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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 4] 곰과 용.봉황이 신상(神像)으로 등장하게 된 동기는
사자(死者)의 환생을 기원하는 염원이었다.
개주시 석붕촌에는 고조선 묘제인 석붕산 고인돌 유적이 있다.
규모가 동양에서는 최대여서 천제를 올리던 장소로도 추정이 되는 곳이다.
왜 규모가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고인돌 유적이 개주의 석붕산에 있었을까?
소위 단군신화에서 웅녀설화로 등장하는 곰과 범의 상징인 곰바위와 범바위가 실재로 오늘날까지도
웅악성 주변에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곰보다 힘이 훨씬 강한 범은 인내력 시험에서 탈락하여 인간으로의
변신에 실패하였고, 곰은 21일을 쑥과 마늘로 버텨 환골탈퇴에 성공하여 조선족의 모계로 선택받게
된다는 설이다.
이때 시험을 받던 장소가 어두운 동굴이었다. 이후로 곰은 수개월을 먹지 않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 받은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굴 안에서 바깥 활동을 멈추고 동면해야만 가능한 것 이었다.
그렇게 하여 불사의 사신으로 등장하던 곰의 장끼(長伎)는 장기간의 동면 이었다.
살아있는 동물로서 수개월을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하며 긴 동면에서 깨어나면 다시 활동을 재개
하는 동물은 몇 종류가 더 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신이 만만하던 인간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곰의 놀라운 환생 능력에 그들을 숭배하게 되었고,
인간이 죽었을때 곰처럼 환생하기 위해서 곰의 동면 생활을 모방 한것으로 추정 된다.
따라서 사람의 장묘 형태를 곰의 동굴같은 고인돌 무덤으로 만들고 마치 곰이 동면하는 모습으로
시신을 앉은 자세로 묻고 곰처럼 환생하기를 시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매장의 형태도 바뀌고 음양 오행설이 발전하면서 적석총과 피라밋형등의
고분의 형태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곰,용, 봉황등의 형상을 옥으로 조각 하여 제단에 안치하고 또한 환생을 빌었다.
웅악성에는 가장큰 곰바위가 있고 석붕산에는 가장 큰 고인돌이 있다.
당시 백성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그곳에 제단을 꾸미고 하늘에 정성을 다하여 제를 올렸다.
이러한 행위를 '샤먼'이라고 하였던가?
이무렵부터 태초로 부터 세상에서 동면을 하는 동물들의 생명체는 거의가 인간들로 부터 숭배를 받아
왔다.
그 중에는 뱀의 화신인 용이 있었고, 개구리류의 대표인 맹꽁이가 있었다.
달속에 들어있는 맹꽁이는 동면을 할 뿐만 아니라 소리로서 비를 부르는 재주가 있어 달속에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달속에는 또 하나 눈이 빨가서 단약의 대명사가 된 토끼가 있다.
용이 물의 화신으로 생명체의 절대적 구성 요소라면 그래서 봄비를 상징하는 사방신(四方神)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봉황은 태양을 부르는 닭의 화신으로 역시 생명체 구성요소중의 불을 상징하고
용과 더불어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철 훈풍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대문명의 발상지가 요동반도의 서쪽 소요수와 비류수가 흐르던 웅악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것이다. 그곳에는 곰과 범의 상징물인 자연바위가 있기때문이다.
윤명철교수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요동지역의 고인돌 유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묘제의 보존과 계승이 동일한 집단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형식과 기능 분포범위의 유사성은 집단의 계승성을 입증하는데 유효성이 있다.
역시 다양한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고조선의 기본적인 무덤양식은 지석묘이며, 고구려 전기의
기본적인 양식은 적석묘이다.
고인돌은 기원문제와는 별도로 고조선의 전 영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요동지역에는 남단 개주시 석붕산(盖州市의 石棚山) 고인돌을 비롯하여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인돌이
약 100여기가 존재하고 있다.
현재의 남만주 일대 고구려의 중심영역에서도 고인돌은 많이 발견되고 있다.
<통화현 문물지>(<通化縣文物誌>)의 소개에는 고구려 이전의 청동기시대 묘장인 입병석붕(砬縫石棚)
과 서강묘지(西江墓地) 두 곳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단군께서 제단을 쌓고 천제를 올리던 기록이다.
개주 석붕산 고인돌 유적이 천제단 이었다면 충분한 계연성이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는 개주의 남쪽으로 흐르는 속말수(마자수)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천제를
올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제왕 연대기》는 천제를 올리던 제단을 강화도 마니산이라고 주석 하였으나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개주의 남쪽으로 기록하고 있다.
《규원사화》의 <단군기>에서 추출한 기록이다.
개주의 니하가 속말수요 패수였음을 알지 못할때 기록된 것이지만 고대 사서에서는 흔이 찾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다.
요동의 압록강이 패수가 되는 이치를 몰랐던 시대에 기록된 이와같은 《규원사화》를 위서로 몰아
불신을 조장했던 지금까지의 행위들은 하루속히 시정이 되어야 할것이다.
이기록은 단군께서 도읍을 여신후 네번째 이동한것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패수의 북쪽이란 개주가 된다.
또한 기록중에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에서 제일
크다는 석붕산 고인돌은 개주시 이대자농장의 석붕촌 남쪽에 있다.
훗날 고운사라는 절로 흡수 되었지만 여전히 제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檀君旣祭天而立敎率民, 而致道化行數年, 率土之民, 皆洽其化, 陶鈞停毒, 無爲而治, 此檀君神德之所
致也, 乃立國之本也. 後可續述焉.]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통솔하며 도를 궁구하여 교화를 행한 지 수년만에
강토의 백성에게 모두 교화가 두루 미치니,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모든 악독함이 사라지는 등 행함이
없이도 잘 다스려졌으며, 이는 단군의 신령스러운 덕의 소치로서 곧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壤卽第二(王)[壬]儉城也. 盖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 府地, 神州是也. 高句麗.國內 桓都
古城之址, 在其境內焉.] 則浿水之非獨爲今之大同江, 明矣.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만에 백산(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이라 하니 곧 두번째의 임금성이다.
대저 속말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게다가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기에 남쪽으로의 교통에는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었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이유일 것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단씨(檀氏)의 치세 때 모두 네차례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는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 곳이다.
고구려의 국내성 및 환도성(桓都城)의 옛 성터가 그 경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帝王年代歷》 〈崔致遠 編著〉
檀君紀 檀君
甲子十月三日誕降, 戊辰十月三日卽位, 庚子三月十五日昇遐. 在位九十三年, 壽二百七十年.
갑자년 10월 3일 탄강하셨으며, 무진년 10월 3일 제위에 오르시고, 경자년 3월 15일 승하하셨다.
제위에 있으신지 93년이요 향년이 270년이다.
戊辰,[1] 國人推戴神人爲君, 定國號曰檀,[2] 頒敎令,[3] 設壇祭天.[4]
무진년에 나라 사람들이 신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나라의 이름을 ‘단’이라 정하고 교령을 반포하였
으며,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를 올렸다.
[1] 唐堯二十五年.
[2] 上古有桓因時代, 桓雄時代, 稱神市氏. 上元甲子, 有神人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檀木下, 設神敎化, 民歸者如市.
戊辰十月, 團衆推戴爲壬儉, 國號曰檀. 是爲檀君始敎, 以男女?父子?君臣之道, 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命彭吳
治國內山川, 開通險夷, 以奠民居. 娶河伯之女爲后, 生四子: 曰扶婁, 曰扶虞, 曰扶蘇, 曰扶餘. 民有疾病, 命扶虞以醫藥
治之; 山多猛獸, 命扶蘇以火獵攘之; 契兪作亂, 命扶餘討平之; 命神誌掌書契, 命高矢治田事, 以余守己爲濊君長, 以緋
天生爲南海長, 分掌諸郡.
[3] 渤海.天統, 注贊《三一神誥》, 卽此也.
[4] 江華.摩尼山.
다음은 예맥족과 고구려족의 관계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다.
2007년 5월 3일~4일에 열린 고구려 연구회와 경성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국제
학술토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 중국학계의 고구려 기원에 대한 논의
[중국학계에서 고구려 관련문제 중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가장 활발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부분이
바로 고구려의 기원 문제이다.
고구려 족원에 대한 중국학계의 전통적인 견해는 예맥설과 부여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찍이 동북역사학자인 金疏黻이 東北通史에서 “고구려는 동북 예맥족계로부터 기원한다”고 주장하
면서 고구려의 기원연구에 서문을 열었고 이러한 견해는 이후 중국학자들에게 계속 견지되어 왔다.
고구려가 예맥으로부터 기원한다는 ‘濊貊說’의 대표적인 학자는 장박천, 손진기, 동동, 손옥량, 이전복,
이종운 등으로 이들은 대부분 한서「왕망전」, 후한서「동이전」, 후한서「광무제기」, 삼국지「동이전」 등에
보이는 예, 맥, 예맥, 소수맥에 관련 기록을 ‘예맥설’의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 손진기(孫進己)는 “고구려의 족원에는 맥인(貊人) 뿐만 아니라 예인(濊人)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
고 하였으며 佟冬은 “고구려는 예맥의 한 지파로서 혼강과 압록강 유역에 주로 분포한다”고 하여
고구려는 예맥의 후예라고 하였다.
* 이전복(李殿福)은 고고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고구려가 ‘맥족’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혼강(“渾江) 중류와 압록강 중류 일대에는 맥인들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삼족기(三足器)나 정격(鼎鬲)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현재 혼강과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발견되는 (고구려)五部문화의 면모는 아직 금석병용단계인 청동기 문화의 면모를 보인다.
문화적 면모를 보여주는 주된 표지인 도기는 대구고복관(大口鼓腹罐), 소구옹( 小口瓮), 발(鉢), 두(豆)가
주이며 정(鼎)과 격(鬲) 등은 보이지 않는다.
도기의 손잡이로 말하자면 다환상수이, 교상이'유상이 (多環狀竪耳, 橋狀耳, 瘤狀耳)가 많은데 이러한
손잡이들은 이후 고구려 문화에 계승되었다”고 하면서 고구려 민족의 주요한 원류는 혼강과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생활하던 맥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악은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여 부여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광개토대왕비문과 모두루 묘지명의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출자(出自)했다는 기록과 논형.후한서,
삼국지. 위서,양서등 16개 사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들 사서들이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증명
한다고 주장하였다.
*왕건군(王健群)은 고구려를 예맥족으로 보는 것은 사료를 잘못 이해하는 데에서 오는 착오라고 하면
서 “고구려인은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여 부여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부여를 숙신계통의 퉁그스 즉 후대의 여진족으로 보아 고구려를 숙신계통으로 파악하고
고구려와 여진을 동일족속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반 부여설과는 차이를 지닌다.
1990년대 들면서 예맥설, 부여설 외에 고이설, 상인설, 염제설, 다원설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면서
고구려의 족원문제는 어느 때 보다도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고이설' ‘高夷說’은 《일주서》<왕회>逸周書「王會」篇에 보이는'성주대회'( ‘成周大會’)에 참석했던'고이
( ‘高夷’)에 대해 진(晉)나라의 공요(孔晁)가 "동북이"(“東北夷)로서 고구려이다”라고 주를 달면서 제기
되었다.
고이(高夷)를 고구려로 볼 경우 고구려의 존속연대를 기원전 11세기까지 소급해서 볼수 있다는 점 때문
에 고이설은 중국학계에서도 찬반 양론이 대립되고 있다.
일부학자들은 고이(‘高夷)’라는 명칭이 일주서(逸周書)에만 유일하게 등장한다는 점, 공요(孔晁)가 고구
려와 동시대인이기 때문에 고(‘高)’자를 가진 고이( 高夷)를 고구려와 같은 족속으로 유추했을 가능성,
고구려의 명칭은 원래 “구려”였기 때문에 고이와 관련이 없다는 점과 공요(孔晁)의 주석에 탈락과 오류
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고이설( ‘高夷說)’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고이설(高夷說)의 대표적인 학자인 왕면후(王綿厚)는 공요(孔晁)가 생존했던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에 웅거했던 전성기였다고 하는 점을 들어 당대 사가(史家)들의 그 시대에 존재했던 민족에 대한
주해(注解)는 권위와 실증성에서 근거가 있는 것이기에 쉽게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규원사화》와 《제왕연대기》그리고 현대의 중국학자들을 통한 예맥문화의 발상지를 추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일부에서 위서로 비판받고 있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어떨까.
고준환 박사의 《하나되는 한국사》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
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
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
(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실증 5] 용봉문화(龍鳳文化)와 진국(辰國)의 발흥지
개주에 있는 용산(龍山)과 취암(鷲巖)(구글 검색)
해주 남해군
海州 南海軍 節度, 本 沃沮國地, 髙麗 為 沙卑城, 唐李世勣 嘗攻焉. 渤海 號 南京南海府, 疊石 為 城, 幅員
九里, 都督 沃晴椒 三州, 故縣六, 沃沮 鷲巖. 龍山. 濵海. 昇平 .靈泉, 皆廢. <요사 지리지>
사해지역 출토 옥제 용조각품 (중국에서 제일 오래된 용조각품으로 인정됨)
사진설명: 이 그림중에는 두가지의 중요한 상징물이 있다. 우선 목을 길게 내밀고 있는 용바위에 대해서
알아 보도록한다.
이 짐승이 용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이곳의 지명이 용산인 관계로 일단 용으로 보기로한다.
그런데 왜 용바위를 자꾸만 보여주는가? 진국이란 이름이 이 용바위에 뿌리를 두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번째사진: 사해문화(査海文化) 부신시 몽골족 자치현 사랍향(沙拉鄕) 사해촌(査海村)서남쪽 5리지점,
서요하 지역 출토 옥룡 (기원전 3500~3000) 크기 26센티.
출토물 중 중국에서 제일 오래 된 용 조각품. 이외에도 돌무더기로 만들어진 용도 발견되었는데 길이가
19,7미터로서 하남성 서수파(西水波)에서 발견된 석룡 1,78미터나 호북 황매 백호향 진촌에서 발견된
석룡, 4,46미터보다 월등하게 크다. 사해의 석룡은 시기와 크기에서 중국 최고의 용임을 자랑한다.
다음은 통설 고조선에 해당되는 진국(辰國)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분야의 학설을 취합한 다양한
글들이다.
사적(史籍)의 기록상에 고조선과 삼한의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그 정체가 뚜렷하지 못한것이 사실이었던
진국(辰國)을 중국의 사학자 전백찬은 진국이 동이족의 중심이었다고 하고 있다.
앞서 웅악성을 근거지로 하는 예맥조선의 실체를 밝혀 보았기에 이번에도 역시 근접 지역에서 발흥한것
으로 추정이 되는 진국에 대한 근원을 공부하기로 한다.
* 다음은 중국의 역사학자 임혜상의 글이다.
[고조선의 위치가 어디었을까 이설이 자못 많다.
강양부는 조선은 본시 은 민족이니 그러므로 그분포지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 당시는 요동조선 반도였을 것이다. 혹자는 그때 아직 깊은 바다가 이루어 지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교통로가 반드시 산해관 일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夏段氏度考)
여사면은 "조선국의 최초의 위치는 오늘날의 조선의 경토에 있지 아니하였다."한다.
대관하면 그 당시에 조선은 연나라 북방에 위치하여 맥과 더불어 잡거하되 맥지를 국토로 하고 맥족을
민으로 하였던것 같다. 맥족의 문화는 은과 대동하다.
기씨가 나라를 가진 이래 점차 은 문명의 영향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中國民族史 上 87面)
[古朝鮮之地何在 頗有異說. 姜亮夫以爲朝鮮本殷氏族族的分布之地...以當時的遼東朝鮮半島.
或者還未成深洋共交通的道路不必起程乎山海關一帶. (夏殷氏度考) 이하 원문 생략
이 지도는 우리가 요구하는 역사적인 지명들이 비교적 많이 소개된 사료역활을 한다. 요동반도의 서쪽으로
웅악성과 용산이 있는 개평이 있고, 한나라의 섭하가 비왕 장을 살해하고 패수를 건너 도망하였던 임유관이
산해관 자리에 있다. 그리고 수중현에 고려하(高麗河)가 있다.
특히 눈여겨 볼곳은 요동만의 윤몰지역의 표시다. 바다의 색깔을 백색 횡선으로 표시한 부분은 평야가
윤몰되어 그위로 다시 토사가 쌓이는 부분이라고 《갈석고(碣石考)》는 설명하고 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학자들에 의해서 윤몰토층이 확인되었고, 그곳의 표시를 지도를 통하여 구분하도록
공인한것이다.
지도에 보이는 해변으로 빨간점으로 표시된 부분이 대부분 윤몰된 지역이다.
황색선으로 그어진 화살표 방향이 예맥,용봉문화가 이동한 부분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백색선 안으로 소요수, 비류수, 졸본,서안평,비사성,만번한,패수,장구진,어니하, 요택등이 있었으나 윤몰
되었고, 수중현의 고려하구 방향은 대요수와 대능하,소능하,백랑수등이 합수되는 육주하가 흘러 난하와
합수되어 바다로 들어가는 패수(浿水)가 있었다고 추정이 된다.
용(龍)의 기본도상(基本圖像)은 환인(桓仁)의 분수령에서 모방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용문화의 상징인 그림을 두고 중국은 난처한 곤경에 빠져있다.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자기들은 용의 자손이라고 자존심을 세워왔는데 난데없이 옛날 국경밖인 변방에서
자꾸만 용의 형상들이 발굴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국의 중원땅에서 발굴된것보다 적어도 수백년에서
천여년이나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던 요서지방의 홍산유적이나 요동지방의 사해유적에서 발굴되고 있으니
변명할 여지를 찾지못하여 아예 자기들 조상의 역사를 바꾸는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고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용의 기본도상은 어디서 모방하여 온 것일까.
그것은 요동반도의 봉황산 동쪽에 있는 환인의 분수령이었다.
봉황산의 서쪽엔 봉황성이 있고 봉황성은 과거에 고구려가 경주로 불렀고,그 후로 당나라,요나라.신라.
발해.금나라.명나라를 거쳐 태봉국.고려때는 개주성으로서 신라가 동주 낙랑부라 불렀고,고려가 동경으로
부르던 곳이다.
이후 개주성은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으로 부터 왕위를 양위받은 이성계(단)는 개주성을 한반도의 경기도로
옮겨갔다.환인은 바로 이 개주성의 동쪽에서 조금 떨어진곳에 있는것이다.
대원사입구의 벽화'용'은 다음에 소개되는 분수령의 용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지도로 보는 환인수고의 용트림 상형
인공위성으로 확인된 분수령 환인 수고. 번호를 단곳은 물들이 동서남북으로 갈라지는 표시다.
이렇게 갈라진 물들은 요동조선의 전체로 흘러서 생명수 역활을 한다.
[실증 6] 중국 하남 박물원에 소개된 “동이문화와 봉황”
천손족들에게 봉황문화는 무엇인가.봉황은 바로 태양을 상징하고 광명을 상징하는 토템이었다.
따라서 발해바다에 거대한 불덩이로 떠오르던 태양은 바로 살아 움직이는 신이었다.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태양을 신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갈 자신이 있었겠는가.
중국학자의 주장을 통해서 봉황과 동이문화의 진상을 알아 본다.
하남성 개봉시에 위치함(1927년 개원)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동이인(東夷人)은 중화민족 조상의 주요한 줄기부분(主幹)이다.(东夷人是中华民族先民的主干部分)
원문번역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동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복희(伏羲)에서 하상(夏商) 2대까지 동이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
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 문자를 창조했으며,
- 청동기를 제작하고,
- 철을 단련했으며,
-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동이족이 중화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위하여 주된 역할과 결정적 작용을 하여 화하문명(華夏文明)은
용봉(龍鳳)이 융합되어(화하족의 용과 동이족의 봉문화가 융합되어)공동으로 창조된 것이다.
봉황목각성상도(鳳凰木刻星象圖) 서한천상도(西漢天象圖) 남경박물원 소장
홍산출토 옥봉(玉鳳)
(출전;九山, 일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