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양추 거사의 본명은 면황(綿晃)이며 광동 조안(潮安)사람이었다
. 태어난 품성이 담박하여 조용하고 별 욕심이 없었으며 친구 사귀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홍콩에 나가서 장사를 하였으며 재난 당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이나 교육사업 같은 일에는 빠지지 않고 동참하여 노역이라도 거들었다.
중년에 삼보에 귀의하여 선밀(禪密)할 것 없이 불법을 널리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허운(虛雲)ㆍ원영(圓瑛)ㆍ태허(太虛)ㆍ굉원(宏願) 등 여러 대사님들을 두루 참례하였다.
뿐만 아니라 홍콩불교학회와 거사림 자항정원의 설립에 적극협력 하였고, 또 남회사 등을 수리 정돈하는데 그의 공덕은
일로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마지막에는 인광대사께 귀의하여 전 가족이 모두 계를 받고 채식을 하였으며 경건하고 정성을 다하여 정토법문을 닦았다.
또《학불진량(學佛津梁)》이란 책을 저술을 하여 처음 불교공부에 들어온 사람들을 많이 이끌어 주었다. 중화민국 31년 1941년
겨울에 일본군이 구룡을 침략하여 홍콩을 공격할 때에 포격이 맹렬해지자 전 가족을 피난시키고 그의 아들 방업광만 남아 곁에 있게 하였다.
방양추는 말하였다.
삼계화택을 남보다 먼저 떠날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행운이겠느냐! 너도 전심전력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여라.
나는 일찍부터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기로 원을 세웠기 때문에 마음에 별로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매일 예불하고 염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2월 18일 저녁 7시에 일본군의 포탄이 그의 집에 떨어져 집이 무너지고 방양추도 뇌를 다쳐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약을 구해다 받쳤으나 그는 약 복용을 거절하고 염불만 계속하였으며, 그의 아들에게 곁에서 도와 염불하라고 하였다.
9시가 되자 더욱 급하게 염불을 하며,
"부처님이 오셨다! 부처님이 오셨다!"하고 외쳤다. 그리고 합장하고 미소를 지으며 왕생하였다.
왕생한 후 발이 맨 먼저 차가워졌고 다음으로 무릎과 가슴이 차가워졌으며, 머리는 최후에 차가워졌다.
그는 당시 59세이었다.
곽함재 거사의 이름은 진용(振墉) 자는 곡이(穀貽)이며 법명은 혜준(慧濬)이었다. 말년에 아호를 정계(淨繼)라 하였으며 호남 상음 사람이었다. 청 덕종 광서 19년(1893) 거인에 급제하였다. 관으로는 안휘성 후보도원과 고등검찰청 검찰장을 역임하였다.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한 후 은퇴하여 호남성 장사 동향의 증만에서 살았다. 평일에는 주로 저술활동을 하여 도를 논하는 등 자기 뜻에 상응하는 생활을 하였다.
일찍이 모금활동을 하여 수재민을 구제하였으며 고아들과 가난한 여인들을 수용하는 수용소를 도움으로서 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새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 자선회와 목장과 방생지 등의 설립을 제창하여 동물생령에게도 혜택을 주었다. 죽을 보시하거나 약물 등을 보시하는 등 자선행사가 있는 곳이면 언제나 빼놓지 않고 솔선하여 동참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속세의 시끄러운 일들을 뒤로하고 불교경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민국 15년 1926년엔 평생 채식을 하고 염불하기로 발원하고 인광대사께 귀의하여 전문적으로 정토법문을 닦았다. 후에 남화사를 참관하고 허운화상을 스승으로 삼으니 그의 불교에 대한 학문의 조예는 일취월장하였고 원력이 날로 원대해 갔다. 해마다《금강경》과《아미타경》을 출판하여 법보시를 하였고 대장경 여러 부를 모시어 여러 총림사원에 나누어 기증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전심전력으로 규산밀인사(潙山密印寺)의 보수와 록산(麓山)사리탑의 중건을 제창한 것은 그의 공덕이 가장 크다 하겠다.
동시에 보호연사(普護蓮社)의 창건을 제창하여 초급 불교인의 교화에 힘을 썼다. 화엄법회를 창립하여 시골사람들의 정신안정을 꾀하였고, 극락탑(極樂塔)을 건조하여 마침내 그의 해묵은 서원을 완성하였다. 1941년 12월 23일에는 자기가 직접 준비 중이던 장차 묻힐 묘혈을 직접 찾아가 시찰하고 돌아오자 곧 몸이 좀 불편함을 느꼈다. 의사의 치료를 받고 또 약도 복용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해가 바뀌었다.
정월 초이튿날 병세가 위중해졌다. 고당사 자안 큰스님과 정토연사(淨土蓮社)의 장흔거사 등을 모셔와 불당에서 예참염불을 하였다. 여러 자녀들이 모두 나와 빙 둘러 서서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그 때 곽함재 거사는 그들에게 오늘 저녁에는 별 일이 없을 것이니 모두 각자 침실로 돌아가라고 일렀다. 초사흗날 홀연히 말하였다.
"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외도중생들이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 같다."고 하셨다.
장흔거사가 곽거사를 대신하여 곧 바로 불전에 나아가 팔뚝에 3주(炷)의 염비를 하여 숙세의 원한을 화해할 것을 기도하였다. 또 실내에 아미타불 성상을 모시고 승속(僧俗)이 함께《지장경》한부를 봉송하였다. 대중이 함께 봉송을 시작하자 곽함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였다.
"마음이 아주 안정이 되어 편안하구나!"
그리고 곧 편안히 잠이 들었다.
초나흗날 식구들더러 영암산 묘진(妙眞)화상께 정중히 편지를 쓰라고 지시하였다. 그 내용은 큰스님께 곽함재 거사를 위해 불칠(佛七)법회를 여시도록 부탁하고 또 영암산에 보시하기로 약속해 놓고 아직 이행치 못한 공덕을 모두 완수토록 하는 등 여러 가지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만장에 쓸 글[輓聯]의 내용을 직접 지어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삼업을 그 누가 소멸시키겠는가, 원하건대 정조정행(正助淨行)에 힘입어 안양(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란다. 만 가지 인연을 이제 모두 놓아버리니, 인천(人天) 복의 업보를 받아 다시 사바세계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노라.』
그날 오시(午時)가 되자 식구들을 불러 발을 씻게 하고 또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 후에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부처님께 9차례 배례하였다.
동시에 사람들을 시켜 침상을 서방으로 향하도록 이동시켰다. 그리고 공손히 합장하고 일부러 와서 조념염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저녁이 되자 자녀들 더러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자기 팔에 삼주(三炷)의 염비를 하라고 팔을 내밀었다.
이어서 권속들도 승속들도 돌아가며 그의 팔에 모두 스물 한 주(炷)의 염비를 하였다.
이때 곽함재가 말하였다.
"지금 나는 너무 편안합니다. 모두들 아미타불 네 글자의 성호를 불러주세요."
이에 동참 대중들은 실내에서 일제히 큰 소리로 아미타불 성호를 조념하였다.
장흔거사가 나서서 그를 안내하여 말하였다.
"극락세계에 아미타불은 실재로 계십니다. 결코 의심치 마세요. 의심하면 곧 장애가 생긴답니다. 곽공께서 힘써 닦은 정행(淨行)은 그 공덕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또 부처님의 크신 원력도 또한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생의 시간은 반드시 정한 시간이 있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놓으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십시오. 인광대사님께서도 왕생하실 때 오랜 시간 앉아 기다리셨어요."
곽함재는 장거사의 말을 듣고 연상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동이 틀 무렵 장흔거사가 또 불당 앞으로 나아가 그를 위해 지장보살을 염하고 그의 귀 가까이 가서 그를 위로하였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거려 대답을 하였다. 그런 중에 홀연히 숨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어서 편안하고 상서로운 분위기에서 운명하였다.
그 날이 1월 5일 진시(7~9시)이었으며, 당시 그는 70세이었다.
여명생 거사는 설강 정해현 사람이었다. 집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천성이 단순하고 소박하였고 불법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아들 여정용은 어렸을 적부터 불법을 신봉하였다.
1941년에 상해에 나아가 원영(圓瑛)법사께 귀의하였으며 전심으로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정토법문이야말로 수행의 첩경이라 믿었다. 이에 불교거사림을 창건하고 대중에게 염불을 권하였다. 이때 여명생도 불교의 가르침을 적지 않게 들었지만 실천하는 일은 없었다.
1942년 1월 24일 몸이 좀 불편함을 느꼈다. 아들 여정용은 곧 아버지에게 정토십념 왕생의 이치를 말씀드렸다. 이에 일시에 믿음과 원이 생겨 일심으로 염불하며 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했다.
1월 29일 그는 대중들에게 조념염불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풍경을 치면서 큰 소리로 염불을 하였다. 2월 초하루 저녁에 그는 홀연히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아미타불을 보았고 서방세계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가지가지 광명의 수승한 정경을 보았다. 나는 연화대 위에 앉아서 칠보의 연못 위를 오락가락 그네처럼 흔들거려 아주 즐거웠다."
말을 마치고 침대 앞에 모신 불상을 향해 합장 예배하고 계속 말을 했다.
"아미타불 연화대 위에 앉아도 됩니까?"
그는 부처님이 잡아서 끌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고 연화대위로 바로 올라가고자 조급하여 더 기다릴 수 없는 듯하였다. 누군가가 그에게 부처님 성호를 10번 외우라고 권하였다.
여명생은 곧 큰 소리로 염불하기 시작하였다. 여덟 번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자 바로 기력이 지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소리가 낮아지며 그저 소리없이 묵념 상태로 들어갔다. 그리고 별안간 크게 웃으며 좋다고 하더니 편안히 왕생하였다.
그 때가 1942년 2월 2일 새벽 세시이었다. 당시 49세이었으며, 그는 오전 9시가 되도록 정문(頂門)이 아직 따뜻하였다. 이튿날 염을 할 때에도 안색이 붉으스레 윤기가 있었다.
《홍화월간》13기
【평왈(評曰)】
병이 난 후에 처음으로 정토법문을 얻어 듣고 임종시에 일념 간절하니 능히 삼계를 뛰어넘어 생사를 요탈(了脫)할 수 있었다. 만약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10번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니 세상에 어찌 이렇게 간편하고 편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불법을 한번 듣고 곧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또 굳은 신념을 갖게 되면 이미 숙세의 근기가 성숙된 것임을 몰라 그러는 것이지 의심할 필요가 뭐 있는가?
관형지 거사는 수십 년 관리생활을 하다가 42세 되던 해에 삼보에 귀의하고 전적으로 정토법문을 닦았다. 그 후 20년이 되었지만 세상일에 바빠 공부가 처음 시작할 때처럼 그렇게 근엄하고 세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성호만은 수시로 염송하여 정토에 왕생하고픈 원력은 너무도 간절하였다.
1940년부터 자주 병석에 눕게 되고 기력이 떨어졌다. 1942년 봄에 진찰해보니 장암이었다. 5월 19일이 되자 병세가 악화되었다. 조박초(趙樸初) 거사를 모셔 와서 유언장에 서명하고 증명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말했다.
정토왕생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미 지금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보타산의 하화지(荷花池)와 관세음보살 성상을 관상합니다. 여러 번 꿈에서 보았어요.
바라건대, 관세음보살께서 고액(苦厄)을 구제하시고 나를 서방정토에 접인(接引)해 주시기를 발원합니다. 다만 병중이라 청정(淸淨)하지 못하나 그저 스스로 깊이 참회하오니, 이 생사대사를 정리하는데 번거로우시지만 조선생께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조박초는 서둘러 도반들과 조념염불을 준비하였다.
관형지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중이 함께 와서 같이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좋겠습니다.
조금 후 덕삼(德森)법사가 도착하자 희색만면하며 합장하고 또 말했다.
스님께서 대중을 이끌고 저를 위해 전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해 주십시오. 관세음보살님께서 오시면 먼저 보타산을 한 바퀴 돌고 난 다음에 다시 저를 극락으로 인도하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덕삼법사께서는 그렇게 멀리 돌게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아미타불을 염하여 아미타부처님께서 인도하여 직접 서방정토로 왕생하도록 하자고 권하였다.
관형지도 그게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가솔들이 그가 바로 타계하는 것을 원치 않고 병이 치유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끝까지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하기를 바랐고 염불 칭호를 바꾸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덕삼법사는 이에 핑계를 들어 그 자리를 떠났다.
흥자(興慈)법사를 모셔와 법문을 들었다. 스님은 그에게 법문하시기를 입으로 염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면 관세음보살님과 심심상인(心心相印)하여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형지는 웃으며 합장하고 말했다.
업을 가지고 왕생하는 것이니 변지화성(邊地化城)인들 어떻습니까? 저는 그도 흔쾌히 바라는 바입니다.
또 말하기를,
염불 소리가 너무 급하면 똑똑히 안 들립니다.
하였다. 이에 흥자법사는 대중들과 함께 천천히 염불을 2시간 동안 계속한 후 떠나갔다.
관형지는 말하였다.
스님께서 염불을 해 주시니 기운이 납니다. 스님께서는 가시지 말고 여기 남아주십시오.
오후에 법장사의 스님들도 오시고 거사림의 정토연우들도 왔다. 관형지는 그들에게 일일이 합장으로 인사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따라 염불을 하며 얼굴에는 희색을 띠고 말하였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놓아버렸으니, 그만 가야겠다.하였다.
저녁이 되자 홀연히 또 말을 하였다.
왜 이리 망념이 많을까! 관세음보살은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다는데 왜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으실까?
조박초가 말했다.
관세음보살은 곧 자기 심중에 계시는 것입니다. 보이고 안보이고 상관마시고 오직 관세음보살님께만 의지하시면 틀림없이 가피를 받을 것입니다.
이에 네팔의 관세음보살 성상을 침대 앞으로 모셔왔다. 관형지는 성상을 보자 합장하고 큰소리로나무대자대비광대영감관세음보살을 소리쳐 염송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방금 연지(蓮池)에 갔었는데 관세음보살은 뵙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어. 아마 업장 때문인가 보다.
이어서 대중더러 그를 위해 대참회문(大懺悔文)을 지송하고 보살의 명호를 같이 지송해 달라고 청하였다. 대략 1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돌연 환호하였다.
보살님께서 오셨습니다.
하고 가족들한테 침대 앞에 꿇어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혼자서 말하였다.
보살님께서 연지 가운데 계시고 연화로 둘러싸여 계신다. 지금 나는 너무너무 기쁘다.
곁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아미타부처님도 오셨습니까?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은 아주 똑똑히 선명하게 보여요.하였다.
이어서 합장하고 큰소리로 나무대자대비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좌우 둘레를 돌아보면서 누구 왕생을 원하는 사람 없느냐고 하면서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하였다. 연후에 시선은 허공을 주시하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 흥자법사가 도착하였다. 여전히 손을 들어 예를 표하였다. 흥자법사는 그에게 눈을 감고 정념(靜念)하라고 하고 대중을 지휘하여 보살명호를 염송하였다.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염송하였다.
관형지는 점점 눈빛이 흐려지며 눈이 감겨지기 시작하였다. 입술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대중을 따라 염불을 하는 듯이, 스님이 또 그에게 모든 인연 다 놓아버리고 일심으로 서방에 태어날 것만 생각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그러겠다고 하였다.
또 부처님 명호가 잘 들리느냐고 물었다. 관형지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낮 12시가 되었다.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왕생하였다. 밤중 자정 이후까지도 그의 머리 정수리부분은 아직 온기가 있었다.
《홍화월간》15기
【평하여 말하건대】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왼쪽을 보좌하며 같이 서방극락세계의 접인도사이시다. 원래는 누가 높고 누가 낮고 하는 차별은 없다. 그러나 임종시에는 대개 아미타불을 주로 염송한다. 평상시에 관세음보살 성호를 주로 지송하는 사람이 아니면 역시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진소정 거사는 이름이 계장(繼璋)이며 호남 영주 사람이었다. 강남에서 관리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강남에서 생활하다가 아버지가 사망한 후 독립해서 살아갈 일을 찾았다. 그러던 중 진강에 싸전(쌀상회)을 차렸으나 경영에 실패하여 남경과 상해의 구제부유회(救濟婦孺會)에 취직하여 조사원이 되었다.
매번 배가 드나드는 시간이면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지나 않나 부둣가에 살피러 나갔다. 그럴 때면 가끔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나선 스님들이 선표 살 돈이 부족하여 배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늘 문제해결을 해주곤 하였다. 그 인원수가 많아도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1934년에 조유산 등 10여 사람과 같이 오대산에 참배를 갔다. 남대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길 안내를 하는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의 안내로 먼저 고남태사(古南台寺)에 들렸다. 거기에서 미청(彌淸) 노화상을 만나 그에게 귀의하였다.
미청법사가 말하였다.
"지난 밤 꿈에 발밑에 이룰 성(成)자가 있어서 어디서 제자가 오려나 보다 했더니 오늘 정말 자네를 만났네. 그야말로 꿈에서 보인 증조와 일치하는군. 그래서 이름을 만성(滿成)이라 해야겠네."하였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산언덕에 올라가 지혜의 등을 구하는 기도를 했는데, 절을 세 번도 다 하기 전에 온 산에 불이 밝혀졌다. 먼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가까이까지 점점 바로 눈앞까지 이르렀다. 이 영이(靈異)롭고 상서로운 광경의 감응을 보고 마음에 기쁨과 자비가 교차하였다.
다섯 개의 산을 돌아다니며 산정(山頂) 진향(進香)참배를 마치고 광제사에 이르렀을 때 미청법사께 귀의한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고남태사의 총무스님 옆에 있다가 말하였다.
"미청 노화상께서는 제자를 받지 않으십니다. 전에 어느 관원이 많은 돈을 내놓고 스님께 귀의하겠다 하였으나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로 귀의를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참 기이한 일입니다."하였다.
진소정은 기이한 인연에 감사하며 이로부터 발심하여 영원히 오대산의 신도가 되기로 하였다. 상해에 돌아온 후 조유산 등과 같이 모금을 하여 오대산에 공양키로 하였다. 동참자가 수십명이 되었다. 한 사람이 매년 30원씩 보시하기로 하였다.
그 후 항일전쟁이 발생하여 정세가 날로 악화되었다. 그동안 모아진 2만원으로 60묘(苗)의 논을 사서 오대산 승려들의 영구 도량(道糧)을 공급하는 토지를 희사하였다. 어느 날 도안스님이 그에게 장래 어찌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오대산에 가서 중이 되려고 합니다."
하였다.
1942년 2월에 홀연히 죽어도 무주고혼이 될 것이니 앞날이 망망하다고 스님께 말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임종시에 주인이 되려면 죽어서 돌아갈 곳을 정해야하니 마땅히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도록 기도하세요."
이에 진소정은 죽어서 정토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그날부터 매일 아미타불 일만번을 염하였다. 4월 초나흘에는 정중하니 흥자스님을 모시고 오계를 받았다.
7월 초사흘엔 이질 설사 병이 났다.
14일에는 홀연 중풍까지 맞아 손발이 비틀리고 또 입과 코가 비틀려 말도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기가 어려웠다. 16일에는 또 숨이 가픈 증상까지 일어났다. 호흡곤란은 치료하여 조금 나았다.
22일 오후 3시에 심기일전하여 홀연 웃으면서 소리쳤다.
"문수보살님이 오셨다!"
그의 처가 곁에서 말을 건네려 하자 또다시,
"아미타불께서도 오셨다. 빨리 도안스님과 사람들을 초청하여 조념염불을 해 달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큰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더니 이로부터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
도안스님과 몇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계속 미소를 지어 인사를 했다. 스님과 동행인들은 침대 앞에 둘러 앉아 큰소리로 염불하였다.
스님이 진소정에게 묵념하라고 권하자 그 때마다 머리를 끄덕여 대답하였다. 11시가 되자 온 몸에서 땀이 나며 숨을 헐떡거렸다. 전신이 모두 차가워졌으나 유독 머리와 가슴은 아주 따뜻하였다.
스님은 그가 왕생하거나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이 아직 굳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어 스님은 그에게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설법하였다.
"사람된 즐거움은 이미 충분이 경험했지 않아요. 뭐 더 연연하고 탐낼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이 생사의 긴요한 대목이니 응당 빨리 마음을 정하고 일심염불하여 왕생을 기원하세요. 더 늦어서 때를 그르치면 그 때에는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부인도 곁에서 같은 말로 권하였다. 이에 심장부위가 점점 차가워졌다. 12시가 되었다. 호흡의 간격이 점점 늘어졌다. 도반들은 그가 혼미해지는 것을 보고 염불소리를 더 높여 그의 귀가에 들려주었다.
그가 숨이 끝날 때까지 아미타불을 찾는 뜻을 놓아버리지 말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오후 1시가 가까웠을 때 그는 왕생하였다. 오직 머리 정수리만은 따뜻하였다.
당시 그는 66세이었다.
《홍화월간》21기
【평하여 말하건대】
여러 날 말을 못하다가 임종시에 말을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감응가피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직 머리와 가슴만 따뜻하다는 것은, 인간의 마지막 신식(神識)이 가슴으로 나가면 내세에 다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머리 정수리로 나가면 극락왕생하여 성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그가 스님이 되는 것과 왕생하는 일에 대한 결심이 아직 결정이 안 된 연유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스님의 간절한 법문으로 왕생하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그래서 가슴부위가 점점 차가워지고 유독 머리 정수리만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임종의 조념염불과 스님의 개도(開導)가 얼마나 중요함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왕경문거사는 이름이 옥순(玉純)이며 대대로 요녕성 수암현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농사를 짓다가 후에 장사를 하였다. 평소 선행을 좋아하고 보시하기를 즐겼으며 불교를 신봉하였다.
53세가 되던 해부터 처자식들과 함께 발심하여 채식을 시작하였다. 자식들 중 둘째 왕초환과 넷째 아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염불하는 공이 삼계를 뛰어넘고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첩경이고 가족들이 가장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법문임을 알았다.
이에 지성으로 정토의 행업(行業)을 수습(修習)하였고 칭명염불을 주로 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였으며 오매불망(夢寐難忘) 하루도 염불을 중단하는 일이 없었다.
1942년 8월 27일 서산에 사는 큰 아들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식사량이 감소되었음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예 일체 식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홀연히 말했다.
"내 몸이 너무 허약하여 이 세상에 오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마 9월도 못 넘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장남은 자기 아버지에게 특별한 질병이 없는 터이라 이 일을 별 주의 않고 흘려버렸다. 오후에 왕경문은 이 일을 자기 부인에게 말하였다. 마침 그 때 곁에서 넷째 아들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아버지가 서방정토에 가실 것을 미리 아시고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서둘러 후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고 어머니께 임종시 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 지금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보고 마땅히 맑은 마음으로 염불에 전념하고 다른 일은 생가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경문은 대답하였다.
"몸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데 다만 밥을 먹기가 싫을 뿐이다."하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은 가볍게 움직이며 멈추지 않았다. 아들이 또 낮은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에,
"내가 말을 하지 않을 때에는 바로 손가락으로 염불 회수를 세며 장단을 맞추는 것이니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하였다.
둘째 아들 왕초환은 안동성 안동시에서 근무하였는데 후에 안동성 봉성현으로 직장을 옮겨 근무하였다. 팔월 29일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침실에 들어가니 홀연히 아버지가 곁에 와 있는 듯 감응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하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오늘밤 자시에 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이다."
왕초환이 깜짝 놀라 말했다.
"만약 그러시면 저는 아버지를 뵐 수 없고 아버님께서 왕생하시는 것도 배웅할 수가 없습니다."
왕경문은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넷째가 이미 집에 돌아와서 임종의 모든 후사를 그 애도 잘 알고 있으니 잘 처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미 서산의 너의 형 집에 와 있다. 이곳이 비교적 조용하고 좋다."
왕초환은 즉석에서 합장하고 염불을 하였다.
마음 속으로 서쪽을 향하여 말하였다.
"만약 저희 아버지께서 장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신다면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도와주십시오. 제발 우리 부자가 만나지 못하여 아버지 왕생하시는 것을 배웅하지 못하게 하지 마십시오."
또 순간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 같이 느꼈다.
"내일 너는 너의 넷째동생이 보낸 전보를 받을 것이다."
왕초환은 다시 말했다.
"내일 전보를 받으면 모레 오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니 아버님께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왕경문이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왕생하는 시간을 9월 2일 자시로 연기하여 너를 기다리겠다."
말을 마치고 왕경문은 나가는 듯 그곳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둘째 아들은 이튿날 정오에 과연 동생의 전보를 받았다. 이에 황급히 안동시로 돌아가려고 나섰으나 밤차가 없었다.
9월 1일에야 왕초한은 처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를 뵙고 "지금 느낌이 어떠시냐?"고 물었고 또 "여전히 평상시와 같이 염불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나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을 염하고 관하는 것을 잠시도 놓아본 적이 없다."하셨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고 묵묵히 염불하였다. 아들들이 서로 교대해 가면서 조념하였다.
밤이 깊어 자시가 되었다. 왕경문은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 단정히 앉아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면서 이어서 편안히 왕생하였다.
당시 그는 80세이었다. 그는 하루가 지나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듯 앉아있었다.
주석승 거사는 이름이 기(祺)이었다. 일찍이 제한(諦閑)법사께 귀의하고 법명을 현가(顯伽)라 하였다. 후에 또 인순대사께 귀의하여 법명을 지예(智睿)라 하였다.
오래 동안 경호철로(京扈鐵路)의 역장 등의 직에 근무하였다. 1922년 상해불교거사림을 발기하여 성립시켰으며 그 부림장(副林長)을 맡았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도반들과 불교제한회(佛敎濟寒會)을 조직하여 온 능력을 다하여 난민을 구제하였다. 기한(飢寒)ㆍ고고(孤苦)ㆍ질병(疾病)ㆍ빈곤(貧困) 등에 처한 대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사실을 조사하여 매월 일정액을 보조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삼보를 홍보하고 보호하고 기한과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었다. 말년에는 지나친 과로로 항상 병고에 시달렸다.
1942년 10월 8일 병세가 악화되자 영암산의 묘진(妙眞)화상이 특별히 거사림에 와서 상세하고 절실한 법문을 하였다. 스님은 주석승에게 만연(萬緣)을 모두 놓아버리고 정념을 들고 일심염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라고 당부하였다.
주석승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매우 기쁘고 감동하여 당부대로 봉행하겠다고 하였다. 10월 11일 진시(7~9시)에 아들이 그에게 마음속으로 염불하고 계시냐고 물었다. 주석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고 있지! 나의 마음은 벌써 서방정토에 가 있다. 염불은 정말 공치는 일이 없다.하며 붓을 들어
「애비는 벌서 서방정토에 가 있다[父早歸西].」라고 써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손에 든 염주를 계속 돌리며 입술을 딸싹딸싹 가볍게 움직이며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오시(午時)에 이르니 대중의 염불성 가운데 편안하고 상서롭게 왕생(安詳往生)하였다.
소혜안 거사는 원명이 치안(治安)이었다. 처음에는 이교(理敎)의 선천도(先天道)를 믿었다. 후에《인광대사가언록(印光大師嘉言錄)》을 얻어 본 후 비로소 삼보를 믿기 시작하였고, 인광대사께 귀의하여 일심염불하고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구하였다.
1942년 봄에 차를 타다가 잘못하여 넘어져 다쳤는데 100여일 가료 후 비로소 치유가 되었다. 9월 24일 자손(自遜)화상의 다비식에 걸어서 찾아가 관례하고 또 예불에도 참례하였는데 정신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와 심한 감기에 걸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염불만은 더욱 정진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그저 왕생을 빌었다.
10월 12일 스스로 때가 되었음을 알고 가솔들에게 조념염불을 해 달라고 하였다.
저녁 초경(저녁 7~9시)에 소혜안은
"지금이 몇 시냐?"고 물었다.
가족은 아무렇게나,
"곧 날이 밝을 겁니다!"하였다.
소혜안은 말하였다.
"나는 오늘밤 축시(새벽 1~3시)에 가련다."
말을 마치고 또 계속하여 염불하였다. 축시가 되었다.
또 말하였다.
"아미타불과 여러 성인들께서도 지금 내 앞에 계시고 자손대사님도 나를 맞이하러 오셨다. 나는 간다!"
하시고 이어서 소리를 높여 "나무아미타불"을 세번을 염하고 연후에 상서롭게 왕생하였다.
왕생한 후에도 얼굴은 생시와 같았다. 8시간 후에도 사지가 아직 부드럽고 몸은 차가웠으나 머리 정수리는 여전히 온기가 있었다.
양문란 거사는 법명이 이덕(怡德)이었고, 절강 오흥 사람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자상하셨으며 불교를 신봉하셨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아 품성이 인자하고 중생이익에 힘썼다. 또 정토법문을 정수(精修)하기를 30여 년 동안을 이어오고 있었다. 부인과 자녀들도 모두 인광대사께 귀의하였다.
1942년 여름이 되자 식사량이 줄어들며 정신이 쇠퇴하였다. 자녀들은 걱정이 되어 영암선사에 편지를 내서 부친을 위해 불칠(佛七)법회를 거행하되 아버지께서 만약 양수(陽壽)가 남았으면 병세가 빨리 쾌유되어 심신이 편안하게 되도록 하고, 만약 명이 다 되셨으면 직접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시도록 축원해 주시기를 부탁하였다.
10월 18일 아침에 일어나《아미타경》1권을 독송하였다. 염불이 끝난 후 홀연히 가족들에게 말하였다.
"사바세계는 고뇌무진(苦惱無盡)이라 나는 이만 서방정토로 가겠노라."하였다.
이어서 비구니스님과 도우(道友)들을 모셔 와서 조념을 부탁하였다. 가족들도 조를 나누어 대중들과 함께 염불을 하였다. 19일 사시(아침 9~11시)가 되자 대중의 조념염불소리 속에서 합장염불하며 편안하고 상서롭게 왕생하였다.
유시(오후 5~7시)까지도 머리가 따뜻했으며, 이튿날 염할 때도 시신은 부드러웠고 안색은 생시와 같았다.
역혜명 거사는 강소 남통 사람이었다. 평소 장사를 하였는데 점치는 미신에 미혹되어 있었다.
어느 날 호혜철거사의 권유로 채식과 염불을 시작하여 정토법문을 주력수행으로 삼았다.
후에는 스스로 《정토요의》란 책도 저술하여 정토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인광대사께 귀의하였다.
1933년에는 금사불교거사림의 발기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겨울에는 수계를 받았으며 거사림에 거주하면서 정토에 주력하며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방생ㆍ보시ㆍ인경ㆍ조성ㆍ불상 등 좋은 일에는 반드시 기꺼이 희사하였으며 주머니를 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42년 11월 1일 아침예불을 마치고 홀연히 두통을 느끼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에 호혜철 거사에게 합장하며 말하였다.
"모레 신시(3~5시)에 저는 서방정토로 가려합니다. 거사림의 연우(蓮友: 정토수행하는 도반)들을 모셔 오셔서 저의 왕생을 좀 도와주십시오."하였다.
예정한 시간이 되자 거사림 연우들도 도착하여 염불을 하니 그도 대중을 따라 열심히 염불하였다. 신시가 되자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단정히 정좌하고 앉아 왕생하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머리는 따뜻하였으며, 오후 7시가 되어 입관할 때에도 몸이 부드러웠고, 얼굴은 생시와 같이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당시 그는 75세이었다.
첫댓글 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이 글을 읽는 자체만으로 정토의 씨앗을 심은것입니다 아미타불
발심 또 발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