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
위만(衛滿)의 정체
조선으로 망명하여 박사라는 대우를 받고 100여리의 땅까지 얻어 서쪽 국경의
경비를 맡았던 위만에 대한
사료는 믿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하기로 한다.
"조선왕 만(滿)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천여명과
작당하여 망명하였다.
오랑캐 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조선족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려 새(塞)를
벗어나 패수(浿水)를 건너
진나라가 점유하고 있던 빈 터의
상하장(上下障)에 살았다.
점점 진번조선의 난민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난민들이 늘자 왕 만(滿)은 왕험(王險)에 도읍을 세웠다."
그런데 《위략》의 기록은 조금 다른 데가 있다.
사기의
기록은 패수를 건넜다고 하였는데 위략은 취수(취=水+臭, 수=水)를
건넜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산해경의 남산경은 취수는
패수의 다른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취'자는 물기운
'취'자다. 즉, 급류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위만과 그 일행이 급하게
동쪽으로 달려나와 패수를 건넌 게 아니라 패수의 급류를 타고 진나라의
군사
들이 머물러 있던 빈터에 직접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만번한'으로 돌아 건너오는 경로를 단축하였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대로 만약 양평, 패수, 만번한 등의 위치가 현
북경(北京)의 서북쪽이라면 만리장성
과는 근접한 위치인데 바닷가에 위치했던
옛 연, 제, 조의 난민들이 강제 축성의 노역을 피해 동쪽의 조선
으로
피란했다는 기록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물을 건너 준왕에 항복하고 중국인들이 망명하는 서쪽 경계선에
머물러 조선을 지켜 주도록 신임과
아울러 위임까지 받았다.
증표로
박사라는 호칭을 받고 깃발까지 하사 받았다. 백리의 땅을 봉지로 받고
서쪽을 지키라는 임명을
받은 것이다.
당시 국경의 이름은
'만번한(滿番汗)' 으로 불리울 때다.
그렇다면 '위만(衛滿)'이란
이름은 이름이 아니라 만번한을 지키는 직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 대를 이어받은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인 우거(右渠)
역시 이름도 성도 아니고 거수(渠帥)의 일종인
직책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우거의 아들 이름은 장낙(張락)이라는 기록이 사기(史記) 권20에
나타난 것이다.
기록을 검토해보자.
《史記》「卷 二十」"建元以來 侯者年表 第八 郡名幾表在河東 以朝鮮王子 漢兵圍降侯 元封六年(BC 105)
侯 張낙 使朝鮮謀反死郡除"
※참고: 한고조 유방의 장자방이었던 장량(張良)과
동성(同姓)인 위만이 사기 조선열전에는 장(長)으로
표기되고 이름도
없었으며 조선에는 없던 최(最)라고 표기된 성이 있는 것은 중간의 개서
과정에서 혼동을
주기 위한 고의적인 왜곡인 것으로 간주된다.
당시에도
최씨(崔氏)가 있었으며 한고조의 아들 혜제의 비(妃)가 장씨(張氏)였다.
장량은 창해역사 얘기와 도가의 양생법을 만년에 실현한, 고조선과 관계가
깊은 동이 종족이었다. [필자 주]
풀이:
《사기》「권 20」한나라 창건이래 후자연표 제팔에 기(幾)로 표시된
군명은 조선왕자가 있는 하동에 있다.
그는 한나라의 포위로 항복했던
후이다.
원봉6년(BC 105) 기후였던 장낙(張낙)은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기군(幾郡)은 폐지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낙랑군의 전신 추저군도 읍급으로 격하되고 대신 낙랑군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필자 주]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자였고 우거의
아들이고 위만의 증손자였던 그는 이름이 장낙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성과 이름이 확실히 밝혀지지를 않아서 애매모호하던 위만조선은 장씨조선으로
검토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이라는 얘기다.
더구나 《산해경》의
대황남경에는 바닷 가운데 고기를 잡아 먹고 사는 장홍(張弘)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당시 역사의 기본으로 응용되던
사기의 기록을 믿는다면 전문학자들이 신중하게 검토하여 결론을 도출해야
된다고 믿는다. 시기가 많이 늦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앞의 참고사항을
검토하여 한나라가 張氏라는 성을
피할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됨으로 정식으로
학계의 검토 있기를 제안한다.
《사기》는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그렇지 않고 조선인이라는 증상들은 군데군데 숨어 있다.
갑작스럽게 나라를 잃고 연나라에 남아 목숨을 부지하던 사람들이 연나라
사람으로 가장하였을 것이고
그들은 적지를 떠나올 때 숨겨두었던 자기
나라의 의복과 상투를 틀어 원상으로 회복시키고 귀국했다고
보고 싶다.
그것이 역사의 기록에 올릴 정도로 특기할 사항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또
《사기》의 기록은 진번조선의 난민들이 위만의 뒤를 따라 연나라를
탈출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니까 위만도 진번조선의 잔류민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박물지》라는 책에는 이러한 내용을 요약한 기록이 있다(9권
11항).
...箕子居朝鮮, 其後伐燕之朝鮮, 亡入海 爲朝鮮國...
풀이:
기자가 조선에서 정착해 살았는데 후에 연나라가 정벌하자
사람들이 도망하여 섬으로 들어가 조선국을
세웠다. 하략...
위만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연나라와 대륙에 흩어져 있는 동이 동족들을 생각하라"
... 혹시 출전이 발견되면 알려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위만이 만약 연나라 장수였다면.
귀순하자마자 국가 존망에 가장 중요한
중국(연나라)측의 국경선을 맡길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위만은 불사약의 무역상이었다는 기록이 《씨성으로 본 한민족의 기원》이라는
김성호 박사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한나라의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권6 진시황 28년 (BC 219)조에 천하를
순유하던 진시황은
제(齊)나라 땅이던 산동반도의 남쪽 낭야에서 서복을 삼신산에 파견하고 동왕 32년에(BC 215)에 불현듯
갈석산으로 갔으며, 이곳이 바로 연나라 동쪽의 진번(眞番)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진번조선이 연나라 갈석산 동쪽에 있었다는
지금까지의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불사약에 관한 참모였던 노생(魯生)에게 선문과 고세라는 두 선인을
찾게 했지만 모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자 진시황은 그들의 성곽과 해자 (垓子)를 파괴하고 또 다른 선인인 한종, 후종, 석생을
다시
해외로 추가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로 진시황 35년(BC 212) 어느 날 노생이 진시황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발해로 나가 지초(芝草)와
선약 및 선인을 찾아 다녀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악귀의 방해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략
당시의 무역망이 낭야와 등주, 장도, 진황도 등으로 연결된 주로 약제 (묘도열도, 삼신산 등의 생산품)상
이었는데 만약
위만이 장씨였다면 현재까지 산동반도에 흩어져 있는 장씨족은 물론 장보고 대사 또한
그의 혈통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한단고기가 위서였다면?
요즘도 심심치 않게 위서라는 주장이 나돌고 있는 《한단고기》의「북부여기」
에는 낙랑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사기》나 《한서》에도 없는 기록이기에 진위여부를 불문하고
선택한 것이다.
어느 사서에 그런 희귀한 기록이 보이던가. 이러한 기록들이 위서일 수가 없다는 대답이기도 하다.
수천년전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기록자가 겪고 있는 시대의 용어를
빌리게 되어 있다. 아니면 번거로운 주석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몇가지의 용어들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눈을 붉히고 찾아내어 그나마 실낱처럼 전달되고 있는 전설
같은 선조들의
역사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말문이 막힐 뿐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낙랑국 기록은 기원 후의 기록 밖에는
없다.
《한단고기》의 기록의 내용은 이렇다.
"壬申元年正月 樂浪王 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城 先是 崔崇 自樂浪 山載積寶
而渡海 至馬韓 都王儉城 是檀君
解慕漱 丙午冬也"
풀이: 임신원년 정월(BC 169) 낙랑왕 최숭은 해성에 곡식 삼백석을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에서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왕검성에 이르렀다.
때는 단군 해모수
병오년(BC 195) 겨울이다.
그리고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箕準立 丁未
爲流賊衛滿所誘敗 遂入海而不還"
풀이: 기준이 즉위 후 정미년(BC 194)년에 떠돌이 도적 위만의 거짓말에 속아 패한 후
바다로 피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 위의 두 기록에서 낙랑국왕 최숭은 BC 195년 이미 기준이 있던 낙랑조선으로부터
왕국의 진귀한 보물
들을 실어 마한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기원전 194년 위만 세력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왕궁의 종자들과 함께
왕검성이 있던 장도를
떠났다.
마한땅! 그곳이 상장 탁(卓)의 출생지였기에 오가들의 추대를 받아 준왕을 모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을 강탈한 흔적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미 그곳에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위만에게 뒷일을 맡기고 안전한 곳으로 물러간
것이라고 보여진다.
조선을 밀어낸 외세인 한나라의 세력도
문제이지만 자연의 변화에 민감했던 당시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영토가 지진 등으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는 천지개벽을
당하자 더욱 옮겨야 되겠다는 의지가
굳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또 한 가지의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있다.
《위략》삼국지
동이전 한조 배송의 주서에서...
기원 전 108년 한나라의 침입이 시작되었을 때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은 왕
우거에게 한나라와 화의하
도록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2천호(약 1만명)의 백성을 대동하고 준왕의 근거지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이다.
만약
무력으로 낙랑조선을 정복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면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만여명의 백성들과
떠나는 책임있는 재상을 순순히 떠나
보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사람들을 떠나 보내고 시작한 한나라와의 전쟁은 1년반을 버텼다.
그것도 성(城)을 사수하던 우거나 장군
성기 등은 한나라의 병사에게 죽은 게 아니다.
한나라의 사주에 의한 반역 때문에 자기 편에게 암살당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다 가운데 있던 왕험성이 장기간 버틸려면 비전투병력을 줄여야
한다.
만약 만여명이 성 안에서 먹고 살려면 얼마나 많은 비축품과 식수가 필요하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비전투병력을 최소로 줄여서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1년반을 버티는
전쟁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필사적
저항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기준왕과 약속한 최전선을 지켰던 것으로 생각을 해 보지만 중간중간에 석연치 못한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게 되어 더욱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필자의 발상은 사서의 기록들이 그러한 생각이 들도록 암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밝히고 싶지 않은 조선인들의 애국심과 저항정신을 곡필로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이유는 이렇다.
요즈음 우리들은 중국인들의 파렴치한 고구려사 도둑질을 매일매일 확인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저들의 상습적인 역사왜곡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소위 '위만조선'을 이끌던 장씨 계보를 '궁(弓)'자를
삭제하는
방법으로 성씨까지 분리하여 천민처럼 왜곡했던 사실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뒷날 그의 후손인 장보고 대사 또한 신라 왕실의
문성왕을 옹립하고도 장(張)씨를 궁(弓)씨로 성을 분리
하여 천민이라며 애매모호하게 신분을 격하시켰던 사례가 있었기도 하다.
장보고
대사 사건도 신라의 수치였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기왕에 장보고 대사의 업적을 되짚어 밝혀
보려는 영화 '해신(海神)에서
밝혔드시 김성호 박사가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
상활동 1,500년》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밝혀 놓은 장보고 대사의 억울한 사연도 함께
참고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꼬리를 달아 보았다.
[실증]위만과 한무제의 전쟁서곡
기원전 128년에 시작한 창해군 설치공작이 일년 반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는 20 여년을 참고
견디는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동안 쉴새없이 위만조선은 세력이 강해져서 섣불리 건드릴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거는
한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않고 진번과 진국등의 한나라와의 접촉을 가로막고 중간무역
으로 부를 늘리고 있었고, 주변의 약한 세력들을 흡수하여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흉노와의 접촉이 감지되고 있었고, 한나라의 외신이 되기를 약속한 처지임에도 입조하여
천자를
배알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괴씸죄가 하늘에 닿았지만 당장 무력으로는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흉노와의 전쟁이 어느정도 정리 되자 무제는
서둘러 섭하(涉河)라는자를 내세워 우거와의 설득작업
을 시작 한것입니다.
이 때가 기원전 109 년 이었습니다.
그러나 우거는 섭하가
내세운조건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중히 섭하를 환송하도록 비왕 장(裨王 長)을 환송 책임자로 국경선인 패수까지 내 보냈는데
사고가
발생한것입니다.
설득작업이 실패로 끝나자 섭하는 앙심을 품고 비왕 장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패수를 건너 한군의 요새로
달려가 무제에게 그 사실을
보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비왕이 정확히 어느정도의 직급인지는 알려진게 없지만 총리급 아니면, 비서실장급 정도로 높은
직책인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보고받은 우거는 당장 복수를 계획하고 별르고 있었는데, 한무제는 섭하를 칭찬하고 그를
요동군 동부도위로
임명 하였읍니다.
한서 지리지는 동부도위의 치소를 무차현 이라고 하였는데 무차현은 개주 근방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섭하의
쾌임을 기다리던 조선에서는 보복군을 출정시켜 섭하를 살해하여 통쾌한 복수를 하였습니다.
역사의 전후사를 통하여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충돌에서
두번째 복수 인것입니다.
첫번째는 창해군 사건때 팽오의 살해 사건 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조선의 최후를 가져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후 한무제는 가두었던 죄수들을 병졸로 모집하여 기원전 108년 조선을 정벌하기위한 출정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이병도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고대사연구> 87쪽 에서 동부도위부의 치소인 무차현을
봉황성으로 비정하고 있기때문에
패수로 비정하고있는 청천강에서 살해된 비왕 장의 복수를 위하여 출동
군을 시켜 국경인 청천강을 건너서 평안북도 지역을 통과하고 또
압록강을 건너가 봉황성까지 침투하는데
성공 하였던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얘기가 될까요?
또한 청천강이 패수였다면,
위만의 왕험성이 낙랑군의 패수동쪽에 있다는 <한서지리지> 의 기록은 무엇
일까요? 청천강의 동쪽에는 산맥들만 왕성한 맹산이 있읍니니다.
평양에서 봉황성까지 가는데 길목만 막아서 지킨다면 수개월이 걸릴수있는 거리입니다.
반대로 무차현이 개주근방 이었다면 묘도군도에서의
바다를 통한 침투는훨씬 용이할것으로 생각됩니다.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
王之都王險城 滿得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왕지도왕험성
만득병위재물 침항기방소읍 진번,임둔,개래복속 방수천리.
元封元年 漢使涉何誘諭 右渠終不肯奉紹 何 去至界上臨浿水.殺送何者
朝鮮
원봉원년 한사섭하유유 우거종불긍봉소 하 거지계상임패수.살송하자 조선
裨王長. 卽渡入塞.(正義曰入塞
平州楡林關也)
비왕장. 즉도입새. 정의왈입새 평주유림관야
<사기> 조선열전의 정의는 섭하가 패수를 건너 들어간
요새는 산해관근처에 있던 유림관 이라 하고
있읍니다. 패수가 한반도내에 있다는 학설을 믿지못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 글은 위에 제시된 <사기> 조선열전의 첫번째 기록에대한 정의의 주석입니다.
王之都王險城 滿得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왕지도왕험성 만득병위재물 침항기방소읍 진번,임둔,개래복속 방수천리
[正義 括地志云
朝鮮高麗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정의 괄지지운 조선고려맥동옥저오국지지 국동서천삼백리 남북이천리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재경사동 동지대해사백리 북지영주계구백이십리 남지신라국육백리
北至靺鞨國千四百里]
북지말갈국천사백리
이상 소개드린 <사기> 조선열전의 위만조선에대한 기록은 거의
유일한 기록입니다.
거기에 위만조선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것입니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조선 고려 맥 동옥저등 오국의 땅은 동서로
천삼백리, 남북으로 이천리인데, 경사
(낙양)동쪽으로 동에 이르러 큰 바다와 만나고, 바다안에서 사백리리다.
북으로 영주경계에 이르고,거리는
구백이십리다.
남으로 육백리를 가면 신라국에 이르고,북으로 천사백리거리에 말갈국이 있다.]
낙양에서 동쪽으로 큰바다에 이른다면
조금은 막연한 표현이지만 한서나 삼국사기 권 34 잡지3 에는
동북 5000리라는 기록과 등주라는 지명을 볼수 있읍니다.
등주가 오천리라는 기록은
<동국고승전> 에서도 볼수 있읍니다.
이 곳을 산해경 에서는 조선의 위치를 "동해지내"라 하였고, 한서 지리지 권24 와
자치통감 에서는 "연제
지간"이라 하였읍니다.
이 곳이 갈석을 지나 동으로 낙랑과 현도군을 두었다고 하는 위치로 봅니다.
등주에서
도리진(여순~대련)까지의 거리는 500 리라는 기록을 가탐의 도리기에서 확인 할수 있읍니다.
< 제왕운기>의
"요동별유일건권 두흥중조구이분 홍도만경위삼면 어북유륙연여선 중방천리시조선강산
하략....원문생략
제왕운기의 이 대목을 차근차근 훑어보면
이곳이 한반도가 아니고 묘도군도라는 해석을 하게 될것입니다.
동서의 폭이 천삼백리라면 한반도가 어느정도 걸리는지는 미지수지만 주
강역은 바다안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남북이 이천리라는 설명은 요동반도의 서쪽을 위주로한 천산산맥의 남쪽을 뜻한다고 봅니다.
서쪽으로
영주 경계가 900여리라는 설명은 바다로 윤몰된 요동만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이곳을 영주 또는 청주로 불렀다는 자료는 생략합니다.
이곳이
요동군 험독지역으로 추정되고, < 산해경> 에 "북해지우"라고 기록된 지역으로 봅니다.
그런데 남으로 600리거리에
신라가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괄지지가 작성된 시기는 당나라때 입니다.
당시 신라의 영토는 산동반도의 동해안지방을 관할하고 있을
때입니다.
서기 732년 신라의 성덕대왕은 당 현종으로 부터 영해군사(寧海軍使)라는 직권을 받아 당시 영해 (연태)를
중심으로한 영성, 석도등 신라방이 형성 되었던 지방을 관할하고 있을때를 말한다고 봅니다.
요지음 한창 위세를 떨치고있는 송호정 박사는 <고조선 국가형성과정 연구> 로 서울대학교 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전도가 촉망되는
젊은 교수입니다.
그는 04,10,05 일자로 <단군 만들어진 신화> 라는 놀라운 책을 펴낸바 있읍니다.
그 책안에 요즘 제가 올리고
있는 위만조선에 대하여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를 살펴봤더니.
위만은 누구인가
전략...도대체 위만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의 국적이 문제되는가.
다음은 위만에 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있는 <사기> 조선열전 의 일부 내용이다.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사람이다.....(한나라가 일어난 뒤에)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부관으로 있던 위만도 망명했다.
무리 일천여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
으로 도망했다...... 차츰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제(齊)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됐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 그때가 마침 혜제(惠帝.기원전 194~180)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국경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오랑캐의 군장(君長) 들이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했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주변자역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가 됐다.
*<사기> 권 115 (조서열전) 제 55 이상...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遼東太守即約滿為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以聞,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皆來服屬,【索隱】東夷小國,
後以為郡。方數千里。【正義】括地志云:「朝鮮、高驪、貊、東沃沮五國之地,國東西千三百里,南北二
千里,在京師東,東至大海四百里,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南至新羅國六百里,北至靺鞨國千四百里。」
송교수는 이상으로 위만과 위만조선에 대한 <사기> 조선열전의 소개를 마친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
있읍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위만조선의 위치를 설명하고있는
정의의 주석을 왜 빠틀였는지를 알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正義 括地志云 朝鮮高麗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정의 괄지지운 조선고려맥동옥저오국지지
국동서천삼백리 남북이천리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재경사동 동지대해사백리
북지영주계구백이십리 남지신라국육백리
北至靺鞨國千四百里]
북지말갈국천사백리
송교수는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을 같은책 167쪽의 상반부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못볼수가 없읍니다.
이러한 해석뒤에 따르는 잡다한 주장들은 그렇기 때문에 믿겨지지가
않는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고조선사 학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국조를 부정하는 학설을 이렇게 다루어도 되는
것입니까?
그는
<한국 고대사속의 고조선사> 를 통해서도 산해경의 조선위치를 설명하는 "동해지내, 북해지우(東海
之內 北海之隅) 의 해(海)를 바다로
해석한 사실이 없읍니다.
그러니 바다가 등장하는 주석을 피할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다가 등장하는 사료는 이것 말고도 신
구당서등 많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황당하다고 생각되는 대목들이
등장하면 모두 못본체 외면하였던가 아니면 잘못적은것 이라고 부정하였읍니다.
송교수는 <단군 만들어진 신화> 라는 책의 171쪽을 통하여 위만 조선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읍니다.
현재
중국의 연.진시대 장성 위치를 보건대, 위만의 초기 거주지역은 대체로 천산산맥 동쪽에서 청천강
일대에 이르는 너른 지역을 포괄했던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지역에 기원전 2세기 말경에 위만이 들어와 살면서 이른바 위만조선을 세웠다.
위만은 압록강 유역 일대에서 청천강 유역에
살고 있던 유이민과 토착민을 포섭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연.제에서 온 망명자를 복속시키고, 남방으로 진출하여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근거
지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하략
그렇다면, 위 <사기>의 조선열전에서 말하고 있는 동쪽
바다로부터 위만조선의 위치가 동쪽으로 대해
400리, 북쪽으로 영주 920리 경계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안에 들어올수 없고,
북쪽1400리(천산산맥이
끝나는 북옥저)의 지점에는 즉 말갈의 위치가 되며, 천산산맥의 동쪽으로는 동옥저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천산산맥의
동쪽에도 근거지가 될수 없읍니다.
동옥저는 정의의 주에서 말하는 등주로부터 동으로 1300 리를 벗어날수 없다고 해석 되기때문에
송교수가
말하는 초기 위만조선의 자리에는 맥,동옥저 등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논란이 심했던 동옥저나, 단단대령의 위치가
한반도내로 비정될수가 없고,
더구나 동옥저나, 동예등이 한반도의 함경도나 강원도 지방으로 비정되는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되겠
읍니다.
위만조선의 왕도나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의 평양이 될수 없다는 주요한 근거를 <사기>조선열전의
정의의 주가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송교수는 이렇게 중요한 기록을 유기한체 사서의 기록이 빈곤함을 탓하였읍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근거를 내세워
위만조선의 위치를 왜곡한 것입니다.
만리장성이 지금의 요양까지 쌓여졌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최초로 등장하는 양평의
위치를 현 요양으로 착각한 결론이겠지요.
송교교수의 연,진,한장성에대한 주장은 이렇습니다.
연. 진. 한대의 장성이 말해주는것들
어환이 쓴 <위략>에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물리친 후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객좌현,
능원시, 건평현), 요서군(조양시), 요동군(요양시) 등
5군이 설치되고 장성(燕 長城)이 축조됐다고 한다.
여기서 장성은 물론 연나라시기에 동호를 물리치고 쌓은 장성으로 동호및 흉노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라
할수 있다.
종래 고조선 요령성설을 주장하던 학자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북경 근처에 이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연나라 때 동호와 고조선을 치고 경계에 쌓은 장성이 북경 근처의 산해관이라 주장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개축한 것이다.
동호족과 고조선 세력을 밀어 내고 연과 진. 한대에 설치한 장성과 초소는 바로 요서 지역과 요동 천산
산맥 일대에 까지
이른다.
한(漢)대에는 우북평군, 요서군을 유지하면서 연 장성 이남에 봉화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장성을 통해 한(漢) 은
흉노. 선비. 오환을 이이제이(以夷制夷) 식으로 통치 했던것이다.....중략
그렇다면 기원전 4~3세기 및 기원전 2~1 세기에
해당하는 장성이 요서및 요동 지역에 설치 됐다고 볼때,
이 당시 위만조선의 영역은 당연히 장성 동쪽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북경 오른쪽에 흐르는
난하 근처의 산해관을 염두에 두고 고조선의 영역을 찾는 일은 없어야 할것이다.
과연 송교수의 주장대로 연.진 장성이 요동군의 요양까지 진출 하였을까요?
근거로 제시한 <위략>을
보겠읍니다.
[一]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
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
이
위략은 <사기> 흉노열전의 "연 역축 장성 자 조양(造陽) 지 양평(襄平)에서 근거를 따 온것입니다.
양평은 지금 요하의 서쪽에
설치되었던 요동군의 양평현 이었으므로 같은 장소였다고 봅니다.
이 지명문제 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귀가 따갑도록 설명 하였지만 다시
소개 올립니다.
* <사기> 진시황본기 2세 황제 원년조
* [염철론] 험국(險國)
전국시대 연국의 동부
국경이 요수와 갈석이었다고 기록됨.
* <한서> 장진왕주전(張陳王周傳)
* 윤내현 의 서변경계고
중국정사 조선전 역주
(1) 77~79쪽
秦漢時遼東郡地唐沒於渤海
<독사방여기요> 의 기록입니다. 당시 요동군이 양평의 발해 윤몰후에 전체가 윤몰 된것으로 보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사 4권의 잘못된 기록입니다.
한국사 4권 83쪽의 첫머리에.......
그후 연에는 훌륭한 장수
진개가 있어 인질로 갔었는데 동호가 그를 상당히 신임 하였다.
진개가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그들을 패주시켜 천여리 땅을 빼앗았다......
연은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朝陽)으로 부터양평(襄平)에 이르렀다.
그리고 상곡, 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여 동호에
대항하였다. <사기> 권 110.열전 50. 흉노 >
이 문항의 조양(朝陽)부분은 조양( 造陽)으로 바꿔야 되는것
아닌가?
朝陽과 造陽은 거리와 방향이 차이가 클뿐 아니라 한나라 시대 에는 朝陽이라는 지명은 아에 없었고
그 자리에는 유성 (柳城)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중국정부가 발행한 역사지도에서 확인이 됩니다.
송호정교수가 연북장성이란 성채의 방향을 주장하는 위치도 대략 이 위치를
비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근거가 모호합니다.
고조선 강역에 대한 서영수 교수의 글을 국사편찬위원가 발행한 《한국사》권 4. 79쪽에도 응용하였지만
위로부터 여섯째 줄에 기록된 천산(千山)을
天山으로 기록하는 착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국사 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사》는 현재의 한국사를 총망라한 대표적인 책이고 또 북한으로도 전질이
전달된 것으로 압니다.千山과 天山은 수 천리 이상 떨어진 아주 다른 산입니다. 혼동이 걱정됩니다.
중국의 고대 장성에대한 보조자료입니다 만리장성의 위치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古長城
自木蘭北數百里 有土堆巍然 東至俄羅斯
西抵準噶爾 蜿蜒數千里 道光以前 屯戍墩堠猶存者 土人云 古長城也
萬里長城
長城起臨楡之山海關 跨直隷 山西 陜西 甘肅四省
蜿蜒屈曲 約長五千餘里 東半內外均砌巨磚 黃河之西則築以泥土
* 고장성의 위치는 현재의 만리장성과는 거리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준가르부는 현재의 신강
위그르자치구와 현재의 카자흐의 접경지역이고 동쪽의 러시아 영토는 현재의 몽골이나 연해주로 보는데
어떻게 보아야
할지
* 청때의 만리장성인데 임유라는 지명을 가진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감숙성까지 연결되는데 황하의 동쪽은
큰벽돌로 성을 축조했고
황하의 서쪽은 진흙으로 빚져서 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장성이 과연 그런 것인가,
실크로드라 방영분에는 이와 유사하게 되어있는데 확실히 황하를 경계로
그렇게 된것인지...
출전:청패류초-제일책,지리류
고사변 (2005-09-15 11:34:49)
古長城
自木蘭北數百里 有土堆巍然 東至俄羅斯 西抵準噶爾 蜿蜒數千里 道光以前
屯戍墩堠猶存者 土人云 古長城也
옛장성
(장성의 위치)는목란-위치는 ?-으로부터 북쪽으로 수백리에 연결되어있는데 흙으로 된
구릉의 모습이
우뚝솟아 오른 듯하고,동으로는 러시아-제정시대-이르며 서쪽으로는 준가르-현재 신장위그로 자치구,
러시아령 일리지방;현재
카자흐공화국-에 이른다(장성이) 도광이전에는 망루에(옛 것이도 즉 거의 볼품이
없어도) 군인들을 상주시켰는데 토인들이 말하기를 옛 장성이라고
한다
萬里長城
長城起臨楡之山海關 跨直隷 山西 陜西 甘肅四省 蜿蜒屈曲 約長五千餘里 東半內外均砌巨磚
黃河之西則築以泥土
만리장성
장성은 임유의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직례를 넘어 산서,혐서,감숙 사성에 이르는데 마치 뱀이 가는 듯
이어
지는데 그 길이가 약 오천여리가 된다 동쪽으로는 안과 밖으로 큰벽돌로 쌓고 황하의 서쪽은 진흙으로
축조를 하였다
위만은 불사약의 무역상이었다.
《회남자》권 18 <인간훈>에"진시황이 장성을 쌓아 망할것에 대비할줄은 알면서도 장성으로 망할줄은
몰랐다."고 개탄했듯, 진시황은
불사약으로 불로장생하는 줄은 알면서도 불사약 때문에 죽게 될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역사는 불사약으로 초래될 진황의 영구집권을
시셈했던 모양이다.
위의 논의에 등장하는 선인이 불사약 채취자로서 이미 언급한 위만조선의 왕호였고, 선인들의 추장이던
진인은 바로 진번 진후로
연결된다.
따라서 진후(眞侯)였던 위만은 원래 불사약 무역상이었다.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에서)
*여기서 위만을
진후(眞侯)라고 하는것은 사기에서 위만을 요동의 이족들을 통솔하는 외번의 진후를 임명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기》일부책에는 막후(莫侯)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진후(眞侯)의 오기라는 것이다.
당시 위만은 진번을 다스린다고 하여 진후로 봉한것이라고 하였다. 위만은 진후가 되는 조건으로
막대한
철제무기를 지원받아 위만의 종속을 반대하던 진번,임둔,옥저,말갈등을 복속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해로의 교통을 막아 중계상으로서 이익을
챙겼다.
[실증] 위만(衛滿)의 교역(交易) 루트
우리는 고조선의 역사를 구분할때 대체적으로 단군시대와 기자시대, 그리고 위만시대로 나눈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으로 마지막을 맡았던 위만이라는 임금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모르는 점이
많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위만을
'故燕人'이라고 하여 옛날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정황
을 종합하여 분석하면 그는 전쟁전부터 조선과 교역을 담당하던 상단의
거수였다.
적어도 휘하에 천여명 이상을 통솔하고 바다길을 통하여 조선과 연나라의 교역을 담당하던 무역인이라는
얘기다.
그러한 무역인들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질 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전부터 교역일을 계속하던 조선인이었다는 추정을 하는것이다.
당시 준왕은 휘하에 있던 천여명의 상단을 거느리고 망명을 요청한
위만을 반갑게 받아드리고 박사라는
호칭을 주고 규(깃발)까지 내려 우대 했던게 사실이고 위만은 백리의 영지를 받아 충성을 다하여 서변의
국경을
지켰던것도 사실이다.
결국 그는 약탈자로 낙인이 찍혔지만 준왕의 뒤를 맡아 조선의 국호를 이었던것이고, 모든 사건들은
준왕의 신임속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책임은 조선에게 있는것이다.
조선은 그를 이민자로 받아드리고 시민권을 부여 하였으므로 그는 당당한 조선인이다.
이제 와서 조선의
계승자임을 부정하는것은 옳지 않다.
중국은 위만을 연나라 출신이라고 이간질을 하지만 흔들릴 필요가 없는것이다.
그것은 제 조상 얼굴에 침을 밷는
격이다. 우리는 이제 조선의 왕이란 이름으로 끝까지 항전하며 한나라
에게 맞선 우거의 조부 위만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사진: 상 -《후한서》권 75조선열전 85 위만은 한나라와 교역하던 잡화상이었다는
기록.
하 - 위만이 활동하던 교역 루트와 기자족과 탁장군의 이동예상도
대인(大人)들의 교역 시장은?
불로 장생 약을 거래하기 위한 시장은 어디 있었을까? 《산 해경》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이것이 시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것도 대인들의 시장이 바다안에 있었다는 이 기록은 신시(장도)가
교역시장의 중심이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것이다.
"대인의 저자가 바다 가운데 있다"
"동해의 밖 대 황 한 가운데 산이 하나 있는데 대언(大言)이라고 도 부르며 해와 달이 나오는 곳이다.
파 곡 산(波 谷 山) 이라고 하는
산은 대 인 국이 있는 곳이다.
대인이 장사를 하는 저자 또한 높은 고산으로 형상이 집과 같이 생겼으며 대 인당이라고 도 한다.
한 대인이
상면에 걸터앉아 위엄을 부리고 있다".(1)
大人 之 市 在 海中 <산 해경> < 해내 북경>
東 海 之 外, 大 荒 之 中, 有 山
名 曰 大言, 日 月 所出, 有 波 谷 山 者, 有 大人 之 國, 有 大 人 之 市,
名 曰 大 人 之 堂, 有 一 大 人 其
上,
張 其 兩 耳. <산 해경> <대 황 동경>
대인의 나라를 다시 확인합니다. 결코 남의 나라가 아닙니다.
후한시대에 허신(許 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 解 字)]는 한자의
근본 원리를 해설한 "절대적" 권위를
가진 책입니다. 그 책에서 "동이(東夷)" 의 해설을 옮겨 봅니다
東(동) 夷(이), 東方 之
人 也. <唯 東夷 從 大 大人 也. 夷 俗 仁, 仁者 壽, 有 君子 不死 之 國. 故 孔子 曰,
道不行 吾 欲 之 君子 不死 之 國,
九夷 承 孚 浮 於 海 有 以 也.>
해설;[동이(東夷)란 동쪽 사람들 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
(有 君子 不死 之 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 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
(君子 不死 之
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고 싶다고 하였다].
▶지도로 보는 위만의 교역 루트
위만은 본래가 교역을 위하여 조선을 왕래하던 잡화의 무역상이었다.
그러나 특히 조선의 수출품중에서 불로초와 선약을 많이 취급하던 고급 상인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장수식품으로 효과가 출중하다는 말린 해삼도 생산되고
있다.
* 위에 제시한 《후한서》의 위만에 관한 전체글을 풀어본다.
論曰:昔箕子違衰殷之運,避地朝鮮。始其國俗未有聞也,及施八條之約,使人知 禁,遂乃邑無淫盜,
門不夜扃,[一]回頑薄之俗,就寬略之法,行數百千年,故東夷通 以柔謹為風,異乎三方者也。
苟政之所暢,則道義存焉。仲尼懷憤,以為九夷可居。或 疑其陋。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亦徒有以焉爾。其後遂通接商賈,漸交上國。 而燕人詹滿擾雜其風,[二]於是從而澆異焉。老子曰:
「法令滋章,盜賊多有。」若箕 子之省□文條而用信義,其得聖賢作法之原矣!
注[一]扃,關也。
注[二]擾,亂也。
贊曰:宅是嵎夷,曰乃暘谷。巢山潛海,厥區九族。嬴末紛亂,燕人違難。[一]
雜華澆本,遂通有漢。[二]眇眇偏譯,或從或畔。[三]
注[一]謂詹滿也。
注[二]詹滿入朝鮮,既雜華夏之風,又澆薄其本化,以至通於漢也。
注[三]偏,遠也。
<옛날 기자가 은나라가 쇠약하여 조선으로 피하였을때, 조선의 전래풍속은 듣지 못하였더니, 기자의
범금 8조를 실시한 후 읍네에서는 간음과 도적이 없어져 밤에도 문을 닫는일이 없었다.
완고한 풍속이 천 수백년동안 행하여져 옛날 동이 이후
겸손하고 부드러운 풍속이 지속되었다.
이를 '삼방자' 라고 불렀다.
비록 관청에서만 도덕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공자는 도덕이 실추된 땅을 떠나서
동이에서 살기를 원하였다.
혹자들은 동이가 누추할것이라고 말류 하였지만 공자는 "군자가 사는곳이 어찌 누추할것인가" 라고 말하며
가기를 원하였었다.
그 후로 서로 물건을 팔고 사는 통상이 이루어지자 연인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가 그 통상을 맡았는데 색다른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다.
노자가 말하기를 "도적이 많아지면 법령도 불어난다"고 하였는데 만약 기자가 서로 신의를 믿는 법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쩔뻔 하였는가.
이 모든것이 법을 만드신 성인의 덕일것이로다. >
주(一)에서 기자가 떠나서 도착한 조선은 신찬이 말하기를 《서경》에서 얘기하는 우이지역 즉 구족들이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살던곳이고, 연인 위만이 분란을 이르키기 전의 조선이다.
*따라서 《상서주소》로 전하는 기자의 도착지는 위만이 출입하던 곳이고 역시 청주에서 바다를 건너서
바다안에 있던 장도로 확인이 된다.
*海岱惟青州疏堯時青州當越海而有遼東也○胡渭曰疏亦未盡疑漢武所開樂浪元菟二郡皆古嵎夷之地在青州
之域者嵎夷羲仲所宅朝鮮箕子所封不應在化外先儒但云有遼東非也
<상서주소 권4고증>
대강의 해석이다. 해대지역에 있던 청주는 요나라때 바다를 건너 요동과
소통하던곳이다.
호위가 말하기를 의심이 없는건 아니지만 한무제가 열었든 낙랑.현도 2군이 모두 옛날 우이지역에 있던
청주지역이다.
우이는 희중이
삶을 열었든 곳이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불응하고 밖으로 나간곳이다.
단 요동지역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위만은 불사약의 무역상이었다는 기록이 《씨성으로 본 한민족의 기원》이라는 김성호 박사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면을 통해서 위만을 조명해 본다.
그리고 한나라의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권6 진시황 28년 (BC 219)조에 천하를 순유하던 진시황은
제
(齊)나라 땅이던 산동반도의 남쪽 낭야에서 서복을 삼신산에 파견하고 동왕 32년에(BC 215)에 불현듯
갈석산으로 갔으며, 이곳이 바로
연나라 동쪽의 진번(眞番)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진번조선이 연나라 갈석산 동쪽에 있었다는 지금까지의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불사약에 관한 참모였던 노생(魯生)에게 선문과 고세라는 두 선인을 찾게 했지만 모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자 진시황은
그들의 성곽과 해자 (垓子)를 파괴하고 또 다른 선인인 한종, 후종, 석생을 다시
해외로 추가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로
진시황 35년(BC 212) 어느 날 노생이 진시황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발해로 나가 지초(芝草)와
선약 및 선인을 찾아 다녀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악귀의 방해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략.
( 졸저 《신시본토기》352쪽)
당시의 무역망이 낭야와 등주,
장도, 진황도 등으로 연결된 주로 약제 (묘도열도, 삼신산 등의 생산품)
상이었는데 만약 위만이 장씨였다면 현재까지 산동반도에 흩어져 있는
장씨족은 물론 장보고 대사 또한
그의 혈통일 가능성이 농후하다.(필자주)]
그러면 《사기》봉선서에 언급된 연나라 불사약 무역항은
갈석산 근처의 진번이었고, 제나라 불사약
무역항은 산동성 남부의 낭야였다는 결과가 된다.
두 지점에서 산동 북부의 봉래로 온 후 맑은 날이면
바다건너로 바라다보이는 요동반도까지는 묘도열도의
섬들로 연결된 징검다리 항로다. 하략. (<씨성으로 본 한일 민족의 기원> 105쪽)
]
낭야(일조)의 역사와 지역적 성격
주변으로 거현, 임기.서우여.서국등의 고대
동이국가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월(越)나라가 있었고 임기에는 고대 단군의 설화를 석각으로 남겨둔 무씨사당이 있다.
그리고
거국(거현)에서는 조선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진 토기가 발굴된 곳이다.
곡부주변에는 소호김천씨의 릉이 있고 이 근방에서의 주생산품으로 명주가
있으며 노상(魯桑)이라는 우수한
뽕나무가 생산된다. 한국의 뽕나무 역시 70%가 노상종이다.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면 연운항에 장군애 석각이 있고
소주에는 실크무역의 중심이 되는곳이다.
주변으로 수백개의 섬으로 구성된
주산군도가 있다.
이 주산군도에는 백제.신라.왜등의 해상활동 본거지가 있었다.
<일조는 “해가 뜨면 가장 먼저 밝은 곳”이라는 전설에서 나온 말이다.
일조시는 중국연해의 중부,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1985년3월에 현급의 일조시를 설립했고 1989년6월에 일조시로 진급했다.
일조시는 현재 산하에 동항구,오련현,거현,남산사무소 및 일조개발구,산해천관광휴양구가 있다.
총면적은5310㎢이고 총인구는 277만이다.
일조시는 전세계경제와 중국경제 중의 전략지위
세계경제의 구성으로 보면, 일조시는 새 유라시아 대륙교 경제 대와 동북아시아 경제권, 환황해 발해경제
권의 교차지대에 있다.두 국제경제지역의 연결점이다.
중국경제의 구성으로 보면, 일조시는 중국 황하 유역 와 동부연해개방지구의 교차지대에 있어서 동부지구와
중서부지구 경제교류의 중계소이다.
중국 서부 경제발전 전략으로 보면, 일조시는 중국 중서부지구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동대문이다.
일서(일조--서안)철도는 산동성 남부를 가로지르고 황하 북안을 따라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며 중국남북을
종관하는 경호,경광,경구,초류 사대철도 간선과 교차하고 임기,곡부,연주,하택,신향,후마,진성 등 도시를
경과해서 서안에서 농해,난신철도와 합병한다.
이 철도는 중국의 동,중,서부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일조시는 새 유라시아 대륙교의 동방 교두보로 중서부지구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방면에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갖추고 있다.
지리적 우위치. 일조시는 중국 해안선의 중부,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에 황해를 사이
두고 일본,한국과 마주해 있어 지리적 우세가 뛰어나다.
일조시는 교통 운수가 아주 편리하다.
국가 일류항구인 일조항,남산항은 다 대외에 개방된다.
일조항은 중국 연해 10대 중합적인 항구의 하나가 되고 세계 10대 석탄수출 항구에 들어간다.
남산항은 중국에서 가장 큰 5만 톤급의 액체 화공품부두가 있다.일조의 철도는 일조시에 나가서 중국
내지를 경과하고 서쪽으로 뻗어 나가 유럽아시아철도와 연결해서 세계에서 제일 긴 유라시아 대륙교
교통무역간선을 형성한다.
일조는 유라시아 대륙교의 동방 교두보의 하나로 비준된다.일조--북경특급열차,일조--정주 직통급행열차
등 여객열차가 이미 개통되었다.매일 북경,정주,제남,임기로 떠나는 여객열차는 4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