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어린이 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그림이다.
도날드 맥클라우드 [‘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 김대운 역
https://archive.md/etbWY
※) 아래 본문에서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으로 적는다.
{바른 믿음} 림헌원 <예장 합동을 혼란케 하는 서창원 김효남 교수 등은 참고하기 바랍니다.>
https://archive.md/OFCgT
※) 아래 본문에서 <예장 합동 꼴뚜기 Wolf험원>으로 적는다.
아래는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옮기는 글이다. 내가 좀 고쳐 옮긴다. ‘파이다고고스(몽학선생, 초등교사)’ 해석에서 “파이다고고스는 선생이 아니다.” 하신 것이 맥클라우드 목사님의 첫번째 확증편향이라면,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용도’를 부정하기 위해 ‘에드워드 피셔 {현대신학의 정수}’를 들이대신 것은 두번째 확증편향이다. 그리고 다윗 왕 예를 드신 것은 세번째 확증편향이다.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7문답>을 내세우신 것은 네번째 확증편향이다.
복음적 회개(Evangelical repentance)는 항상 하나님께 돌이킴을 포함한다. 위대한 청교도 모음집인 ‘에드워드 피셔 {현대신학의 정수} (1645년)’는 ‘회개는 믿음의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윗의 경우에도 그의 상한 마음(시 51:17)은 하나님의 용서 선언 이후에 왔다(삼하 12:13). 그리고 그는 시편 51장 1절에서 주님의 은혜와 확고부동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표현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7문> 대답 역시 이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ㅡ[{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 원문1) “Evangelical repentance”를 김대운 목사는 “복음주의적 회개”로 번역했다. 그런데 ‘복음주의적’을 뜻하기도 하는 ‘Evangelical’에서 ‘Evangeli’는 ‘복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회심에 이르기까지 준비은혜 과정에서 있는 일반 회개로서 이른바 “율법적 회개”를 염두에 둘 때, “Evangelical repentance”는 ‘복음적 회개’를 뜻한다. 즉, 참된 회개를 뜻한다.ㅡ
1700년대 초반에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있었던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은 ‘에드워드 피셔 {현대신학의 정수} (1645년)’가 일으킨 논쟁이었다. 그러면 {현대신학의 정수}는 이른바 “회심준비론”으로 말하는 ‘준비은혜론’, 준비은혜론의 율법적 회개를 단죄하며 오직 참된 회개, 믿음의 결과인 회개, 복음적 회개만을 강조한 책인가? 바꿔 말하면, 이 책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초등교사)으로서 율법의 용도’를 부정한 책인가? 다음은 ‘에드워드 피셔 지음, 토머스 보스턴 해설 {토머스 보스턴과 함께 읽는 개혁신앙의 정수} 황준호 편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75쪽~76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그리고 가로 속 청색으로 쓰는 문장은 토머스 보스턴 목사님 주석을 뜻한다.
이율법: 그럼 여전히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 율법이 행위언약으로서 갖는 용법이 있었나요?
김복음 목사: 예, 있고 말고요.
최반율: 그 용법들이 뭔지 알려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김복음 목사: 제 기억으로는 루터가 ({갈라디아서 주석} 171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롭지 않은 사람, 즉 불신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한 부류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받지 않을 사람들이다. 유대인 가운데도 이 두 부류가 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들에게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데려가는 역할을 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돼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는 바울 사도 말과 같지요. 이 말은 (행위언약으로서) 도덕법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보여 줘서 (죄책과 율법의 저주를 깨닫고, 스스로 율법을 행하거나 벌을 다 받을 능력이 없음도 아는 상한 심령으로) 제사법으로 달려가게 해,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즉 그리스도께서 순종과 죽음으로 죄인들을 대신해 율법을 만족하게 하신 것을) 이 제사법에서 배우고, 그리스도를 믿어, (즉 제사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만족을 믿음으로 받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삼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이 이렇다. 즉, 위 인용문에서 보는 대로 에드워드 피셔 목사님께서는 {현대신학의 정수}에서 ‘중생(회심) 전 그리스도께서 이끄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용도’를 서술하셨다.
‘특별은혜가 아닌 일반은혜로서 준비은혜는 중생(회심) 전 일반소명에 속한 준비은혜’다. 그러함에도 맥클라우드 목사님은 다윗 왕의 예, 중생자로서 다윗이 점진성화 과정에 있었던 일을 예로 드심으로써 개혁 교회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를 비평하신다. ‘범주 일탈의 오류’를 범하신 것이다. ㅡ밧세바를 범할 때 다윗 왕은 중생자가 아니었다는 뜻인가?ㅡ
맥클라우드 목사님은 “다윗의 경우에도 그의 상한 마음(시 51:17)은 하나님의 용서 선언 이후에 왔다(삼하 12:13).”고 하셨다. 그러면 용서 선언 이전에는 다윗에게 상한 심령이 없었는가? 다윗은 상한 심령 없이, 아무 죄책감이나 공포감 없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는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노라.”, 이 말은 다윗 왕 상한 심령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었는가?
간음죄(도적질죄)도 모자라, 살인죄에서도 가장 간악무도한 모살죄를 저지른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께서는 다윗 왕 죄를 지적하며 율법의 보응인 재앙을 선포하신다. 이 선포에 모살죄를 저지르면까지 양심에 화인 맞았던 다윗 왕은 상한 심령으로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은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했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2:13~15 상)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제39문답>부터 <제81문답>까지 십계명을 다룬 뒤 <제84문답>에서 “모든 죄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은 무엇입니까?”를 묻는다. 그리고 <제85문답>에서 “우리 죄로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를 묻는다.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9문답>이다.
문: 말씀이 어떻게 구원을 위해 효력 있게 됩니까?
답: 하나님의 성신께서 말씀의 낭독, 특별히 강설을 효력 있는 방도로 쓰셔서 죄인을 설복하고 회개케 하시며, 거룩함과 위로로 그들을 세워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나는 “죄인을 설복하고”를 ‘성령께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받은 죄인을 책망의 가시 채로 치시며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사역, 성령의 일반사역’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 교회 ‘구원의 서정’에서 ‘일반소명’ 개념이 없는 예장 합동 꼴뚜기파 Wolf들은 “죄인을 설복하고”를 ‘중생자를 설복하고’로 독해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6문답>이다. 도돌이표 인용이다.
문: 도덕법이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답: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도 소용이 있습니다. 그들 양심을 그것으로 일깨워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려고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나아가게 하거나, 혹은 죄의 상태와 죄의 길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해 그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예장 합동 꼴뚜기 Wolf험원>에서 분별 없는 Wolf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서창원 목사님과 김효남 목사님을 모독한다.
맥클라우드 박사의 가르침을 제대로 연구 묵상하여 주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은혜’를 입어 진짜 ‘회심’이 일어나는 기쁨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맥클라우드 같이 훌륭한 교수의 성경적 가르침은 길이 남기고, 조엘 비끼 같은 자들의 비성경적 가르침은 신속히 내다 버리고 결별해야 하나님 앞에서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중략)…
그동안 장로교 안에서 회심준비론을 계속 주장해 온 교수나 목사들이 있다면 회개하여 그동안 물의를 일으킨 점을 사과하든지 아니면 신속하게 장로교를 떠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을 {페북} 김대운 목사 담벼락에서 수박 겉핥기로 읽으면서 나는 여러 문제가 있는 글임을 알았다. 그런데 환갑 넘은 늙은이(?)라서인지 이 글을 비평하고자 하는 전투력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장 합동 꼴뚜기 Wolf험원>을 읽었을 때였다. 기고만장해 예장 합동 서창원 목사님과 김효남 목사님을 조롱한 Wolf험원 모습에서 기고만장해 예장 합신 김병훈 목사님을 정신병자로 몰며 김병훈 목사님에게 ‘교단校壇에서 내려오라.’ 했던 Wolf창모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Wolf험원 기고만장한 교만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하룻강아지로서 Wolf험원 기고만장한 교만이 임인년(1962년) 8월 15일생 늙은 흑호黑虎 전투력을 되살린 것이다.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정말 그러한가?’ 하는 신사의 자세가 없는 까닭에 ‘여러 문제가 있는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을 분별 못 한 그 짧은 신학 수준으로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대표”??? ㅉㅉㅉ! “서당 개 3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는데, 총신신대원을 졸업하고 목회를 수년 동안 했음에도 저 모양이면, 소나 개나 돼지도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대표” 하겠다. ㅠㅠ. 그러므로 Wolf험원 이하 예장 합동 Wolf들은 “사돈 남 말” 하지 말고, 내 모母 교단 예장 합동을 욕 먹이는 꼴뚜기 짓거리들로 예장 합동을 혼란스럽게 하는 짓 그만두고, 신속하게 장로교 예장 합동을 떠나 살길을 찾기 바란다. 적당한 교단으로는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는 지방교회가 좋겠다. ‘선포로 이루는 저절로 성화론’의 원조 교단인 이단 지방교회가 좋겠다. ㅠㅠ.
이 비평문 ④편은 “이 모든 성경 본문에서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대한 어떤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즉각 순종해 주님을 따르는 모습만 관찰된다.”는 맥클라우드 목사님 주장을 다루는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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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donaldmacleod.org.uk/dm/conversion-must-there-be-a-preparatory-law-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