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해란초의 존재는 이년 전, 인천 다녀오는 길에 알게 되었다.
흙도 없는 담벼락에 치렁치렁 늘어져 보랏빛 꽃을 피우는 존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덩굴해란초'라하였다.
아마도 연안부두를 통해서 들어온 외래종이리라.
노란색의 해란초와 색깔과 이파리만 다를 뿐, 영락없다.
덩굴주름잎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짐학 이 꽃, 씨앗을 조금 받아와서 화분에 뿌렸더니만 싹이 올라왔다.
그러나 기어이 꽃은 보지 못하고, 그냥 겨울에 얼어죽었다.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동행했던 권사님이 베란다화분에 덩굴해란초가 무성하게 펴졌다고 하셨다.
다시 씨앗을 얻어 재도전, 그렇게 지난 해 덩굴해란초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고, 화분은 야외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올 봄, 새싹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지난 해 맺혔던 씨앗들이 여기저기 퍼졌다.
화분에도 퍼졌지만, 콘크리트 틈새에도 피었고, 인천에서 보듯 담벼락에서도 싹이 났다. 여기저기 퍼저 꽃이 핀다.
이런 기세라면, 머지않아 이곳에서 심심치 않게 덩굴해란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유해식물이 아니라면, 더불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발도 없고, 날개도 없는 식물의 이동은 신비하다.
그들이 인간을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오만함이 고개를 숙인다.
*
꽃씨를 전해준 권사님은 지난 해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분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전해준 씨앗은 이렇게 싹을 틔워 새로운 생명을 피워낸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나는 이곳에서 해마다 덩굴해란초를 볼 터이고, 그를 볼 때마다 권사님을 기억할 것이다.
꽃과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특정한 사람과 연결될 때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문득, 부모님들의 꽃을 생각해 본다.
어머님이 키우시던 나비란은 퍼지고 퍼져 처치곤란할만큼 많지만, 나는 그것이 어머니의 꽃이므로 단 하나도 허투로 여길 수가 없다. 어머니의 손길로 자라던 꽃, 어머니는 오신 곳으로 가셨지만, 나는 그 꽃을 통해서 어머니를 느낀다.
덩굴해란초의 기세가 대단하다.
하루가 다르게 퍼져나가고, 하루가 다르게 꽃을 피운다.
언젠가, 누구든지 그 꽃의 존재를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즈음이면 권사님과 꽃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될터이다.
덩굴해란초,
먼 이국 땅에서 이곳까지 발도 없이 날개도 없이 긴 여행을 했다.
첫댓글 오랫만에 들렸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자연속에 빠집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