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과 칠성(七星) 신앙
최홍(문학 작가)
우리 사찰에서 칠성 신앙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사찰 한쪽에 칠성각(七星閣)이라는 전각을 지워놓고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칠성 신앙은 원래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간 신앙(일부 학자들은 칠성 신앙이 중국의 도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선조들의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북두칠성 별자리가 그 증거이다.)의 하나였으나, 불교가 우리 민족에게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민간 신앙과 습합되면서 칠성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 자체가 원래 다른 종교들처럼 배타적이 지 아닌 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보다 큰 이유는 불교를 대중화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우리 전래의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찰에 칠성각이 세워진 것은 실상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사찰에 칠성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였기 때문이다. 왜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야 사찰에 칠성각이 등장하기 시작하는가. 이는 조선 시대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불교가 우리 전래의 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서 당국의 탄압을 모면하고, 사람들의 발길을 사찰로 돌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찰의 칠성각 안에 봉안된 칠성탱화를 보면 주존불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가 약사여래와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양쪽에 협시보살로 일광(日光)보살과 월광(月光)보살을 두고 있는 점도 그렇지만 왼손에 약병, 또는 약을 담고 있는 함으로 보이는 금함을 들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원래 북극성(北極星)을 상징하는 부처로, 약사여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데도 이처럼 약사여래화 시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질병과 재난으로부터의 구제 등 약사여래의 현세 이익적인 성격을 치성여래에게도 부여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때문에 칠성각에서 중생들은 수명 연장 등 현실적인 기원을 쏟아냈고, 특히 부녀자들은 아들이나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기도 했던 것이다.
출처 : 천년의 비밀 운주사 (최홍 지음) 106~107쪽
<전북 남원 산내면 서진암 칠성각 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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