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은 사망
<비밀은 없다>(이경미, 스릴러, 청소년관람불가, 2016)
스릴러는 심리를 이용하여 극의 효과를 나타내는 장르다. 보는 자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고 때로는 착시를 일으켜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장르영화의 성공 여부는 영화가 관객의 집중과 분산 그리고 충격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있다. 이야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길 정도로 관객은 충분히 설득되어 있어야 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마지막 순간에 충격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장르영화를 통해 기대하는 것이다. 속으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이런 면에서 <비밀은 없다>는 스릴러다. 영화 속 정치이야기는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한 맥거핀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치열한 선거전에서 벌어질 만한 정치 이야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오직 딸을 잃은 엄마에게 나타나는 심리의 변화를 파헤치며 관객을 충격적인 반전으로 이끌어 간다. 사건의 진행을 연홍(손예진)의 심리적인 변화를 통해 보여주려 했고, 또 그것을 보고 관객이 스스로 감지하기를 기대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설명이 많이 생략되어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이해가 안 되었지만, 이것은 말이 아니라 보게 했다는 점에서 영화적인 특성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라 생각한다. 특히 흥행 보증 수표인 여배우 손예진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가 관객에게 얼마나 수용되느냐가 흥행의 관건이겠다.
영화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다. 비밀은 드러나기 전까지는 결코 비밀이 아니다. 감추려는 의지가 작용하는 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밀은 오직 어떤 단서 때문에 존재의 흔적을 느낄 뿐이며 그전까지는 결코 존재조차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 단서 없이 비밀을 밝히는 일은 불가능하며, 단서를 바탕으로 그것을 밝히는 과정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숨기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강력한 의지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비밀이란 게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일 수 있지만, 메가톤급 TNT 효과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가 누구의 비밀을 다루고 또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는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지만, 영화는 비밀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비밀이 드러나는 과정을 추적한다. 감독은 여러 사람들의 비밀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어떤 현상들을 유발하지만, 그동안 꼭꼭 숨겨져 있던 것들이 결국 딸의 죽음을 계기로 모두 폭로되는 과정을 스릴러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제목을 <비밀은 없다>고 한 것이리라.
비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 내용은 이렇다. 세대교체를 외치며 대구지역에 출마한 젊은 정치인의 딸이 국회의원 선거전 첫날에 사라졌다. 이 사건을 두고 정치인으로서 아버지와 엄마의 반응은 다르다. 남편 종찬(김주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혹시라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며 노심초사한다. 딸의 가출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종찬의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인 연홍의 생각은 달랐다. 경찰마저도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자 직접 딸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유괴라면 돈을 요구했을 것인데, 그런 요구도 없었다는 점에서 연홍은 돈을 노린 사건이 아니라 정치적인 음모로 추정한다. 게다가 상대편 후보자 캠프를 의심할 만한 단서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과연 정치적인 음모일까? 딸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무관심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마침내 광기로까지 변하는 심리적인 과정은 연홍의 외모와 의상을 통해 표현되었는데, 관객은 이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연홍의 심리적인 변화과정을 시각적으로 연출했다는 점에서 영화적인 특성을 제대로 살렸다고 생각한다.
딸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관객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영화는 딸의 친구인 미옥에 대한 의심을 불필요할 정도로 증폭시킨다. 그동안 딸에 관해 몰랐던 사실들을 학교 담임과 미옥을 통해 전해듣는데, 무엇보다 학교에서 왕따였다는 사실, 그리고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면서 연홍은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동안 엄마로서 딸에 관해 아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 연홍은 그녀의 메모와 이 메일에 담긴 비밀을 풀면서 딸의 주변으로 관심을 확장해 나간다. 딸의 학교 친구 미옥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는 확신이 들 때에, 딸은 시신 상태로 발견된다. 누가 왜 죽였을까? 반대편 정치적인 음모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다. 왜냐하면 오히려 딸의 죽음을 통해 종찬의 지지율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구의 짓일까?
다소 아쉬운 점은 일련의 질문을 숙고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돈을 노린 유괴도 아니고, 정치적인 음모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딸이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묻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를 뒷받침 할 장면은 부족하고, 연홍은 다만 딸의 컴퓨터에서 단서를 발견하고 접근해갈 뿐이다. 딸의 담임과 친구 미옥 사이를 오가면서 연홍은 딸의 죽음에 얽혀 있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이하 치명적인 스포일러 있음)
이즈음에서 영화의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종찬은 딸의 담임과 불륜의 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들의 성관계 장면을 녹화한 딸과 미옥은 영상을 가지고 담임을 위협한다. 처음에는 학교 시험지를 유출하도록 요구하지만, 나중에는 공연을 위해 필요한 돈을 요구한다. 담임은 처음에는 숨기고 있다가 결국 많은 돈을 요구하자 사실을 종찬에게 밝힌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위협을 받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종찬은 흥신소에 이 일 처리를 위임하고, 결국 딸은 살해를 당한다. 이 장면을 목격한 미옥은 흥신소 직원을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한 후에 거리에 방치해두고, 다만 죽은 친구만을 야산에 매장한다. 결국 시신이 발견되자 연홍은 미옥을 의심하고, 마침내 딸의 일기장에서 딸과 미옥만의 비밀장소를 찾아내고 또 그곳에서 많은 돈을 발견한다. 미옥을 추궁하여 얻어낸 단서로 연홍은 동영상으로 위협한 사람을 죽이도록 지시한 자와 연락하는데, 그날은 마침 선거일이었다. 아침상을 푸짐하게 차려주면서 승리를 기원하며 아내로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눈 연홍은 약속 장소에 나온 사람을 살해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딸인 줄 모르고 지시했다가 결국 본인이 변을 당한 셈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죄를 회개하지 않고 다만 죄의 결과만 피하려 한다면, 결국 사망에 이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