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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 21]고조선족을 천손족이라 불러온 이유는 무엇인가.
발해해협에 속하는 낙랑 즉 조선은 무슨 근거가 있었길레 그들을 천손족이라 불렀을까.
이를 실증할 수 있는 근거들은 수 없이 많다.
지형조건이 특별하여 타지역과는 비교될 수 없는 기록들을 확인해보자.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천손족을 실증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갗춘 사료들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유감스럽게도 한반도와 일치되는 증상은 없다.
1.《삼국유사》<기이>편에는 천손족을 설명하는 하강설화가 있다.
2. 무씨사당의 석판화에는《삼국유사》의 하강설을 설명하는 기록화가 있다.
3. 봉래해상의 신기루는 무씨사당의 석판화를 실증하는 원전이 되었다.
4. 북두칠성 형태의 묘도열도(廟島列島)에는 천제단이 있었다.
5.《제왕운기》의 두성(斗星)설은 묘도열도가 북두칠성형태임을 증명한다.
6. 마고성(사문새=沙門塞)의 천후궁은 마고의 소도(蘇塗)였다.
7. 홍산지역의 천원지방형(天圓地方) 제단은 발제국의 제단이었다.
8.《한서 천문지》의 상(象)설은 고조선에 관상대(천문대)가 있었음을 설명한다.
9.《산해경》의 천독(천축국)설은 고조선의 위치를 발해로 설명한다.
10.동방삭의《해내십주기》와《초학기》의 성한=(星漢)설은 발해가 은하수로 비유되었음을 설명한다.
11.왕가(王嘉)의《습유기》는 발제국(홍산)이 전욱고양씨의 제후국이었음을 증언한다.
12.《속 산동고고록》의 지도에는 견우도.천교구=天橋口)등 하늘을 상징하는 지명들이 있다.
13. 묘도 항해박물관에는 고조선의 천문도와 천문관측도가 전한다.
14.광개토호태왕의 시호 국강상(國강(四+正上)이란 북두칠성의 별칭이었음이 확인 됨으로 그는 묘도열도와
깊은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5.집안지역의 묘총에 매장된 시신들의 발향이 서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고국이 묘도열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삼귝유사》기이(紀異) 제1
첫 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명(符命)을 얻고 도록(圖록)을 받게 된다.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뒤에라야 큰 변의 틈을 타서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도박물관에 소장중인 청동기와 도철문의 설명에는 예.악.징벌이라는 주기가 있다.
제사시 음식을 차려놓고 종(징)소리를 울리는것은 잡귀를 징벌하기 위한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례악과 청동기의 도철문의 시원은 고조선(장도)으로부터 기원된것이다.
제례악이나 아악에서 편종을 사용하는 풍습은 이곳으로 부터 전해진것이다.
발제국(勃鞮國)의 남쪽 바다는 북해(北海)이고 발해(渤海)이다. 따라서 명해(溟海)란 발해(渤海)이다.
발해(渤海) 북쪽에 발제국(勃鞮國)이 있고, 날씨가 추운 지방이니, 새털 옷을 입는다.
날개가 없어도 날아다니고, 해가 중천에 떠도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신선의 나라임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그곳에 신선세계가 존재했던 모양이다.
수명이 천세라고 하였으니, 천년의 세월처럼 오래 유지된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습유기》
묘도의 천후궁과 성벽
▶ 한편 단군에 대한 기록은 위나라때 공빈이 쓴 《東夷列傳》에도
있다.
東 夷 列 傳 (註 檀奇古史 附錄)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동방에 고국이 있었으니 이름이
동이다.)
星分箕尾 地接鮮白(별자리는 기성과 미성에 속했는데 땅은 조선과
접했다.)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그때 신인이 있었으니 단군이다.단군은 구이(九夷)의 추대로 임금에 오르고 요와 병립하였다.)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우순은 동이에서 출생하여 중국으로 들어왔다.마침 천자가 되어 백왕의 탁월한 임금이 되었다.)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의 수유(須臾)에 대한 부분이다.
(전기 일부를 생략하고 해당부분을 추출하였다.)
"동서 하권 정미일(丁未日)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전날인 병오일(丙午日)에는 왕보하(王保河)에서 주필했다.
이 날은 산해관으로 장차 들어 가려고 환희령(歡喜嶺)을 통과했는데 산해관 동쪽 3리에 있으며,
일명 서황령(恓惶嶺)이라는 곳으로 관을 나가는 사람들은 이 곳에 올라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므로 서황령
이라 하고, 일단 관에 들어와서 이곳에 오른 자는 기쁨에 넘치기 때문에 환희령이라고 한다.
이날 산해관 서쪽 8리쯤에 있는 징해루(澄海樓)에 구경하였다. 이십리포에서 주필하면서
《징해루관해가(澄海樓觀海歌)》를 지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황제는 관해시(觀海詩)를 쓰고 작자는 징해루(澄海樓)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나 할까.
그 노래를 짓기까지의 서문은 아래와 같다.
한무제가 동순한 것은 《한서 · 제사지》에 나온다. 괄호한 부분은 원래 있던 내용인데 누락이 되어 원문의
뜻을 복원해 내려면 이 부분을 살려서 번역해야 문장의 전후 관계가 확연해 진다.
昔漢武帝東巡海上, 方士言蓬萊諸神若將可得, 遂欲自浮海求蓬萊, 群臣敢莫能止。 夫武帝以英明之主,
惑于方士, 爲後人所譏笑。 比者, 左道朱方旦持其邪說, 蠱世惑民, 皇上毅然誅之, 以正人心, 天下稱快。
孟子曰: 經正則庶民興,. 足徵人主好惡, 關于治蘭不淺, 是日 捧讀御製觀海詩, 實寓此意也. 駐蹕二十里鋪,
作澄海樓觀海歌:
"옛날 한무제가 해상을 동순할 때, (태산을 봉한 뒤에 바람과 비를 만나지 않자) 방사(方士: 도사)들이
어수선하게 말하기를 봉래(蓬萊)의 여러 신선들을 만날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이윽고 황상은 흐믓해
하면서 신선들을 만나 보았으면 하고 또 다시 동쪽 해상으로 가서 멀리 바라 보았다. 봉거(奉車) 자후
(子侯)가 갑짜기 병이 나서 하루 사이에 죽어버렸다.)
마침내 몸소 바다로 건너가서 봉래에서 신선들을 만나려고 하매, 군신들이 감히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대저 무제는 영명한 군주이신데 방사들에게 현혹되다니 후인들에게 조소를 당할 만하다.
최근에 사교의 무리인 주방단(朱方旦)이 그 요사한 설을 믿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을 황상께서
목을 베어 인심을 바로 잡아, 세상 사람들로부터 후련하다는 말을 들었다.
《맹자(孟子) · 진심(盡心)》 장구에 이르기를, "법도가 잡히면 백성들에게서 착한 기풍이 일어난다(經正
庶民興)"고 하였는 바, 이는 임금의 호오(好惡)가 치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날, 황상께서 지으신 《관해시(觀海詩)》를 받잡아 읽어 보니 실로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황제께서 이십리포(二十里鋪)에서 잠시 머물러 숙박하였다.
《징해루관해가(澄海樓觀海歌)》를 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登州海市更奇幻, 須臾臺榭生虛空。 停鑾古岸列蘭錡, 華旟翠羽飜長虹。
三山靈境疑咫尺, 蜃樓縹緲將無百川朝宗會九野, 緬維大禹眞神功。宸遊扈從廣聞見, 蕩滌心地開塵蒙。
.....(후략)......
등주(登州)의 신기루(蜃氣樓) 더욱 기묘하게 변하더니 한순간 허공중에 누각과 정자 같은 것이 생겼다네
황제수레 옛언덕에 멈추고 병기 틀에 놓아 좍 벌려놓고, 화려한 군기(軍旗) 빛고운 물총새 나래 치듯
펄럭이누나
삼신산(三神山)의 신령스런 풍경 지척인듯, 신기루 아스라이 모든 게 다 다르이
온갖 하천 구야(九野)로 모여드니, 우임금 뛰어난 공적 참으로 생각나누나
황제 유람할 제 호종하여 견문 넓히니, 이내 마음 후련하고 속세의 어리석음 확 트이는듯 하다
봉래해상에 정자들이 늘어선 모양, 이를 수유대사(須臾臺木+射)라고 불렀다.
봉래해상에서 벌어진 현대화된 신기루, 이러한 현상은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있다.
[제2도]지도자료:<속산동고고록 첨부지도> 향고도 제공 편집:필자
상측에 표시된 등주수도(登州水道)를 <천교구 天橋口>라고 이름하였다.
즉 하늘다리 입구라는 말이다.
이곳을 왜 하늘다리 입구라고 하였을까? 답은 본문안에 있다.좌측에 있는 창락은 기자일행 약 5
천명이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경유한 장소이고 동이의 고문자가 출토된 지역이다.
고조선이 있던 사문도=장도와 출입하던 거점이기도 하다.
묘도에는 지금도 마고(麻姑)를 모시는 천후궁(天后宮)이 있다
위 봉래해상의 신기루는 07/10/8일에 있었던 약 4시간동안의 장면이다.
이러한 장관이 벌어지고있는 바다위를 수유대사(須臾臺木+射)라고 부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수유족
(須臾族)이라 불렀다.
따라서 기자도 이곳에 들어와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수유(須臾)라 부른것이다.
수유란 본래 잠간(약 45분)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기루가 망망한 바다위에 안개와 함께 나타나서 마치 연극 무대처럼 다른장면으로 바꿔
가며 유지 되다가 수 시간만에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 장관은 바로 장도=봉래해상(삼신산)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다음은 중국의 신경보(新京報)가 보도한 봉래각 신기루에 대해서 보도한 내용이다
"오전 9시 펑라이거 앞바다에 짙은안개가 내려앉아 주변의 작은 섬을 뒤덮었으며, 2시간40분이 지난 후
신기루 현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거북과 같은 모양이더니 곧 군함과다리, 산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펑라이거의 동쪽 바다에서는 갑자기 대규모 도시 모습이 나타났다.
바다 신기루 현상이 나타나자, 주민 7만여명이 해변으로 뛰어나와 약 3만명의 관광객과 함께 이를 지켜봤다.
이곳에서는 지난해 5월에도 2시간 동안 신기루 현상이 나타났었다."
전욱 고양씨 - 인간 세계의 질서 확립(산동반도 소호국 시절의 단제)전욱 고양씨에 대한 설명을 보면,
<남정(南正-관명)의 중(重)에게 명하여 하늘을 관장케 하고 그로써 신(神)을 속하게 했다.
또한 화정(火正-관명)의 여(黎)에게 명하여 땅을 관장케하고 그로써 민(民)을 속하게 하여서 서로 침범하여
모독하지 못하게끔 했다>고 되어 있다.
그 신화적 연역은 다음과 같다.
그 옛날 하늘과 땅은 반고(盤古)에 의해서 상하로 떠밀려져 멀어지긴 했으나, 그 후에도 천지간의 교통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때부터 신시인 장도와 내륙의 교통을 통제하고 질서유지를 강화했다는 비유로 보인다.
이때가 비록 공자시대는 아니었지만 세상의 도가 땅에 떨어져 하극상의 난세가 계속되자 전욱은 장도로
들어가 조선을 건국하여 새로운 도덕과 질서를 강조한것으로 비로서 동방예의지국이 탄생된것이다.
이후로 천여년이 흐른 뒤 같은 이유 즉 신하국이 상국을 배반하여 주(周)가 은(殷)을 치자 기자가 장도로
들어가 팔조금법을 만들어 한층 예의를 강화하였고,
그로부터 약 700여년뒤 다시 천하에 도가 떨어져 난세가 되자 공자가 뗏목을 타고라도 도가 살아있는
군자의 나라로 건너가기를 원하였다는 사실은 시공을 넘어도 같은 역사는 번복되었다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공자가 주제하던 곡부는 바로 소호의 본거지었고, 전욱이 24년을 비왕으로 활동하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사당(武氏祠堂)"
무씨사석실은 당초에는 세 석실이 앞뒤로 있었으나, 후세에 하수의 범람으로 인하여 흙이 쌓여 그 속에
파묻혔던 것을 1786년 황역이라는 사람이 유지와 함께 발굴하여 따로 전으로 사당을 세우고 벽에 화상석
을 끼운 것이 지금의 무씨사석실이다.
무씨사석실이 만들어진 연대는 여러기록으로 보아 한 건화원년(147)으로 추정되며 세 개의 석실이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이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사당 내의 화상석에는 중국의 삼황 오제를 비롯하여 충신, 효자, 의사, 절부 등의 사적을 새기고 그 곁에
간단한 설명이 가해져 있다.
프랑스 학자 '에두아르 샤반느'는 1907년 중국 북부를 여행하며 유적과 유물의 사진을 찍고 혹은 탁본을
하여 그 조사결과를 그의 유명한 저서 <북중국 고고학 조사>에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 무씨사당 화상에 관한 상세한 기술이 있다.
그의 화상석에 대한 설명은 청조때 사람 풍(馮)씨 형제가 저술한 <금석색 金石索>의 석색편(石索編)에
기술되어 있다.
풍씨형제의 화상석에 대한 해석은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인물과 설화에 나오는 동물들을 인용하여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으나 "대체로 후석실에 있는 그림은 괴이한 것을 그린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제3석이 제일 다상한 것들이다.
더욱이 제3층의 소재는 <산해경 山海經>이나 <영광전부 靈光殿賦>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괴이한 것들
로도 그 뜻을 알기 어렵다.
믿을 수 없는 것들이어서 화상 자체에 설명이 적혀 있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다" 라고 표현하고 설명을
가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고조선의 역사를 설명한《산해경》천독(천축국)의 역사를 모르니 그럴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에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국내학자들의 견해는 어떠하였는지 고고학자 김재원박사의 논문을 소개한다.
무씨사당 화상석의 단군탄생 설화
- 고고학자 김재원(金載元)씨 논문 단서로 중국 산동현지답사 윤여덕 | 현정회 이사
이병도의 마지막 소원
실증사학이라는 미명아래 단군의 실재를 부인하던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가 아이러니칼하게도 권위
있는 단군단체 가운데 하나인 현정회 임원으로 있으면서 행사 때마다 단군초상 앞에 꿇어 엎드려 극진히
예를 올렸다.
이를 지켜보던 한 인사가 그의 행동의 모순성을 지적하자 이씨는 태연하게 ‘내가 학문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과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경배드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재야 사학계의 끊임없는 공격과 매도에 시달리던 이씨는 작고하기 2년전 병석에 누워서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의 국조’라는 글을 그해 10월 9일자 조선일보(1986)에 기고하여 종래의 그의 사관을 180도
수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작업을 착상하고 주도한 분은 일본유학시절부터 이씨와 막역한 교분을 쌓아온 법학자로 말년에는 역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최태영(崔泰永,당시 104세)옹이다.
이때 이씨는 이미 집필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이희수(李喜秀) 당시 현정회 상무이사가 구술
(口述)에 따라 원고를 초(草)하고 필자가 교정정리를 맡아하느라 자주 동숭동 이씨 댁을 드나들었다.
이씨는 병석에 누운 채로 원고를 위로 치켜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갈 논문을 꼼꼼하게 교열했는데 어느
때는 토씨 하나를 첨삭(添削)하는데만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문헌사학의 한계극복 위한 돌파구
원고가 완성되어 갈 무렵 어느 날이었다. 느닷없이 ‘무씨사당(武氏祠堂) 그림을 꼭 한번 보아야 할터인데
…하면서’ 당시는 중국과 국교도 트지 않았을 땐데 설사 여건이 허락한다 해도 병상의 몸으로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문헌사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이씨는 그의 학문적 소신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2천 여년전의 이 고고학
자료를 통해 문헌사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종의 돌파구를 기대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그림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한 사람은 해방 후의 고고학 1세대로 꼽히는 김재원(金載元)박사다.
광복직후부터 70년까지 꼭 25년간 국립중앙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박사가 1947에 ‘檀君神話의 新硏究’라
는 책을 내면서 ‘武氏祠石室의 畵象石에 보이는 ‘檀君神話’ 편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탄생 설화와 적어도 8, 9부까지 부합되는 내용이 그 화상석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청대 ‘금석색’이 연구바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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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 22] 묘도 천후궁과 천문관측 /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만물의 생멸을 주관하는 관직중에는 풍백.우사.운사등이 있다고 하였다.
정부 조직중의 삼정승에 속하는 관직이다.
이는 천문을 관장하는 부서이기에 필수적으로 천문대가 필요했다.
묘도에 있는 천후궁은 천문을 관측하고 제를 올리는 의식을 겸하던 시설이었다.
바다에서 생활하던 그들은 기상정보는 생명과 같은 필수조건이었다.
천후궁은 용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용봉산이란 중요한 뜻을 가진다.
항해박물관에는 천문도가 전시되고있다.
항해박물관에는 고조선인들의 야간 항해시 북두칠성을 관측하는 그림이있다
고구려시대의 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 석각판이 전쟁시 대동강으로 유실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조선 건국을 주도한 이성계의 주관으로 천문도를 만들려고 할때 그 탁본이 발견되어 저본자료로
인용되었으나 별자리의 위치가 달라 새로운 학자들을 불러 지형에 맞도록 수정하였다.
이 천문도는 송나라이후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지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짜 오래된 천문도는 사문도에 있었다.
당시 평양이던 사문도가 지진으로 바다로 윤몰될때 유실되었다고 추정된다.
돌은 무게가 있어 멀리 이동하지는 못했을것이다.
만약 해저유물 발굴이 필요하다면 묘도를 중심으로한 해저 탐색이 유리할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유념할것은 천문도에 보이는 은하계의 위치다.
신라 문무대왕의 15대 선조인 성한왕(星漢王)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은하계가 지나는 위치에 한반도가 해당하는가.
아니면 낙랑군의 위치가 기성 3도라는 《한서》<천문지>의 위치를 중심으로 하면 기성1도의 발해가
은하수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것인가.
금석문 자료인 문무대왕비문에 따르면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령한 선악
(仙岳)에 임하였다(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고 하였다.
그 15대조는 김알지의 조상을 의미한다. 선악(仙岳)을 선인들이 사는 삼신산으로 해석한다면 삼신산이
있는 발해는 은하수가 되는것이다.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선인왕검이 살던 엣 평양인것이다.
《한서》<천문지>
元封中, 星孛于河戍占曰: "南戍爲越門, 北戍爲胡門。" 其後漢兵擊拔朝鮮, 以委樂浪、玄菟郡。
朝鮮在海中, 越之象也; 居北方, 胡地域也。)"라고 하였다.
"원봉 연간(B.C 110~105)에 혜성(孛星)이 남하(南河) · 북하(北河)의 성구(星區)에 나타났다.
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북하(北河)는 호인(胡人)들의 문호(門戶)요, 남하(南河)는 월(越)나라의
문호라고 하였다.
그후 한(漢)의 군사가 조선(朝鮮)을 쳐서 낙랑(樂浪)· 현도군(玄菟郡)을 만들었다.
조선은 해중(海中)에 있고,천문을 관찰하는 상(象=기상대)이 건너다 보이는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북쪽은 장수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상(象)이란 천문(天文)을 관찰하는 기상대(氣象臺)를 말하는것이다.
은나라를 탈출한 기자는 천문을 관찰하던 최고의 현인이었기에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
로 국가의 치도를 훈수하지 않았는가.
사문도 천후궁에는 기상대가 있어 천기를 살피고 결과에 따라 수시로 하늘에 천제를 올렸다는 얘기다.
따라서 지명까지 묘도(廟島)라 불렀다.
그 흔적들이 기록화로 남아있다.
두번째로 호지역(胡地域)이란 오랑케 땅이란 말이 아니라 장수인들이 사는 군자국이란 뜻이다.
▼묘도 항해박물관 소장 일출경배도
모닥불을 피어놓고 축제를 여는 장면은 그 복장이 인디언들과 흡사하다.
이 장면은 해맞이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해를 광명신으로 믿었던것이다.
따라서 빗살무늬 즉 햇살무늬는 광명신의 상징이다. 이러한 자료는 산동성박물관에도 없었다.
단군왕검은 14세에 웅심국왕(소호)의 사위가 되었다가, 배달나라의 거불단한웅이자 단국의 홍제의
태자로 들어가 단국을 인수하면서, 웅심국과 단국을 통합하여 조선이라고 하였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와 이고선의 <조선기> 종합)
조선의 일월마지는 전욱고양이 유백국(楡伯國, 유망 쪽에서 말하면 유백국이고, 황제 쪽에서 말하면
유웅국有熊國이다)의 제위帝位에 있을 때, 무당과 함께 올리던 제사였다.
이 무속행위가 조선이라는 이름에 그대로 반영되어 오늘 날에도 전해 오고 있다.
(낙빈기의 금문해석중에서)
따라서 조선이라는 문자에는 전욱고양이 유백국에서 국가적인 행사로 해마지를 하던 나라제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단군이라는 문자에도 단군왕검이 해맞이를 하는 사람임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전욱고양의 정통성을 단군왕검이 해맞이를 통하여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묘도 항해박물관소장 도제 선박(陶製船舶) bc108년 이후) 출전:《신시본토기》
한나라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로 만든 배의 모조품이다.
다만 시대만 한나라였지 역시 배의 발명은 고조선이었다.
한나라가 바다로 진출한것은 위만조선 이후였다.(bc108년 이후)
항해박물관에 전시된 항해의 시원에 대한 설명서이다.
항해는 깊은 물속의 자원을 채굴하고,어업등.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이때 비로소 인류는 바다의 주인이 된것이다.
동쪽 18000여km에 태평양이 있고,발해,황해,동해와 남해가 어울려있다.
지남침의 발명으로 인류가 항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장도는 인류항해 선주지로서 누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발해해협의 장산열도(장도)는 우리나라 항해의 발원지다 또한 옛 등주항(봉래)의 외항이다.
이 항해는 중국고대의 남쪽으로는 남양과 통하고 북쪽으로는 조선과 일본등 상호 왕래하던 항로였다.
(장산열도란 장백산맥에서 따온 이름이다.일명 묘도열도로도 부른다. 필자 주)
출전:《신시본토기》
<항해박물관의 해시 성시도>.발달된 수로를 통하여 모여든 선박들이 성시를 이루고있다.
이곳을 《산해경》에서는 해중에 대인들의 저자가 있다고 하였다.
더불어 이곳은 신시의 발원지이고 하늘에 천제를 올리던 마고의 사당인 소도가 있었다.
일명 천후궁(天后宮)궁이라고 부른다.출전: 《신시본토기》
묘도의 천후궁 입구
보탑초(寶塔礁)
묘도 천후궁및 사문새성지
경배를 올리고 있는 방문객, 이곳의 천후궁은 약 5천년동안 항해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던 제단이다.
즉 그 이름이 묘당(廟堂)이고 그 이름을 따서 섬 전체의 이름을 묘도군도 혹은 묘도열도라고 부르고 있다.
廟자는 조선의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다.
역사를 알고 제단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숙연해진다.
이로부터 조정, 조복, 조천, 조례등의 용어가 발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류시원문화의 마고사당은 이렇게 많은 세월의 변화를 견디며 장도에 존재하고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때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지만 이곳의 마고상은 코만 약간 파손된 체 살아남았다고
한다.
▶고구려 유민 인 이정기(732~781)는 안록산 (안사(安斯)의 난(755~764)이 일어나자 이를 제압하고
당 대종의 영태 원년(765)평로치청의 번수가 되었다.
그 뒤 현종의 원화14년(819)까지 무려 55년 동안이나 오늘날의 산동성 전역을 점유하고 지배통치하
였다.
그들은 당시 발해의 북서쪽 영주에서 출발하여 발해의 동쪽을 경유하고 묘도열도를 건너 등주 근해를
경유 치부.청주에 상륙한다.
그러니까 그는 기원전 2400여년경에 전욱고양씨가 다스리던 발제국 위치에서 약 3000여년만에 전욱
고양씨의 원토로 회귀한것이다.(신시본토기 72쪽)
서기 735년 신라는 발해국의 등주침공(733)을 계기로 영해군사(寧海軍使)라는 직책을 성덕대왕이
받게되는데 이로써 대련.연태.명주등에 영해주(寧海州)라는 해상치안사령부를 두고 동해안 전역의
치안권을 신라에서 위임받은것이다.
이때 장보고는 신라소의 제1대사및 진해장군이라는 직책을 받아 활동한다.
(출전;九山, 일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