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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지난 1967년 3월 충북불교신도회 창립을 논의하고 법주사 미륵부처님 앞에서 월산스님(오른쪽), 벽산스님(왼쪽), 이영일 포교사(가운데)가 기념촬영을 했다. |
스님은 하심(下心)하고 남을 배려(配慮)하는데 지나칠(?) 정도였다고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전화 통화를 마칠 때면 인사를 여러 차례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기를 들고 머리 숙여 절을 하여 곁에 있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설곡스님이 “스님, 전화기에 절을 하면 상대방이 보기라도 합니까.”라고 묻자 벽산스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누가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을 하면 내가 편안해지니까 인사를 하는 겁니다.”
스님의 ‘하심 일화’를 한 가지 더 소개한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누가 인사를 오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오히려 스님이 먼저 3배의 예를 올렸다. 때문에 스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찾아온 젊은 스님들은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고 한다.
벽산스님은 후학들에게 “항상 수행 정진하라”면서 “모든 이를 위해 보시하고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젊은 시절부터 벽산스님과 인연이 닿은 이영일 포교사의 말이다. “스님께서는 설법하실 때마다 항상 불보살님들처첨 모든 이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보시하고 정진하라면서 불보살님들을 닮다보면 광명(光明)이 도래할 때가 온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벽산스님의 주머니는 텅텅 비었다고 한다. 청주시내에 있는 걸인들이 몰려오면 스님은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못했다. 절에서 공양을 ‘대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 청주교도소에서 교화활동을 펴면서 인연이 된 재소자들이 출감하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함께 나누며 격려했다. 그들이 공양시간을 지난 후에 찾아와 혹시 대중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스님은 이렇게 타일렀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못 먹어 보았을 텐데 부처님의 자비심을 배운다는 사람이 어찌 그리 인색하냐”
벽산스님은 경북 상주에서 부친 윤병상(尹炳商)씨와 모친 전주 이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18세되던해에 법주사 청공(靑空)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후 직지사에서 제산스님의 선법문을 듣고 수행의 귀감을 삼았으며, 제산스님의 제자인 퇴운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또 서울 각황사(지금의 조계사)에서 박한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일제시대인 1936년 청주 보살사와 용화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1970년대에는 대한불교수도원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포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던 스님의 육성이다. “다음 생에도 출가하여 공부를 깊이하고 전국적으로 포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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