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2/20-백제영웅 큰구수>
百濟(백제)의 英雄(영웅) 큰仇首(구수)
☯ 서기347년, 백제 ᄀᆞᆷ나루 천황성
당시 십제 왕인 큰초고의 태자 큰 구수(仇首)는 질자가 되어 백제의 서울 ᄀᆞᆷ나루에 와 있었는데, 대단히 영명(英明)하여 천황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큰 구수》
0045(우측)
가우리와 백제의 연합작전으로 대방과 낙랑을 거의 동시에 멸망시키긴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외백제와 가우리 사이에 낙랑이라는 완충지대가 없어져, 이제는 외백제와 본백제는 안팎으로 가우리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가우리와 백제 사이에 자연적으로 국경분쟁이 발생하여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마침 십제와 백제의 통합군 사령관으로 취임하던 천황가의 진정(眞淨) 장군(將軍)이 십제 측의 거센 반발을 받으니, 천황은 큰구수[근구수(近仇首)]를 사령관(司令官)으로 임명하였다.
☯ 통합군 사령관 큰구수, 첩보전으로 가우리 완파, 사유열제 사살
♬(말풍선)
“큰구수 상장님! 저의 임무는 벌써 막고해 장군님으로부터 귀띔을 받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가우리군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신임을 얻어 작전부로 접근한 후, 가우리군의 동태와 작전게획을 탐지하여 세세히 보고해 올리겠나이다.” (세작 사기)
↔
“큰구수 상장(上將)님! 이 자의 이름은 사기(斯紀)라 하옵니다. 어려서부터 이 막고해(莫古解)의 심복 중의 심복이올시다. 절대로 믿고 신임할 수 있사옵니다.” (막고해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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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하였다. 아무쪼록 적의 사기와 보급상태, 작전 지시서 등을 탈취하도록 노력하고 작전 중 너의 판단으로 아군의 공격시간, 지점 등을 정확히 알려주도록 하라.” (큰구수 사령관)
큰구수 태자의 지령을 받은 사기(斯紀)는 일부러 왕실의 국마(國馬)를 다치게 한 후, 간첩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가우리로 달아났다.
고등간첩인 사기(斯紀)는 과연 큰구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가우리 군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큰구수로 하여금 가우리 군의 일거일동을 손금 보듯 환하게 알게 하여 그 후의 전쟁에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다.
서기 349년. 큰구수는 외백제를 통하여 연나라의 모용황[(慕容,光+皇)→慕容皝인 듯?]과 동맹(同盟:불가침조약)을 맺어 우선 외백제의 배후를 안정시킨 후, 외백제 군을 동원하여 가우리의 서부 전선을 강공하여 십·백제(十·百濟) 통합군도 북방으로 전진 배치시키니, 가우리는 백제의 양면 작전에 밀려 고전하였다.
서기 369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가우리의 사유 열제(事由烈帝;고국원왕故國原王)는 전연(前燕)과 휴전하고, 가우리의 유명한 보기군단(步騎軍團) 2만 명을 동원하여 치앙을 기습하여 왔다.
그러나 고등간첩 사기(斯紀)의 눈부신 활약으로, 가우리 군의 작전 계획에서 군의 움직임까지를 세세히 입수, 분석한 큰구수 군은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매복, 역습 작전으로 사유 열제의 가우리 군을 완파하였다.
《당시 백제와 가우리의 접전도》
0046
서기371년 10월, 그 동안 백제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가우리의 사유 열제는 3만의 정예군을 강력하게 무장시켜 자신이 직접 인솔하고 펴라까지 진출,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선진적인 첩보전을 총동원한 큰구수는 이미 사유 열제의 움직임을 낱낱이 탐지하고, 역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하고 남펴라[남평양성(南平壤城)]를 기습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황한 사유 열제가 군을 지휘하여 성루에 나설 즈음, 이미 성내에 잠입해 있던 백제의 특공대가 절묘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화살을 날려 사유 열제를 명중시켰다.
♬(말풍선)
“아, 적의 잠입병들이다! 어서 저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막아야 한다!” (가우리군)
↔
“아악!” (사유 열제)
큰구수는 특공대를 파견하여 가우리의 왕을 죽이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간첩 사기(斯紀)의 공이었다.
가우리의 의원들이 열제(烈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독이 온몸에 퍼져 왕은 결국 10월23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사유(斯由)열제(烈帝)는 고국원(故國原)에 장사지냈으므로 그의 시호를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 하였으니, 가우리의 제16대 왕이었다.
☯ 큰구수, 중국대륙도 공략해 옛 쥬신 영토 청구[산둥반도]도 수복
서기 375년. 큰구수는 백제 통합군을 이끌고 외백제로 상륙하여 외벡제군을 자신의 통제 밑에 합류시켜 대군을 형성하였다. 그 후, 모용씨(慕容氏)를 공격하여 지금의 베이징[북경(北京)]을 빼앗고,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郡)을 설치하였다. 계속하여 군을 몰아 북부여를 공격하여 동족의 수도 녹산(鹿山)을 빼앗으니, 북부여는 서울을 개원(開原)으로 옮겨 갔다.
이때 진왕(秦王) 부견(符堅)은 90만의 대군으로 선비(鮮卑)의 모용씨를 쳐서 멸망시켰는데, 모용씨는 잔병을 이끌고 큰구수의 백제와 동맹을 맺어 진왕 부견과 싸웠다
그 후, 진(秦)은 중국의 패권을 놓고 진(晉)과 싸웠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힘이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큰구수는 옛 청구(靑丘) 땅[산동반도(山東半島)]를 요구하였다. 진(秦)이 거부하자, 제 2차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내국[래국(萊國)] 이래 중화족에 빼앗겼던 청구 땅을 다물하였다.
승세를 탄 큰구수 군은 계속 남진하여 진(晉)과 결전을 벌여 대승하고, 많은 영토[주군(州郡)]를 빼앗아 양쯔강 하구의 성양군과 광능군을 연결하니 황해는 또 다시 백제의 내해(內海)가 되었다. 이로써 옛 쥬신제국의 영지를 거의 다 회복하여 동이족의 세력을 온 누리에 과시하였다.
《큰구수의 중국대륙 석권 격전 상황도》
0047
☯ 큰구수, 십제 왕위 계승으로 대륙중원 통일 꿈 접고, 가우리만 제압
큰구수가 중국 대륙을 석권하고 있는 동안, 가우리[고구려(高句麗)]의 구부열제(丘夫烈帝: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가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을 다시 뺏앗아 갔다. 이 사건으로 큰구수의 중국 정복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고, 다음 해(서기376년) 11월, 큰초고[근초고(近肖古)]어라하가 죽으니, 태자의 위치에 있던 큰구수는 십제(十濟)의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할 수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젊고 현명한 큰구수의 중원통일 꿈은 이로써 좌절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중국 대륙의 옛 동이 영토를 거의 다 다물[수복]하고 개선한 큰구수는 백제 천황의 치하 속에 큰초고왕의 뒤를 이어 십제(十濟)의 왕위에 올랐다. 그 동안 십제는 북쪽 방위를 위하여 천황의 명으로 왕도(王都)를 한산(漢山:광주廣州)으로부터 한성(漢城:지금의 잠실 올림픽공원 옆)으로 전진 배치하였다.
서기 376년. 천황은 수곡성(水谷城)을 가우리에게 빼앗긴 막고해(莫古解) 장군을 파면하고, 그 후임으로 천황가의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임명하여 큰구수를 보필하게 하였다. 이처럼 십제는 언제나 백제의 감시 하에 있었다.
서기 377년 10월. 큰구수는 진고도를 장군으로 해군선 백여 척을 포함한 통합군 3만 명을 동원하여 수륙 합동작전으로 또 다시 남펴라[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펴양]를 공파하는 데 성공하니,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선진적 작전이었다.
이 당시 가우리는 강력한 백제[십제]에 매 전투마다 참패의 고배를 마셨다. 그해 11월. 복수심에 불타는 가우리의 구부(丘夫) 열제(烈帝)는 직접 군을 지휘하여 반격전을 폈으나, 번번이 첩보전에 걸려 실패하곤 하였다. §
2020.5.20.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