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5
초등학교 4학년 때 오촌 당숙의 아버님 제삿날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상가(喪家)에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저하고 형한테 당신 대신 기제사에 참석하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형은
5학년이었습니다. 오촌 당숙네 집은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 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인 저녁 나절에 갔다가,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밤길을 밟아 돌아와야 하는 일정입니다. 언뜻 캄캄한 밤길을 10리나 걸어와야 한다는 점이 무섭기는 하지만 싫다는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과 저는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여름이라서 해는 한참 남아 있었고 오랜만에 육촌 동생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의 설렘을 안고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신작로를 걷다가 땀이
나면 미루나무에 등을 기대어 쉬기도 하면서 큰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개를 넘어가자 공동묘지가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묘지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흐드러지게 서 있는 망초꽃 사이에 한 무더기씩 서 있는 노란색 원추리에 곰취 꽃이며 연분홍 비비추만
보였습니다.
노을을 등에 업고 오촌 당숙네에 도착했을 때 같은
동네에 사시는 친척 어른들도 오셨습니다. 저희는 아버지가 시키신 대로 큰절을 하고, 아버지가 오실 수 없었던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친척
어른들은 이제 열한두 살 먹은 형제가 10리 길을 걸어 제사를 지내러 온 것을 보고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정지에서는 오촌 당숙모가 친척 아주머니들과 제사준비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남의 제삿집에서 밤 놓으라 감 내놓으라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마다 제사 지내는 가풍이 다르니까 참견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저희 집안에서는 자정이 넘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에는 면소재지를 제외하고는 전등불이 들어가는 동네가 없었습니다. 오촌 당숙네도 등잔불을 사용했습니다. 등잔불을 가운데 두고 육촌
동생들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시나브로 잠이 들었습니다.
제사 준비를 끝낸 오촌당숙이 흔들어 깨울 때는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겁습니다. 그래도 제사는 지내야 하니까 밖에 나가서 흐르는 계곡물에 고양이 세수를 합니다. 방안에는 이미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고, 두루마기를 입으신 친척어른들은 제사상을 차리고 계십니다.
제사 음식을 먹을 때는 집에 갈 때 무서움을 타지
않는다며 제사상에 올려놓았던 물(헌다)을 마시게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귀신이 마셨던 물이라서 무서움을 안 탄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음식을 배부르게 먹었지만 갈 길이 구만리입니다.
친척 어른들이 가로등 하나 없는 동네 어귀까지라도 배웅을 해주셨으면 좋은데 사립문 앞에서 "조심히들 가라" 는 말씀만 하시고 돌아서십니다.
짓궂은 친척 어른은 한술 더 떠서 "공동묘지 앞을 지나갈 때는 처녀귀신에게 붙들려 가지 않도록 조심해라."라고 겁까지
주셨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반짝이지만 길은 캄캄합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형제는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요즘에야 시청각이 발달해서 유치원생들도 대중가요 몇 마디쯤은 합니다. 그
시절에는 음악 시간에 배우지 않은 노래라고는 ‘백마부대’ 라든지 ‘맹호부대’ 등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함께 배운 월남파병부대 노래가
전부였습니다.
열한두 살 먹은 어린 학생들이 손전등도 없이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라고 목소리 높여 부르며 밤길을 걸었던 것을 생각하면 왜 전 정권에서 역사 교과서를 바꾸려고 안간힘을 썼는지가 잘
이해가 됩니 다.
낮에도 공동묘지가 보이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도
묘지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묘지보다는 꽃들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밤에는 묘지가 보이지 않는데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하니까 땀으로 셔츠가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제 다 컸구먼’하시며 반겨주는 어머니 말씀 한마디에 무서웠던 시간들이 하얗게
녹아들었습니다.
요즈음 농촌 지역의 초등학교에는 통학버스가 학생들을
등하교시킵니다. 학교가 있는 지역 학생들도 웬만한 가정에서는 학교 앞까지 자동차로 태워다 줍니다. 도시는 고사하고 농촌 학생들까지 자동차로
등하교를 하다 보니 요즈음 초등학생들은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안 합니다. 만약 부모님이 먼 거리에 심부름이라도 시킨다면 비약해서 한는
말로, "내 부모가 맞느냐고"의심까지 할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대한 대부분의 추억은 등하굣길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미국처럼 치안이 안 좋은 나라도 아닌데 등하굣길을 걸어서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어른들이 자식들의 추억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추억을 줄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식에게 의타심을 심어주는 결과가 됩니다.
요즈음 군대에서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우는 장병들도
있다고 합니다.
직장 상사에게 하루 휴가를 내겠다는 말을 어머니가
대신해 주기도 합니다. 심지어 여자친구를 만나 무엇을 먹을까 어머니에게 물어보거나,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답니다. 나중에는 대신 결혼해
달라는 자식들이 안생긴다는 보장은 없을 겁니다.
첫댓글 동감입니다.공동묘지는 기피대상 1호였고 상여집 옆을 비올때지날때는 머리가 쫑긋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