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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2 주일설교
본문: 렘 17:5-8
제목; 마음이 떠난 사람
1.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다.
둘을 겸하여 믿고 의지할 수는 없다.
사람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없다.
하나가 마음을 차지하면, 자연 다른 하나는 밀려나고 말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입술로는 가까워도 마음은 멀도다가 되고 만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니라”(마6:24)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여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겉으로는 종교적으로 의롭게 보였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 거짓과 불법이 가득하였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도 낙타는 삼키는 회칠한 무덤이었고,
교회를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사람을 믿는 사람은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사람이다.
‘육신’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과 세상’을 말한다.
‘육신을 그의 힘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그 사람 또는 세상을
그의 힘으로 의지하고 따르고 우상으로 섬기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믿는 사람은 사람과 그 소유와 쌓은 바벨탑과 지혜를 그의 힘으로 삼는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을 모르고 돈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여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마음은 돈과 재물을 섬기고 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온통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결코 하늘과 하늘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기울일 수가 없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한다.
세상과 벗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반대는 ‘영’이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른다.(갈5:17)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영에 있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육신에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그리스도의 영도 없이 교회 다니고 직분만 맡으면 구원받은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과 교인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은 멸망의 무리들일 뿐이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 천국과 지옥만큼 다른 사람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
종일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가를 보면 그가 무엇을 따르는지 알 수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가져오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한다.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 일시적으로는 뭔가를 이루고 재물과 성공을 쌓는 것 같지만,
그 끝은 멸망이고 사망이고 저주로 끝이 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교인들도 이 교훈과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그대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이스라엘 역사가 증거하고, 인류 역사가 말씀이 진리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
원칙(말씀) 중심으로 살 때 오래 번영함을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증거하고 있다.
몇 년 농사로 헤아리지 말고 일생의 농사, 역사의 농사로 인생을 헤아리고 살아야 한다.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이 받는 저주를 자세히 말씀하고 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렘17:6)
그 저주 받은 모습은 사막에 외롭게 처량하게 쓸모없이 서 있는 떨기나무와 같다.
그 인생에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외롭게 소망 없이 절망 가운데 산다.
간조하고 건건하다는 것은 광야 사막이 뜨겁고 건조하여 생물이 살기 힘든 환경을 말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라고 말씀한다.
떨기나무처럼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떨어져, 외롭고 힘들고 고달픈 인생의 그림이다.
그것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저주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어둠과 혼란과 공허들은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들이 받는 하늘의 저주이다.
삶에 활력이 없고 평안이 없고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가?
약물과 향락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온 질병이고 저주인 것이다.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마음 가죽을 베고 스스로 할례를 행해야 한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 힘을 삼는 마음 속 그 우상을 제거하고 버려야 한다.
2.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17:7)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힘을 다해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인생에 복과 저주를 갈라친다.
복을 그토톡 원하면서도 저주의 길에다 마음을 쏟아부으는 역설과 모순을 언제 깨달을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야망을 품고 열심히 달려간다고 복이 오지 않는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는 것이 하늘의 복이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마음 속 생활 속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의 법도대로 살아야 복이 임한다.
하나님도 말씀도 다 팽개친 채로 일에만 매달리고 바벨탑 쌓는 경쟁에만 집중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맹인들이요, 한치 앞도 못 보는 뱀들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입술로는 하나님과 가깝고 마음은 먼 자들에게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실 뿐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와 강단에 얼마나 많은 세상 지혜들이 들어와 있는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 없는 곳, 그곳은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회당일 뿐이다.
하나님은 오직 순전한 말씀이 선포되고 순종하는 곳을 교회로 여기신다.
그 교회를 축복하시고 사용하신다.
오늘 하나님이 네게 명령하는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을 것이며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1-6)
이 모든 복을 받는 조건은 오직 하나이다.
네 소견에 옳은 대로 살지 말고, 네 주장과 감정대로, 네 주권으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심을 믿지 않으니까
성경도 우습게 알고 교회도 예배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을 성경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싫은지, 성경과 예배를 멀리만 한다.
형식적으로만 가까이할 뿐, 마음은 온통 다른 것으로 채우고 멀기만 한다.
성경을 멀리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우상과 가까워진다.
세상과 벗하게 되고 하나님과는 원수가 된다.
땅에만 보물을 쌓을려고 하고 하늘에는 보물을 쌓을려고 하지를 않게 된다.
성경을 멀리하면 복과는 멀어지고 저주와는 가까워진다.
생명과 평안을 주는 영의 생각과는 멀어지고 사망을 낳는 육신의 생각으로만 살게 된다.
복과 저주는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그리고 말씀이 기준인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육신을,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힘으로 삼고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지금도 통치하고 심판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상 곧 복을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 상을 푯대로 삼아 달려간다고 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우리 주님도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도 하셨다.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선다고 하셨다.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이고,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면 그 집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셨다.
그래도 성경을 멀리하고 악인들의 꾀만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만 설 것인가?
오직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만이 교회를 개혁하고 내 인생을 개혁할 수 있는 길이다.
교회도 내 인생도 성경의 진리가 그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한다.
그 길만이 복된 길이고 형통하는 길이고 인생이 평탄해지는 길이다.
3.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결실을 그치지 아니함 같다.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8)
광야 건조하고 건건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심어진 떨기 나무와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복과 저주의 엄청난 차이이고, 인생의 총결산이 맞게될 극명한 차이이다.
잠시 뭘 좀 가졌다고 그것이 영원한 줄 알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받는 일시적인 결말을 보고 있지만 최종 결말은 그것이 유가 아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17:11)
인생은 짧은 안목으로 보지 말고,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길게 영원까지 성경을 통해 보고 내 운명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룸을 믿고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 기다림이 길어 보여도 하나님의 때가 차면 속히 이루어진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광야 40년이 차매 모세를 세우셨고, 주님도 때가 차매 오셨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다.
결실이 그치지 않게 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할 것이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할 것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실 것이다.
우리 손으로 행하는 일들이 견고하게 서게 될 것이다.
한가족교회와 청교도 아카데미에, 여러분의 가정과 일들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