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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 11] 삼신산에서 청구로 옮겨진 신시는 산동반도를 발판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먼저 신시의 본거지였던 삼신산을 재확인한다.
치우 이후로 신시의 영역은 산동반도 전역으로 확장되었고,수많은 전쟁을 거치는동안 민족이 분열하며
화하족과 동이족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전쟁말기에 전욱고양씨는 산동반도에서 신시본토(장도)로
후퇴하여 새로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여기서 전욱고양씨가 돌아갔던 신시가 어딘가를 두고 이견이 많았다.
그것은 최초 신시의 건국지를 백두산이라고 하는 고서들의 기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원명대로 삼신산으로 찾았다면 문제는 훨씬 빨리 해결되었을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실증 2]를 통해서 요점을 밝힌바 있다.
그리고 백두산의 실재 이름은 백산.밝산.태백산.장백산.백두산 개마대산등 여러가지로 불려왔다는
사실을 깊게 연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실제로 백두산이란 이름은 밝은 산이란 뜻으로 발해바다와 관련이 깊은 현 장도에서 연유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명은 물이 흐르는 평지에서 일어난다는 생존의 절대조건을 필요로 한다면 한반도의 백두산은 신비
하기는 할 지언정 신시나 고조선이 도읍하기는 부적합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고조선의 건국지는 고 평양(故平壤)이라는 사료가 존재하는 한 신시가 백두산일 수 는 없는것
이었다.
반면 고 평양성(故平壤城)이 있던 장도(長島)는 요하.대능하.난하.상건하.황하등의 대수들이 발해로
모여 황해로 흐르던 입해구에 있었다.
현 등주에서 북쪽으로 떨어져있는 연태시 소속의 섬이다.
지정학적으로 심양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묘도열도까지 이어졌던 산맥이 장백산맥이라고 산동고고록
의《산동총도》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산맥은 지진으로 부분부분이 가라앉고 남은 부분이 섬이 되었다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은 기록하고있다.
이 산의 별칭은 삼신산으로 삼신문화의 발상지었지만 그동안 사학계에서는 신화속의 산으로만 인식할
뿐 별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중국당국은 한국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한국의 사학자들 또한 별 관심이 없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따라서 삼산산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않는 역사의 사각지대에 놓여지게 되었고,자연히 신시와 고조선의
발상지도 격리된 체 숨겨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당국은 2009년 11월까지 한국인들의 장도출입을 통제하여 답사활동을 금지시켰었다.
《속산동고고록》중<산동총도> (청)섭규수작(葉圭綏作)1850
묘됴열도의 여순(旅順) 남쪽으로부터 장도까지 연결되는 산맥을 성경(심양)으로 부터 내려온 장백산
(長白山)이라고 하였다(山脈自盛京長白山來).
이러한 표주는 《삼국유사》에서 신시의 발상지가 삼위태백산이란 기록을 증명해준다.
태백과 장백은 같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한반도 백두산은 고조선의 장백산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해상 삼선산이라는 표지석에서 필자. 뒤에 보이는 나무는 조경수로 무궁화를 심었다.
현대중국은 삼신산을 삼선산(三僊山)으로 표시한다.
그러면서 옆에 작은 글씨로 옛 삼신산이라고 부기를 하고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기》권 12 효무본기
入 海 求 蓬 萊 者 , 〔 一 〕 言 蓬 萊 不 遠 , 而 不
能 至 者, 殆 不 見 其 氣 。
上 乃 遣 望 氣 佐 侯 其 氣 云 。
바다안에 있는 '봉래'라는것은 멀지도 않지만 도착한 사람도 없고, 가까이서 그 기를 본 사람도 없다.
〔 一 〕 正 義 蓬 萊 、 方 丈 、 瀛 州 , 勃海 中 三 神 山 也 。
정의 에 봉래란, 방장,영주등 발해안에 있는 삼신산을 말한다.
〔 六 〕 天 下 名 山 八 , 而 三 在 蠻 夷 ,五 在 中 國 。 中 國 華 山 、 首 山 、 太 室 、 泰 山 、 東 萊 ,
此 五山 黃 帝 之 所 常 遊 , 與 神 會 。- 하략-
* 〔 六 〕 天 下 名 山 八 , 而 三 在 蠻 夷 ,五
在 中 國 。 中 國 華 山 、 首 山 、 太 室 、 泰 山 、 東 萊 ,
此 五山 黃 帝 之 所 常 遊 , 與 神 會 。
*천하에는 명산이 8개가
있는데 그중 세개는 만이(蠻夷)안에 있다.
중국에 있는 다섯개의 명산은 화산, 수산, 태실,태산, 동래등이고 이 다섯개의 산은 황제가 신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노닐던 곳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최대 욕망의
하나인 장수를 누릴수 있는곳은 봉래라는 삼신산인데 그 산은 그들이
만이라고 부르던 조선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 삼신산이 멀지 않은 발해안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곳이
조선이었다는 말씀이다. 장도를 말하는것이다.
만약에 한반도로 가정한다면 북으로 바다 건너라는 말이 당치 않고 요동반도라 하더라도 요동반도는
가까운곳이 될 수 없고, 발해안이라는 말이 당치 않다.
▶지금까지 한국의 어떤 사람들이 발해의 삼신산을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었던가.
이처럼 동방문화의 요람이었던 삼신산은 홍산이나 내륙의 백두산에 있었던게 아니라 발해해협의 바다에
있었다고 많은 사료들은 전하고 있다.
진시황이 그토록 건너기를 원하였지만 종래 건너기에 실패하였던 그 삼신산에 대한 자료들을 간략하게
소개드린다.
한무제가 삼신산을 모방하여 장안(長安)에 건설하였던 바로 그 삼신산은 어떤구조를 가지고 있었을까.
《사기(史記)·무제기(武帝紀)》에 기록하기를, "건장궁(建章宮)을 수축했는데 규모가 매우 크고 문호가
극히 많았다.
그 전전(前殿)은 미앙궁(未央宮)보다 높고 컸고, 그 동쪽은 봉궐(鳳闕)로 높이가 20여 장이요, 그 서쪽은
당중지(唐中池)로 빙둘러 수십리의 호랑이 우리(虎圈)요, 그 북쪽에 큰 못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점대
(漸臺)는 높이가 20여 장으로, 이 못을 이름하여 태액지(泰液池)라고 하였으며, 못 속에는 봉래(蓬萊)·
방장(方丈)·영주(瀛洲)·호량(壺梁) 등 네 신산(神山)이 있었고,
또 해중의
신산(神山)·해귀(海龜)·해어(海魚) 따위를 본딴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다시 《사기(史記)》·《한서(漢書)》는, 고대 발해(渤海) 연안의 인민들이 발해 안에서
일어나는 해시신루
(海市蜃樓: 신기루) 현상을 목도하였으나 그것의 과학적 생성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체 바다 속에 들었다가
비록 목적지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이러한 섬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기에 부인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바로 바다로 가서 신기루를 찾아 나섰다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섬을 발견하게 되었던것이다.
봉래해상에 정자들이 늘어선 모양, 이를 수유대사(須臾臺木+射)라고 불렀다
봉래(蓬萊) · 방장(方丈) · 영주(瀛洲) 이러한 이름으로 볼 때, 마땅히 고대 동래(東萊)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곳으로 생각된다.
왕헌당(王獻唐)의 유서(遺書)인 《염황씨족문화고(炎黃氏族文化考)》에서 지적하기를, "봉래(蓬萊)는 풍래
(風萊)와 같은 말로, 풍이(風夷) · 내이(萊夷)가 사는 지방이라고 하였다.
방장(方丈)의 방(方)은 풍(風)의 음전이요, 장(丈)은 곧 마당 장(場)자이니, 방장(方丈)은 곧 풍족(風族),
다시 말하면 내이(萊夷)가 사는 곳임을 말한다.
영주(瀛洲)의 영(瀛)은 영족(瀛族)이 살던 해중의 육지이다. 영(瀛)도 이(夷) 가운데 하나이다.
이(夷)란 동래(東萊)에 원래부터 있었던 부족이다.
《황현지(黃縣志)》에 말하기를, "황현(黃縣)은 요임금 때 우이(嵎夷)의 땅이다"라고 하였으니,
봉래 · 방장 · 영주는 모두 해중의 내이(萊夷)가 살던
해도였다.
[실증 12]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의전쟁전말
오제(五帝)에 대하여
오제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일치하는 설이 없지만 주로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그중 중국의 고대사서 《십팔사략》에서 나오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인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
고신,제요도당, 제순유우 등을 말한다..
소호금천((少昊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바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고 한다..
이 소호의 뒤를 이은 것은 전욱고양((顓頊高陽))으로,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다.
전욱고양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고 한다.
이 전욱 고양은 바로 조선(朝鮮)과 한민족(韓民族))의 우리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 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금천의 아들인 제곡고신(帝嚳高辛))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
제요도당과 제순유우는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삼황오제가 중국 신화 속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이들을 동이(東夷))나 한민족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삼황오제가 동이였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일부 존재한다.
중국의 사료 《고사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 복희, 제준(帝俊) 제곡 帝嚳). 제순(帝舜).소호(少昊) 그리고 설(契)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선조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고있는 상식이다.”
《고사변(古史辯)》]
이처럼 이 동이라는 존재를 모두 한민족(韓民族)으로 보는 역사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한민족(韓民族)이
속해 있는 동이는 한나라 이후의 동이이기 때문에,진(秦)나라 이전의 개념인 삼황오제의 동이 여부와
한민족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강단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우리민족의역사서《삼국사기》에는, 신라인과 가야인은 그 조상을 소호 금천씨라고 했고, 고구려인은 그
조상을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19代 廣開土王 17年 3月의 記錄에는 고구려가 고양씨(高陽氏)로부터
내려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十七年 春三月...
《염황씨족문화고(炎黃氏族文化考)》에서 염황씨(炎黃氏)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염제(炎帝) · 황제(黃帝)
를 이르는 말이요, 일반적으로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 함은 염제 황제의 자손, 즉 한민족(韓民族)을 일컫는
말이었다.
따라서 삼신산은 동이족의 발상지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들을 한민족(漢民族)으로 고쳐 기록하였다.
여기서 부터 민족계보의 왜곡이 시작되었던것이다.
우리는 중국역사상 전설시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란 말을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삼황(三皇)이라 함은 상고시대 부락 추장으로 그 명칭은 종류가 많은데, 어떤 때는 복희·신농·수인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복희·신농·여와라 하고 어떤 때는 천황·지황·태황이라 하고, 어떤 때는 복희·신농 · 황제라
하고, 어떤 때는 천황·지황·인황이라고 하는 등 4개의 조합으로 나뉘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일설에 의하면 염제(炎帝)는 신농씨(神農氏)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중화민국시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장개석 정부가 망하면서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활약했던 유명한 서량지(徐亮之)라는 사학자가 쓴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황제족은 부족연명시대에 동이로 스며 들어왔다(黃帝族在部族聯盟時代渗入東夷)」라고 정의하고, 그
근거로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는 황제(黃帝)의 증손이다.
고신(高辛)의 부는 교극(교極)이요, 교극(교極)의 부는 현효(玄嚣)요, 현효의 부는 황제(黃帝)이다.
현효와 교극은 모두 제위에 있지 않았으나 고신씨에 이르러 제위에 올랐다.
고신은 전욱(顓頊)의 족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곡(帝嚳)은 은상(殷商)의 시조라고 하였다.
(서량지,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화정서국, 256~259쪽 참조)
그러나《규원사화》<태시기>는 치우와 황제의 등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이미 오래되니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가면 갈수록 넓게 퍼졌다.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넓게 퍼질수록 덮고 입으며 마시고 먹는 일과 생전에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
지내는 일 등에서 모두 그 소비가 눈에 뛰게 늘었다.
이로서 처음에는 화락하기만 하다가 점차 다급하게 되어 가니, 무릇 다급하게 무엇을 구하고 찾다 보면
다투고 싸우는 순서를 어찌 밟지 않겠는가.
대저 유소씨나 수인씨는 서방의 임금이요, 신시씨와 치우씨는 동방의 임금과 신하이다.
세상을 다스리던 초기에는 각각 한쪽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땅의 구역이 사뭇 다르고 인가(人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다른이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까닭에 수렵하고
채벌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힘든 일이 없었다.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또한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어 바람은 널리 퍼지고 기온은 화창하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지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
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탁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중국이 한때는 치우천왕을 도깨비처럼 비하하여 그들의 조상임을 부인하더니 동북공정을 통하면서 홍산
문하가 밝혀지자 치우천왕을 다시 자기들의 조상으로 추겨새우고 탁록에 삼조당을 지어 삼황으로 모시고
있다.
치우천왕, 철을 발명해 철갑과 투구, 그리고 철제무기로 싸움의 신으로 통했다.
그러나 위의 그림과 비교하면 도깨비에서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3황제신, 왼쪽부터, 치우천황, 황제헌원, 염제신농씨이다.
치우가 완전히 중국황제로 편입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치우 대신에 복희씨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기 위해서
치우천황으로 교체한것이다.치우는 하가점 하층문화의 청동기문화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남성 정주시에 조성한 염황이제(炎黃二帝)조각상은 건설에 20년이 걸렸다.
당시까지는 중국의 선조는 염제와 황제 두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북방의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중국은 동방의 치우천왕을 중국의 시조로 추인하는 공작을 벌이고
있는것이다.
유교를 국교로 숭상하며 세게의 문화대국이라고 자칭하던 그들이 5000년동안이나 자기들 조상조차 몰랐
다면 누가 그들을 문화민족이라고 인정하겠는가.
홍산문화가 중원의 문화보다 훨씬 앞섰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들은 조상관마져 바꾸고있다.
↑위에서 계속
이때에 유망이 소호(少顥)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
켰다.
《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
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때에 헌원(軒轅)이란 자가
있어 유망은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치니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 )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함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패하였다.
《운급헌원기(雲 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
지고 또한 염제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
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
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 鄕城)
안에 있다 하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달라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
《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
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
하다.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
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고 단군이 또 다시 나라를 일으킨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또한 이치에 가까우나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서기전2383년경에 이르자 황제헌원의 나라인 유웅국(有熊國)에 제곡고신씨의 아들 요(堯)가
출현하였고, 서기전2357년 갑진년에 요(堯)가 이복형제이던 유웅국의 왕 제지(帝摯)를 쳐서
천자자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요임금은 서기전2401년 출생으로서 단군왕검보다 31세가 많았으며, 서기전2383년경에 도(陶)라는 땅에
봉해지고, 45세이던 서기전2357년에는 제지를 쳐서 스스로 천자(天子)가 되어 당(唐)이라 하였으며 이후
제왕(帝王)이라 칭하며, 이웃 나라를 침범하여 차지하고 구주(九州)로 땅을 마음대로 나누었던 것이다.
계속하여 요임금은, 서기전2357년 14세이던 때부터 단군왕검(檀君王儉=전욱고양씨))께서 비왕(裨王)
으로 섭정(攝政)을 하시던 웅씨국(熊氏國, 염제신농국의 후신, 단웅국(檀熊國)이라 함)을 세차례 이상
기습침략하였는 바, 마지막으로 서기전2334년에 단군왕검께서 순방(巡訪)을 하시느라 왕성(王城)을
비운 사이, 요임금이 기습침략하여 점령하였고 이에 웅씨국 왕이던 홍제(洪帝=소호김천씨)께서 붕어하시
므로, 단군왕검께서는 왕성으로 돌아가시지 못하고 곧바로 무리 800과 함께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하셨던
것이다.
배달나라 말기에 단군왕검께서 섭정하시던 웅씨국(염제신농씨의 후계국)은 궁상(窮桑=곡부)을 수도로
지금의 산동지역에 태산(泰山)을 포함한 나라였는데, 요임금의 변란으로 나라를 잃고 옛 신시배달국의
중심지인 지금의 장도 땅으로 이동하여, 아사달(阿斯達)에 수도를 정하시니 이곳이 단군왕검께서 38세
이던 서기전2333년 10월 3일에 한배달 구한(九韓)의 추대에 응하여 임금이 되신 곳이요, 나라 이름을
광명의 나라라는 뜻으로 조선(朝鮮)이라 정하셨던 것이다.
이로서 유웅국(有熊國)과 역사를 공유하던 신시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조선의 역사가 시작된것이다.
조선(朝鮮)이란 국명은 해와 달을 존중하여 양고기와 생선을 제물로 천제를 모신다는 뜻을 포함한다.
나라를 정비한 단군왕검께서는 약10년이 지나는 서기전2324년경에 도(道)를 잃은 요임금을 깨우치기
위하여 유호씨(有戶氏, 고수라고도 함)에게 환부(鰥夫), 권사(權士) 등 100여명과 군사를 주어 토벌토록
하니, 이때 유호씨의 장자이던 순(舜)이 약20세로 환부(鰥夫)의 직을 수행하였으며,
이때 당나라의 요임금은 눈치가 빨라 금방 정세를 알아차리고 유호씨를 영접함으로써 단군조선에 굴복
하여 천자자리를 보존하고 나라를 보존하였던 것이다.
이후 요임금은 순(舜)의 사람됨됨이를 보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하였고, 감(甘)이란 땅에 머물면서 언제
반역할지 모르는 요임금의 소행을 감시하던 유호씨는 아들 순(舜)에게 여러번 경고하였으나, 순은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 요임금에게 협조함으로써, 부자간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어 중국기록에서는 순이 불효
자라고 기록한 것이 되는데, 결국 순은 30세이던 서기전2314년에 요임금에게 등용되었고, 이후 50세이던
서기전2294년에 요임금의 섭정이 되어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요임금 시절에 순이 섭정을 하던 서기전2288년에 황하 남쪽으로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여 대대적인
홍수가 발생하였는 바, 이를 소위 요순 9년 대홍수라 하며, 서기전2267년경에 이르기까지 22년을 넘는
기간동안 물에 잠겨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섭정하던 순(舜)은 곤(鯤)에게 치수(治水)를 맡겼으며, 60세이던 서기전2284년에 권력에 눈이 멀어 118세
이던 요임금을 강제로 유폐시키고 천자자리를 찬탈하여 스스로 천자가 되었는데, 순임금의 나라를 우(虞)
라 하여 요임금의 당나라와 구분한다. 이후 순임금은 서기전2280년까지 치수담당 곤이 치수를 끝내지
못하므로 우산(羽山)에서 처형하고, 곤의 아들 우(禹)를 사공(司空)에 봉하여 치수를 맡겼다.
아버지 곤의 업을 이은 사공(司空) 우는 서기전2280년부터 서기전2267년까지 13년간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직접 물에 잠긴 땅과 산을 오가며 홍수 속에 헤메면서 수많은 고생을 하고 치수에 힘썼으나 결국 실패
하였는 바, 서기전2267년경에 우(禹)는 치수 방법을 찾던 중 자허선인(紫虛仙人)으로부터 비책을 얻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단군왕검의 장자로서 진한(眞韓)으로 봉해져 섭정을 맡고 있던 태자부루(太子扶婁)를 뵙고
가르침을 전수받는 것이었다.
위 지도는 치우의 이동 경로와 주나라 건국시 까지 동이족 즉 신시배달국의 영지를 표시한것이다.
지도에서 청구로 표시된 청구지역은 지진으로 윤몰되어 현 래주만(萊州灣)이 되었다.
이곳은 래이족의 발상지 래산(萊山)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예맥조선으로 표시된 지역은 치우와 황제의
탁록전이 벌어졌던 탁군이다.
연안지역에 창락.청주.수구.영구.임치.왜팡등이 있었고 창락은 근래에 고대 동이문자가 발굴 된 곳이다.
전욱고양씨의 후손들이 모(牟)씨국을 경영하였던 기록이 로사(路史)에 보인다.
후에 제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기자와 그 종자 5천여명이 고조선으로 건너기 위해서 경유한곳이
창락(昌樂)이다.
(지도저본:안경전 역주《한단고기》재펀집:필자)
소식(소동파)의 《춘추열국도설 (春秋列國圖說) 《고조선사연구》문정창 124쪽
지도설명:
2번에 보이는 제나라와 모씨국(牟氏國)은 본래 치우천왕의 청구국이 있던 지역이지만 지진으로 윤몰
되어 산동반도의 지형이 재편되었다.
모씨국은 바로 전욱고양씨의 고조선 직활국이다.
4번이 신시(神市)의 본토이고 1번 지역이 만리장성의 동단인 양평이었지만 지진으로 윤몰되어 지명이
요양의 북쪽으로 이동되었다.
이곳에 진번조선이 있었는데 진번조선은 홍산문화를 관활하던 지배국이었다.
특히 1번과 2번의위치에 진번조선과 청구배달국이 바다로 윤몰되어 발해바다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왕횡(王橫)이 말하기를, "옛날 하늘에서 연일 비가 오고,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범람하여 서남쪽으로
솟구쳐 올라, 수백 리가 물에 잠기게 되었고, 구주의 지역도 이미 바닷물에 잠긴 적이 있었다."라고 했다
....(중략)...
발해(勃海)라는 이름은 예전에는 아직 없었다.
《한비자(韓非子)》에 이르기를, "제경공(齊景公)은 안자(晏子)와 더불어 소해(小海)를 유람하고, 백침
(柏寢)이라는 대(臺)에 올랐다"고 하였다.
소해(小海)는 곧 발해(勃海)로서 경공(景公) 때 이미 이런 지명이 있었다.
비단 이것 뿐만 아니라,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에, 초성왕(楚成王)이 제나라 군중으로 파견하여
제환공(齊桓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남쪽에 살고 있다(君處南)"고 하였으니, 북해(北海) 역시 곧 바로
발해인 만큼 환공 때에도 그런 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역하(逆河)의 남쪽 해안 지역이 바닷물에 잠겨 버린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실증13] 전욱고양씨의 출생과 성장
중국은 홍산문명을 ‘요하문명’이라 칭하며 중화문명의 새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요녕성박물관 앞에 ‘3황5제 시대는 다민족 통일 국가를 형성하는 바탕을 이뤘다’고 적고 홍산문화를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못박았다.
이는 동북공정의 하부공정인 웅녀공정, 고구려공정보다 진일보한 움직임이다.
주목할 점은 홍산문화 바로 위층 하가점 하층문화. 황제족(한족)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홍산문화층 위에
중국 최초 국가인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다.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이를 고조선 출범과 연계시킨다.
청동기를 개발한 3000여 명 환웅세력이 웅족과 결합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다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고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청동기의 추정연대인 기원전 2400년 부터와 자연스럽게 연계
된다.
어떻튼 동시대에 중국은 요.순.우 시대가 시작되고 고조선은 전욱고양씨 시대가 시작된다.
따라서 중국의 최초 역사지리서인 《서경 (書經)》에는 요.순.우.만 있을뿐 전욱고양씨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음은 새롭게 등장하는 소호희화국과 전욱고양씨의 출생지에 대해서 알아본다.
《산해경》에서 기록한 미주 양곡 부상에 있는 소호희화국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양곡(暘谷) 부상(扶桑)을 중심으로 소호희화국(少昊羲和國)이 있었으며,그곳에는 소호희화족 수령
신목(神木)을 보좌하는 관리 구망이 있다. 전욱이 이곳에 살았다.
『東海之外大壑,少昊之國,少昊幼帝 顚頊于此』
『동남해의 바깥 감수지간에 회화지국이 있다. 東南海之外 甘水之間,有犧和之國』--중략--
▶평구(平丘)에 전욱족이 살고 있다.《여씨춘추 고악편》에 『전욱은 약수에서 태어났다.
궁상에 거했으며,제위에 올랐다.
▶《제왕세기》에는 전욱이 난지 십년에 소호를 보좌하였고,나이 스믈에 제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顚頊生十年生爲佐少昊,二十年爲登帝位』
▶《연려실기》의 <사전전고=祀典典故>제4권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숭령전(崇靈殿)은 평안도 평양성 밖에 있으며,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을 향사하는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리어 중간 제사[中祀]를 지낸다.
숙종이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는데, 어제(御製)한 단군사(檀君祠) 시에
이르기를,
동해에 성인이
일어나시니 / 東海聖人作
일찍이 요와 한때라 들었다 /
曾聞竝放勳
산마루에 사당이 있으니 /
山椒遺廟在
박달나무에 상서로운 구름이 둘러 있도다 /
檀木擁祥雲
왜 단군을 동해(東海)에서 일어난 성인이라고 한것일까.
만약 단군이 한반도에서 탄생하였다면 동해란 위치는 이치에 맞지않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특정지역인 동해바다란 구체적으로 어디를 지목한 표현일까.
그러한 사서의 표현들은 대부분 중국의 산동지방을 기준으로 해가뜨는 동표(東表)지역 즉 사문도(沙門島
현 장도)를 동북해빈(東北海濱)으로 표현하던 말이었다.
*평구=평양에는 전욱족(단제족)들이 살고 있다.
약수(바다에서 태어난 전욱(단제)는 궁상(곡부)에서 살았다. 그는 생후 십년될때부터 소호를 보좌하였으며
나이 스므살때 제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욱은 단제이고 소호의 사위로서 십세때부터 장인 소호를 도와 24자씨족의 비왕이 되었다가
스므살때 소호의 제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堯)의 반란으로 소호가 서거하자 따르는 800여명의 종자들을 데리고 삼신산(장도)으로 귀향하여
새로히 조선을 건국한것이었다.
따라서 전욱고양씨에 대한 추적이 필요한데 여러 사서의 기록들이 전욱을 황제계로 끌어드리기 위해 갈팡
질팡하여 정답을 얻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나 동방삭의 《해내십주기》에서는 부상(扶桑)을 벽해에 있다고 하였고,부상에는 태제궁(太帝宮)과
태진동왕(太眞東王)이 있다고 한것이다.
그렇다면 태진동왕은 전욱고양을 칭하는 말이 분명한것이다.
[실증 14] 전욱고양씨에 대한 금문(金文)의 진술
1900년대 초 청나라 말기(장개석의 국민당 초기에 하북성 청원 남향에서 당우 삼과병명(唐虞 三戈兵銘)
이라는 청동으로 만든 칼 세 자루가 발굴됐다.
이 칼에 새겨져 있는 글자는 삼황오제시대 제왕들과 그 친족들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동이족의 시조인
신농의 손자 전욱 고양(顫頊 高陽. 기원전 2467~2421)과 그의 아들, 그리고 또 3대에 걸친 손자들의
이름이 칼에 새겨져 나온다.
전욱(顓頊)은 고대 중국의 신화상의 제왕이다. 이름은 고양(高陽)이었고 고양씨(高陽氏)로도 부른다.
전욱 고양은 신농의 아들인 희화 주와 황제의 딸 상아 사이에서 태어난 오제의 한 명으로 소호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왕위에 올라 78년을 재위했다고 한다.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昌意), 어머니는 촉산씨(蜀山氏)의 딸인 창박(昌僕)이다.
* 따라서 위의 기록은 전욱고양씨는 두사람의 아버지와 두사람의 어머니를 가진셈이 된다.
첫번째 계열은 신농이 부계이고 황제는 모계인데 두번째 기록은 황제가 부계이고 촉산씨가 모계가 된다.
그러나 전욱고양씨는 첫번의 기록대로 황제의 직계가 아니라 외척(外孫)이 라는 사실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중국은 그를 친손으로 왜곡하여 홍산문명과 연계를 시도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사서의 기록에 창의는 황제의 아들이고 전욱은 바로 황제의 손자가 된다고 하였다.
자식으로는 궁선(窮蝉)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제헌원은 누구의 후손이었을까. 그도 역시 신시배달국의 고시씨 즉 고시례의 후손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성씨는 공손씨었다.
그리고 그의 손자로 알려진 전욱고양씨는 성이 고양씨다.
따라서 고양씨는 고시씨의 후손이 된다. 이외에 소호금천씨의 후손에 제곡고신씨가 있다.
황제는 사람인가 신인가. 지금까지도 학술계에 정론은 없다.
중국의 저명한 신화연구가 원가(袁珂)는 황제가 신화전설가운데의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뇌전(雷電)에서 기(起)하였으므로 최초의 신직(神職)은 뇌신(雷神)이 된다.
후에 뇌신으로 우뚝 일어나 중앙 천제가 되었다.
전해오길 그는 얼굴길이가 4장(張)으로 동시에 사방을 돌아볼 수 있어 어느 지방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황제는 기타 4 천제와 싸워 승리한 후 자신의 신국을 건설했다.
황제신화 전설의 주요부분에 관해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황제와 염제의 판천(阪泉) 전쟁 중에 황제는 "수웅(帥熊), 랑(狼),표(豹), 추( ),호(虎)를 앞세우고 조(雕:
독수리), 할( :靑鳥로 죽을때까지 물러서지 않아 무인의 상징깃털로 쓰임), 송골매(鷹), 소리개(鳶)를
기치로 삼았으니 이로써 전쟁규모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황제와 치우의 탁록전은
특히 참혹하고 치열해서 "혈류에 절구공이가 떠내려갔다(血流漂杵)"고 전한다.
이 전쟁 중에는 쌍방이 모두 신공마법(神功魔法)을 베풀었다.
처음에 치우(蚩尤)가 법술을 베풀어 즉각 큰 연무가 미만해 인마와 사람 그림자를 구분할 수 없었다.
황제는 다시 풍후(風后)에게 명을 내려 지남거(指南車)를 만들게 하여 방향을 식별케 하고 치우를 쳐
이겼다.(이게 거짓말이란 걸 이젠 알 것이다)
그러자 치우는 풍백,
우사를 청해와서 풍우를 크게 일으켜 폭풍우로 황제의 인마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정도로 교란시켰다.
황제는 또 발(魃:한발귀신)이라는 천녀(天女)를 청해와서 폭우를 멈추게 하고 대군을 지휘하여 벼락, 천둥,
섬전(閃電)의 기세로 치우 부하의 진형(陣形)의 중앙을 어지럽히고 승기를 잡아 치우를 죽여 그 머리를
탁록에 매장했으니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동남의 탁록현으로 이곳에 치우분(蚩尤墳) 한 기가
있다.
중국의 사가들은 황제부락과 염제부락이 합병한 이후 통칭 화하족(華夏族)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말은 화하족의 출발이 염제부락의 마지막 왕 유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유망은 동이족 강(姜)씨 시조 염제 신농의 마지막 왕으로 흔히 부족국가 시대인 고로 추장 유망으로도
기록되어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동족인 치우 천왕의 배달 환웅국에도 전쟁을 벌인 바 있으나 치우 천왕에게 격퇴 당하자 이번에는
황제에게 대들다 멸망해 치우 천왕과 황제가 72회의 판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인들이 흔히 화사(華史)라 발음하는 화하족(華夏族)에 대하여
중국학자들이 연구한 화하족에 대한 결과는 지나(支那) 한(漢) 족이 동이족으로부터 서이족으로 민족
개량을 한 다음 다시 수많은 혼혈 잡종과정(하이브리드화)을 통해 서하족으로 건너뛰고 다시 화하족으로
변했다가 진한시절에 비로소 지금의 한(漢) 족이 되었노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 혈통 얘기가 나오고 왕실의 뿌리가 나오고 하여 이야기가 많이 복잡해진다.
안경전의 역주본 《환단고기 》
황제헌원은 신시배달의 신하인 고시씨의 후손임으로 황제 역씨 동이족이다.
< 황제헌원(黃帝軒轅)에서 순(舜)임금까지의
역대왕조(歷代王朝)
1대 황제(黃帝): 이름 헌원(軒轅)=황제헌원(黃帝軒轅).
2대 전욱(顓頊): 이름 고양(高陽).
[황제헌원의 둘째아들이 창의이며 창의의 아들이 고양이다]
3대 제곡(帝嚳): 이름 고신(高辛). [황제헌원의 첫째아들이 현효이며 현효의 손자가
고신이다]
4대 요(堯)임금: 이름 방훈(放勳). [고신의 아들이 방훈이다. 황제헌원의 첫아들의
후손이다]
5대 순(舜)임금: 이름 중화(重和). [요임금 이후로 적자가 아닌 선양으로 이어왔던
둘째아들의 후손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여기서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인
소호금천(少皥金天)의 후손은 빼고 황제헌원의 후손
들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황제헌원도 결국 신농씨의 뒤를 이었다. 라고 사마천 사기의 오제본기(五帝本紀)편에서 기록
하고 있다.. ((헌원의 계보에서))
이처럼 전욱 고양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이 세 자루의 칼 가운데 첫 번째 칼에서 전욱을 나타내는
조일주(祖日珠)에 바로 ⌜조선의 조(朝)⌟자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두 번째 칼에서 전욱의 자식대를 나타내는데, 이중 중부일계(中父日癸)는 전욱의 셋째 아들 중여
곤(衆餘 鯀)으로, 여기에서 ⌜조선의 선(鮮)⌟자가 등장한다.
또한 세 번째 칼에서는 전욱의 손자들이 이름이 나오는데,
이 한은 바로 삼왕오제의7대인 순임금을 나타낸다.
이처럼 당우 삼과병명(唐虞 三戈兵銘)이라는 청동으로 만든 전욱 고양의 가문에서 나온 칼 세 자루에서
조선과 한의 역사적인 유래가 금문을 통해 바로 밝혀진 것이다.
한나라의 동방삭이 쓴 《십주기(十洲記)》에 이르기를, "동해에는 따로 또 명해(溟海)·원해(員海)가
있다고 하였다."
《십주기(十洲記)에 이르기를, '부상(扶桑)이 벽해(碧海: 깊고 푸른 바다) 가운데 있는데 거기에는
태제궁(太帝宮)이 있어 태진동왕(太眞東王)이 사는 곳이요, 봉래산(蓬萊山)은 그 둘레가 5천 리가
되며, 이 산 바깥쪽에 원해(員海)가 있어 봉래산을 둘러 싸고 있으며, 바닷물 색깔이 바로 검정색이
므로 명해(溟海)라 한다.'고 하였다
낙랑이 있었던 발해해협을 명해(溟海)로도 불렀다.
또한 이 당시 발제국은 발해의 북쪽 끝에 있었고 흑옥으로 홍산문화를 꽃피웠던 주인공으로 밝혀졌다.
(필자 주)
전욱 고양씨 - 인간 세계의 질서 확립(산동반도 소호국 시절의 단제)
전욱 고양씨에 대한 설명을 보면, <남정(南正-관명)의 중(重)에게 명하여 하늘을 관장케 하고 그로써
신(神)을 속하게 했다.
또한 화정(火正-관명)의 여(黎)에게 명하여 땅을 관장케하고 그로써 민(民)을 속하게 하여서 서로 침범하여
모독하지 못하게끔 했다>고 되어 있다.
그 신화적 연역은 다음과 같다.
그 옛날 하늘과 땅은 반고(盤古)에 의해서 상하로 떠밀려져 멀어지긴 했으나, 그 후에도 천지간의 교통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때부터 신시인 장도와 내륙의 교통을 통제하고 질서유지를 강화했다는 비유로 보인다.
이때가 비록 공자시대는 아니었지만 세상의 도가 땅에 떨어져 하극상의 난세가 계속되자 전욱은
장도로 들어가 조선을 건국하여 새로운 도덕과 질서를 강조한것으로 비로서 동방예의지국이 탄생
된것이다.
이후로 천여년이 흐른 뒤 같은 이유 즉 신하국이 상국을 배반하여 주(周)가 은(殷)을 치자 기자가
장도로 들어가 팔조금법을 만들어 한층 예의를 강화하였고,
그로부터 약 700여년 뒤 다시 천하에 도가 떨어져 난세가 되자 공자가 뗏목을 타고라도 도가 살아
있는 군자의 나라로 건너가기를 원하였다는 사실은 시공을 넘어도 같은 역사는 번복되었다는 교훈을
말하고 있는것이다.
공자가 주제하던 곡부는 바로 소호의 본거지었고,전욱이 24년을 비왕으로 활동하던 본거지이기도
하다.당시 반란을 이르켰던 요(堯)의 근거지도 곡부다.
▶《상서》<순전=주2>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순임금이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네고 동쪽으로 가 제후(천자)를 알현하고 천자국으로 부터 내리는 월력
(달력)과 악률(제례악)과 도량형을 일치시켰다는 말씀이고 제후(천자)를 알현하는데 예를 가추었던 세가지
비단과 두가지 산 짐승, 한가지 죽은 짐승및 예물을 정리하고 다섯가지의 옥기는 예가 끝난후 돌려드렸다는
대목이다.
이로서 순임금의 요나라는 고조선의 제후국이었으며 모든 문화의 기본을 고조선으로 부터 공급받았던것
이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도 산동반도의 곡부에있는 공자의 공묘(사당)에서 제를 올리는데 필요한 의식절차를
복원하면서 한국에 와서 종묘제례의식을 도입해가기도 하였다.
곡부는 소호의 능이 있고, 단군이 비왕으로서 24년을 통치하던 공자보다 1800여년이나 이른시기에 활동
하던 무대였다.
순임금이 태산에서 천제를 올린후 동쪽으로 동후를 알현하던 주인공은 바로 제 준 또는 태진동왕(太眞東王)
으로 부르던 전욱고양씨(단군)이었다.
[주2]<<尙書 >><舜典>
歲二月東巡守至于 垈宗柴望秩于山川 肆覲東后 協時月正日 同律度量衡
순임금이 이해 이월에 동쪽을 순행하여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고동쪽의 제후를 알현하고 ,
철과 달을 맞추고 날짜를 바로 잡았으며 악률과 도량형을 일치시키고
脩五禮五玉三帛二生一死贄 如五器卒乃復.
오례와 오옥(홀,규,종 등...) 세가지 비단,두가지 산 짐승, 한가지 죽은 짐승 및 예물을 정리하였다.
다섯가지 옥기는 예가 끝난후 돌려 드렸다.
(출전;九山, 일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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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형일계(兄日癸)에서 한국이라는 ⌜한민족의 한(韓)자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