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에서 _ 정현웅에게/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잦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
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
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1940년 11월 <문장>지에 정현웅의 글 <압력>이란 글이 있다.
그의 나이 30에 쓴 글인데 읽어 보면 그가 어떤 성격이며 어떤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이 글을 보고 그가 친일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그가 월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그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 것 같다.
압력壓力 / 정현웅
“ 어려서는 병에 묻혀 자랐다. 쌍창 앞에 이불을 돋어 놓고 비스듬이 기대 않어서
마당에 움직이는 나무 그림자를 물끄럼히 내다보고 있든 것, 밖에서 지껄이는
아이들 소리를 귀결로 들으면서 드러누워 있든 것,
내 어릴 때의 기억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란 오로지 이런 류의 것으로서 유소년기에
있어서 나는 남들 같은 오픈 도어의 생활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 때에 문지방을 짚고 있던 파리한 백납같은 손꾸락과 천정의 무늬가
지금에도 눈앞에 선하다.
소학교에 가서부터는 그다지 병은 앓지 않었으나 여전히 쇠약한 신경적인 소년
이었고,완력을 두려워하는 쫌생원이었다. 아이들의 짓꿏은 것이 무서워서 서로
어울려 논다는 것은 염두도 못했고,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는 남들의 결산을 하고
노는 꼴을 구경이나 하고 있거나, 어느 구석에서 제 생각에 젖어 있었다.
세상의 아이들이란 모두 나에게는 무서운 압력壓力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완력으로 오는 경우에는, 대항의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집에 심부름을 갈 때에도 혹시 길에 아이들에게 피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이 떠나지 않았다. 이러니 자연히 나는 내 세계를 만들어서 스스로 몰두하고
즐길 도리 밖에는 없었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만만한
어린 아이들을 집에 모아 놓고 학교 장난이니, 환등(幻燈) 작란이니 하는 따위에
놀이었다.
소년기에 있어서 오픈 도어의 생활을 갖지 못한 병약한 소년이었다는 이것이 오늘의
내 성격을 만든 여러 가지의 기지(基地)가 된 것 같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 공상벽이라든지, 고독벽이라든지,
자기 부정성이라든지, 이 보다도 중대한 것은 나의 비사교성일 게다.
어릴 때에 소년들에게 느끼던 압력을 지금에도 남을 대할 때는 느끼게 된다.
더욱이 상대가 나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우월한 사람이거나 또는 인간성의 거리가
나와 먼 사람이면, 이 거리가 멀면 멀수록 압력이 더욱 무거워진다.
즉, 인간으로나, 성격으로나, 지성으로서나, 나와 능히 사귈 수 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 사람이 나로서 존경할만한 사람이거나, 또는 경멸할 사람이거나, 이성을 넘어선
일종의 압력을 느끼는 것이다. 이 압력이 늘 남들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들어서 남 앞에
스스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어색한 공기를 주위에 퍼뜨리고 다니게 된다.
나와 비교적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사이로서도 단 둘이 대면할 경우에는 내게서
발산하는 어색한 체취로 말미암아 그 친구 역시 설사 입으로는 여러 말을 떠들면서도
내면이 어색한 벽을 느끼는 것 같다.
나로서는 이렇게 슬픈 일은 없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현웅은 누구인가?
정현웅(鄭玄雄, 1910년 9월 20일 ~ 1976년 7월 30일)은 화가이다.
1910년 9월 20일 경성부 종로구에서 태어나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제이고보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고성(古城)〉을 출품하면서 미술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다니기도 했으나,
곧 귀국하여 삽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이무영의 신문 연재 소설 《먼동이 틀 때》를 시작으로, 이기영의 《어머니》,
채만식의 《탁류》, 이태준의 《청춘무성》 등 많은 연재 소설의 삽화가 정현웅의
손을 거쳐 나왔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신문사 소속의 출판미술가로 일하면서 유화,
인물화를 즐겨 그려 선전에 총 13 차례 입선했고, 전위적인 작가들의 모임인 《34문학》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을 맡고 조선미술동맹에 참가하여
좌익 성향을 보였다. 대한민국 건국으로 좌익 탄압이 심해지면서 월북 또는 전향을
택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하였으나,
한국 전쟁 발발 후 결국 월북했다.
정현웅은 북조선에서도 조선화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 월북 예술인 가운데 특별히
성공한 편으로 꼽힌다. 고분 벽화의 모사로 독자적인 위치를 구축한데다 역사화가로서
도 명성을 쌓았다. 안악고분, 강서고분, 공민왕릉 벽화를 모사하였으며, 〈전주성 입성〉(1961), 〈거란 침략자를 격멸하는 고려군〉(1965) 등의 역사화를 그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월북 전 대표작으로는 만주로 떠나는 유랑민의 고달픈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유화
<대합실〉(1941)이 꼽힌다.
-<반도의 光> 표지화는 모두 그의 그림이다-
정 화백을 친일파로 규정한 이유는 △조선금융연합회 기관지 ' 반도의 光 '에 3년 간
표지화 연재 △대중잡지 '신세대'에 표지화와 김동환의 시 '백린개선'에 삽화
△경성일보 자매지인 '소국민'에 삽화 세 번 △조선방송협회 기관지 '방송지우'에
대한 두 번의 삽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업삽화가로서 생계를 위한 행위였다는 점을 인정받아 국가기관인 친일반
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인사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서울에 부인과 3남 1녀 등 가족을 모두 두고 월북하였고, 1956년 북조선에서 역시
월북한 배우 남궁련과 재혼하였다. 197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어쩌면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어 친일했을 것이다.
몇 몇 사람은 제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