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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와 훼밍웨이가 사랑한 하얀 마을 론다 Ronda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곳곳에 매력적인 하얀 마을이 있다. 그중에서도
론다(Ronda)는 오랜 역사와 빼어난 풍광, 중량감 있는 유적들,
시인 릴케와 소설가 훼밍웨이가 사랑한, 단연 최고의 마을로 꼽힌다.
릴케는 론다의 절벽 위에 펼쳐지는 하얀 집들의 마을, 푸에블로 블랑코(Pueblo Blanco)를 보고
조각가 로댕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 내전을 다룬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론다가 등장한다. 전쟁에 희생된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는 곳이 바로 론다였다. 론다는 안달루시아(Andalucia)지역의 말라가 주 높은 지대(해발 750 m)에 있는 인구 약 34,000명의 작은 도시로 투우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신시가와 구시가를 잇는 누에보 다리 아래는 100m나 되는 절벽이며, 타호 계곡 맞은편으로는 저 멀리 평원이 이어진다. - 론다 역사 - 론다라는 이름은 기원전 켈트족이 이곳을 'Arunda'라고 부른데서 유래하며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역사적으로 주요 요새의 구실을 했다. B.C. 2세기 경에는 로마인들이 점령했고 8세기 경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왔을 때 역시 이곳을 주요 거점으로 지배했다고 한다. 론다를 "애인과 함께 머물 가장 로맨틱한 도시" 라고 토로한 사람이 바로 훼밍웨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도시 론다에서 그의 대표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무기여 잘 있거라>를 완성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론다를 배경으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세 개의 다리 론다에는 신시가지(사진 아래쪽)와 구시가지(사진 윗쪽)를 잇는 3개의 다리가 있다.
지도에 있는 협곡의 왼쪽 다리부터, Arab bridge, Ancient bridge, New bridge이다.
스페인 명칭은 Puente Arabe(아랍 다리(13번)
올드 브릿지라 부르는, 이슬람 시대에 만든 Puente Viejo(비에호 다리(15번)
뉴 브릿지로, 론다를 대표하는 Puente Nuevo(누에보 다리(18번)
누에보 다리 Puente Nuevo (New bridge)
론다를 대표하는 상징적 다리이다.
두 개의 거대한 절벽 마을을 연결해 놓은 다리인데 1735년 펠리페 5세가 처음 지었다.
6년 뒤인 1741년 붕괴되면서 5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이 후 1751년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무려 42년이나 걸려 다시 다리가 완성되었다.
누에보 다리는 18세기에 돌로 만든 다리이다.
다리 가운데에 보이는 방들은 과거 한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감옥조차도 낭만적인 곳, 그 곳이 론다이다.
다리의 왼쪽 절벽 위에 서 있는 건물 또한 낭만적이라구요?
우리 일행이 유숙했던 '론다 파라도르'랍니다.
파라도르 맞은 편 '돈 미구엘 호텔 레스토랑'(오른쪽 건물)은
누에보 다리를 제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해서 음식 값이 비싸대요.
맛 좋고 가격 저렴한 곳이 어디에 있느냐구요?
호텔 아래 비탈에 매달려 있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가셔요. 허름한 외양보다
맛은 일품이랍니다. 게다가 누에보 다리도 코 앞에 있고...
비에호 다리 Puente Viejo (Ancient bridge)
'올드 브릿지'는 이슬람 시대에 만든 다리로
누에보 다리를 사용할 수 없었던 기간에 주로 이용되었다
아랍 다리에서 바라본 비에호 다리
난간 기둥에 둥근 공을 올려 놓은 듯...
아랍 다리 Puente Arabe (Arab bridge)
아랍 브릿지는 로마가 점령하던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여러 번의 강의 범람으로 인해 계속 고쳐져온터라 그 당시의 흔적은 알 수가 없고
다만 아랍의 건축구조를 반영하고 있어서 아랍 다리라고 불린다.
아랍 다리는 비에호 다리 아래쪽에 있다.
아랍 목욕탕 유적을 보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알라메다 전망대에서
알라메다 전망대로 가는 길을 유두화가 안내하고 있었다.
아슬아슬~~~
구시가지
론다에서는 하나도 바쁠 것이 없다. 누에보 다리를 건너
구시가로 향하는 발걸음이 느긋하다.
하얀 마을은 스페인 남부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한데
건물 전체가 모두 하얗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디언핑크나 파스텔 톤의 테두리를 두르기도 하고
빨강 지붕에 어울리는 색깔로 건물마다 창과 테라스를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자동차도 마차도 바쁠 것이 없다
누에보 다리에서 펠리페 5세의 아치까지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은, 때론 골목으로 이어지고
때론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내리막길이다.
펠리페 5세 아치(Arco de Felipe V)를 지나면 비에호 다리가 나온다.
펠리페 5세의 아치는 1742년 만들어진 것으로
스페인왕국의 부르봉왕조 첫 번째 왕인 펠리페 5세의 통치기간 중에는
시내로 들어가는 실제적인 현관으로 이용됐다고 한다.
펠리페 5세의 아치를 지나며 누군가 외쳤다.
"오~ 세르반테스여!"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가
왕위 계승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부르봉 왕가 사람으로는 최초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였다. 지금의 스페인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국왕도
부르봉 왕가의 후손이다.
스페인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펠리페 5세는
특히 문화적인 면에 관심이 많아
1713년, 스페인 어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왕립언어학술원을 만들었으며,
<모범사전>의 출판으로 왕립언어학술원의 언어 체계가 '모범 스페인어'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모범사전>은 16~17세기까지의 고전 작가들의 훌륭한 예문들을 인용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가치를 인정받는 작가는 바로 세르반테스였다.
세르반테스는 당시에 스페인어를 가장 정확하게 쓴 작가도 아니고
가장 인기 있는 작가도 아니었지만, 왕립언어학술원은 세르반테스의 언어 세계를
재평가해서 1780년에 <돈 키호테>를 호화 장정으로 다시 출판하고,
그를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스페인 어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돈 키호테>는 작품의 내적 가치는 물론이고, 언어학적 관점에서도
왕립언어학술원의 목표에 적합한 아주 훌륭한 모델이었다.
아랍 목욕탕 유적
비에호 다리 아래쪽에 있는 아랍 다리를 건너면 길 왼쪽에 '아랍 목욕탕 유적'이 있다.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반에 걸쳐 만든 이슬람 양식의 공중목욕탕 유적이다.
말굽형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둥근 천장에는 채광을 겸한 별 모양의 환기구멍이 뚫려 있다.
스페인에 남아 있는 아랍 목욕탕 중에서도 그 규모가 크며 보존상태도 좋다.
밖에서 본 환기구멍
1485년까지 이슬람 교도에게 지배당했던 이 도시는, 골목마다 창문마다
저마다의 사연과 모습을 갖추고 있다
누에보 다리에서부터 이어져 온 큰 길을 따라 구시가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론다의 수호성인을 기리는 산타 마요르 성당이 있다.
15~16세기의 옛 이슬람 사원 터에 건설된 성당으로 종루는 무데하르 양식의 첨탑을 개장했다.
건물 전면에 이슬람의 양식인 발코니가 유럽풍의 양식과 혼재되어 있어,
일반적인 유럽의 성당과는 다른 모습이다.
지도를 접어두고, 론다의 골목 골목을 발길 가는대로 누비다가
마당에 우물이 있는 집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타일로 만든 론다 전경
오래된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며
하야 벽 사이로 좁게 이어진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던 일은
론다에서 누렸던 소박한 기쁨 중의 하나였다.
구시가지를 거닐다가 무심코 들어간 전시장에서는
릴케사상을 주제로 한, 나무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진의 모델은, 에세이스트 17호부터 '老子의 原音을 찾아서'를 연재 해 주셨던
서강 대학교 최진석 교수.
흔들의자가 있는 풍경
론다 파라도르 Ronda Parador
론다 파라도르는 1761년에 건조된 시청사를 개조한 건물로, 론다의 명물이다.
우리 일행이 여장을 푼 파라도르는 신시가지의 가장자리,
눈맛 시원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파라도르'란 스페인 정부가 국내에 있는 2,000여 개의 中世 궁전이나 古城, 유서 깊은 수도원 등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건물의 내부를 개조하여 오픈한 국립호텔 체인이다. 1905년에 시작하여
지금은 약 100여 개로 구성되어 있다.
파라도르는 앉은 자리도 명당이려니와 방과 욕실과 식당 등이 모두 앤틱하여,
일반 호텔에 묵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정원 가장자리에 있는 수영장은, 우리 방에서 1분이면 갈 수 있었다
파라도르의 저녁 식탁에서도 포도주는 필수였다
훼밍웨이 산책로
'훼밍웨이 산책로'는 우리 일행이 머문 파라도르 가까이에 있었다.
그가 걷던 길을 따라 걷는데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부분, 사랑하는 여인이 죽은 뒤
주인공이 병원에서 나오는 장면이 선연히 떠올랐다.
"그들을 내보낸 다음, 방문을 닫고 불을 꺼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조각상에다 작별 인사를 하는 것과 같았다. 잠시 후 나는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 하고
빗속을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수식어를 모두 떼어버리고, 박정하리만치 간결한 문체로 남자의 슬픔을 표현한 마무리!!!
훼밍웨이가 17번이나 고쳐 썼다는 이 부분을 나는 17번도 더 읽었나 보다.
게리 쿠퍼와 잉그릿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포스터
론다는 아랍의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투우의 고장이요, 헤밍웨이
소설의 배경이 된 도시였다. 헤밍웨이는 이 론다에 머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있거라' 를 집필하면서 실제로 스페인 내전(1936~1939)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영화에서 시민군들이 브르쥬아들을 처형할 때, 다리 밑으로 사람을 던지는데,
바로 이 누에보 다리가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 영화는 세트를 이용해서 찍었다고...
투우장 Plaza de Toros
안달루시아 하얀 마을 중의 하나인 론다는 근대 투우의 창설자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태어난 도시로, 지금도 유서깊은 투우장이 남아 있다.
론다는 근대 투우의 발상지로 투우사들의 성지이다.
1785년에 지은, 스페인에서도 아주 오래된 투우장이다.
18세기에 이 도시에서 태어난 프란시스코 로메로는, 소를 모는 케이프와
물레타(붉은 천)를 고안하고 근대 투우를 확립했다.
관중 없는 투우장엔 햇빛만 가득하다
고야作 <투우>
그림에서 가장 많이 투우를 다루었던 화가는 18세기 중반의 고야(1746-1828)이다.
그는 '투우'를 소재로 역동하는 소의 모습을 판화집으로 묶어 냈다.
매년 9월이면, 이 투우장에서는 화가 고야가 살던 시대의
전통 의상을 입은 고야식 투우가 열린다.
고야作 <마을의 투우> Goya 'Bull Fight'
7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투우장에서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경기장 內 '투우박물관'에서
투우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중세 때 스페인 국토회복전쟁의 영웅 엘시드가
창으로 투우를 했고, 16세기에 까를로스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바야돌릿 광장에서 투우를 죽이는 행사를 가졌다. 이렇게 18세기까지
투우경기는 귀족들의 행사였고 그들은 말을 타거나 짧은 창검으로 소를 죽였다.
18세기 중엽부터 직업 투우사가 나타나고
(론다를 중심으로) 땅에서 황소와 싸우기 시작했다.
투우장 내부에는 로메로와 그의 아들, 전설적인 영웅이 된
손자 페드로를 비롯해 론다가 배출해낸 투우사들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전설적인 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는
생애를 통틀어 5,585마리의 소를 죽였고, 자신은
몸에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80세로 죽었다.
고야가 페드로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투우사가 40세 때의 일이다.
1820년, 37세의 투우사 꾸로 기옌은 치명적인 받힘을 당했다.
그는 론다 투우장의 모래 위에서 죽은 유일한 투우사이다.
피카소作 '투우사'
피카소 作 <투우>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며 열광하였던 사람들은 지켜보았으리라!
얼마나 많은 건장한 황소가 펄펄뛰며 들어왔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투우 [鬪牛, corrida de toros]
영어로는 불파이팅(Bull Fight)이라고 한다. 투우 [鬪牛, corrida de toros]는 에스파냐에서
발달하였고, 국기(國技)로 되어 있다. 에스파냐에 투우를 전한 것은 무어인이라고 하며,
17세기 말경까지에는 전적으로 궁정(宮廷)의 오락거리로 귀족들 사이에 성행했는데,
18세기 초 부르봉 왕조(王朝) 시대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일반 군중들 앞에서
구경거리로 행해졌다고 한다.
투우사의 개조(開祖)는 에스파냐 남부 출신인 프란시스코 로메로라고 하며,
지금도 에스파냐의 투우사 중에는 에스파냐 남부 출신이 많다.
스페인 신문들은 투우 기사를 스포츠면에서 다루지 않고 문화면에서 다룬다.
투우는 스페인 사람들에겐 놀이가 아닌 인생의 철학을 담은 하나의 의식이다. 투우는 목축업의 풍요를 기원하면서 신에게 숫소의 죽음을 바치는 의식에서 기원한다. 투우사가 숫소를 향하여 사력과 기술을 다하는 모습은 발레의 2인 무도와 비슷하다고 하며, 투우에서 살해가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이 최고의 구경거리는 아니며, 투우사와 숫소의 솜씨 즉 파세(pase)가 최고라고 하겠다.
투우의 공식적인 행사는 3월에 발렌시아의 '불축제'로 시작되며 10월 사라고사의 피랄축제로 막을 내린다 스페인의 투우 이야기, 고독한 투우사 보다 더 고독한 슬픈 검은소 ! 죽음과 맞서서 침착성으로 빚어내는 예술... 뿔이 날카로운 검은소가 노도와 같이 달려 온다. 흙먼지가 부옇다, 목표는 소를 흥분시키고 있는 빨간 천조각이다. 빨간 천을 놀리는 의젓한 복장의 투우사는 우아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모면한다. 관중들의 환호성, 스페인에서만이 맛볼수 있는 짜릿함 쾌감이다.
스페인 하면 누구나 투우와 플라밍고를 연상한다. 그래서 붙은 스페인 별명이 '정열의 나라'다. 그러나 막상 투우를 보러 가면 피가 튀는 원시적인 잔혹성과 이해 할 수 없는 고묘한 예술 적 심도로 초심자들은 쉽게 당황하게 된다. 오직 으리으리한 투우사의 복장과 5백 킬로그램 이 넘는 검은소 앞에 무릎을 꿇고 태연하게 청중을 향하는 저 유명한 '코르도베스'의 담력 앞에 우리는 그저 숙연할 뿐이다.
아무도 투우가 언제부터 서반아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한때는 아랍인들로 부터 전해졌 다는 설도 있었지만 서반아를 중심으로 고대 서양에서 헤라클레스시절부터 있어 온 사나이 들의 용기와 담력의 축제였으리라는 설이 맞다. 헤라클레스가 제리온의 투우와 히스파니아 평원서 싸운것이 전설적 시초가 된다.
고대중세에는 투우이야기가 별로 없으나 13세기 알폰소 현왕의 '총실록'(Cronica Gereral)에는 결혼식 뒤풀이에 투우놀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 중세기사 '시드'의 결혼식에도 투우놀이가 등장한다. 그러나 투우에 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세기 중반 이후이다. 특히 투우가 인기 축제로 자리를 잡은 것은 르네상스 시기인 16세기와 17세기다. 이때는 투우를 요즘 포르투칼이나 특수한 경우에 하는 식으로 말을 타고 기사가 말위에서 투우와 싸 우는 소위'레오오'(Rejoneo)방식이 유행했다.
요즘은 말 타는 투우사, '피카도르(Picador)가 그 당시 전통의 퇴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 다. 요즘은 피카도르도 소 등에 상처를 내는 일 밖에는 안 하지만… 그런 17세기 말에서 18세기부터는 요즘처럼 투우사가 땅에 서서 투우와 싸우는 방식이 일반화 된다. 귀부인에게 모자를 던지던 낭만적인 투우사들 18세기만 해도 투우와 싸우는 방식은 투우사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잔인하게 창이며 칼이며 화살로 투우를 죽였다.
화가 고야의 그림에 나오는 투우장면은 이런 잔인성과 흥분의 피투성이 무대들이다.
18세기 말에 와서야 로메로라는 사람이 오늘의 투우경기와 같은 규칙을 만들어 정격화되기 시작한다. 그때 부터 한 경기에 여기저기서 모든 투우사들이 제가끔 투우와 경기하는 식이 아니라 한 그룹이 조직적으로 경기에 참여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경기를 보게되면 맨 처음에 나팔이 울리고 투우가 시작됨을 고한다. 이때 투우사와 몇 몇 보조들이 나와 청중에게 인사를 한다.
투우사는 옛날 같으면 어느 귀족 부인에게 이 투우경기를 바친다는 식의 한마디를 하며 모자를 던진다. 이때 이 모자를 받는 귀부인에게는 그날이 영광스러운 날이 되는 셈이다. 이어서 문의 빗장을 열면 때로는 투우사가 커다란 카포테(Capote)를 휘장으로 두르고, 때로는 무릎을 꿇은 채 맨몸으로 뛰어나오는 투우를 맞는다. 펄펄 살아 날뛰는 투우를 한두번 패스(Pase)한 뒤 보조들에게 넘긴다.
보조 투우사들은 소를 피카도르(찌르는 기사라는 뜻)쪽으로 튼다. 이때 잘못하면 놀란 소에게 변을 당 할 수가 있으므로 보조들은 때로 소가 곤두박질하며 덤비면 틀 밖으로 뛰어 도망가기도 한다. 말을 타고 완전무장을 한 피카도르가 소를 유인하면 그에게 소가 덤빈다. 그때를 놓치지 않 고 피카도르는 등에 창을 꽂는다.
소는 등이 아플수록 더욱 더욱 덤비고 피카도르는 계속 투우 등에 상처를 낸다. 피카도르가 너무 소를 많이 찌르면 청중들이 소리소리 치며 야유를 놓는 것도 이때다. 소가 너무 힘이 빠져 버리면 진짜 본 경기가 시작될 때 힘을 못쓰기 때 문이다.
이일이 끝나면 '반데릴예로'(banderillero), 즉 등에 깃대 꽂는 투우사 두엇이 나온다. 맨몸으 로 서서 등에 얼이 든 투우를 부른다. 양손에 깃대 드개씩 들고, 투우가 반데릴예로 앞으로 달려오면 정면에서 등 양쪽에 깃대를 꽂고 날쌔게 도망쳐야 한다. 이미 여기서부터 투우의 멋과 예술은 시작된다.
- 투우(TORO) - 많은 사람들이 열광시키는 신성한 의식, 투우...그리고 정열적인 춤, 플라멩코. 스페인을 이야기하면서 이 둘을 빼놓으면 알맹이 가 빠진 것이나 다름 없다.
로마 시대때부터 있어 온 투우는 원래 귀족들의 오락이었으나 후에 서민들의 경기가 되었는데 안달루시아출신의 유명 투우사들이 많다.
투우는 투우사 마타도르(MATADOR)1명이 2마리의 소와 대결하며 1회 진행하는데 3명의 마타도르가 등장한다. 따라서 1회에 총 6번의 투우가 진행되며 투우1번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20분. 마지막 순간 마타도르가 새빨간 천(무레타)을 흔들며 소가 돌진하도록 하는데 (이를 파세PASE라고 함)몸이 소와 얼마나 아슬 아슬하게 비켜나느냐에 따라 기량의 우열을 점친다. 마침내 힘이 빠진 소에게 "진실의 순간"이 다가온다.
소의 정면에 선 마타도르가 심장 바로 위를 칼로 찌르는 "의식"을 치르면 1마리 소의 운염이 마감된다. 멋진 투우를 보여준 마타도르에게 관중들은 환호를 보내며 명예를 주도록 하는데 명예란 다름아닌 넘어진 소의 귀를 잘라 마타도르에게 주는 것. 하지만 이러한 명예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이 따르며 상대적으로 고수익이 보장된다.
▶ 투우를 보려면..... 스페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는 야성미 넘치는 남성들만의 경기이다. 영화의소재 로 등장하여 우리에게도 익숙한 투우의 본고장이 바로 마드리드이다.
마드리드는 변두리와 교외에 투우장이 여러 곳 있는데 라스 벤타스 Las Ventas투우장이 가장 유명하다.
투우 는 3월부터 10월까지 열리는데 주로 일요일 오후에 경기가 있다. 메트로 벤타스역에 내 리면 찾을 수 있다.
시내의 여행안내소나 여행사에서 티켓을 구입 할 수 있고, 투우장 매표소에서 구입해도 된다. 가장 싼 좌석은 2유로~제대로 경기를 보려면 10유로~정도는 내야 한다.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투우의 나라'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말년에
도자기에도 투우 몇 점을 그렸다.
피카소:'창으로 소를 찌르는 투우사'
피카소: '투우'
마네(Manet) : 투우 의상을 한 빈토린느
마네 : 투우
첫댓글 감동적이군요~ 자연 그 자체가 조각이면서 그림이기도 하고 거기에 선 사람조차 미술품이 되는 거리. 정말 죽기전에 가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 크지않은 조용한 도시였어요.
릴케의 고백처럼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애지는" ...그런 곳...
아! 가고 싶어라. 아직 못 가본, 옆지기가 꼭 가보고 싶다는 그곳... 그런데 옆지기가 잘 걸을 수 있게 건강해져야 돌아 다닐텐데 영영 그림의 떡이 아니길 빌 따름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잖나요. 가까운 시일 내에 두 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스페인에 가시면 호텔보다 파라도르를 택하세요. 여행의 진국을 그곳에서 두 배로 맛볼 수 있더군요.
안달루시아의 하얀 마을들이 야생화 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겝니다.
보는 동안 꼭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이곳, 산책길도 걷고 싶고 파라도르에 묵으며...
여행하는 동안 참 편안하겠다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이 아침 잠시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
가족과 함께 여행사 상품으로 여행했을 때와, 아카데미에서 프로그램을 짜서 갔을 때와의 차이점은 숙소에 있었지요.
두 번 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여행이었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 들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