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는 빛으로 바깥 정보를 받아들인다.
빛의 양과 파장으로 사물을 구분한다.
파충류뇌, 포유류뇌, 영장류뇌가 판단하는 시스템이 서로 다르다.
인간의 경우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동물이며, 그 앞의 포유류와 영장류에서는 서열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은 경쟁자이자 섬겨야 할 대상이거나 복종할 대상 중의 하나다.
수렵 채집 사회 이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람의 얼굴 정보를 해석하는데 많은 신경세포를 동원한다.
매우 미세한 표정을 읽고, 눈빛을 해석하여 상대의 의도와 기분 등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관상이라는 사이비 잡술 역시 그런 진화 단계에서 나온 몸부림이다.
얼굴 자체로 충분히 그 사람의 역사와 기분 상태, 성정 등을 읽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름이나 바위 무늬, 산마루, 나뭇가지 등을 볼 때 사람 얼굴과 비슷한 정보가 즉시 튀어나와 시각정보에 대응하려고 애쓴다.






인간의 두뇌는 얼굴을 통해 상대의 정보를 하나라도 더 캐내기 위해 편도체와 후두엽의 신경세포(후두엽에는 32가지 영역이 있다)를 동원한다. 그러다보면 윤곽선만으로, 광대뼈만으로, 그림자만으로도 인식이 가능하다.
얼굴 인식은 일반 물체를 인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두뇌 용량을 필요로 한다. 뇌를 다쳐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사람조차 물체 인식율은 상당히 높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슬퍼하는지 기뻐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종합판단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3살 때 쇼크를 받아 뇌 일부를 다쳤는데, 그 결과 낮은 단계의 안면인식장애를 갖고 있다. 늘 만나는 사람은 구분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오랜 동안 보지 못한 사람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자주 보던 동창이나 마을사람이라도 그렇다.
하지만 이건 병이 아니다. 오히려 두뇌의 장난을 막아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한 실험 결과,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간단한 설문을 받는 실험에서, 설문을 받는 사람이 중간에 바뀌어도 피실험자들은 대개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키가 다르고, 상의 색상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지만 사람들은 설문 내용에 신경쓰느라 그 설문을 받는 사람의 얼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전혀 다른 두 사람을 한 사람으로 인식해버리는 것이다.

설사 이상하다고 느낀 피실험자라도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더 계산하지 않은 탓이다.
얼마 전 나는 서산에 가던 중 고속도로 교각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았는데 뭔가에 가려져 '선년 페 쇄' 부분만 시각 정보로 들어왔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던 중이었으므로 자동차는 그 교각을 금세 지나쳤다. 하지만 잠시 뒤 내 두뇌는 그것이 '전면폐쇄'라고 알려주었다. 즉 두뇌는 입력 정도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가장 가까운 정보를 즉시 대응해 알려준다.

이 두 아이는 키가 비슷하다. 하지만 방안 가구의 크기를 다르게 함으로써 시각이 오판하도록 방을 설계하였다. 뇌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것이다. 시각 정보량은 워낙 방대하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지레짐작하고 예단하고 추측하는 시스템이 발달했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이 아무리 개안수술을 하더라도 이러한 두뇌 신경세포가 발달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시각정보>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각만이 아니다. 청각도 그러하고 심지어 후각, 미각, 촉각도 그러하다.
꿈에서 보는 시각정보나 청각 등은 뇌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정보 창고에서 나오는 것일뿐 실제로 보거나 듣는 건 아니다. 뇌 정보만으로도 인간은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각, 청각 등은 사실일 수도 있고, 뇌가 상상하거나 꾸며대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 두뇌는 적당한 정보만 주어지면 저절로 입체화하는 단말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진실을 보고 듣기란 이처럼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