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증 15] 전욱고양씨의 별칭 제준(帝俊)의 정체
제준(帝俊)의 이름은 오제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또한 정통적인 사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고전에서는 이를 황제(黃帝) 또는 제곡이나 순제(舜帝)의 이칭이라고도 하나 은민족(殷民族)의
조선신(祖先神)이라고도 전해지는 것으도 보아 제준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간주된다.
제준에게는 아황(娥皇), 희화(羲和), 상희(常羲)라는 세 아내가 있었다.
아황은 삼신국(三身國)을 낳았다고 전해지며, 희화는 태양의 여신으로서 열이나 되는 태양의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을 번갈아가며 천상에 오르게 하여 하계에 빛을 주었다.
또 상희는 달의 여신으로서 열둘이나 되는 달의 딸을 낳았다. 이 딸들이 번갈아가며 하늘에 오르게 하여
밤을 환히 밝혔다.
열의 태양과 열둘의 달이란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사상과도 결부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태양이라
든가 달의 어버이 신으로서 제준(帝俊)의 존재는 주목받을
만하다.
[제24도]제 준의 초상도
제 준(帝俊)은 열개의 태양과 열두개의 달을 낳아 관장하는 동방의 천제였다.
그 일월이 출입하는곳을 양곡 또는 동표.동방이라 하였다. 한편 '우이'라고도 불렀다.
그곳을 조선이라 부르고 천손족과 인간세계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따라서 십간 십이지와 역서들을 만들어 서토를 개몽시킨것이다.
이때 수레와 배등이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볼수 있다.
요임금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은 성인으로 미화시켰지만 열개의 태양중에서 아홉개의 태양(동이부족)을
제거한 원흉이었다.
제준의 모습을 그린 상상화가 언제부터 그려진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단순하게 넘길 수 없는 상징이 몇개
있다.
첫째는 후광으로 보이는 태양이다.이것은 부처님들의 불상 후광과 같다.
그리고 오른손에 보이는 수인(印)이다. 마치 불상에서 볼수있는 모양과 같다.
따라서 《산해경》에서 말하는 천축국과 부도가 조선에서 난다는 기자조선의 전불시대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찰에 대웅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할수가 있다.
그리고 제 준은 동방천제로서 그의 로고는 봉황이었다.
양곡 부상목에 앉은 아홉개의 태양(삼족오)을 활로 떨어뜨리는 예 (가상현 무씨사당의 석판화)
(해설 구산)
무려 1565여년간 존속된 신시배달국시대는 18세를 거치면서 각각의 이름들이 있었지만 한웅만은 공통
분모였다.
따라서 제 준은 동방천제를 통칭하는 단제(檀帝)로 보아야 할것이다.
《규원사화》의 <단군기>에 따르면 단군은 제위에 오른지 93년이 되는 해에 210세의 나이로 태자 부루
에게 선위하고 승천하였다고 하였으나 어디에 능을 남겼다는 기록은 없다.
전욱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산동지역에도 그의 능은 없다.
그러나 《금문의 비밀》에 의하면 중국 하남성 내황현,양장현에 있는 이제능(二帝陵)에 제곡고신씨와
함께 모셔저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렇게 볼때 동방천제의 제 준이란 이름이 제곡고신씨나 요임금시대에도 등장하였다면 그는 신시배달국
18세 거불단 한웅 (혹은 단웅)의 뒤를 이어받은 단군왕검밖에는 없다.
또 하나 전욱고양에 대한 무덤얘기는 《산해경》의 <해외북경>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러나 무우산이 어디에 있다는 설명은 없다.
무우산(務隅山)에는 전욱(顓頊)임금이 남쪽에, 아홉 명의 후궁(后宮)이 북쪽에 묻혀있다.
그곳에는 곰*말곰*무늬호랑이*이주(離朱-세발 까마귀)*수리부엉이*시육(視肉-아무리 베어내도 고기가
줄지 않는 소) 등이 산다고 한다.
(務隅之山 帝顓頊葬于陽九嬪葬於陰 一曰爰有熊羆文虎離朱(丘鳥)視肉
<해외북경>
따라서 수백년의 시공을 초월하며 등장하는 제 준의 기록을 특정인으로 기정사실화 한다면 혼돈과 왜곡을
벗어나기가 어려울것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구분할것은 중국의 사적에서 벗어난곳 즉 삼황오제 외에 동방천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조선이 곧 동방천제국이라는 사실이다.
천제가 있는곳에 천손족이 있어야 하는것은 당연한 논리다.
천제(하늘)를 탱글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단군은 곧 천제를 이르는 말이다.
※ <원가袁珂>는 《산해경》에서 말하는 대학(大壑)을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의 귀허(歸墟)로 보는데
그곳은 발해의 동쪽에 있다(중용국(中容國)에 있어 해와 달이 돋는다는 학명준질산(壑明俊疾山)을 유의해
볼 까닭이 있다).
아울러 같은 지역에 대언산(大言山)과 대인국(大人國)*중용국(中容國)*백민국(白民國)*청구국(靑丘國) 등
[동방천제국(東方天帝國)]과 여러 방국(邦國)들이 보인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때의 동방천제국은 조선이고 '제 준'은 '제 전욱'이 이름을 바꾼 단군(선인왕검)이었다.
다음은 전욱고양씨가 소호김천씨의 비왕으로 있을당시 요임금의 반란으로 천제를 올리던 부도가 파괴되고
동이족 연맹체가 해체되던 실상을 신화로 남긴 기록이다.
요임금의 입장을 합리화시킨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예가 아홉개의 태양을 제거한 행위도 제준의 책임으로 돌리고 한개의 태양을 남겨둔 공적을
요임금의 공적으로 돌리는 변명을 하고 있지만 여타 다른 얘기들은 《사기》<오제본기>의 전욱고양씨전을
벗어날 수 없다.
요임금의 반란 진상을 신화한 기록을 링크한다.
요순시대를 태평성대로 왜곡한 신화는 사실은 고조선의 건국을 부추긴 치열한 난세였다.
http://blog.naver.com/mihuh43/40028141930
[실증 16] 전욱고양씨의 활동지역
<소호금천(少昊金天)이 고양씨(高陽氏)를 사위로 맞아 이름을 추(郰)로하고 산동성 곡부(山東省 曲阜)
옆의 추(郰)땅인 추현(雛縣)을 주어 바탕골을 봉(封)한 것이다.
이곳이 뿌리가 되어 추족(追族)의 우 어르신(先祖선조)으로서 고구려의 처음 바탕(前身部族 전신부족)
이며 추모(鄒牟)의 추(鄒)로 이어지게 되었다.>
(출전:금문의비밀 참고=대수맥) 참고:김대성저 <<금문의 비밀>>140~141쪽
다음은 소호금천씨와 전욱고양씨의 관계를 기록한 중국측의 사료다.
이 사료에 의하면 전욱고양씨는 황제의 직계후손이 아니다.
http://blog.daum.net/gusan0579/8011506
《산동총도》무씨사당과 가상현 위치도
대청광여도 산동성 곡부 재령부분
가상현의 무씨사당 주변으로 인접하여 동쪽으로는 추나라.소호능이 있고, 남쪽으로는 김일제의 투후국이 있던
하택시의 금현이 있다.
북쪽으로 동평호에는 치우능이 있고 서쪽의 개봉에는 태호복희씨의 진국이 있다.
서남쪽으로 기자사당이 있는 몽성과 상나라의 상구와 송나라가 있어 마치 동이의 집단을 보는듯하다.
중국 산동성 가상현의 동남쪽 28리 자운산(적산) 아래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은, 《삼국유사》
에 있는 단군기록에 대하여 근거가 없는 설화에 불과할 뿐이라는 부정론이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을 거친
이후 근세까지도 기성 역사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음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잘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괴변들을 분쇄할수 있는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삼국유사》가 집필되기 천 여년 전에
이미 무씨사 석실의 화상석에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이러한 화상석이 햇볕을 보게된 이후 진즉 한국의 건국신화를 실화로 인정해야 하는 연구가 있어야
했음에도 책임있는 학자들이 화상석의 내용을 외면함으로서 고조선의 실체가 실종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발견된 화상석묘는 모두 157개인데 그중 63개가 산동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하북에는 북경에 한군데만 있을뿐 기타지역에서는 발견된바 없다.
[제19도]제 전욱의 초상 자료사진
전욱고양씨에 대한 《금문신고》의 기록은 김대성저 《금문의 비밀》132~159쪽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이라는 '朝字' 가 전욱과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름만도 일곱개나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문장이 길어 불가피하게 생략하였다.
[실증17] 전욱고양씨에 대한 《습유기 》의 기록
≪습유기(拾遺記)≫ 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전욱고양씨는 황제헌원씨의 손자요.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창의가 하수(河水)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검은 구슬 그림을 짊어진 흑룡을 만났다.
그 때 한 노인이 창의에게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수덕(水德)으로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년이 지나고 전욱이 태어났는데, 손에 용과 같은 문양이 있고 또한 구슬그림의 무늬도 있었다.
그날 밤 창의는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북극성 밑에서 노인으로 변했다.
*금문에서 전욱의 출생은 신농의 8대손 유망의 첫째 아들 희화 주씨와 황제의딸 항아 사이에서 출생
한걸로 기록되어있다.
황제는 유망의딸 뉘조와 결혼한 사위다.
따라서 전욱고양씨는 황제의 친손자가 아니라 외손이 된다.
그런데 전욱의 아버지를 황제의 아들 창의라고 하니 금문을 믿는다면 이는 왜곡된 기록이다.
顓頊
帝顓頊高陽氏,黃帝孫,昌意之子。昌意出河濱,遇黑龍負玄玉圖。時有一老叟謂昌意云:“生子必葉
水德而王” 至十年,顓頊生,手有文如龍,亦有玉圖之像。其夜昌意仰視天,北辰下,化為老叟。
전욱고양씨는 ‘헌원씨의 손자이고, 창의(昌意)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창의가 하수(河水)가에
나갔다
● ) 그림을 짊어진 흑룡을 만났다’고도 하였다.
흑룡은 남자를 상징하고, 검은 구슬( ● ) 그림은 존귀한 태양을 뜻하며 전욱고양씨를 상징하는 씨표(氏標)
이기도 하다.
그리고 창의가 10년 후 전욱을 낳았으니, 창의는 여자이고 흑룡의 아내이다.
따라서 헌원씨의 손자이나, 외손자이다. 수덕(水德)으로 임금이 되었으니, 물을 잘 다스렸다는 뜻이다.
‘손에 용과 같은 문양이 있고 또한 구슬그림의 무늬도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씨칭문자로써,
‘부주(父珠, 아래 도명(圖銘) )’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전욱고양씨는 황제의 직계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의식적으로 전욱고양씨를 황제헌원의 직계손으로 조작하기 위해서 무리한 주장을 끼워넣고 있다.
전욱고양씨가 용의 자손이라고 하였고,창의가 용을 만난지 10년만에 전욱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치를 벗어난 주장이다.
《환단고기》<삼한관경본기>부루태자 부분
이에 대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단군의 태자 부루가 우임금을 만나 자칭 북극의 수정(水精)
이라고 하면서 우임금에게 치수와 관련된 비책을 전해 주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番韓)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는 북국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府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걸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黃鉅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담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대저 오행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를 도산(塗山)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禹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임승국 역주,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218~219쪽 참조)
*그렇다면 부루태자는 수덕으로 태어난 전욱고양씨의 태자가 된다.
따라서 전욱고양씨는 조선의 건국자 단군이 되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순임금은 조선의 통제를 받는 제후였다.
《습유기(拾遺記》)≫란 어던 책인가.
다음은 《습유기》에서 말하는 명해와 발해를 설명한 동방석의 저서 《해내십주기》다.
발해와 명해를 천상으로 비유하여 일월이 멀지 않다고 하였다.
《해내십주기》에 소개된 성한(星漢)은 조주(祖洲)가 동해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기록에 주석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동해란 발해해협을 말하고 발해해협을 은하수로 불렀다는 얘기다.
대청광여도는 삼신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 삼신산을 건너기가 어려웠는지는 우측의 표주(漂注)가 설명한다.
이곳을 동방삭은 《해내십주기》에서 조주(祖州)로 부르고 주석에서 성한(星漢)이라고 부기하고 있다.
《초학기》와 《습유기》에서 기록한 삼신산과 명해(溟海)얘기
한나라의 동방삭이 쓴 《십주기(十洲記)》에 이르기를, "동해에는 따로 또 명해(溟海)·원해(員海)가
있다고 하였다."
《십주기(十洲記)에 이르기를, '부상(扶桑)이 벽해(碧海: 깊고 푸른 바다) 가운데 있는데 거기에는
태제궁(太帝宮)이 있어 태진동왕(太眞東王)이 사는 곳이요, 봉래산(蓬萊山)은 그 둘레가 5천리가 되며,
이 산 바깥쪽에 원해(員海)가 있어 봉래산을 둘러 싸고 있으며, 바닷물 색깔이 바로 검정색이므로
명해(溟海)라 한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장자(莊子)》에도 명해(溟海)가 있으니 사해(四海)가 모두 명해(溟海)라 말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실증 18] 명해(溟海)에는 북두칠성형태의 묘도군도(廟島群島)가 있다.
위성으로 본 묘도군도(廟島群島)다.붉은 원 안으로 보이는 섬들이 마치 북두칠성을 닮았다고 하여 많은
일화들이 발생한곳이다.
그렇게 하여 천손민족설을 낳았고, 인류시원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제왕운기》는 조선을 북두칠성 즉 '두성'이라고 하였다.
#의 비밀을 밝히려고 집안지역을 답사한 작가 최인호는 무덤안에 안치된 시신들의 방향이 서남방을
향하고 있었다고 <왕도의 비밀>에서 밝히고 있다.
바로 북두칠성형태로 전개된 묘도열도를 향한것이다.
이어 해신(海神)을 쓰던 최인호는 이집트의 국립도서관에서 신라의 고지도를 발견하였는데 위치를
파악할 수 가 없었다.
뒤에 kbs tv에서 역사스페셜로 다루었는데 역시 해석을 못하였으나 필자가 해석을 시도한 결과
사문도로 밝혀졌다.
북두칠성형으로 배열된 묘도열도 <청구칠청(靑丘七靑=동방칠수(東方七宿> 이 해역을 성한(星漢)
이라고 하여 은하수로 비정하였다.
삼신산 해역을 동래로 표시하고 그 우측으로 견우도(牽牛島)를 배치하고 있다.
즉 이곳이 은하계인 성한(星漢)이라는 말이다.
견우(牽牛)는 모씨(牟氏)마을을 생성시켰고,성한(星漢)이란 신라의 성한왕과 관련이 있다.
또 북두칠성은 광개토대왕의 시호인 국강상과 관련을 가진다.
전욱을 기록한 참고자료들
▶ 말발굽형 옥기를 머리
정수리에 상투로 맨 홍산문명 통치자로서의 모습 (홍산문화 출토 상투용 옥고)
▶"전욱은 태어날 때 머리의 살이 솟아올라 방패와 창이 대립하는 것처럼 높이 솟아있었다."
-제왕세기
▶"(전욱의 모습은) 머리에 뿔과 같은 것이 자란 것으로..." -원화충袁華忠의 논형전역論衡全譯
▶"전욱은
머리 위가 솟아올라 방패와 창처럼 대립하는 모양이며 금신으로 계절에 따라 움직이는데
정수리의 모양이 말(斗)처럼 사방형이다." -
백호통白虎通
▶"(전욱은) 뿔을 머리에 쓴 모양이 마치 방패를 쓴 것 같다. " -논형論衡
해양신으로서의 속성
▶"전욱은
수덕(水德)으로써..., 즉위하였다." - 제왕세기 <== 수신水神임.
▶"뱀이 변하여 물고기가 되었는데 이를 어부라 한다.
어부는 전욱이 죽어 다시 부활한 것이다."
- 산해경 대황서경
▶"북방의 끝에 크고 어두운 바다가 있는데. (...) 매우 춥고
얼음이 쌓여있으며 눈,우박,서리,싸라기눈이
내리며 많은 물이 있는 들이 있는데 전욱과 현명은 이곳의 만이천 리를 다스린다." -회남자
시칙편
"적산(赤山:붉은 산 즉 홍산紅山!!!)에 전욱 임금과 아홉 부인이 묻혀있다.
큰
곰,호랑이,표범,요벽(옥기) 등이 묻혀있다." -산해경
홍산문화 최고 통치자의 무덤 부장 모습이
신화화됨.
▶"북방의 우강은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으로 귀에 두 마리의 푸른 뱀을 걸고 있고 두 마리의
푸른 뱀을 밟고 있다.
(곽박 주: 자(字)는 현명이며 수신水神이다.
장주가 말하기를 "우강이 북극에 서 있다고 하는데 또는 우경(愚京)이라고 하며 또 다른 책에서는
우강은 몸과 손발이 검으며 두 마리의 용을 타고 있다."고 한다.)" - 산해경 해외북경
▶"북해의 신은 이름이 우강으로 신령한
거북이 그를 위하여 심부름을 한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인용 대황경大荒經
▶우강의 자(字)는 현명이다. 현명은 전욱의
신하이므로 우강은 전욱의 신하다.
둥근 옥벽,옥팔찌는 완전히 둥근게 아니라 중간이 끊어져있다. 이건 '뱀'을 상징한다.
북방의 우강은 바로 중국의 북방의 홍산문화의 최고 통치자를 말하며 최고 통치자가 무덤에 부장된
모습이 이렇게 신화화된 것이다.
거북이
우강을 위하여 심부름한다는 것도 완벽하게 무덤의 부장 모습과 일치한다.
전욱 고양의 도읍은 '박'이라고 중국
사서에 나온다. 중국 사학자 '부사년'은 '박'이 요서에
있다고 하였다. 즉 홍산문명 일대다.
진서 모용외전에 모용외가 전욱의 옛
도읍이 요서 극성이라고 주장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 고찰해볼 때 전욱 고양은 바로 '박' 즉 박달(배달) 문명의
임금이었고 중국이 이를 뺏어
갔다는 주장이 성립 가능하다.
중국 사서의 전욱 고양의 문명은 바로 홍산문명이었고 박달(배달)이었던
것이다.
《규원사화》<단군기>
고시씨와 모든 사람은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을 받들고 그의 아들인 환검신인(桓儉神人)을 다
함께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으니, 이로서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라 함은 군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라에서 이른바 ‘니사금’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셈하면 대략 4천여 년이 되니 바로 당요(唐堯)와 같은 때로서, 세속에서 말하
듯이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고 이름하는데,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
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
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
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다.
지금에 만약 언문과 함께 쓴다면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없을 것이니, 곧 들녘의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깨우쳐 문화의 계발이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
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僂侲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
(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
(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
(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徙]海岱之地, 以致
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神誌氏受封於僂侲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麤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挹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羙,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
[煖]而食肥羙,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 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睊睊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天
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
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
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挹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 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 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
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한단고기》<단군세기>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BC 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으로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BC 2333)년 제요도당 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무진 원년 바햐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단군세기》
(출전;九山, 일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