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2/33-가야와 외백제 멸망>
加耶· 外百濟 滅亡
가야· 외백제 멸망
☯ 실라의 공격으로, 가야동맹 망하고 다물임나 도왜출항 닫혀
서기 555년 남부여의 성왕(聖王)을 전투 끝에 죽인 실라는 이제 자신이 생겨 옛 백제에 바쳐왔던 조공을 끊고 완전히 독립하였으며, 한강 유역 진출에 막대한 전투력을 과시했던 화랑군(花郞軍)을 앞세워 비사벌(比斯伐)을 정벌하였다.
이어 서기 562년. 대가야(大加耶)를 위시한 가야(加耶)동맹(同盟)의 숨을 끊고, 오랫동안 눈엣가시 같던 임나를 공격하여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경상도 지역을 통일하고, 대 실라로 발전하는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리하여 고대 도왜(渡倭)이민(移民) 출항구(出港口)였던 임나는 백제의 응신천황의 망명으로부터 약 160년 만에 그 파란만장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한동안 (남부여가 망할 때까지) 왜지(倭地)에 대한 조직적인 이민 활동은 중단되었다.
《실라의 가야동맹 및 임나 공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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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大加耶)를 위시한 가야 동맹은 이로써 실라에 통합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가야인들은 마지막으로 출항하는 도왜선(渡倭船)에 대거 승선하여 왜지로 떠나니, 그들도 천황 국가의 일원이 되어 오늘날의 일본으로 발전하는 데 큰 기둥이 되었다.
이 때, 왜 열도로 탈출해간 아라인(阿羅人)들과 가야제국 인들은 일본 도착 후 성씨를 아라가야 출신이라는 의미로 ‘아야씨’[안라씨(安羅氏)]로 불렀으며, ‘穴(혈)’, ‘삼水변+歲(세)’ 자 등을 차자(借字)하여 썼으니, 후에 한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일부 왜인들에 의하여 ‘漢(한)’자로 고쳐 쓰여지게 됐다.
이 아야[安羅(안라)]인들은 백제인과 더불어 일본 고대사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 본백제의 지원 잃은 외백제도 멸망
한편, 중국 내의 백제 세력도 새로운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
강력했던 백제가 ᄀᆞᆷ나루의 남부여와 왜의 나라백제로 쪼개어짐으로써 해외의 식민정부들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때마침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이후 서울을 펴라[平壤(평양):요하지역]로 옮기고, 적극적으로 서진 정책을 펴온 가우리는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평원왕平原王)을 맞아 대장 온달(溫達)을 보내 외백제를 공격하여 갈석산(碣石山)을 빼앗고, 다시 그곳으로부터 배찰산(拜察山)과 유림관(楡林關)까지 토벌하니, 크게 놀란 북주(北周)가 군을 급파하여 가우리의 서진을 막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이로써 비류천황이 대방[帶方]고지[故地]에 세웠던 외백제[(外百濟):백제군(百濟郡)]는 무려 590년 동안 누렸던 발해만의 주인 자리를 가우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중국 산시성[산서성(山西城)]의 동쪽은 모두 가우리의 영지가 되었다.
《가우리의 외백제 공격 및 북주의 북제 점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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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76년 주 무제(周武帝)는 그 동안 북제(北齊)의 종주국 노릇을 하던 막강했던 백제가, 이제는 가우리의 온달(溫達)장군(將軍)에게 발해만의 외백제가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손 한 번 써보지 못하는 것을 보자, 오늘의 백제가 그 전의 백제와는 완전히 다름을 파악하였다.
이제 주 무제는 자신을 얻어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제(北齊)의 서경(西境), 진주[(晉州): 지금의 산서성(山西城) 임분(臨汾)]을 공격하여 어렵지 않게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백제에서는 군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너무도 이상하게 생각한 주 무제(周武帝)는 대담하게도 북제의 왕성인 업성(鄴城)을 공격해 보았다. 그러자 내분으로 백제의 지원군이 올 수 없음을 깨달은 북제(北齊)는 왕 이하 대신들이 모두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함으로써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한때 대군을 동원하여 북위군(北魏軍)을 두 차례나 참혹하게 격파시켜서 대륙을 놀라게 했던 강국 백제 제국은 자신의 제후국들이 차례로 적들에게 유린되어 가는 것을 쳐다보면서도 더 이상 그들을 구원할 힘이 없었다.
당시 ᄀᆞᆷ나루 백제는 천황백제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남부여계와 잔존 졸본계의 부여인들 간에 집권 싸움이 한창이어서, 식민 정부를 위하여 군을 파견할 형편이 못 되었다.
이리하여 뜻밖에 북제(北齊)를 쉽게 석권한 주무제(周武帝)는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산둥 반도의 백제 세력까지 공격하여 백제는 발해만의 외백제에 이어 산둥 지역의 식민지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중국 통전(通典)에 기록된 외백제의 소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城傍餘衆 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主扶餘崇 竟不敢還舊國 扶餘氏君長遂滅”
성방여중 후점과약 산투돌궐급말갈 기주부여숭 경불감환구국 부여씨군장수멸:
<성 밖의 백제 잔류 민들은, 차츰 모든 기력을 잃고, 돌궐이나 말갈족으로 흩어져 투쟁했으며, 외백제의 부여숭 왕과, 부여씨 군장들은, 멸망해 버린 옛 나라[外百濟(외백제):百濟郡(백제군)]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소멸되고 말았다.>
본국 정부는 내란 상태이고, 북부의 외백제와 산둥의 모든 백제 세력이 허무하게 멸망해 버리자, 양쯔강 상·하구에 설치했던 성양군 광능군도 더 이상 지원받을 곳이 없어 고립되었다가 결국 陳(진)나라에 병합되어 버림으로써 대륙 내에 있던 백제의 모든 식민지는 그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
2020.6.5.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