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토. 천성산과 공부1-나의 공부론
간 밤에 비 뿌렸다. 하지만 포근한 날이다. 홍룡사 초입에 매 2마리를 보았다. 천성산에서 말똥가리 황조롱이는 쉽게 자주 봤지만 매는 자주 보는 편은 아니다. 화색의 등과 흰색 배, 그리고 꼬리 끝의 진한 무늬가 눈에 띄었다. 숲정이에 쉬다가 놀랐는지 하늘로 날아오르며 크게 한번 소리쳤다. 주변의 상공을 배회하더니 멀어졌다.
천성산과 공부
도입
감히 나는 산에 공부하러 왔고, 산에서 공부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산공부다. 내 공부 방법은 주변에 주어진 우연적 요소를 통합하며 점차 필연의 총체적 의미를 찾고 내 삶에 유기적으로 통합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세 가지 차원에서 내 산공부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첫째 나의 공부론이다. 반교육론 이후 나는 교육이라는 말을 폐기하고 공부를 삶과 통합하고 일체화하는 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둘째 천성산의 의미와 천성산과 나의 관계론이다. 하필 왜 천성산이 내게 인연이 되었고 그것은 내 삶에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셋째 원효와 수운과 나의 관계론이다.
왜 하필 이곳에서 나는 원효와 수운을 만나게 되었는지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물론 자연과 지역문화 등 총체적인 것들과 만남이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다만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인문생태학적 관점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의 공부론
어쨌든 나는 교사로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학교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학창시절까지 포함하면 학교 교육이 내 인생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나는 반교육을 표방하며 학교와 교육을 거부하기로 했다. 칼도 쓰기 나름인 것처럼 학교와 교육도 하기 나름인 것은 맞다. 하지만 교욱과 학교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와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그것은 교육과 학교가 근본적으로 하이어라키(위계)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자체가 위계적 권력관계로 고착되어 있다.
거기에 교사집단 내부의 위계와 학생집단 내부의 위계가 더해져 학교는 철저히 위계사회를 내면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런 교육에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생을 대상화하고, 주체가 된 교사는 권위에 안주해 버린다. 하지만 현대처럼 전인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교사 또한 불완전하고 직업인에 지나지 않는다. 직업적 전문성에 의존해 자신의 권력을 합리화하고 소위 전문성에 의해 구축된 지식과 사회를 절대화하고 그 질서에 대한 복종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교사는 기성사회의 룰을 신참자들이 익히고 복종하도록 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구조를 극복하는 것은 극소수의 개인에게 가능할지 몰라도 집단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는 학교라는 제도와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내가 선택한 것은 공부(工夫)다. 처음에는 삶과 분리된 공부를 삶과 통합해가는 것이 과제지만, 점차 삶이 공부고 공부가 삶이 되도록 일체화하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삶과 그리고 나 자신의 주체와 분리할 수 없다. 공부가 곧 주체의 함이라는 능동작용으로서 삶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는 것이 공부는 하는 것이다.
흔히 교육에서는 교육의 단점을 알묘조장(揠苗助長)에 비유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교학상장(敎學相長)과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상적으로는 교학상장과 즐탁동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극히 훌륭한 교사 개인의 자질에 힘입은 바가 클 뿐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 성취로 학교와 교육에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대상화, 위계화, 그리고 복종이 더 큰 문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개인은 무기력해지고 자기감각과 능력, 그리고 확신을 완전히 빼앗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는 교육과 달리 철저히 자기감각과 집중, 능력, 그리고 통합을 지향한다. 공부가 곧 주체의 능동적 함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생물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도 생물의 삶과 기본적으로는 동일하다. 즉 인간도 자연이고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한 특징, 즉 자기 원인성과 자기 활동성에 의해 삶을 이루어갈 능력을 타고 났다. 소나무를 생각해보자. 고도가 낮은 곳에 자라는 소나무는 성냥개비처럼 곧고 높이 자란다. 주변의 활엽수들 사이에서 살아남자니 그들의 키보다 높거나 최소한 같은 정도까지의 키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능선이나 산정의 소나무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대신 눈과 바람 등의 혹독한 기후에 적응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키를 낮춰야 한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다면 물과 양분을 얻기 위해 바위 틈으로 길고 긴 뿌리를 내려 물과 양분을 찾아내기도 해야 한다. 솔씨 하나가 날아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적응하며 천양지차의 모양을 가지된다. 태풍에 가지가 꺾이고, 폭설에 허리가 부러지기도 한다. 그럼 또 그에 맞게 적응하며 자신을 발현한다. 그게 소나무의 삶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가혹한 시련을 겪은 소나무일수록 더 아름답고 강하고 향기롭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생명과 자연의 삶이자 공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우리도 자연에 속하며 생명의 힘을 지닌 씨앗과 같다. 그러데 씨앗이 어느 곳에 떨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순전히 우연이다. 하지만 씨앗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발아해 뿌리를 내리고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문제도 생긴다. 폭풍이나 폭설이나 벌레 같은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그것을 겪으며 자신을 발현해가며 기어이 자기의 가능성을 실현하며 삶을 이룬다.
지나고 나면 이 모든 것이 필연의 과정 같지만 삶 자체는 수많은 우연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그 과정 속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개체는 우연과 과제를 해결하며 환경 속에 자기식대로 유기적 통합을 이룬다. 소나무 뿌리가 바위와 엉기고 부러진 가지로는 송진이 나오고 키를 낮게 줄이기도 한다. 식물이라고 해서 이런 일련의 과정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의 삶 자체가 능동 적응이다.
내가 믿는 삶의 공부도 소나무의 성장과정과 같다. 우선 나는 기존의 학교에 빼앗긴 능동과 자기감각을 회복하기 위한 감각회복의 공부와 연습이 필요하다. 외부 지식에 주눅 들고 남들처럼 적응하며 살지 못하는 삶의 불안을 떨치고, 내 양심과 직관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어느 정도의 거부와 단절, 그리고 실패가 필요했다. 내가 나를 다시 낳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나를 낳고, 사회가 나를 낳는 것처럼, 내가 나를 다시 낳는 과정이 필요하다. 때문에 공부에는 단절과 휴식, 기다림, 그리고 자기집중과 노력 등을 통해 자기리듬을 만들고 스스로를 조율해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보면 소나무가 성장하듯 내 삶의 방향과 흐름이 느껴진다. 나의 관심과 호기심 장점 등이 경험을 통해 인격 안에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발휘되어 간다. 솔씨 하나가 점차 가지를 뻗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가는 것이다.
노력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공부(工夫)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김용옥 선생은 공부(工夫)를 공부(功扶)를 간략히 쓴 말이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공부(工夫)에서 우리는 기술의 익힘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뒤의 공부(功扶)에는 노력(力) 곧 힘씀이 나오고, 도움(扶) 혹은 붙들음이 나온다. 모두 몸의 힘씀과 집중이 나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공부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집중해서 힘쓰는 것이다. 예전엔 그 무엇이 삶에 필요한 몸적인 기술인 경우가 많았다. 즉 활쏘기, 밭갈기, 말타기 등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문명이 발달할수록 시서예화 등의 다양한 문화가 삶에 필요한 기예로 연마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공부의 원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은 좀 다르게 설명한다. 신영복 선생은 역학적 해석학으로 두 글자를 바라본다. 즉 공부는 하늘(一)과 땅(二) 사이에 사람(人)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한다. 공(工)자는 하늘과 땅의 연결로 나타나고, 부(夫)자는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이 일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을 가지고 공부를 해석하여 공부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아전인수인가? 김용옥 선생의 해석이 학문적 접근이었다면, 신영복 선생의 해석은 동시성 내지 우연의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두 분의 견해를 모두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옥 선생의 해석은 공부의 기원을 통해 공부의 특징을 파악하게 하고, 신영복 선생의 해석은 공부의 목적이 세계의 이해이자 조화로운 삶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이렇게 삶의 총체적 통합으로 바라봄으로써 공부가 소외를 극복하고 주체에게 오롯이 돌아오게 된다. 나는 신영복 선생의 해석을 좀 더 강조하고 싶다. 공부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거듭 깊이 또 넓게 이해나가고 새롭게 여리는 세상에 자신을 통합해간다. 우연(과제)을 쉼 없이 통합하며 유기적 필연의 과정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곧 공부의 방법이다. 우연(과제)의 통합과 필연화 그것을 나는 공부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연(과제)이야말로 새롭게 가능성을 창발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부는 순수하게 자발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어야 한다. 솔씨에게 주어진 우연(과제)을 솔씨는 유기적으로 통합하면서 필연의 소나무가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우연은 동시적이다. 그것을 감각하고 그것에 반응하며 삶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