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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동화 작품론〛
전후의 신산스러운 삶에 대한 긍정적 조망
김 문 홍
1. 전지적 시점을 통한 조감도
박홍근 선생은 1919년 함경북도 성진시 쌍포동에서 2남으로 태어나 1950년 12월에 부인과 형, 그리고 조카와 함께 남으로 피난했다. 그는 2006년 영면할 때까지 89세를 일기로 동시, 동화, 아동소설 등 아동문학의 전 분야를 섭렵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어진 성정과 종교적 인품으로 인해 동료 작가와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그가 간지 10여 년이 지났지만‘박홍근 문학상’이 생전에 제정되고 시행됨으로 인해 그 고고한 인품과 문학적 향훈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박홍근의 장편 아동소설 『마음 속에 태양을』은 200자 원고지 1천 장이 조금 넘는 분량으로, 요즈음 추세로 따른다면 장편 3권 정도나 되는 아주 긴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많은 분량으로 책읽기에 대한 호흡이 짧은 요즈음 어린이들에게는 벅차 보이지만, 서사의 재미와 사건 전개의 빠른 템포로 인해 금세 읽힐 수 있는 가독성이 아주 좋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전후의 신산스러운 삶을 유머러스한 긍정적 조망으로 서술되어 있어, 시대적 풍물을 훑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그 시대적 배경이 1960년대의 어느 항구도시로 설정되어 있다. 저마다 형편이 어려운 사정으로 흘러들어온 주민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통해 당시의 의식주 생활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성인들인 주민들의 삶보다는 아이들의 일상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어, 독자들인 어린이들 역시 작중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감정이입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의 시점은 3인칭 전지적 시점과 3인칭 객관적 시점이 혼합되어 있다. 전지적 시점은 작가의 시점이고, 3인칭 객관적 시점은 작중인물들인 어린이들의 시점으로 구분되어 있다. 작가는 시대적 조망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작품 속에 개입하여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적 환경을 설명한다. 그러다가도 얼른 아이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 그들로 하여금 사건을 전개시키도록 하는 기법을 택하고 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인지 능역이나 현실인식이 자라지 못한 아이들의 시각으로 시대사회적 배경을 설명하고 조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①
경숙은 우산을 접어 채소 더미 위에 올려놓고 손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보통 아이들이라면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겠지만 영걸은 태연하다. 영걸의 형 영철이만 해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 영걸은 자기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다.
②
그 골목은 영걸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골목 안에 지금은 남의 집이 된 영걸이네 옛집이 있다. 그 집에서 영걸이가 태어났을 땐 할아버지도 살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영걸의 이름을 지었다. 영걸이라는 이름은 영웅호걸이라는 한문자 꽃부리 영 자와 호걸 걸 자 두 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다시 말해서 뛰어난 인물이 될 거라고 예측했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③
향미의 아버지가 경찰에 구속된 지도 벌써 닷새째였다. 밀수 사건은 신문에도 보도 되었다. 밀수품은 몇 억대에 달하는 타일이며 세면대며 양변기라고 했다.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생산되는 물건인데, 허영심이나 사치성이 강한 사람들은 값이 비싸도 외국제를 사용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았다. 그런 약점을 노려 한꺼번에 큰돈을 쉽게 벌려고 엄청난 밀수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 11.‘밀수사건’중에서
인용문 ①은 작품의 주인공인 영걸이가 어머니 대신 채소 손수레를 끄는 장면이다. 같은 반인 경숙이가 영걸이를 도와 손수레를 함께 밀어주고 있다. 두 번째 문장인‘이런 경우......영걸은 태연하다.’는 작가가 작품 속에 개입하여 주인공인 영결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어머니가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경우, 그것을 숨기고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러나 영결은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러한 부끄러움을 마다 않는 마음을 작가가 조곤조곤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②는 작가가 개입하여 영걸이의 집에 대한 내력과 할아버지가 영걸의 이름을 지는 내력과 뜻을 설명하고 있다. 주인공 영걸이의 입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설명할 때는 과거 회상이나 독백(혼잣말)을 통해 서술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서술이 길어지고 어색하기 때문에 작가가 작중 인물을 대신하여 간명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③은 향미 아버지의 밀수 행위를 작가가 개입하여 서술하고 있는 대목이다. 밀수란 어떤 행위이고 밀수를 하는 행위의 이유를 작가가 서술하고 있다. 이런 작가 개입의 서술이 없다면, 성인인 어른들이 그것을 설명하거나 아이들이 서로 대화하는 행위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서술이 길어지거나, 아직 시대사회적 현실인식이 없는 아이들로서는 밀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거나 표현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이 작품 속에는 작가가 작품의 서사 속에 개입하여 건물의 지정학적 위치와 내력에 대한 설명,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에 대한 설명, 작중 인물의 내적 심리에 대한 설명을 작가가 개입하여 간명하게 서술하는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한 설명이 끝나고 나면 작가는 곧바로 작중인물들에게 서사를 넘겨주고 그들 스스로 사건을 전개시키도록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이러한 기법은 시대사회적 사건이나 흐름에 대한 경우에 주로 활용하고 있어 서사의 템포를 조정하고 있다.
2.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시각
이 작품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한계 상황에 놓인 영걸이네 가족을 큰 서사 축으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동네의 삶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미덕은 그러한 절망적이고 불운한 상황 속에서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서사의 낙관적 태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영걸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지만 현실의 불운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가 채소 장사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고나 탓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영걸의 의지력에 대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고 있다. 영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적극적 태도뿐만이 아니고, 자신의 이웃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앞장서서 해결하거나 도와준다.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시각을 바탕으로 봉사, 협동, 진취적 모험 등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인물이다.
①
영걸은 그제서야 발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양말 앞이 헤어져서 빨개진 엄지발가락이 쑥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영걸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했다. 영걸의 발가락이 나온 것을 맨 먼저 발견하고 웃어댄 향미는 저희 집이 잘 산다고 늘 거드름을 피우는 아이다. 철호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분, 이 감자는 오늘 점심시간에 먹을 내 점심입니다.”
영걸은 말하고 하하 웃었다. 자기를 창피 주려고 한 향미나 철호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웃고, 영걸은 마룻바닥을 쿵쿵 구르면서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 2.‘감자가 나왔다!’사건
②
가난한 산동네에는 특히 아이들이 많다. 그러나 영걸이처럼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려는 아이는 없다. 철민이는 난생 처음으로 남의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영걸이어서 더욱 좋았다. 철민은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철민이도 영걸이처럼 아버지가 없다. 몇 해 전에 집을 나간 후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어머니와 동생이 하나 있는 철민이네는 어머니가 생선 통조림 공장에 다니고, 철민이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신문팔이를 해서 살아간다. 영걸이네나 철민이네 모두 어렵게 살아가는 건 마찬가지이나, 두 집은 큰 차이가 있다.
- 3. ‘거리의 신문팔이’중에서
③
“형, 신문 파는 게 뭐가 창피해?”
“우리 집은 체면이 있잖아.”
형의 가장 큰 단점은 툭하면 체면을 내세우는 것이다.
“체면이 다 뭐야.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사람은 형편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성실하게 말야.”
영철은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다. 영철이도 형편대로 살고 또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체면이라는 것을 고집하는 것이다.
- 3.‘거리의 신문팔이’중에서
위 인용문들은 작품의 주인공인 영걸이의 도덕적 가치관이나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영걸은 작가가 전후의 절망적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삶의 긍정적 태도를 역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조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이를 헤쳐 나가는 보편적 인물상을 이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걸이란 인물은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항상 가슴 속에 밝은 태양을 안고 살아가는 의지의 인물이기도 하다.
인용문 ①은 양말이 헤어져 그 구멍을 통해 삐져나온 자신의 발가락을‘점심시간에 먹을 내 점심’이라고 자랑스럽게 내뱉는 영걸의 능청맞은 태도를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느 친구들 같았으면 그것을 부끄럽거나 창피하게 생각해 감추려고 안간힘을 쓸 터인데도, 영걸은 스스럼없이 그 위기를 유머러스하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삐져나온 발가락은 현실의 가난을 상징하고 있다. 가난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고 오히려 그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더 가난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난을 부끄러워함은 곧 자신의 어머니나 처지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넌지시 풍자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영걸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속마음이나 곁 마음으로도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②는 남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영걸이의 연민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면이다. 아버지 없이 생선 장사를 해서 살림을 꾸려 나가는 철민이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함께 신문을 팔아주면서 도와주는 영걸이의 의젓한 마음과 태도를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 않는 여느 친구들과는 달리 이타심을 발휘하는 영걸이의 도덕적 행동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결국 도움을 받은 철민이는 나중에 영걸이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사서 도와주게 된다.
인용문 ③은 철민이를 도와 신문 파는 일을 목격한 중학생 형 영철이가 남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를 도와주는 동생에게 핀잔하자, 오히려 사람은 형편대로 살아야 한다고 되받아 치는 장면이다. 형 영철이도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한다. 형 영철이는 이러한 동생의 태도와 행동을 통해 자신의 이기적 태도를 버리고 집안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도덕적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게 된다. 이 작품 속에서 형 영철은 동생의 행동을 도덕적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비뚤어진 태도와 행동을 고쳐나가며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해 나간다. 즉, 동생 영걸이가 형인 영철의 반면교사가 되어 자신의 행동을 고쳐 나가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이 작품 속에는 영걸의 태도와 행동이 다른 친구들에게 인간의 이기심을 고쳐 나가는 계기가 되고, 어지러운 사회 질서를 바로 잡아 나가게 되는 도덕적 변화의 기폭제가 된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 영걸이의 행동을 통해 도덕이 무너진 사회나 인간들을 바로잡아 나가는 이상적 인물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형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바람직한 인간상이 될 수 잇다는 것을 작가는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3. 희망과 꿈에 대한 신기루
이 작품은 영걸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후의 신산스런 삶을 헤쳐 나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의지를 그려 나가고 있는 아동소설이다. 요즈음 어는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즈음의 어린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지 의심스럽다. 그런 시대적 환경에서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회고담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이런 과거지향적인 작품이 요즈음의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지 다소 부정적 견해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이야기로 형상화한 도덕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을 도덕 교과서 같은 교훈성에 탈피시켜 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그곳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고래가 잡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영걸이를 비롯한 아이들이 그곳으로 달려가는 대목이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헛소문으로 드러나지만, 이 작품 속에서 그 장면이 주는 상징적 은유로서의 문학적 장치는 이 작품을 대중적 재미에서 문학적 완성도로 끌어올리고 있다.
고래는 아이들에게 신기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누추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그것은 정말 신기한 대상인 것이다. 그것이 어느 곳에 있더라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이들은 그것을 보지 않고서는 좀이 쑤실 것이다. 왜냐하면 고래는 신산스런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꿈이고 이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①
철민은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었다.
모래밭에 벌렁 나자빠진 아이들은 저마다 킥킥거리기도 하고 아. 아, 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군함보다 큰 고래 구경을 하겠다고 철민이와 영걸을 따라 먼길을 온 것이 어이없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했던 것이다.
철민은 칠성 아저씨가 원망스러웠다. 여느 때도 신문 지국에서 신문배달이나 신문팔이 아이들을 거짓말로 곧잘 속이는 아저씨인데도 군함보다 더 큰 고래가 포구에까지 밀려 나왔다는 이야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 14.‘다시 바빠진 영걸’중에서
②
철민은 군함보다 큰 고래 이야기를 들은 경위에 대해서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아냐. 너 때문에 오래간만에 유쾌했어. 형길아, 그렇잖아?”
“그래, 군함보다 큰 고래를 봤다면 그저 놀라기만 했지, 이렇게 유쾌하지는 않았을 거야.”
군함보다 큰 고래를 보고 싶은 호기심에 먼데까지 왔는데, 고래는 있지도 않았지만 유쾌하기만 했다. 아이들은 사실 실망보다 유쾌한 감정이 더 컸다.
“야아, 오늘 너무 재미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며 형길이네 동네의 나이 어린 아이가 불쑥 소리를 질렀다.
“정말 재미있다아! ”
합창하듯 외치는 아이들이 소리가 바닷가 산에 메아리졌다.
아이들은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바닷가를 걸어갔다. 철민이만은 아무 말 없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내가 부담해야 한다.’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린 철민은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철민이가 생각한 것은 버스 차비를 부담하는 것이었다. 자기 잘못으로 아이들이 먼 곳까지 와서 허탕까지 쳤으니 응당 그러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 14.‘다시 바빠진 영걸’중에서
철민이와 영걸이는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군함보다 큰 고래가 잡혀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을의 다른 아이들도 두 사람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들은 고래를 보러 가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선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해 보니 그것이 헛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낙담에 젖는다.
인용문 ①은 고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들이 실망에 빠져 모래받에 벌렁 나자빠져 히히덕 거리는 모습을 나타낸 장면이다. 결국 철민이와 영걸이는 칠성 아저씨에게 속고, 아이들은 철민이와 영걸이에게 속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꿈이고 이상인 군함보다 큰 고래는 없고 누추한 현실만 그들 앞에 펼처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성 아저씨는 왜 철민이와 영걸이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일까. 아이들에게 그저 헛설음을 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현실을 버텨 나가는 아이들에게 잠시나마 거짓으로라도 꿈을 품게 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칠성 아저씨가 가슴 속에 품은 꿈과 희망을 아이들에게 전염시켰는지도 모른다. 어렵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잠시 동안이라도 꿈을 품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그랬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그런 허황된 꿈을 믿은 아이들 자신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인용문 ②는 산산조각 부서진 고래의 꿈 앞에서 허망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결국 아이들은 헛소문 때문에 거기까지 간 것을 후회하지도,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칠성 아저씨, 그리고 철민와 영걸이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재미있어 한다. 그들은 왜 그것을 재미있어 할까?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스러운 삶을 잊게 해준 헛소문에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헛걸음이었지만 자신들이 그런 꿈과 희망을 향해 얼마나 목마름을 느꼈으며, 또한 현실의 누추함을 잠시나마 잊게 된 그 설렘을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 속의 바닷가에 떠밀려 온 군함보다 큰 고래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드러난 하나의 신기루이다. 작가 역시 전후의 신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잠시나마 꿈을 안겨줄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신기루의 꿈을 꾸게 하려는 의도가 결국 큰 고래 이야기인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 속의 군함보다 큰 고래 이야기는 전후의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내리는 하나의 축포이며, 희망과 꿈에 갈증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내리는 단비인 셈이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문학적 장치는 이 작품을 대중적 재미에서 문학적 향훈을 느끼는 하는 하나의 훌륭한 문학적 장치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문학적 장치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축구 시합니다. 축구시합은 중반 이후에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과 힘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는 의도로 그려지고 있다.
그때 석이가 소리를 질렀다. 형일이와 용기가 골목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형일아, 오늘 축구 시합해?”
욱이는 까만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 하기로 했어.”
형일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 신난다!”
꼬마들은 손을 맞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그런데 형일아, 눈 위에서 공을 차는 거야?”
“아냐. 10시에 양팀 선수들이 모여 눈을 치우기로 했어. 모두들 집에서 싸리비를 가지고 가야 해.”
“우리도 싸리비 가지고 간다!”
꼬마들은 삼석이네 집으로 가는 형일이와 용기 뒤에 대고 소리쳤다.
- 18. ‘축구시합을 앞두고’ 중에서
위 인용문 영걸이네 마을 아이들은 다른 마을 아이들과의 축구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축구 선수들의 유니폼을 만들기 위해 폐지를 모아 돈을 마련하고, 연습을 위해 정미소 아저씨의 도움을 받기에 이른다. 정미소 아저씨는 정미소 앞의 땅을 연습장으로 제공하고, 고등학교 축구 선수인 아들을 코치로 투입하고 축구 기술을 전수받는다. 아직 학교에 가지도 않은 꼬마 아이들까지도 승리를 위해 밤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심장을 뛰게 만든다. 아이들은 시합에 이기기 위해 자신들의 능력과 힘을 아끼지 않는다. 축구 시합을 위한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어른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갖가지 생활의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가 축구시합을 설정한 것은 전후의 어려운 사람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희생한 채 오직 승리를 위해 단합하고 협동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큰 고래 이야기와 축구시합 이야기는 전후의 어려운 삶을 극복하고 꿈과 희망을 가지고, 아울러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단합과 협동이라는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 공들인 하나의 훌륭한 문학적 장치이다.
4. 전후의 신산스러운 삶에 대한 긍정적 조망
박홍근의 장편 아동소설『마음 속에 태양을』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내리는 하나의 찬란한 불꽃놀이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가지라고 펼쳐놓은 하나의 신기루고 오아시스이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오늘의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다.
첫째,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하는 아동문학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아동문학의 기능 중에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가치기준이 변하더라도 놓칠 수 없는 것이 작품을 통한 희망과 꿈의 제공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작품에 드러나야 하는 것이 교훈성과 재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하나의 모델이다. 이 작품은 1천 장이 넘는 분향의 작품인데도 가독성과 재미를 함께 아우르고 있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갖추어야 할 도덕적 독목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둘째는 재미와 교훈성 때문에 놓치기 쉬운 문학적 완성도를 지향하고 있다. 군함보다 큰 고래 이야기와 축구시합 이야기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단합과 협동의 가치관을 완성도 짙은 문학적 은유와 상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셋째,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인간의 덕목이 주는 고귀한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러한 독목과 가치들이 교훈이라는 형태로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재미있는 서사적 장치에 융합되어 은연중에 느끼게 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지나간 시대의 특정한 시기를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해 당대의 의식주와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독자들에게 그러한 풍속도를 통해 한 시대를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이상적인 풍속도를 세밀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박홍근의 이 작품은 발표 시기가 50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읽어도 아동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굳게 지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한국아동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지키기에 크게 손색이 없는 하나의 걸작으로 남아도 아깝지 않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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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동화 작품론〛
종교적 덕목의 예술적 승화
김 문 홍
1. 동화문학의 본질에 부합되는 소재와 주제
박홍근 선생이 발표한 단편동화는 모두 46편이다. 1950년대 2편, 1960년대 13편, 1970년대 16편, 1980년대 5편, 1990년대 9편, 그리고 발표연대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 작품 1편이다. 그 중 3분의 2를 넘는 작품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가장 집필 활동이 왕성할 나이인 4,50대에 창작된 작품들이다.
이들 46편을 동화 갈래로 분류해 보면 의인화 동화가 6편, 생활동화가 30편, 아동소설이 9편, 전래동화의 현대적 개작이 1편 등이다. 이들 중에서 어린이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생활동화 편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보아, 소재와 주제가 어린이들의‘지금 이곳’의 현재적 생활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쉬운 점은 판타지 동화(환상동화)가 한 편도 없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창작 기법의 섬세함이나 작가의 자유뷴방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환상동화 창작은 집필을 꺼려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흔히 동물이나 식물을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 빗대어 서사를 엮어 나가는 의인화 동화를 환상동화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그 창작 기법이나 소재,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접점과 이동에 있어서 판이하게 구분된다.
또한 생활동화와 아동소설 역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생활동화는 초등학교 저학년과 중학년을 대상으로, 어린이들의 현실과 일상생활을 소재로 기술되는 동화이다. 그러나 아동소설(소년소설)은 고학년을 대상으로 사회 현실과 인간의 본성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일종의 리얼리즘 문학이다. 즉, 현실인식에 눈을 뜨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박홍근 선생의 단편동화가 대부분 생활동화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동문학의 본질과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대상으로 인간과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아동소설은 아직 현실인식이 심회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는 적합한 형식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판타지 동화는 작가의 상상력의 크기와 깊이가 체질화되지 못하거나,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창작 기법이 섬세하고 어려워 부담감이 적지 않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교훈과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글감을 얻을 수 있는 생활동화가 제격일 수밖에 없다.
박홍근 단편동화 중에서 그 소재나 주제에 있어서 특이한 현상 중의 하나는 가톨릭 신앙을 다룬 작품들이 더러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생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소재와 주제는 아동문학의 본질과 특성에 밀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협동의 신앙생활 덕목은 곧 아동문학의 본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2. 현실과 환상의 접점을 통한 판타지 세계
박홍근 동화의 특징 중 하나는 본격적인 판타지 동화는 아니지만 의인화 동화나 생활동화, 그리고 아동소설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자유분방한 꿈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띈다는 점이다. 작품에 따라서 편차를 보이고는 있지만 현실과 환상의 어우러짐이 일부 장면, 혹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판타지 동화의 특성과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①
“저요? 전 아랫동네에서 온 부엉이입니다.”
“뭐? 부엉이라고! 그런데 왜 눈에서 빛이 나지 않지?”
“그건 저도 몰라요.”
“모르다니? 부엉이라면 나같이 어두운 데서는 불을 켠 것처럼 눈에 빛이 나야 한단 말야. 넌 부엉이가 아냐!”
“아닙니다. 전 틀림없는 부엉이입니다.”
“넌 부엉이인 척하고 우리들 비밀을 알아내려고 온 간첩인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전 부엉이입니다. 저도 숲속에서 같은 부엉이들과 살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아니다. 넌 간첩이다. 어서 여길 떠나란 말야. 그렇지 않으면 모두 불러내어 널 잡을 테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할아버지 부엉이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부엉이는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났습니다. 날아서 더 깊은 산속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시계들이 본 꿈」
②
상민이는 젊은 아저씨네 동네에서 큰 고개 둘을 넘는 15리 가량 떨어진 읍 남쪽 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였습니다.
상민이가 신나서 따라간 곡마단 악대나 아름다웠던 구슬은 실제로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민이는 낮잠을 자다가 깨어났습니다. 눈을 뜨고 꿈을 꾸고 있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상민이가 산에서 울고 있는 것을 집에 업고 온 젊은 아저씨는 훈의 큰형님이었고, 큰형님은 그때 집 뒤뜰에서 꽃씨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상민이에게는 훈이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 아버지 어머니같이 되었고 훈의 큰형님은 형님으로 따르게 된 것입니다,
- 「눈 뜨고 꿈꾼 아이」
③
돌이네 할아버지와 순아네 할아버지, 꾀돌이 야경꾼 아저씨와 옥이, 길순이 이 모두가 달이 떠 있는 것은 생각지 않고 새벽이 되어 밝은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도둑이야!”
하고 소리친 것은 홀로 사는 철이네 엄마였습니다.
잠을 자다 깬 철이 엄마는 연탄불을 보러 부엌으로 나가다가 담장을 넘는 고양이의 검은 그림자를 보고 도둑놈이 담을 넘는 줄 알고 그만 급한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기계인 시계도 고장이 나고 사람들과 수탉과 또 쓰르라미도 새벽인 줄 잘못 알고 제멋대로 법석을 떨어도, 오직 달님만은 하느님이 만드신 몇만 년 전 그때나 다름없이 제시간에 뜨고 또 제시간에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 중심지에서 북쪽으로 25리 가량 떨어진 옥이네 마을에는 이날 아침이 다른 때보다 몇 시간 빨리 찾아온 셈이 된 것입니다.
- 「아침이 몇 시간 빨랐던 마을」
인용문 ①은 의인화 동화 중의 한 장면이다. 시계방 주인인 아저씨가 먼 여행을 떠나고 난 뒤의 한바탕 소동을 다루고 있다. 부엉이 시계의 부엉이는 숲속으로 날아가지만 할아버지 부엉이가 눈에서 빛이 나지 않는다면서 혹시 간첩이 아니냐며 핀잔을 준다. 부엉이의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었지만 진짜 살아있는 부엉이의 세계에서는 만들어진 가짜 부엉이를 그들의 세계에 편입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부엉이 시계 속의 부엉이는 어떻게 해서 숲속으로 날아간 것일까? 결말 부분에서 그 이유가 밝혀진다. 시계방 주인인 아버지가 여행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시계 태엽을 감아주라고 일렀는데 아들이 그만 태엽 감는 일을 깜빡한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해서 시계 속의 부엉이가 숲속으로 날아간 것이다. 시계방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는 곳은 현실이고 부엉이가 그 틈을 이용해 시계 속의 부엉이가 날아간 숲속은 판타지의 시계이다. 태엽을 감지 않았다는 문학적 장치에 의해 현실 속의 부엉이가 판타지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생활동화이지만 판타지 동화의 일부를 차용한 것이다.
인용문 ②는 생활동화이다. 어린 상민이가 한때 집을 나가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상민이는 곡마단을 따라갔다가 길을 잃어버려 어른에 의해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상민이는 한낮에 잠을 자다가 곡마단의 풍악소리에 눈을 뜬 상태에서 곡마단을 따라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상민이가 잠을 잠 건은 현실이고, 눈뜬 상태로 곡마단의 음악소리를 따라간 것은 일종의 판타지이다. 이 작품 역시 현실의 낮잠 속에서 곡마단의 음악소리라는 판타지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여기에서 곡마단의 음악소리는 현실세계 속의 상민을 판타지 속으로 옯기게 하는 일종의 문학적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인용문 ③ 역시 생활동화이다. 이 작품은 분명 일상생활 속 한 마을의 소동을 다루고 있는 생활동화이지만, 작품의 서사적 내용은 판타지 세계의 분위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옥이는 주인집 아저씨가 아침 7시에 출근하기 때문에 5시쯤이면 일어나 밥을 짓는다. 옥이가 일어나 가게로 가 보지만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이웃집 닭이 울자 마을의 다른 집의 닭들도 그것을 신호로 하여 연쇄적으로 울어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옥이가 일어난 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옥이 방 안에 있던 시계가 고장이 나서 새벽 두 시에 울린 것이다. 밖으로 나왔지만 주위가 훤하게 밝아 옥이는 아침 무렵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서산마루에 걸려 있던 달이 휘영청 밝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 달을 올려다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소동을 벌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고장 난 시계가 두 시에 올린 것과 서산의 밝은 달은 현실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 진입시키는 일종의 문학적 장치이다. 평소와 다르게 옥이가 일찍 일어나고 마을의 닭들이 울어댄 것은 분명 판타지 세계인 것이다.
3. 상징과 비유를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들
박홍근의 단편동화 중에서 상징과 비유를 통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들이 몇 편 눈에 띈다. 그러한 작품들은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에게는 작품의 시적인 비유로 인해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지만, 동심을 지닌 성인 독자들에게는 공감대와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어느 부분과 장면만 시적인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서사가 상징적이며 드러내는 주제의식이 예술적 형상화로 승화되어 있어 어린이 독자들에게는 이해의 공감 폭이 약한 특징을 니니고 있다.
①
느티나무 잎 편지를 읽고 난 민혜 앞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전에 살던 집 골목을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민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 골목을 뛰어나갑니다.
“오빤, 학교에서 왔니?”
어머니가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오빠 아직 안 왔어요. 민자만 왔어요. 엄마, 그런데 왜 벌써 돌아왔어요. 아직 돌아올 날짜가 안 됐는데…….”
“응, 길고 긴 여행이라, 날짜는 남아 있으나 어쩐지 너희들이 걱정돼서…. 더 있을 수 없어 목적지까지 다 가지 않고 도중에서 돌아왔단다.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아버지 말입니다.
민혜는 아버지의 트렁크를 받아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지 아주 가볍습니다.
“항상 너희들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되지, 너희들만 남겨 두고선 걱정이 돼서 아무리 즐거운 여행도 즐겁지가 않더구나. 민혜야, 그 트렁크 이리 줘.”
아버지는 또 말을 이었습니다.
“아니어요. 무겁지 않아요.”
“이리 달래도…….”
아버지는 민혜가 들고 있는 트렁크를 받아듭니다.
- 「느티나무의 편지」
②
물속에 떨어져 있는 달을 보자, 성호 머릿속에 이와 같이 동화같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동화책에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샘이 솟아오르듯 이런 이야기가 성호 머리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
성호 입가에 즐거운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제 생각에도 참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봐, 포플러는 한국적인 정서야!”
하는 것보다 멋지다고…….
성호는 나무껍질 배가 달빛 아래서 바람에 밀려 풀과 갈잎 사이를 살살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옵니다
물속의 산과 포플러, 집과 반달 등 모두가 잠깐 동안 일그러졌습니다.
그리고 늪 속은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아까처럼 또 하나의 성호네 마을이 아름답게 비치고 있습니다. - 「늪 속에 떨어진 달」
③
참외 할아버지네 보리밭은 마을에서 멀지 않다.
석호는 느티나무 밑에서 종달새 둥우리가 있던 곳을 짐작해 보리밭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 자리에 둥우리를 놓고, 근처의 보리를 잘 세워 놓고 나왔다.
다시 느티나무 밑에 숨었다.
“형, 어미종달새가 와?”
“응, 올 거야!”
어디서 종달새 소리는 들려도 참외 할아버지네 보리밭 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왔어, 왔어!”
석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디서 날아왔는지 어미종달새가 보리밭 위를 한참 돌다가 바로 둥우리가 있는 곳에 내렸다.
“이제 됐어!”
하고, 석호는 일어섰다.
서산 위에 기울어지는 햇빛이 형제의 등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종달새」
인용문 ①은 「느티나무의 편지」라는 단편동화로, 이 작품의 화자는 산동네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잎을 하나씩 떨어트리고, 길바닥에 나뒹구는 느티나무 잎을 보고 산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걱정을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경미는 엄마보고 털스웨터를 사달라는 생각을 하고, 여자중학교에 다니는 숙희는 빨간 털실로 곱게 장갑을 뜰 생각을 하고, 동희 어머니는 어서 연탄을 들여놔야 한다는 살림 걱정을 한다. 이처럼 산동네 사람들은 떨어진 느티나무 잎을 보고 한겨울을 나야 한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느티나무는 자전거를 몰고 온 집배원 아저씨의 생각까지 읽는다.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여의고 어머니와 오빠가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민혜네를 걱정한다. 이 작품 속의 화자인 느티나무는 곧 작가의 분신인 셈이다. 느티나무가 겨울을 앞두고 산동네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은 곧 작가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기도 하다.
연용문 ②는 「늪 속에 떨어진 달」의 마지막 부분이다. 성호네 집 앞에는 늪이 있고 그 길가로 포플러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어느 날 풀밭에 앉아 쉬고 있던 신사들 중 한 사람이 그런 풍경을 보고 “포플러는 역시 한국적인 정서야.”하고 감탄에 마지 않는다. 성호는 그 말의 뜻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되뇐다.
인용문의 장면은 늪 속에 떨어진 달을 보고 성호가 한국적인 정서를 느끼는 대목이다. 늪의 물 속을 헤엄치는 붕어들까지도 일렁이는 늪의 말에 일그러진 달의 모습을 보고 반 동강이 났다고 시적인 비유로 흥취에 젖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늪 속에 비친 마을의 풍경과 포플러가 늘어선 풍경,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까지 혼연 일체가 되어 한국적인 정서의 풍경을 연출하는 모습을 시적인 비유와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땅과 풍경, 그 풍경에 녹아들어가는 사람들의 투명한 마음을 통해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고 있다.
인용문 ③은 세 작품 중에서 가장 시적인 비유와 상징이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마치 한 편의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음악적인 리듬을 우리의 심상에 새겨 놓는 강한 울림을 준다.
이 작품의 서두 부분은 아주 상징적이다. 어머니가 보리 밭 이랑 사이를 걸어가고 석호가 그 뒤를 따른다. 어머니가 석호 이름을 부르고 석호가 대답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서두의 장면은 석호의 한낮 꿈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내다보는 바깥은 오월의 햇살로 눈부시다. 동생 석민이가 종달새에게 줄 먹이로 여치를 잡아와서 자랑한다. 석호는 엊그제 보리밭에서 잡아 온 종달새 새끼를 도로 제자리에 갖다 두자고 얘기한다.
결국 두 아이는 보리밭의 그 자리에다 종달새 새끼를 가져다 둔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작품의 서두 부분에서 석호가 뒤따르며 엄마를 부르는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데, 꿈속에서의 석호 엄마는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종달새의 안타까운 모성을 상징하는 문학적 장치라고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보리 밭 이랑 사이를 걸어가는 두 모자의 모습, 보리밭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싱그러운 풍경, 다시 돌아온 새끼가 있는 보리 밭 아래로 내려오는 어미 종달새의 모습 등은 하나의 시적인 비유로 우리의 심상을 혼곤한 봄날의 정서로 휘몰아 넣는다.
이밖에도 물을 찾아 행진하는 오리 무리의 위태로운 여정을 통해 동물과 사람의 연대와 소통을 그린 「오리들의 행차」(1973), 아기 다람쥐 이쁜이가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야, 내 얼굴 봤다!」(1981), 자동차가 베란다의 유리창 거울에 비친 착시 현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베란다의 하얀 자동차」(1991) 등의 작품들도 어린이들의 일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상징과 비유의 기법으로 문학적 승화를 시도하고 있다.
4. 민족의식을 내면화한 작품들
박홍근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31세인 1950년 흥남철수를 통해 남으로 피난 온 세대인 만큼 자유와 민족에 대한 혈연적 유대가 강하다. 그의 단편 중에서 일제강점기와 이념의 배치를 통한 남북문제를 다룬 것은,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 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①
상민이는 소름이 끼쳤다. 경찰서 앞을 지나 아이들이 갇혀 있다는 유도장 옆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쪽에는 창문이 없어 유도장 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또 때리는 소리와 아이들의 비명이 상민의 귀를 쨌다.
“우리는 놈들의 쇠사슬을 끊어야 해. 그래야 사람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어!”
석호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그래!. 나도 크면 석호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자!”
상민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상민이는 눈을 맞으며 한참 동안 아이들의 비명을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영식아!”
“철호야!”
아이들이 갇혀 매맞고 있는 유도장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 「만세」
②
할아버지는 홀로 살기는 하지만 가게에 나와 있는 동안은 조금도 쓸쓸한 줄을 모릅니다. 별의별 아이들이 오기 때문입니다. 언제 봐도 코를 훌쩍거리는 ‘코흘리개’, 뭔가 사러올 때마다 어딘가 터져서 빨간 약칠을 하고 오는 ‘터지기’. 돈만 내밀고 물건도 받지 않고 그대로 뛰어가는 ‘덤벙이’ 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뭔가 사가지고 나갈 때면 할아버지는 으레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고것들 참…….”
어린이들이 귀여워서 하는 말입니다.
‘집엔 저런 것들이 있을 텐데……’
할아버지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할아버지가 집이라고 하는 것은 고향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피난을 나올 때 열 살짜리 아들 형일이가 있었습니다. 일곱 살짜리 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홀로 집을 떠나왔습니다.
- 「집엔 저런 것들이 있을 텐데」
위 인용문 ①은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 의거에 영향을 받아 상민이가 다니는 보통학교 조선인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태극기를 들고 만세 운동을 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린 장면이다. 작품의 주인공 상민이는 친구인 석호와 그의 아버지가 일제에 항거하는 행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워나가게 된다. 자신은 비록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 했지만 경찰서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 아이들의 비명소리, 일제의 쇠사슬을 끊어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석호 아버지의 말을 통해 민족의 울분을 느끼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간다.
작품 속의 보통학교 학생들은 광주학생의거 소식을 듣고 학교를 뛰쳐나가 만세 운동을 벌이게 된다. 작품 속의 주인공인 상민은 곧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다. 작가는 광주학생 의거가 일어난 해에 열 살의 나이로 북쪽에서 보통학교를 재학 중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 상민에게 어린 날의 자신을 투영시켜 민족의식을 역설하고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을 통해 당시에 만세 운동에 합류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용문 ②는 북쪽에 집과 아이들을 두고 혼자 남쪽으로 피난 내려온 가게 할아버지는 망향의 그리움을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것으로 달래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집에 저런 것들이 있을 텐데’라고 읊조리며 그리움에 목말라 한다. 여기서의 집은 북쪽에 두고 온 고향집을 말하며,‘저런 것들’은 고향집에 두고 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지칭하고 있다.
작품 속의 가게 할아버지 역시 작가 자신의 분신일 것이다. 작가는 1950년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피난 온 이산가족이기 때문에, 북쪽에 두고 온 부모님과 친척들에 대한 애끊는 그리움 때문에 이 작품을 창작했을지도 모른다.
위에 인용한 작품 외에도 산토끼 깡충이와 쪼로로 다람쥐의 헌신적인 우정을 통해 경색된 남북 관계를 상징적으로 풍자한 「봄을 물고 가는 깡충이」(1975), 굳건한 민족의식으로 항일운동을 벌여나가는 젊은이의 기백을 그린「없어진 장화」(1977), 식민지 학생으로 일본에 있는 조선인 동포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는 민족애를 그린「아직도 그런 일이」(1982) 등의 작품들 역시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을 내면화한 작품들이다.
그 밖에도 외국인 신부님의 수염에 대한 궁금증을 통해 호기심이 강한 동심을 재미있게 표현한「방지거 신부님의 수염」(1980), 꼬마 바오로의 어이 없는 나들이를 통해 이웃 간의 사랑을 그린「꼬마 바오로의 버스 나들이」(1979), 크리스마스 즈음의 풍경을 통해 이웃 간의 교류를 따뜻하게 표현한「크리스마스와 형일이」(1993) 등의 작품들은 종교와 신앙생활의 에피소드를 통해 종교적 사랑과 유대를 그리고 있다. 이런 작품들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작가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동화들이다. 비록 종교적 신앙생활을 소재로 삼지 않은 작품들 역시 그 주제는 이웃 간의 교류와 사랑,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 생명의 수중함,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휴머니즘, 현실의 아픔과 어려움을 보듬어 안는 사랑 등 종교적인 덕목과 가치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작가의 오랜 동안의 신앙생활에서 우러나온 정서와 감정일 것으로 추론된다.
5. 박홍근 단편동화의 미학
박홍근 선생은 동화작가로서 보다는 동시인으로 이름이 더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동문학 작품들 중에서도 동화보다는 시 쪽이 문학적 성과를 이룩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46편의 단편동화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동화문학에서 그가 이룩하고 있는 성과 역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동화작품들 중 생활동화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문학적 주제의식과 기법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룩하고 있는 것은 의인화 동화들이다.
그의 단편동화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주제의식에 있어서 아동문학의 본질과 특성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재미와 교훈성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근거이다.
박홍근 단편동화의 두 번째 특징은 종교적 덕목과 가치라는 일관된 주제의식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천진난만한 동심의 풍경, 가족 간의 연대의식, 생명의 소중함, 인간과 동물의 어우러짐,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등이 그의 작품들에 내재해 있는 보편적 주제의식은 곧 종교적 덕목들이다.
셋째,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과 남북 분단에 따른 이산의 슬픔과 망향의 그리움은 작가의 현실적 경험에서 비롯된 정서의 산물이다.
넷째, 어린이 독자보다는 동심을 지닌 어른들을 독자 대상으로 삼은 몇몇 작품은 시적인 상징과 비유를 통한 예술적 승화로 독자적이며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이룩하고 있다.
박홍근은 한국 아동문학의 1세대 작가로 시와 동시, 동화와 아동소설 등 아동문학의 모든 부분을 섭렵하면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겨 한국아동문학사의 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인간과 작품이 일치해야 한다는 아동문학의 덕목에 부합되는 작품 활동과 문단 활동을 통해 작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인간적 품격을 갖추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들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홍근 아동문학전집>(가톨릭 출판사) 제9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댓글 1919년에 태어닌 박홍근 작가님!
100년 전에 탄생한 작가님의 글인데도
판타지 기법이 자유자재로 운용되었고 품격이 높습니다.
현재를 사는 작가군들이 눈여겨 볼 점이 많아요.
자꾸 가벼워지는 동화의 속살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김문홍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