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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 오희영,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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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가문이 있다. 3대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이 있는가 하면 3대가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일가가 있다.
전자는 경기도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영의 가문이고, 후자는 ‘친일매국 제1호’의 친일파 송병준의 일가다. 광복이후 이 두집안을 과연 어떻게
됐을까. 매국 집안과 독립을 위해 3대가 싸운 집안의 광복이후의 모습을 되짚어 봤다.
■ 독립운동의 가업, 오희영 일가 3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오희영
집안처럼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예는 극히 드물다. 좀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경기도에서 유일하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유일하다. 오인수는 의병을, 아들 오광선과 며느리 정현숙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손자인 희영·희옥·영걸 남매는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오인수는 1905년 일제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강탈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에 참여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폐위당하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안성·양지·죽산 일대에서 활동하다 일본군에 의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게 되자
야음을 틈타 죽능리 어현의 집에 돌아왔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송종현은 오인수를 밀고했고 잡혀간 오인수는 7개월간의 모진 고문과 8년의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해야
했다.
아들 오광선은 1917년 만주로 망명해 중국 보정군정학교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봉오동 전투를 치렀다.
대한독립군단 시절에는 자유시 참변으로 이르크츠 감옥에 갇혀 6개월간 수감생활 끝에 탈출해 맨발로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를 건너 임시정부에 참변을 알렸다.
오광선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묻혔을 참극이었다. 오광선은 자유시 참변 후 한국독립당 의용군 군대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중국 국민당과 ‘한중연합토군’이
결성되자 경박호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가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교관을 거쳐 일본관동군참모장 암살을 위해 북경에 금은방을 운영하다 체포돼 3년형 옥고를 치르고 1941년에
출옥했다. 출옥 후 흥안령 지역에서 빨치산들과 항일 활동을 벌이다 광복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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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광선 생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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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오광선이 밖에서 활동하는 동안 정현숙은 독립군 뒷바라지에 힘썼다. ‘만주의 어머니’로 통한
정현숙은 화전을 일구어 지은 농사로 독립군들과 찾아오는 학생들을 마다치 않고 밥을 해 먹이며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한편 비밀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남경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였고 한독당원으로 활동했다.
오광선과 정현숙 사이에서 희영·희옥·영걸 남매가
태어났다. 1939년 한국광복진선공작대가 결성되자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오희영과 열네 살이었던 오희옥 자매는 자발적으로 공작대에 입대해
포스터, 거리선전, 연극, 노래, 춤 등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한국과
중국이 공동의 전선을 형성해서 일본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광복군이 창설되자 적지인 부양에서 남성 광복군들과 똑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오희영은 광복진성청년공작대의 경험을 살려 주로 초모 활동과 반일
감정 및 항일 의지를 고취하는 선전 활동을 하다가 부양에서 군사교육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단의 1기 졸업생들과 중경으로
돌아와 임정에서 김구의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오희영 일가의 행적은 투옥과 고문 그리고 출옥 후
또다시 독립운동으로의 투신으로 압축된다. 3대의 삶이 곧 우리 독립운동사인 셈이다.
■ 매국의 가업, 송병준 일가
3대
오희영 일가가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때, 송병준 일가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두
집안의 반응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농상공부 대신이었던 송병준은 칼을 차고 어전에 들어갔다.
칼을 차고 어전에 들어간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고종을 겁박했다는 사실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일본에 건너가 일황에게 사과하든가,
대한문에 나가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 그렇지 않으면 “폐하를 죽이고 자살하겠다”는 송병준의 겁박은 단순한
협박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뒤에 누가 있을지 짐작이 된다. 그의 행동은 ‘친일매국 제1호’ 다웠다.
겁 없는 ‘친일매국 제1호’
송병준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후안무치다. 이완용에게 매국의 공로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합방청원서’를 제출하고 가쓰라를 만나서는 1억엔에
나라를 팔겠다고 흥정했다. 매국의 대가는 달콤했다. 두둑한 은사금과 작위를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매판자본가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서 독살됐다는 일설을 보면 하늘이 무심하지만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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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병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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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의 백작 작위는 아들 송종헌이 물려받았다. 오희영의 할아버지 오인수를 밀고 하여 7개월간의 모진 고문과 8년의 징역형을 받게 한 이가
바로 송종헌이다.
송종현은 군수의 자문기관인 경기도 양지군 참사를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지냈는데 참사는 군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2명으로 위촉된다.
믿을만한 친일매국노여야만 참사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친일매국 제1호 아들답게 부임 첫해에 의병장을 잡는 기염(?)을 토해낸
것이다.
송종현은 백작 작위를 물려받고 노다 아쓰무겐으로 창씨 개명했으며 그의 아들 송재구, 노다 다로로는 1937년부터
1942년까지 양지면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당대의 명사로 행세했다. 그러니까 삼대가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한 셈이다. 이뿐인가. 송병준의 사위는
민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한 구연수다. 그는 1907년에 송병준의 천거로 총독부 경무총감부 최고의 직급에
올랐다.
조선인으로 경무관을 지낸 사람은 지금까지 구연수가 유일하다. 구연수의 아들 구용서는 경성중학교와 도쿄상대를 졸업하고
1925년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들어갔다.
조선은행은 식민지 중앙은행으로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조선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과 더불어 중추적인
침략기관이다. 이렇듯 송병준 일가는 3대가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그 대가로 호의호식하며 개인의 영달을
누렸다.
■ 해방 후, 두 가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해방은 송병준 일가에게 광명의 빛이 됐다.
해방 당시 구용서는 조선은행 오사카지점 서구 출장소 지배인이었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를 파직시키고 구용서를 부총재로 임명했다. 출장소 지배인이었던 그를 부총재로 만들어준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해방이었다.
구용서는 1950년에 총재로 승진했고 같은 해 한국은행으로 개편되면서 중앙은행의 초대 총재가 됐다. 친일매국 제1호 송병준의 외손인
구용서는 대한민국 금융의 최고의 수장이 됐으며 상공부 장관에 올랐다. 광복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오르지 못할 자리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 요직에 오른 이들은 대다수 매국노 후손들이다. 일본을 닮고 싶어 했던
윤치호, 그의 동생 윤치소 아들 윤보선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었다.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윤치호 집안에서 대한민국 내무장관과 국회
부의장, 농수산부장관 등 관직에 오른 사람은 윤보선을 포함해 윤치영, 윤영선 등 3명이다.
경술국치 당시 궁중 병합을 담당했단
민병석의 자손 민복기는 대법원장 자리에 올랐다. 민병석은 당시 궁내부대신으로 지금 청와대의 비서실장인 셈이다.
민병석은 이완용과 데리우치 통감의 사주를 받고 궁중의 병합 반대론자를 무마한 1급 친일파이다. 1급
친일파 후손이 이 나라 사법부를 장악한 것이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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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오씨기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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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오광선은 단칸 셋방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딸 오희영·신송식 부부의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희영의 남편 신송식은 한국광복군 참령으로 복무했는데 해방 후에는 “지하실에서 담배를 야매로 싸서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오희영은 1969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송식도 육 남매를 뒤로 하고
1973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6남매는 고아가 됐고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 했다.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고 두 명만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이다.
배우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기란 요원해 보인다. 결국 독립운동가의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3대가 독립운동한 대가는 참혹하다. 반면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세력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사법, 입법, 행정, 금융 등 주요
관직을 장악하며 잘 살고 있다. 묻고 싶다. 또 다시 나라가 위기에 처한다면 나라를 지키겠다고 누가 나설까. 자못 궁금하다.
김명옥 건국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