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비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삶도 변한다.
내가 좋아질 때 삶도 좋아진다.
내가 변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갖는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
– 앤드류 매튜스 –
진분홍의 천상화원, 비슬산 참꽃군락지가 냉해로 ......
대구 달성군은 비슬산 자연휴양림 일원에는 매년 4월 100만㎡에 달하는 전국 최대 참꽃군락지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 왔었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취소 되고 말았다.
두 번에 걸쳐 험한 등산로를 따라 다녀 간 곳이지만 참꽃을 보기가 어려웠는데
작년엔 부근에 사는 지인을 통해 참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에 가슴 설레임으로 달려가 환상속에 눈호강을 했었다.
우리 나라 진달래 명산으로 산 정상부 능선에 진달래 군락지!
코로나로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아내와 함께 달려가 비슬산 매표소에 9시에 도착했으나
인파로 1시간을 기다려 출발하는 전기차를 타고 35여분 달려 해발 1000m의 정상에 도착했다.
왕복 1만원 요금으로 대견사 입구까지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 남녀 노소 누구나
비슬산의 아름다운 산세와 진달래꽃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며칠 간의 강추위로 연분홍 물감을 뿌려 놓은듯 온 산을 붉게 물들였던 풍경들은
삭막한 겨울 풍경으로 참꽃들은 시들어 고개 숙였고 실망과 함께 강풍으로 추위가 온몸을 엄습해 오는 시간들......
대견사 사찰을 탐방하고 참꽃 군락지를 2시간여 트레킹, 가까이 있는용연사로 향했다.
내년의 화려한 천상화원을 상상하며 오랫만에 맑은 공기 마시고 스트레스를 푸는 행복한 하루였다.
비슬산 (琵瑟山) 대견사(大見寺), 참꽃 군락지
2011년 11월 대견사 재건 공사가 착공되어 2014년 3월 적멸보궁, 요사채, 산신각, 목조와가 등 건물 4동이 완공되었다.
이로써 대견사가 폐지된 지 100여년 만에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30m, 높이 6m의 축대가 남아 있고,
무너진 구층석탑과 거대한 석조선각불상,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洞窟臺座) 등이 있다.
이 중 축대는 현재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도량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도굴꾼에 의해서 무너진 구층석탑은 원래 높이 4.5m, 기단 너비 1.2m이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전성기에 이 절은 비슬산의 중심사찰이었다고 한다. 산 밑에 있는 소재사(消災寺)는 옛날 이 절의 식량이나 각종 생활용품·의식용품 등을 공급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소재사 앞터에는 방앗간을 비롯하여 두부공장·기왓골 등도 있었다 한다. 현재 이 절의 축대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으며, 가뭄 때면 달성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
비슬산은 해발1,084미터의 장중한 산세와 기암괴석, 맑은 공기, 울창한 산림뿐만 아니라
유가사, 소재사, 용연사 등 전통사찰과 대견사, 비슬산자연휴양림 등을 연계한
관광명소로도 꼭 한번 찾고 싶은 곳으로 유명하다.
달성군에서는 이러한 유서깊은 비슬산과 각종 문화유적, 참꽃군락지를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널리 알리고 시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1997년부터 매년4, 5월경 비슬산참꽃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참꽃군락지는 이렇게 화려했었는데......
4월의 강추위로 참꽃은 시들어......
영화 촬영지로 각광 받다
늦은 점심으로 별미 불닭고기를 ......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용연사(龍淵寺)
신라 선덕왕 3년(914) 보양(寶壤)이 창건하고 조선 세종 1년(1419) 천일(天日)이 중건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선조 36년(1603) 탄옥(坦玉)·경천(敬天) 등이 사명대사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광해군 13년(1621) 범종각을 지었지만 효종 1년(1650)에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효종 4년(1653)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하였다.
효종 6년(1655)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지었다.
효종 9년(1658)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
현종 1년(1660)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현종 11년(1670) 천왕문 앞 석교를 완성했고 현종 17년(1673)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세웠다.
경종 2년(1722)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하였는데 당시 절 규모는 2백 수십 칸에 이르렀고 거주하는 승려수도 500여 명에 달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을 비롯하여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