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하실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3)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돼,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3:24) 믿음이 온 뒤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5)
四季 朴埰同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㊺ :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서철원 신학’>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89
※) 아래 본문에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서철원 신학>으로 적는다.
도날드 맥클라우드 [‘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 김대운 역 (2023.08.22.11:49)
https://archive.md/etbWY
※) 아래 본문에서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으로 적는다.
四季 朴埰同 <‘도날드 맥클라우드 [‘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을 비평함 ②>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504
※) 아래 본문에서 [도날드 맥클라우드를 비평함 ②]로 적는다.
四季 朴埰同 <‘도날드 맥클라우드 [‘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을 비평함 ③>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505
※) 아래 본문에서 [도날드 맥클라우드를 비평함 ③]으로 적는다.
나는 (1984년에 출판된 것으로 기억하는) ‘서철원 {복음과 율법의 관계}’ 초판본이 나오자마자 사서 읽으면서 여러 문제가 있는 책임을 깨달았다. 그 하나가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뿐이요, 그 이후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갈 3장)이 바울의 주장이다.”1) 같은 세대주의 신학 잔재였다. 그리고 여러 문제가 있는 책임을 알고 있었기에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서철원 신학>에서 ‘서철원 목사님 초기 신학은 새 관점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 신학 영향을 받았음’을 ‘서철원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있는 글을 제시해 밝혔다. 그런데 [도날드 맥클라우드를 비평함 ③] 끝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비평문 ④편은 “이 모든 성경 본문에서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대한 어떤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즉각 순종해 주님을 따르는 모습만 관찰된다.”는 맥클라우드 목사님 주장을 다루는 글이 될 것이다.
지난 8월 28일에 ‘N.T. 라이트 {갈라디아서 주석} 김선용 역 (서울: 복 있는 사람, 2023)’가 출판됐음을 오늘 알게 됐다. 이 까닭으로 “이 모든 성경 본문에서 …… 즉각 순종해 주님을 따르는 모습만 관찰된다.”는 맥클라우드 목사님 주장은 다음 비평문에 다뤄야겠다. 다음은 [도날드 맥클라우드를 비평함 ②]에서 옮기는 글이다.
나는 <비평문을 쓰기 전, 머리를 감아야겠다.>에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으니,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관한 기독교 정통 해석을 버리고 새 관점 신학 성경 해석에서 (확증편향에 따른) 그 일부만 내세워 개혁 교회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회심준비론)을 반대한 도날드 맥클라우드 목사님 글을 비평하는 글, 아래에 링크하는 글을 비평하는 글을 산책을 다녀와 목욕한 뒤 간단하게라도 일단 한 편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새 관점 신학 성경 해석에서 (확증편향에 따른) 그 일부만 내세워”는 온전히 정신을 못 차린 데서, 조금 정신을 차린 데서 나온 그릇된 문장이다. 새 관점 신학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도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선생이 아니다.”고 해석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그릇된 주장이다.
내가 “그런데 ‘새 관점 신학 성경 해석에서 (확증편향에 따른) 그 일부만 내세워’는 온전히 정신을 못 차린 데서, 조금 정신을 차린 데서 나온 그릇된 문장이다.”고 인정한 까닭은 ‘파이다고고스(초등교사, 몽학선생)’에 관한 해석은 ‘새 관점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 해석’과 ‘기독교(새 관점 신학이 “옛 관점”으로 부르는 종교개혁자들 신학) 정통 해석’과 똑같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도날드 맥도날드 목사님은 새 관점 신학 영향을 받은 목사님이 아닌가?’, 이 생각은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을 {페북} 김대운 목사 담벼락에서 수박 겉핥기로 읽고 했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도날드 맥클라우드를 비평함 ②]를 쓴 뒤 이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완독한 것은 아니지만,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최현만 역 (서울: 에클레시아북스, 개정판 2016)’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톰 라이트는 구원론(이신칭의론)에 관한 종교개혁자들 성경 해석을 “옛 관점의 전통”으로 말하며 일단 부정하고 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점 때문에 [도날드 맥클라우드를 비평함 ②]를 쓴 뒤 ‘[갈라디아서 주해]가 있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에서 파이다고고스에 관한 톰 라이트 해석이 있나를 찾아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했지만, 이 생각은 내 잠재의식 속에 묻히고 말았다. ‘톰 라이트 해석은 제임스 던 해석과 같겠지.’라는 생각과 ‘도날드 맥클라우드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 비평]’에 관한 비평문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내 잠재의식 속에 묻힌 것이다.
어젯밤까지 이 비평문 ④편과 ⑤편 초고를 타이핑해 둔 오늘 아침이었다. 주일 예배를 가기 전 ‘아, 생각만 하고 놓친 게 있구나. 왜 지금까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와 서철원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파이다고고스에 관한 해석을 안 살펴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철원 {갈라디아서 주석} (서울: 쿰란출판사, 2020)’을 수박 겉핥기로 읽을 때 문제 있는 엉뚱한 해석은 밑줄을 그어 표시해 뒀는데2), 이 책 201쪽~202쪽 파이다고고스에 관한 해석에는 밑줄이 그어있지 않았다.
다른 때보다 10 분 일찍 집을 나서 교회로 갔다. 지난 25일에 펴낸 ‘박영선 & 조주석 대담집 {개정증보판: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서울: 복 있는 사람, 2023)’을 교회 서점에서 살 생각으로 10 분 일찍 나선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는 배포됐지만, 교회 서점에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서점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보자마자 내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N.T. 라이트 {갈라디아서 주석}’이었다.
예배 시작 전, ‘파이다고고스에 관한 해석’ 부분을 펼쳐봤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타이핑하면서 ‘서철원 {갈라디아서 주석}’을 펼쳤다. 다음은 ‘서철원 {갈라디아서 주석}’ 202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이 노예 가정교사들은 주인이 위촉한 기간까지만 아들을 교육한다. 교육이 마쳐지면 그 아들을 아버지에게 인도해 그 결과를 보고함으로 임무를 마감한다. 이처럼 율법도 그리스도 오시기까지만 이스라엘을 교육하도록 위촉됐다. 그리스도 오시는 때까지만 율법이 활동할 기한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활동기한이 마감됐다.
다음은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옮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KJV}는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선생(Schoolmaster)으로 부른다. 그러나 헬라어 파이다고스는 학교 선생이 아니다. 그는 아직 어린 주인 아들의 양육 책임을 맡은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 아들을 맡은 동안 그의 의무는 주인 아들을 데리고 등교시켰다가 하교시키는 일이다. 그는 선생이 아니란 말이다.
그들의 논의를 이해하기 더 어렵게 하는 바울의 진술은 율법의 책임에 대한 것이다.바울은 율법에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책임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라는 율법의 기한에 대해서 말했다.
다음은 ‘N.T. 라이트 {갈라디아서 주석}’ 389쪽~390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3:26-25 바울은 아브라함과 메시아 사이의 시간에 토라가 맡았던 역할을 분석하면서 토라에 특별한 역할이 있었음을, 곧 토라가 ‘파이다고고스 paidagogos’의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흠정역 KJV} 같은 역본은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를 어린 소년들을 가르치는 “초등교사(schoolmaster)” 또는 “가정교사(tutor)”로 번역했다. ㅡ{개역 성경}은 “몽학선생”으로, {개정개역 성경}은 “초등교사”로, {공동번역 성경}은 “후견인”으로, {새 한글 성경}은 “돌봄 교사(혹은 감독자)”로 번역했다.: 역주ㅡ 하지만 ‘파이다고고스’는 어린이들이 학교에 오가는 길에 장난이나 못된 짓을 하지 않도록 돌봤던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노예의 역할은 대략 영어권에서 “베이비시터(babysitter)”라고 부르는, 부모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지만, 별도로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파이다고고스’는 필요할 때까지만 역할을 수행한다. 바울은 여기서 ‘파이다고고스’의 일이 ‘에이스 크리스톤(eis Christon)’까지만 지속된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를 “메시아의 도래 전까지”라고 풀어서 번역했다. 다만 우리는 추가됐을지 모를 배움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배움은 ‘크리스토스(Christos)’가 16절에서 연합적 메시아, 곧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 없이 메시아-백성으로 구성된 가족 전체이자 새로운 단일한 가족으로 구체화된 메시아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단일한 가족이 생겨나는 새로운 경륜의 시대까지만 이스라엘이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율법이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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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판본을 분실해 아쉬운데, ‘서철원 {복음과 율법의 관계}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개정판 2쇄, 2008)’로는 31쪽에 적힌 문장이다.
2) 그 예 하나는 이 책 265쪽에 적힌 “율법은 그리스도를 배척했으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