적이 있었다. 이때 후미코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 것은 부강 퇴메(台山)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가네코 후미코 89주기 추도식이 지난 7월 23일 영면하고 있는 경북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 입구의 묘소에서 열렸다. 이곳을 찾은 일본인들은 부강도 반드시 방문한다.
'멋있는 부용봉이 멀리 저쪽에 솟아 있다. 그 산자락을 돌아 동에서 서로 가을 햇살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백천(白川)이 흰 비단을 휘감은 듯 천천히 흐르고 있다. 그 모래밭 위를 짐을 실은 당나귀가 께느른한 모습으로 지나간다. 산자락에는 나무 사이로 조선인 마을의 낮은 초가지붕이 띄엄띄엄 보인다. 안개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조용한 마을이다. 남화(남종화 지칭)에 보이는 듯한 경치이다.'-<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134쪽>
후미코는 이후 할머니 친척의 젖먹이를 업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손찌검을 당했고 끼니도 굶어야 했다. 그녀는 집앞 부강 철길의 자살 시도가 실패하자 조약돌을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아, 모두가 이별이다! 산도 나무도 돌도 꽃도 동물도 이 매미소리도 모두…"라는 혼잣말을 하며 금강으로 뛰어들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할머니나 고모의 박정함이나 냉혹함으로부터는 벗어날 수는 있겠지. 그래도, 그래도 세상에는 아직 사랑할 만한 게 무수히 있다"라는 생각을 하며 자살을 포기했다.
1919년 4월. 나이가 차가자 할머니는 후미코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겉으로는 '시집갈 나이가 됐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걸혼 비용을 대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어째든 후미코는 기뻐했고, 옥중 수기의 백미로 꼽히는 부분을 쓰게 된다. 경부선 기차가 부강역에서 남으로 막 떠나려 하자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아아, 기차여! 7년 전 너는 나를 속이고 데려왔다, 그리고 나를 오로지 혼자 고통과 시련 속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그 사이 너는 몇백번 몇천번 내 곁을 지나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곁눈으로 흘끗할 뿐 말없이 지나쳤구나. 하지만 이번이야말로 너는 나를 마중 와주었다. 너는 나를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 어디라도 데려가다오! 어서 어서 어디라도. 그냥 빨리 이 땅에서 데려가다오!'-<〃173쪽>
그녀가 부강을 떠나기 직전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 있었다. 바로 1919년 부강의 횃불 만세운동이었다. 그녀는 박열과 함께 체포돼 재판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 중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역적 정서만큼 제거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1919년에 있었던 조선의 독립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습니다."-<재판기록 20쪽>
1926년 7월 23일, 그녀가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메 자살을 하자 가족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고 따라서 형무소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일본경찰은 법적 남편의 고향인 경북 문경의 가족들에게 유골을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후미코의 유해는 후에 이장돼 문경읍 마성면 박열기념과 입구에서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22년 동안 일본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박열은 6.25때 납북돼 북에 잠들어 있다.
/ 조혁연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