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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 2020 올해의 좋은 시조(집) 총평
마주하는 세계, 추구하는 세계
정희경
1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형체가 있는 것은 그나마 오감에 힘입어 선택자의 판단이 용이할 수 있지만, 형체가 없거나 정신적인 것은 그 판단 기준이 오롯이 선택자의 정신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한 해 동안 발표된 시조·시조집 중에서 올해의 좋은 시조·시조집을 선택하는 일은 어떨까?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시조는 언어라는 형식으로는 형체가 있지만 그 담고 있는 내용은 형체가 없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달리 판단되고 무한한 상상력을 담고 있고 그 확장성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올해의 좋은 시조·시조집이 선정되는 것은 그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가 선자들의 눈과 마음에 공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 공감은 주관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객관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2 《다층》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조집은 이송희 시인의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와 이토록 시인의 『흰 꽃, 몌별』이다. 이송희 시인의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는 세련된 언어감각과 깊이 있는 현실 투영으로 서정과 현실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시조집이다. “말을 집어 삼”킨 당신(「암전」), “당신을 보내고 당신과 마주한 저녁”(「식탁」), “일그러져 내게” 온 “당신의 사랑”(「데이트」), “늘 불안한/당신”(「유리잔을 마주하다」), “눈부신 당신”(「옐로우」), “당신이 떠난 자리”(「카니발」), “당신이 잠든 동안”(「팔월」), “당신의 비명”(「여름, 비에 젖다」), “액자 속”에 살고 있는 “귀를 감싼 당신”(「액자」), “갑이” 된 “당신”(「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당신의 무덤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흑백」), “수많은 당신들 앞에/또 다른 당신”(「십이월」), “당신들이 빨려드”는(「빨대를 꽂다」), “눈밭에서 길을 잃은 당신”(「독감」), “눈 내리는 창밖에서 당신을 기다리며”(「데자뷔」) 등 “수많은 당신들 앞에서” 시인은 “또 다른 당신이” 된다. 사물 혹은 객체로 표현된 당신 즉 타자와의 거리를 좁혀 동일시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물론 간극을 좁히는 데는 당신에 대한 사랑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의도는 작품에 생명성을 부여하여 현실감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당신’ 뿐 아니라 ‘너, 네, 나, 내, 그, 그녀, 그대, 우리’라는 시어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이 시조집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방증이다.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의 또 다른 특징은 ‘상실’에 있다. 「사막의 표정」 「꽃잎의 시간」 「엑스트라」 「바닥의 단상」 「우편함」을 통해 해고자, 노동자 등 사회의 그늘에 있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행복의 상실을, 「인형놀이」 「모노드라마」 「열리지 않는 가방」 「사각지대」를 통해서는 폭력에 의한 인권의 상실을, 「산벚나무의 시간」 「시간의 문」에서는 시간의 상실을, 「흑백」에서는 역사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당신은 캄캄하게 말을 집어삼켰어//벽과 벽을 더듬어 문을 찾아 헤맬수록 발은 더 깊이 빠져 헤어날 수 없었어 묻어버린 수사들은 기억 속에 잠겼고 꺼내려 할수록 가라앉아 버렸어 침묵은 침묵을 낳고 또 침묵을 키워갔어 사월은 화려했고 오월은 더 빛났지만 그해의 봄날은 하얗게 지워졌어 떠올리려 할수록 색은 더 지워지고 네가 있던 풍경도 사라지고 말았어//어둠은 활활 타올라 너와 나를 삼켜버렸어 -이송희, 「암전」 전문
한쪽 눈을 잃고서야/양쪽 눈을 얻었다//한쪽만 바라보며/한쪽으로만 걸었던//외골수 외길의 시간,/외롭고도 더딘 길들//흑백의 담장 앞에서 밀고 당기며 새던 밤/앞에서 달려오는 그의 말을 자르던//편견의 깊은 동굴 속/뼈아픈 밤의 소리//이제 나는 외눈으로 내 깊숙한 곳을 본다/한쪽 눈에 담겨지는 더 넓은 들판을//너와 나, 우리 사이를/가로지르는 말의 세계 -이송희, 「외눈」 전문
많은 작품이 타자의 상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비해 「암전」과 「외눈」은 자신의 상실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말을 집어삼켜”버려서 “어둠은 활활 타올라 너와 나를 삼켜”버린 「암전」은 “하얗게 지워”진 “봄날”에 함께 침묵하고 지워진 너와 나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역사 앞에 침묵하는 당신과 나, 더 나아가서는 우리들에 대한 반성으로 읽어도 좋겠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은 “말을 집어삼”킴으로 인해, “침묵”함으로 인해 “어둠”이 “활활 타올라” 모두를 삼키는 암전으로 가고 있다.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은 화려하고 빛남으로 계속 남아야 한다는 시인의 결연한 의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현시대의 아픔을 역설과 은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몇 안 되는 값진 작품이다. 「외눈」은 상실에서 얻은 충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외눈”으로 “내 깊숙한 곳”을 보고 “한쪽 눈에 담겨지는 더 넓은 들판”과 “너와 나, 우리 사이”의 “말의 세계”까지 읽는다. 이 작품에서 “양쪽 눈”이 상징하는 바는 “흑백의 담장”이며 “밀고 당기며 새던 밤”이다. 극단의 양극의 논리에 빠져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편견의 “양쪽 눈”이다. 그렇다면 “외눈”은 반대로 상대를 인정하는 눈이다. 편견을 버린 순수의 눈이다. 자기중심의 사고를 버림 혹은 상실함으로써 더 큰 세계를 얻는 눈이다.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진리가 작품 속에 잘 녹아있다.
이토록 시인의 시조집 『흰 꽃, 몌별』은 신선한 비유와 깊이 있는 사유, 그리고 개성적인 목소리로 사물 혹은 존재를 증명하는 성찰에 무게를 둔 작품이 많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깊이를 더하다」 「황사」 「비의 약전」 「우박에 관한 몇 개의 비유」 「물웅덩이」)이든, 내 곁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사물(「목간」 「드라이플라워」 「넝쿨장미」)이든, 타자 혹은 이웃 (「수화」 「활」 「국수를 기다리다」 「심야버스를 타는 하루살이」 「0시의 편의점」), 선현들이 남겨놓은 정신적·물질적 유산(「다시 쓰는 헌화가」 「누정의 꽃」 「읍성에서 한 시절」 「면암을 읽는 밤」 「다시 쓰는 도하가」)이든, 글을 쓰는 행위(「절필」 「마당을 쓸다」 「시, 제련」)이든 그가 선택한 폭넓은 소재들은 “어디서 흘러왔나 저 써늘한 문장들”(「면암을 읽는 밤」)이 되어 단단한 정형의 결속 안에서 시조가 운문문학으로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나무 엉덩이에 플러그를 꽂는다/오늘은 거룩한 밤/성자가 태어난 날/울음이/강보에 싸여 말구유를 타고 온다//캐시밀론 솜눈을 거실 가득 내려야겠다/종소리도 닿지 않는 불 꺼진 첨탑 아래/남몰래 아이를 지운/마리아가 우는 밤//죽은 나귀 발자국들 공중을 걸어가고/밑동을 다 들어낸 불구의 기억인지/나무는/뿌리도 없이/우듬지만 푸르다 -이토록, 「플라스틱 트리」 전문
“전나무 엉덩이” “캐시밀론 솜눈” “뿌리도 없이/우듬지만 푸”른 “나무”는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세계이다. “오늘은 거룩한 밤/성자가 태어난 날” “남몰래 아이를 지운/마리아가 우는 밤” “죽은 나귀 발자국들 공중을 걸어가”는 밤은 종교의 세계이다. 이 두 세계가 화자의 “거실”에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보이는 현실 세계마저도 진실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종교의 세계가 허상의 세계이듯 현실 세계도 진실처럼 보이는 세계일 뿐이다. 그래서 제목부터 “플라스틱 트리”로 출발한다. 그러나 진실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진리의 세계이고자 하는 시인의 염원이 보인다. “플러그를 꽂”고 “거실 가득” 솜눈을 내리는 행위를 통해 “밑동을 다 들어낸 불구의 기억” 속에서도 “뿌리도 없이/우듬지만 푸”른 나무를 보고 있다. 다소 냉소적이기는 하나 종교가 갖는 초월의 세계를 자아와 현실의 세계로 끌어오고 있음을 본다.
다시 온 이승이여//나는 그저/유골이다//길 잃은 발자국들 허공을 떠도는지//돌아갈/이름도 없이/살을 지운 시간들//일련번호 목에 걸고/뼈를 꺼내/딸각일 때//노래를 찾으러 온 풍금 속 어둠 같은//바람이/흰 줄에 걸려/오금을 꾹 접는다 -이토록, 「발굴」 전문
이 시조의 주체는 “유골”인 “나”이다. 많은 시간 동안 땅속에 혹은 “돌아갈/이름도 없이/살을 지운 시간” 속에 갇혀 있던 “유골”이다. “일련번호” “흰 줄”로 보아 이 발굴 현장은 국가가 주도하는 현장임에 틀림이 없다. 전쟁에 희생된 유골인지 앞선 시대의 왕의 유골인지 평민의 유골인지 아니면 순장한 유골인지 알 수 없으나 발굴하는 입장에서는 “흰 줄”을 치고 “일련번호”까지 매기는 중요한 유골이다. “노래를 찾으러 온 풍금 속 어둠 같은/바람이” “오금을 꾹 접는” 헌사와 존경을 표하고 있다. 그 “노래”는 “어둠”을 빠져나와 “다시 온 이승”에 울릴 것이다. 발굴 현장의 모습을 ‘발굴자’나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유골’의 입장에서 전하고 있어 존재에 대한 접근이 더욱 생생하다.
3 《다층》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조 10편을 읽는다.
나 죽어 부고에 뭐라 쓸까 궁금하네//종이신문 부고 보다 그게 문득 궁금하네 세상과 이별이라 별세했다 할 것인가 영원히 잠들었다 영면이라 할 것인가 고인 되었다 작고했다 인간계 떠났다 할 것인가 죽어 세상 떠나도 서열은 남아있어 사망 위에 별세 별세 위 타계 타계 위 서거 그 위엔 또 뭘까 죽어 한 줌 재 누구나 매한가진 걸//난 그냥,/잘 갔다고만/그렇게 좀 전해주오 -김영란, 「죽음의 서열」 전문
‘이승을 떠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에서 이 작품은 시작한다. “별세, 영면, 고인, 작고” 등 죽음의 다른 표현을 화자는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 궁금함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실마리일 뿐이다. 죽음에는 저승으로 간다는 의미보다는 이승에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거기다가 더 나아가 어떤 서열로 살았는가에 방점이 찍힌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종이신문”의 부고란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진 나의 부고에 관한 생각이 ‘죽음에 대한 표현들 → 서열에 따른 표현들’로 나아감이 주제를 성급하게 드러내지 않고 독자의 시선을 끝까지 끌고 오는 힘을 보인다. 사설시조가 가진 미덕을 십분 발휘한 작품이다. 중장에서 늘어지는 사설이 대구와 열거와 점층의 수사를 통해 진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초장에서 도입과 중장에서의 전개와 전환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서의 결말의 안정된 구조도 사설시조가 가지는 특징에 편승한 이점을 지닌다. 죽음이란 이승에서의 삶의 반영이 아니라 “그냥/잘 갔다고” 말 할 수 있는 인생 흐름의 선상에 있다는 것을, 죽음에는 서열이 없다는 것을 ‘추구하는 세계’를 통해 보여준다.
세상 가장 앞뒤 없이 아름다운 말 있다면/눈앞 캄캄해지는 바로 이 말 아닐까/해와 달 눈부심 앞에 그만 눈이 멀 듯이//큰 기쁨 깊은 사랑 크나큰 마음으로/아무것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눈멀어, 아주 한마디로 끝내주는 이 말 -류미야, 「맹목」 전문
‘맹목’의 사전적 의미는 ‘앞뒤를 가리거나 사리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 혹은 ‘사물을 볼 수 없는 눈’이다. 시인에게 있어서의 ‘맹목’은 “세상 가장 앞뒤 없이 아름다운 말”이며 “눈앞 캄캄해지는 말”이고 “아주 한마디로 끝내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의 ‘맹목’은 ‘숭고한 사랑’으로 읽힌다. 시인은 이미 그의 작품 「말들의 해변」이라는 단수에서 장님이었던 시인 호머와 「눈먼 말」의 시를 남긴 박경리를 언급한 바 있다. 시인에게 있어 눈이 먼다는 것, 즉 ‘맹목’의 의미는 무한한 긍정이며 근원에 가 닿는 것이다. 그것이 글을 쓰는 행위이든, 사람을 대하는 행위이든, 삶을 살아가는 행위이든 시인에게 있어 ‘맹목’이란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동한다. 그리고 쉬운 시어의 선택과 전개로 그 에너지가 독자에게도 잘 전달되고 있다. “눈앞 캄캄해지는” “눈이 멀 듯이” “아무것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눈멀어” 등의 ‘맹목’에 대한 다른 표현들로 시조의 단조로움을 피해가는 말 부림에도 성공한 작품이다.
날더러 철들라꼬/봄이 이 모양이제/기별이 올 적에는/코빼기를 뵌 둥 만 둥/문빗장 다 열어놓고는/나갈 문도 못 찾네//어이쿠, 이 문둥아/하는 짓 하고는 참,/아닌 봄 역병 속에/무다이 훼사를 놓네/고 잘난 입마개 없이도/꽃은 저리 보채 쌓고//꽃이 피믄 뭣할 끼고/피는 족족 피멍인 걸/푸닥거리 불 지핀들/재만 풀풀 날리는 걸/글렀네 철들긴 글렀네/이미 낯선 낯빛인 걸 -박기섭,「봄 아닌, 봄-사투리調·10」전문
“날더러 철들라꼬/봄이 이 모양이제”라고 시작하여 “글렀네 철들긴 글렀네/이미 낯선 낯빛인 걸”로 마무리하는 이 작품은 사투리조로 하는 한탄이다. 처음 초장에서 묻고 마지막 종장에서 스스로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답은 이미 초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첫째 수 종장 “문빗장 다 열어놓고는/나갈 문도 못 찾”는 것이 둘째 수 초장 “문둥”이로 이어지고 둘째 수 종장 “고 잘난 입마개 없이도” 보채는 꽃은 셋째 수 초장 “꽃이 피믄 뭣할 끼고”로 받는다. 혼자 말하는 사투리조 한탄이지만 던지고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사투리조와 더불어 시조의 능청거림을 잘 보여준다. ‘철들다’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줄 알게 되다’라는 의미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물론 “역병”이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수 있는 것조차 막는다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시인은 그 속에 ‘봄이라는 철(계절)이 들지 않는다’는 의미 즉 ‘봄이되 봄이 아니다’는 의미까지 은유로 깔아 놓고 있음을 본다. 꽃은 “피멍”이 들고 “푸닥거리 불”은 “재만 풀풀 날”려 봄은 “이미 낯선 낯빛”이기 때문에 제목처럼 “봄 아닌, 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들다”는 시어는 “역병”이 인간에게 주는 경고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바라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의 표현이다. 참으로 적절한 시어의 선택이고 치밀한 구성이다. 생경한 현실도 계몽적인 내용도 없으면서 코로나 19로 겪는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잘 보여주는 모범적인 작품이다.
유월의 첫 강의는 밤꽃에 관한 서사/전문적인 향기를 허공이 베낄 동안/빠르게 꽃술을 늘이며 여름이 달려든다//서두부터 어지러운 꽃들의 속기록이/부우연 달변으로 뒤덮인 첫더위가/이마를 들이받으며 숲길을 막아선다//고약하고 숨 막혀라 햇살도 챙챙한 날/보리 수염처럼 쇠어가는 자욱한 책장마다/능선을 회오리치는 밤꽃들이 소란하다 -박명숙, 「별도의 숲」 전문
시인이 말하고 있듯이 이 시조는 “밤꽃에 관한 서사”이다. 유월 밤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이 시간적 흐름으로 펼쳐지고 있다. “강의”라는 전제를 달아 “전문적, 서두, 속기록, 달변, 책장”의 시어들이 작품 전체에 잘 녹아있다. “강의”라는 축과 “밤꽃”이라는 축이 이 시조 전체에서 서로의 영역을 잘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견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밤꽃이 피는 과정을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상징과 은유로 보여줌으로써 회화성을 높이는 효과를 보인다. 밤꽃의 독특한 향기를 “전문적인 향기”로 단정한 시인은 “어지럽”고 “부우연”하고 “고약”하고 심지어는 “숨 막혀라”라고 하여 이 시어만 떼어내어 본다면 직설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 향기를 나타내는 시어들이 각기 다른 시어 “서두, 달변, 햇살도 챙챙한” 등의 시어와 조응함으로써 직설에서 상징과 은유로 탈바꿈하는 경지를 보인다. 유월 밤꽃이 피기 시작하면 동네 앞산, 뒷산이 온통 밤꽃 냄새로 뒤덮이는 상황이 가히 “별도의 숲”임에 틀림이 없다. 후각, 시각, 청각이 동원된 이 “별도의 숲”의 강의는 시인에 의해 명강의로 탄생했다.
그녀는 칼날로 북극 먼저 도려낸다/지구의 기울기인 23.5도로 사과를 눕혀/돌리며 깎아나간다/북반구가 하얘진다//푸른 지구 속살에서 흘러나온 과즙 향기/끊길 듯 이어지며 남극까지 깎이는/청사과 엷은 껍질에/매달린 빌딩들//사과를 기울여 한 바퀴 돌릴 때마다/그녀의 눈동자에 낮과 밤이 지나가고/사랑의 기울기 끝에/빙하가 다 녹는다 -박성민, 「청사과 깎는 여자」 전문
참 기발한 작품이다. “청사과”와 “푸른 지구”를 동일시하고 있는 작품, ‘깎는다’라는 행위에 방점을 둔 이 시조는 독특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지만 난개발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흔히 사과를 비스듬히 기울여 윗부분부터 깎는다. 끊길 듯 말 듯 사과를 돌려가며 아랫부분까지 깎으면 사과는 맨살을 드러내며 과즙 또한 흐른다. 시인은 그 과정을 지구의 난개발로 개성 있게 그려내고 있다. ‘붉은 사과’가 아니라 “청사과”를 선택한 점은 “청” 즉 ‘푸르다’를 강조하여, 지구의 난개발을 염두에 둔 탁월한 선택이다. “푸른 지구”는 “북반구”가 먼저 “하얘진다.” 실제로 북반구가 남반구에 비해 많은 인구가 분포하고 육상생태계가 발달하여 난개발에 의한 생태계 파괴와 자연의 훼손이 심하다. 그 깎는 행위는 이제 남반구를 지나 “남극까지” 이어져 “빌딩”들이 매달려 있으니 그 심각성은 “빙하가 다 녹는다”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 종장의 “사랑”이라는 시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과를 깎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달콤함을 주기 위한 행위라고 본다면 “푸른 지구”를 깎는 행위 또한 누구를 위한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행위는 그 누구, 결국 인간을 이롭지 않게 만든다. 그렇다면 “빙하”를 녹이는 이 “사랑”이라는 시어는 역설적으로 쓰인 것이다. 난개발의 현실 앞에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오늘따라 바람은 왜 네게로 부는지/금요일은 둥글고 촘촘하게 달리는지/분홍은 왜 슬픔 뒤에 귀 닫고 서있는지//안개는 왜 발목을 또다시 붙잡는지/오지 않을 연락은 그렇게 창백한지/떠나는 모든 것들은 한꺼번에 오는지//물컹거리는 울음은 왜 쓴맛이 나는지/폭우는 왜 이럴 때 싱싱하게 돋는지/사랑의 유효 기간은 왜 그렇게 뻐근한지 -박화남, 「새들에게 묻는다」 전문
각운으로 인해 얼핏 보면 각 장과 각 수가 대등한 무게로 나열되어 있는 듯하지만 의미가 점층적 단계를 밟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조의 주된 정서는 “슬픔”과 “울음”이다. 이 “슬픔”과 “울음”을 녹여 내는 방법이 개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점점 좁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람” “금요일” “분홍”은 화자의 슬픔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시어이지만 슬픔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와 무관한 것조차 슬픔이 이입되는 법이다. 시인은 그 점을 노리고 있다. 그래서 첫째 수는 “슬픔”의 ‘배경’이라 해도 좋겠다. 둘째 수에서는 슬픔이 화자에 더 근접하고 있다. “발목”을 “붙잡”고 “연락”은 오지 않고 “모든 것들은” “한꺼번에” “떠나”고…. 그래서 화자는 “창백”하다고 고백한다. “슬픔”의 ‘현상’이 나타난 둘째 수이다. 셋째 수에서는 그 “울음”과 “슬픔”의 감정을 토로하기에 이른다. ‘배경’과 ‘현상’을 지나 ‘감정’에 이르고 있다. “물컹거리는 울음”, “싱싱하게 돋는” “폭우”, “뻐근한” “사랑의 유효 기간”이라는 표현은 “울음” “폭우” “사랑의 유효기간”이라는 대상을 낯선 것들 혹은 낯선 동사들과 결합하여 주관화시키고 있다. 그 결합은 “울음” “폭우” “사랑의 유효기간”을 ‘낯설게 하기’에 충분하다. 초중종장을 의미의 열거로 배열하고 첫째 수, 둘째 수, 셋째 수를 의미의 점층으로 배열하여 주제를 부각하고 있는 점이 이 시조의 가장 큰 매력이다.
바라보는 눈길은 그들의 몫이지만/파도와 갯내음은 나무나루木浦 향기라오/눈물에 빠진 노을이 아리도록 눈부셔요.//비린내가 퍼덕이는 선창 골목 헤매는 밤/샛바람 치는 날은 부평초도 서럽다나/불빛에 따라온 그림자 헤아리며 갑니다.//덤으로 받은 선물 에코와의 산책길은/잠든 세포 깨우는 그녀만의 시간 여행/행복은 『정희진처럼 읽기』/녹아드는 커피 한 잔. -용창선, 「에코의 서재」 전문
시인의 말에 따르면 제목인 “에코의 서재”는 목포시 소재 북카페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커피와 함께 『정희진처럼 읽기』에 빠져든다. 이것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지만 시조 속에서는 시인이 펼쳐놓은 또 다른 공간을 불러온다. 서평집인 『정희진처럼 읽기』는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까지 79권의 책을 ‘고통’, ‘주변과 중심’, ‘권력’, ‘안다는 것’, ‘삶과 죽음’이라는 5장으로 분류하여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작가 정희진의 시각으로 79편의 작품을 읽는 것이니 참으로 밀도 있는 책이고 화자나 시인의 입장에서는 ‘에코’의 책인 셈이다. 그래서 제목인 “에코의 서재”는 북카페라는 실재 장소를 넘어 바로 『정희진처럼 읽기』 그 자체가 되고 그 책을 읽는 행위 자체라는 또 다른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정희진처럼 읽기』를 통해 안과 밖을 나누고도 있다. “파도와 갯내음” “눈물에 빠진 노을” “비린내가 퍼덕이는 선창 골목” “샛바람 치는 날”은 바깥의 풍경이고 다소 애상적이다. 그에 비해 『정희진처럼 읽기』는 “에코와의 산책길”이고 “시간 여행”이며 안으로 천착하는 모습이다. 시인은 다소 발전이 늦은 목포의 겉모습에 정신적인 풍요를 더해 내면의 충족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어린 왕자 행성에 불시착한 밤이면 꿈에라도 꿈꾸던 계절을 소진해요//몇 겹의, 꿈자리 너머 소녀 이후 또 소녀//젖멍울 풀릴 무렵 심장 언저리마다/꽃빛으로 녹아든 우리 최초의 언어//좀처럼 잊힐 리 없는 첫사랑의 데자뷔//사막의 전갈자리 서쪽으로 기울면 당신의 이름 위로 꽃을 불러보는 날/전갈이 전갈을 물어 피를 섞는 밤 열두 시//불 꺼진 도시 변방 쓸쓸한 미간 사이 오늘의 일기 속에 붙들린 민달팽이//축축한 전생을 벗고 소낙비로 울어요 -이명숙, 「사막장미」 전문
“사막장미”는 ‘모래에 갇혀 있던 해수가 증발하면서 모래와 미네랄이 엉켜 장미 모양의 결정체로 굳어진 석고’이기도 하고 ‘극심하게 건조한 기후 속에서도 놀라운 저항력으로 수분을 유지한 채 살아남는 식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조에서의 “사막장미”는 “어린왕자”가 그의 행성에서 정성껏 돌본 그 ‘장미’이다. 어린 왕자와 장미는 서로를 길들이면서 상대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화자는 “어린 왕자 행성”에서 “장미”를 만난다. “장미”는 화자에게 있어 사랑이다. 그것도 “최초의 언어”를 가진 “첫사랑의 데자뷔”이다. “장미” 즉 “꽃”으로 대변되는 사랑은 원초적인 그리움이며 근원적인 자아에 닿아있다. “전갈이 전갈을 물어 피를 섞는 밤 열두 시” 그 근원을 지나 일상의 “일기 속”으로 돌아온 자아는 “축축한 전생을 벗고 소낙비로 우”는 민달팽이가 된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그리움을 꿈이라는 현상 안에 가두고 있지만 “불 꺼진 도시 변방”이라는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그 원형을 “소낙비”를 통해 울음으로 표현한다. 꿈속의 “어린 왕자 행성”이라는 이상과 “도시 변방”이라는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활달한 행갈이로 더 증폭되는 느낌이다.
어둠의 고린내가 코끝까지 올라오는 밤/한 가난이 표백된 채 헛웃음만 짓고 있다/눈물로 밝혀주는 별빛, 어느 죽음의 환생일까//한번 잘 살아보자는 그 예쁜 말에 속아/진창 길 가는 곳곳 네 선한 맘 읽어내다/기우뚱, 몸이 다 닳은 줄 까맣게 몰랐다//간절한 기도들은 하늘에 안 닿았지만,/슬픔만 묻은 체온 못 뿌리친 죄인이지만,//바닥에/쏟은 눈물과 달리/뜨겁도록 웃어도 봤다 -임성구, 「밑창」 전문
이 시조의 주체는 “밑창”이다. “밑창”의 장례식이 진행 중이다. 그 장례식에서 “밑창”이 뱉어내는 말들을 시인은 받아 적고 있다. “몸이 다 닳은 줄 까맣게 모른” 채 “슬픔만 묻은 체온 못 뿌리”치고 “진창 길 가는 곳곳” 따라다닌 “밑창”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예쁜 말” “선한 맘” “간절한 기도”가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닥에” “눈물”을 쏟기도 했으나 “뜨겁도록 웃어도 봤다”라고 고백한다. “밑창”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소시민이라 읽어도 좋겠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발을 감싸는 신발, 신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밑창을 소재로 선택한 시인의 의도는 충분히 감지된다. 시인은 소시민의 신산한 삶을 위무하고 있으며 짙은 페이소스가 작품 전체에 흐르도록 장치하고 있다. 시적 주체를 “밑창”으로 놓고 둘째 수와 셋째 수에 “밑창”의 독백을 배치함으로써 첫째 수의 “밑창”의 “환생”을 뒷받침하고 있다. 첫째 수에서 “밑창”의 “환생”을 툭 던져놓고 “밑창”의 속마음을 통해 그 당연한 귀결을 보이는 형태를 취해 주제를 부각하는 노련함을 보인다. 물론 “어둠의 고린내” “표백된 가난”은 아직까지 힘든 삶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힘들고 어려운 삶은 “눈물로 밝혀주는 별빛”에 힘입어 새로운 이상의 세계로의 환생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전반에 “밑창”에 대한 시각을 현실로, 서정으로, 눈물로, 웃음으로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는 변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홑잎이니 혼잎이니/화살나무 새잎 앞에//조물조물 무쳐먹던/묵은 입술을 고치다//빗맞은/화살 같은 것을//다시 맞는/연한 봄날//어린순은 어쩌면 다/나무들의 혼이겠지만//홑을 아는 잎이라면/혼도 아는 잎이려니//홑과 혼/반 끗 사이가//섬도 같고/별도 같고 -정수자, 「홑혼」 전문
1인 가구의 빠른 확산에 더하여 코로나 19 시대가 혼술, 혼밥, 더 나아가 혼공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홑잎”이니 “혼잎”이라 해도 좋겠다는 독특하고 참신한 발상에서 이 시조는 시작한다. 거기다가 ‘혼’이라는 동음이의어의 발상이 더하여 우리말의 재미있는 말 부림에 힘입은 작품이다. ‘홑잎나무’라고도 불리는 “화살나무”를 선택한 점도 탁월하다. 화살나무는 나뭇가지에 화살 깃털을 닮은 회갈색의 코르크 날개를 달고 있다. “묵은 입술” “빗맞은/화살”은 화살나무를 시각적으로 끌어올린 극점이지만 이 시조의 주제 또한 절정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조물조물 무쳐먹던/묵은 입술을” 고쳐보지만 “빗맞은/화살 같은 것”이므로 결국은 혼자이다. 누군가를 보내고 “다시 맞는” 봄이지만 또 그 새잎은 “홑잎”이다. 그러나 나무의 “어린순”은 “나무들의 혼”이라 하여 ‘혼魂’은 혼자에 대한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이다. ‘홑’과 ‘혼자의 혼’은 한 끗도 아니요, 반 끗 차이지만 ‘홑’과 ‘혼魂’은 ‘섬과 별’같이 그 사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겉으로는 반 끗, 안으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이 “홑혼”은 제목에서부터 ‘홑과 혼(자)’ ‘홑의 혼魂’으로 읽히는 중의성을 가져와 홀로된다는 것, 홀로서기라는 것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확장하고 있다.
4 시인이 마주하는 세계는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아니 시인 스스로 그러한 현실을 마주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고 하는 것이 더 옳다. 시인은 진한 페이소스를 가지고 문제점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굳은 의지로 새로운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다층》이 뽑은 올해의 좋은 시조· 시조집에서 보았다. 시인이 꿈꾸는 이상의 세계는 힘들고 지친 현실 세계를 견인할 것이다. 시조의 미래가 밝음에 박수와 확신을 보낸다.
-《다층》 2020. 겨울호 |
첫댓글 좋은 시집과 좋은 시조와 무엇보다 더 좋은 총평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문학 카페 '시인회의'로 모셔갑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