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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4
李承晩과 金九(31)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필라델피아 대한인 총대표회의(제1차 한인회의) 준비에 골몰하던 李承晩이 3·1운동의 소식을 들은 것은 3월10일이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로 上海나 국내로 가고 싶었으나, 국민회 중앙총회장 安昌浩는 자신이 上海로 떠났다. 4월5일에는 上海에 있던 玄楯의 전보로 孫秉熙를 대통령, 李承晩을 국무경(국무총리)으로 한 「大韓共和國」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재미 한인사회에 전해졌다. 이 정부는 만주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로 알려졌으나,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國內에서는 「朝鮮民國」, 「新韓民國」 등의 임시정부 조직이 비밀리에 추진되었고, 李承晩은 이들 지하 임시정부에서 副都令 겸 내각총무경, 국무총리 등으로 추대되었다.
4월11일에 上海에서 수립된 大韓民國 임시정부는 李承晩을 정부수반인 國務總理로 선출했다.
金九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틀 뒤인 4월13일에 上海에 도착했다. 그는 10년 만에 만난 李東寧의 주선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가 곧 內務部委員으로 선출되었다.
(1) 大韓共和國의 國務卿
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上海로 간 金九는 臨時議政院 의원으로서 고난에 찬 직업적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시작했다.
① 玄楯의 전보로 3·1 운동 소식 알아
미주와 하와이의 한인동포들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上海에 도착한 玄楯(현순)이 安昌浩와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李鍾寬 앞으로 보낸 다음과 같은 전보에 의해서였다. 玄楯은 3월1일자로 전보를 쳤는데, 미주와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3월9일이었다. 전보가 이처럼 늦어진 것은 전쟁기간에 미국 정부가 실시했던 미국-일본-중국 사이의 전보와 통신 검열이 이때까지도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인 3백만 명 독립단은 예수교회 3천과 천도교회 5천과 각 대학교와 모든 학교들과 및 각 단체들이 일어나 조직한 자라. 독립단은 3월1일 하오 1시에 서울, 평양과 및 그 밖의 각 도시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대표자는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3씨를 파송하였소. 리승만 박사는 어데 있소. 회전하시오. 상해 특별대표원 현순.〉
李鍾寬은 이 전보를 받자마자 安昌浩에게 〈오늘 한국 독립선언의 소식을 받으셨습니까. 이번 외교의 전권은 중앙총회장에게 맡기나이다〉라고 타전했다. 그는 12일에 워싱턴의 李承晩 주소로 현순의 전보내용을 알렸다. 3·1 운동의 소식은 「新韓民報」의 표현대로 재미동포들에게 「마른 하늘에 굴러떨어지는 벽력」이었다. 安昌浩는 각 지역의 동포들에게 전보를 쳤고, 전보를 받은 사람들은 감격해서 중앙총회로 답전을 쳤다.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 총대표회의(제1차 한인회의)의 준비에 골몰하던 李承晩은 徐載弼에게 보낸 安昌浩의 전보를 통하여 3·1 운동 소식을 듣고는 玄楯의 해저전신 번호와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 중앙총회로 타전했다.
玄楯이 전보에서 孫秉熙, 李商在, 吉善宙 세 사람을 대표자로 파송했다는 말은 곧 이들을 파리 講和會議에 대표로 파송했다는 뜻이었다. 이미 구속된 孫秉熙와 吉善宙는 물론, 민족대표 33인이나 48인에도 포함되지 않은 李商在를 거명하고 있는 것은 얼핏 보면 매우 의아스럽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 쪽의 3·1 운동 논의과정에 李商在가 참여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玄楯이 上海로 떠날 때까지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선정을 확정하지 않고 있었다. 기독교 쪽 민족대표들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李商在는 咸台永과 마찬가지로 거사의 뒷수습과 특히 日本政府와 교섭할 대표자로 남기 위해서 서명자 명단에서 빠졌었다. 또한 玄楯도 孫秉熙와 吉善宙가 검거된 것을 이때까지는 몰랐었다.
② 朴泳孝나 李承晩이 大統領된다는 풍문
玄楯의 전보에서 주목되는 것은 李承晩의 소재를 급히 찾고 있는 점이다. 그는 15일에 다시 국민회 중앙총회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일백여 곳에(서) 날마다 독립시위운동을 거행하는데, 예수교인들과 천도교인들과 불교인들과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회집하야 독립을 부르며, 대표자 32인을 뽑으며, 일본정부를 공격하는 동시에, 5천여 명이 포착되얏고, 5백 명이 죽었고, 일본인회사에서 일하던 한인들은 일시 동맹파공을 하며, 한인들이 일본물건을 배척하니, 우리 내지의 정형이 사람과 돈을 아울러 요구합니다. 리승만 박사가 유럽에 갔는지요? 그의 번지를 알기 원합니다. 그이더러 유럽에 가기를 권고하시오.〉
현순의 이러한 전보는 上海에 있던 인사들이 만세시위운동의 전국적인 확산 소식에 고무되어 파리 강화회의에 한층 큰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玄楯이 李承晩을 거듭 찾고, 그에게 파리행을 권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내외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 기대가 증대됨에 따라 李承晩에 대한 기대도 더욱 급속히 증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국내에서는, 윌슨 대통령의 주도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식민지들이 독립된 공화국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는 朴泳孝나 李承晩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또한 독립선언과 동시에 천도교 쪽에서 제작하여 서울 일원에 뿌린 「朝鮮獨立新聞」 3월2일자(제2호)에는 〈일간 國民大會를 열어 假政府(가정부: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假大統領을 薦擧한다더라. 安心 安心. 不久에 好消息이 有할지니…〉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玄楯이 李承晩을 급히 찾은 데에는 개인적인 친분도 작용했다. 두 사람의 교분은 매우 오래 된 것이었다. 玄楯의 아버지 玄濟昶(현제창)은 李商在, 南宮檍 등과 함께 1898년 11월4일에 체포된 17명의 獨立協會 간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李承晩과 같이 독립협회 소속의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었다. 玄楯 자신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李承晩과 교분을 나누었다고 한다.
李承晩이 1910년에 서울YMCA의 한국인 총무가 되어 귀국했을 때에 玄楯은 尙洞敎會의 부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1903년에 제2차 이민단을 인솔하고 하와이에 갔다가 1907년에 귀국했었다. 李承晩이 국내에 머무는 동안 이들은 미국에 유학했던 金奎植, 白象圭, 申興雨 등과 「바보클럽」을 만들어 시국에 대하여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막중한 사명을 띠고 上海로 파견된 玄楯이 李承晩과의 연락을 서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월1일에 상해에 도착한 현순은 한국에서 알았던 피치(George A. Pitch) 선교사의 소개로 鮮于爀을 만나고, 이어 申圭植, 李光洙, 金澈, 呂運弘 등 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거의가 新韓靑年黨 사람들이었다. 현순은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연합통신(AP)발로 중국 신문에 보도된 3월 4일에 上海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하여 프랑스租界 霞飛路(하비로)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中國과 서양의 보도기관들을 상대로 한 통신관계 업무는 李光洙와 呂運弘이 맡고, 申圭植과 申錫雨가 일반사무를, 金澈과 鮮于爀이 재무를, 그리고 현순 자신은 총무일을 맡았다.
③ 3·1 운동 소식에 「피가 끓고 담이 떨려」
애원하다시피 했던 윌슨 대통령과의 2, 3분 동안의 면담조차 좌절되고 말아 실의에 빠져 있던 李承晩이 3·1 운동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격했을 것인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安昌浩에게 쓴 편지에서 〈피가 끓고 담이 떨리는 처지를 당하야〉 곧 중국으로도 가고 싶고 본국으로도 들어가고 싶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月刊朝鮮」 2004년 7월호,「李承晩, 國際聯盟에 한국의 委任統治를 청원하다」참조).
이 편지를 쓰기에 앞서 그는 3월16일에 安昌浩에게 〈제가 上海로 갈 수 있겠습니까?(Can I go Shanghai?)〉라는 전보를 치고 있다. 자기를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로 上海로 파견해 주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安昌浩 자신이 上海로 갈 결심을 한 때였다. 李承晩은 곧 뉴욕에서 대규모의 연회를 열고 각국 신문기자들을 초청하여 徐載弼과 鄭翰景과 함께 셋이서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연설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랬다가 국내 사태가 계속해서 미국신문에 보도되는 것을 보고 徐載弼과 상의하여, 미국 본토는 물론 하와이의 동포들도 참석하는 한인들의 대규모 정치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까지의 李承晩의 활동은 국민회의 대표자격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李承晩이 여권 발급 교섭에 실패한 뒤에 중앙총회에 대해 자신이 뉴욕에서 한 달 더 머물면서 외교활동을 할 것을 건의하고,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가 이 건의를 승인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전보나 편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필라델피아 한인총대표회도 명목상으로는 대한인국민회의 행사라는 형식을 취했다. 李承晩은 安昌浩에게도 대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安昌浩는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띄우고 4월1일에 上海로 떠났다.
〈東方의 國民大會를 여시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오며 昌浩가 進參(진참: 나아가 참예함)할 뜻이 간절하오나 이미 東洋으로 가기로 결정하야 今日下午에 발정하므로 가지 못하오니 매우 섭섭하오이다. 閔燦鎬, 尹炳圭(求), 李大爲 3씨가 대회에 참석키 위하야 갈 터이오니, 그리 아소서.…〉
安昌浩는 국민회가 모금한 자금 가운데에서 4,000달러를 가지고 鄭仁果, 黃鎭南을 대동하고 떠났다. 그는 上海로 가는 길에 호놀룰루와 마닐라에 들렀는데, 李承晩은 그가 알리지도 않고 캘리포니아를 떠났다고 불편한 심경을 「日誌」에 적어놓았다. 알리지도 않고 떠났다는 말은, 호놀룰루에 들른다는 말을 자기에게 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安昌浩는 4월27일까지 하와이에 머물렀다.
④ 美國獨立戰爭 때의 大陸會議같이
安昌浩의 편지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회가 중앙총회장의 승인 아래 대한인국민회의 권위를 빌어 소집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대회의 소집을 알리는 「대한인총대표회의 청첩」이 「대한인국민회 총대표위원 이승만 정한경 서재필」의 명의로 되어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安昌浩가 국민회 중앙총회 대표로 참가할 것이라고 말한 세 사람 가운데에서 李大爲는 국민회 중앙총회의 업무폭주를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李承晩이 작성한 것이 틀림없는 「청첩」의 내용은 실제로는 이 대회가 국민회 중앙총회와는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전적으로 李承晩과 徐載弼의 생각대로 준비되었음을 말해 준다.
〈미주 동편 몇 지방의 동지가 수차 의논한 결과로 4월14일로 16일까지 필라델피아성(城)에서 북미 대한인연합대회를 열고 미국의 각 사업계, 교회계, 교육계, 신문잡지계의 모든 단체적 대표 될 만한 신사숙녀를 다수히 청하야 방청으로 참여케 하고, 서재필 박사와 다른 고명한 웅변대가로 국어와 영어로 연설하야 대한독립선고의 주의를 발표하며, 독립운동에 대하야 우리는 생명과 재산을 바쳐서 도울 뜻을 선고하며, 평화회에 글을 보내어 독립을 승인하라 하며, 옥에 갇힌 충애지사를 일인의 악형과 학살에서 보호하라고 공포하며, 우리가 독립을 회복한 후에는 공화정치를 쓸 것과 외교, 통상, 선교 등에 국제상 책임을 담임하며, 동양평화와 만주개방을 보호한다는 뜻을 공포하며, 그 외에 몇 가지 문제를 첨부하야 순서를 정하고 연일 개회하야 세계에 알리겠으며, 마지막 날에는 다수한 미국 동지자들로 합동하야 이 도성에 큰 길로 국기를 받치고 행렬하야 독립관에 가서 큰 연설과 축사와 만세로 폐회할 터이외다.…〉
독립된 한국이 동양평화와 滿洲의 개방을 보장하겠다고 천명하는 것까지 대회의 중요한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은 미국인의 관심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李承晩 등이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만주의 門戶開放문제는 미국의 극동지역에서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대회 개최지를 필라델피아로 정한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필라델피아는 독립전쟁 때의 미국의 수도였다. 대회의 대외적인 명칭을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라고 정한 것도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의 중심조직이었던 大陸會議(Continental Congress)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대륙회의는 1774년과 1775년의 두 차례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었다.
⑤ 『전쟁하여 독립하려는 뜻 보여야…』
세 사람 명의로 된 「청첩」과는 별도로 李承晩은 「新韓民報」를 통하여 일반 동포들에게 공개편지를 쓰고 있다. 이 편지는 만세시위운동이 국내외로 거세게 전개되고 있을 때의 李承晩의 시국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는 만세시위를 「독립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이번 대한독립 선고는 천고에 희한한 일이외다. 이 기회에 이 일이 생긴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오니, 다수한 동포의 피를 흘리고 저렇듯 시작한 독립전쟁을 그치지 말고 독립을 회복하는 날까지 계속하여야 할 터인데, 저 운동을 도우려면 세계의 공론을 돌리는 데서 더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李承晩은 편지의 서두를 이렇게 적고 나서 재외동포들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말할 적에 다음 두 가지 요점을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
첫째로 〈우리가 전쟁하여 독립을 회복하려는 뜻을 보일지니, 이것이 지금 세상에 동정을 많이 얻는 본의라〉고 했다. 곧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전쟁을 대신하여 달라거나 日人을 대신 욕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평하기만 해달라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우리가 큰 단체를 만들어 각 처의 독립운동자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보이면 사람들이 와서 뉴스거리를 구하려 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인심을 선동하는 자로 지목받기 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필라델피아 회의가 우리의 「실력」을 보여 주는 대회이므로 많은 동포들이 참석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번 필라델피아 독립관에서 총대표회를 열자는 것이 이 세계에 우리의 실력을 보이고자 함이니, 이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하고 앉아서 남더러 동정만 달라고 하자는 것이 아니요, 다수한 한인들이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기어히 회복하고야 말 결심이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서 남의 동정이 스스로 발하게 하야 신문상에 공포하야 한인이 어떠한 인민인 것을 알리자 함이니, 천재일시(千載一時)로 이 기회를 잃지 말고 다수한 우리 동포가 참여하심을 바라나이다.〉
李承晩은 이러한 공개편지뿐만 아니라 각지의 친지들에게 전보를 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것을 촉구했다. 유학생들에게도 연락이 닿는 대로 통보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林炳稷이 「미주한인학생단 서기」 명의로 이 회의에 유학생들이 많이 참가할 것을 촉구하는 신문광고가 나기도 했다. 林炳稷은 李承晩의 YMCA 학원 제자였고, 1913년에 미국유학을 올 때에는 하와이에 들러 李承晩의 집에 머물렀었다.
현순으로부터 孫秉熙를 대통령, 朴泳孝를 부통령, 李承晩을 국무경(국무총리)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재미동포들에게 전해진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현순의 전보에는 독립군 600명이 두만강을 건너 본국으로 진격했다는 감격적인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⑥ 滿洲에서 大韓共和國 임시정부가 수립돼
3·1 운동의 후속조치로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재미동포들은 4월5일자(535호) 「新韓民報」에 3월1일에 선포된 독립선언서 전문과 함께 보도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고 그들의 기대가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만주에 있는 각 단체 대표들을 소집한 후에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내각을 조직하얏습니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경― 리승만 내무경― 안창호
탁지경― 윤현진 법무경― 남형우
군무경― 리동휘 강화전권대사― 김규식〉
이 기사는 玄楯의 전보에 따른 것이었다. 玄楯은 3월29일에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李鍾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일본은 간교한 수단으로 뇌물을 주어 세 사람의 친일파를 고용했습니다. 시천교도와 보부상패들이 우리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자치단을 조직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강제로 독립에 반대한다는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26일과 27일에 서울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언덕들은 태극기로 단장을 했습니다. 200명이 체포되었고, 양쪽에서 비슷한 사상자가 났습니다. 매일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600명의 독립군이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격했습니다. 시베리아와 만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대표들에 의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경 이승만, 내무경 안창호, 재무경 윤현진, 사법경 남형우, 군무경 이동휘, 총사령 유동렬, 파리 강화대사 김규식. 곧 공표할 예정이니까 급히 당신의 의견을 회답하기 바랍니다. 70만 엔이 일본인들에게 몰수당했습니다. 재정지원이 시급합니다. (보내준) 자금은 받았습니다. 김규식은 이름을 Chin Chung Wen(金仲文)으로 바꾸었습니다. 현순〉
현순은 같은 전보를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 중앙총회로도 보냈는데, 「新韓民報」의 기사는 이 전보를 요약한 것이었다. 현순의 전문에는 「임시정부」라고만 되어 있는 것을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라고 한 것은 번역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만주에서 수립되었다고 한 것도 독립군 600명이 두만강을 건너 본국으로 진격했다는 말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와이에서는 〈한-청-러시아 접계되는 간도〉에서 대한공화정부가 조직되었다고 번역했다.
이 전보를 받은 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白一圭는 이튿날로 4대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에,「대한독립단(Korean Independent Union) 특별대표」 玄楯으로부터 만주에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전보를 받았다면서 대통령 孫秉熙 이하 각료명단을 통보했다.
⑦ 『풍족한 재정지원을 받을 것입니다』
대한공화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新韓民報」는 「대한공화국 건설정부와 우리」,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대통령 손병희 선생」 등 장문의 기사를 잇달아 게재하여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를 기정사실화했다. 이 무렵에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國民報」가 보존되고 있지 않아서, 미주지역의 동포들보다도 더 흥분했을 하와이의 李承晩 지지자들의 반응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현순의 전보를 받은 李鍾寬은 31일에 李承晩에게 『하와이는 선생의 뉴스와 임시정부 (소식에 대해) 기뻐합니다』라는 전보를 치고 있다.
또한 현순의 전문을 번역한 하와이의 자료에는 이때의 李承晩의 직함이 「국무급 외무총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전문의 각료명단에 외무경이 없었기 때문에 국무장관이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미국처럼 국무경(국무총리)이 외교업무를 겸임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한 것 같다. 李承晩 자신도 한동안 자기의 선전사진에 「국무경 겸 외무경」이라고 표기하여 사용했다.
현순은 하와이 국민회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전보를 보낸 지 이틀 뒤인 3월31일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李承晩에게 〈임시정부가 건설 중(provisional government under construction)〉이라는 전보를 보낸 다음 4월4일에는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와 샌프란시스코 중앙총회에 보낸 것과 같은 내용의 임시정부 각료명단을 타전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곧 공표할 예정이니까 귀하의 의견을 급히 답하시기 바랍니다. 귀하는 풍족한 재정지원을 받을 것입니다. 완전한 독립이 요망됩니다.〉
풍족한 재정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玄楯이 天道敎 쪽에서 자기에게 장담했던 말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 것이다. 현순은 뒤에서 보듯이 李鳳洙를 통하여 孫秉熙를 대통령으로 하는 천도교 쪽의 임시정부안을 전달받으면서 그 보상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풍족한 재정지원을 약속받았던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서울을 떠날 때에 崔麟으로부터 2000원을 건네받으면서, 上海에 있는 金澈에게 운동자금 1万元을 맡겨놓았으니까 필요에 따라 쓰라는 말을 듣기도 했었다. 그리고 완전한 독립이 요망된다는 말은 李承晩의 委任統治請願문제가 상해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2) 大韓國民議會와 上海臨時政府의 수립
그런데 이때에 알려진 大韓共和國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1919년 3월 17일에 러시아령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공표된 大韓國民議會가 조직한 정부였다고 인식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 정부를 흔히 「露領政府(노령정부)」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대한국민의회는 볼셰비키혁명 뒤의 러시아를 본떠서 입법뿐만 아니라 행정과 사법의 기능까지도 통합한 소비에트제를 표방했기 때문에, 따로 정부를 조직할 필요가 없었다.
대한국민의회는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난 뒤인 1917년 12월에 연해주 한인사회의 통일적 중앙기관으로 조직된 全露韓族會 중앙총회를 바탕으로 하여, 러시아 안의 각 지역과 北間島, 西間島, 琿春(훈춘)의 대표들과 함께 국내인사들도 참가하여 조직한, 말하자면 3·1 운동 이후에 수립된 최초의 임시정부였다. 이 무렵 연해주지역에는 20만을 헤아리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한국민의회에는 독립선언서와 5개항의 결의안 이외에 그 조직체계를 알 수 있는 憲章이나 강령 같은 것은 없었다.
의장에는 귀화인으로서 한족회 중앙총회 회장인 文昌範, 부의장에는 역시 한족회 중앙총회 부회장인 金哲勳, 서기에는 吳昌煥이 선출되었는데, 文昌範은 러시아령의 한인들 사이에서 大統領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립전쟁을 수행할 宣戰部長으로는 李東輝를 선임했다.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고 연해주와 북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그는 러시아혁명 뒤에 볼셰비키의 지원을 얻어 1918년 6월에 韓人社會黨을 창당했었다.
선전부는 뒤에 군무부로 개칭되었다. 국민의회의 집행부에는 선전부 이외에 외교부와 재무부가 있었는데, 외교부장은 崔才亨이, 재무부장은 韓明世가 맡았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장로격인 崔才亨은 일찌감치 귀화하여 帝政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큰 재산을 모았었다.
이처럼 대한국민의회는 文昌範, 崔才亨 등의 귀화한인 그룹과 李東輝 등의 한인사회당 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인데, 이들 주동자들은 모두 함경도 출신이었다. 함경도 출신이 아니면서 대한국민의회 조직에 참여했던 기호파의 李東寧, 趙琬九(조완구), 曺成煥 등은 국민의회가 선포된 뒤에 곧 上海로 떠났다.
대한국민의회 주동자들은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최고기관인 상설의회 의원 수를 15명에서 30명으로 늘려 기호파의 李東寧, 趙琬九 등 5명과 서도파의 李剛, 鄭在寬 등 5명을 상설위원으로 선정했으나, 李東寧이 상해에서 구성된 臨時議政院의 의장으로 선출되자 李東寧과 趙琬九를 제명해 버렸다.
대한국민의회는 선포되고 나서 한참 뒤에 미주에도 알려졌으나, 재미동포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玄楯이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로 보낸 전보에서 독립군 600명이 두만강을 건너 본국으로 진격했다고 한 정보의 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렵 연해주와 북만주지역에는 무장 독립운동자그룹들이 산재해 있었고 이들은 한결같이 본국 진격을 호언하고 있었으므로 현순에게도 과장된 정보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이 무렵의 일본 정보기관의 한 정보보고는 하와이에 있는 李承晩一派의 원조와 연락으로 4월2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大韓國政府가 조직되었다고 했으나, 이 대한국정부는 각료명단도 없으며, 高宗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하는 등의 내용으로 보아 신빙성이 없다.
① 天道敎 쪽 의견 토대로 임시사무소에서 작성
현순이 3월 말에서 4월 초에 걸쳐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와 李承晩에게 孫秉熙를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전보를 왜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회상기에도, 또 당시의 기록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의 독립운동자들은 上海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앞으로의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최고기관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 그 최고기관을 정당의 형태로 할 것인가,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인가의 논쟁이 있었으나 독립을 선언한 이상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임시정부 수립논의는 여러 갈래에서 급속히 진행되었다.
3월27일경에 상해에 있던 인사들과 연해주, 만주, 北京 등지에서 온 인사들의 합동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격론이 벌어졌다. 회의는 북만주에서 온 趙素昻의 열변으로 임시정부를 즉시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채택될 분위기였으나, 먼저 민족대표 33인의 「남겨 놓고 간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玄楯과 李光洙 등 임시사무소 멤버들의 주장에 따라 양쪽 대표로 8人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하기로 했다. 8인위원회는 몇 차례 회합을 가졌으나 진전이 없었다.
이 무렵에 서울과 상해를 오가며 임시정부 수립에 열성을 보이고 있던 李鳳洙라는 천도교 쪽 청년이 孫秉熙를 대통령으로 하고, 朴泳孝를 부통령, 李承晩을 국무총리로 하는 임시정부 조직안을 玄楯에게 은밀히 전했다. 천도교 쪽에서는 孫秉熙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보상으로 임시정부에 재정지원을 약속했던 것 같다. 현순이 李承晩에게 보낸 전보에서 풍족한 재정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러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天道敎團에서는 3·1 운동의 기획단계에서 이미 임시정부의 수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3월1일의 독립선언과 동시에 그 날짜부터 「朝鮮獨立新聞」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배포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예고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朝鮮獨立新聞」의 발간을 준비했던 李鍾一의 「備忘錄」에 따르면 천도교단에서는 3·1운동이 성공할 경우에 대비하여 大韓民間政府를 조직하고 그 본부를 天道敎 중앙총부에 두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인선작업까지 해놓고 있었다.
대통령 孫秉熙, 부통령 吳世昌, 국무총리 李承晩, 내무부 장관 李東寧, 외무부 장관 金允植, 학무부 장관 安昌浩, 재무부 장관 權東鎭, 군무부 장관 盧伯麟, 법제부 장관 李始榮, 교통부 장관 朴容萬, 노동부 장관 文昌範, 의정부 장관 金奎植, 총무부 장관 崔麟.
이 임시정부 조직안은 3·1 운동을 주동했던 천도교 쪽의 핵심인물 네 사람이 대통령, 부통령, 재무부 장관, 총무부 장관의 자리를 맡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안은 공표되지는 않았다.
② 『임시정부는 본국에서 조직해야』
그런데 뒷날 임시정부에서 편찬한 공식 자료인 「獨立運動에 관한 略史」에는 李鳳洙는「京城獨立團本部」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이었고, 그가 임시정부를 조직하라고 했으나 임시사무소는 임시정부의 조직은 본부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서울로 돌려보냈다고 적혀 있다. 이때의 李鳳洙의 서울행과 관련하여 李光洙는 주목할 만한 기술을 남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본국서 기별이 없으므로 나는 李鳳洙를 서울로 들여보내고 열흘 내에 돌아오라고 말하였다. 이봉수의 임무는 천도교의 鄭廣朝거나 정광조도 잡혀가고 없거든 남아 있는 천도교의 중심인물이거나, 金性洙, 宋鎭禹거나 玄相允이거나 중의 하나를 보고 정부조직에 관한 삼십삼인의 의사를 들어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일의 준비로 새 나라 이름과 내각의 직제와 사안인 각원명부 하나를 만들어가지고 가게 하였으니, 이것은 국내에서 정부조직에 대한 준비가 없는 경우에는 이 안을 참고로 하거나 또는 그대로 승인하여 달라기 위함이었다.〉
李光洙가 李鳳洙에게 주어 보냈다는 내각의 직제와 각료명단이 바로 玄楯이 미국으로 타전한 내각의 직제와 명단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李鳳洙가 현순에게 은밀히 전달한 천도교 쪽의 의견을 토대로 하여 임시사무소 핵심멤버들이 준비해 놓고 있던 임시정부안이었던 것이다. 현순이 국민회나 李承晩에게 전보를 보낸 것은 발표에 앞서서 그 임시정부안에 대한 그들의 동의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현순은 이보다 앞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자 바로 기독교 쪽 민족대표들의 실무를 맡아보았던 李奎甲에게 국내에서 후속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놓고 있었다.
上海에 모인 한국독립운동자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는 3월 말쯤에는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에도 포착되고 있었고, 임시사무소는 프랑스조계 金神父路에 임시정부로 사용할 큰 양옥을 300元이나 주고 빌려놓았다.
③ 朝鮮民國은 李承晩을 副都令으로
임시정부 설립 작업은 국내에서도 일본경찰의 엄중한 경계 속에서 지하활동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임시정부의 수립을 알리는 전단이 발견된 것은 4월9일이었다. 이날 일본 경찰은 「朝鮮民國 임시정부 조직포고문」, 「朝鮮民國 임시정부 창립 장정」,「都令府令」 제1호와 제2호의 네 가지 문건을 압수했다. 12장 33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창립장정」은 독립선언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된 여러 임시정부 조직 강령 가운데에서 가장 구체적이며 짜임새 있는 것이었다.
이 朝鮮民國 임시정부는 朝鮮國民大會와 朝鮮自主黨의 연합으로 수립했다고 반포되었으나, 실제로는 이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여한 사람들 역시 천도교 관계자들이었다. 朝鮮民國 임시정부 내각구성은 천도교와 미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연립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조직포고문」에 발표된 각료명단은 다음과 같다.
④ 都領府: 정도령 孫秉熙, 부도령 李承晩.
內閣: 내각총무경 李承晩, 외무경 閔燦鎬, 내무경 金允植, 군무경 盧伯麟, 재무경 李相, 학무경 安昌浩, 법무경 尹益善, 식산무경 吳世昌, 교통무경 趙鏞殷(素昻).
만국평화회의에 열석할 만국외교위원: 李承晩 閔燦鎬.
이처럼 이 朝鮮民國 정부 안에서는 李承晩은 副都領으로서 正都領 孫秉熙와 함께 都領府를 구성하고, 내각총무경으로서 내각을 총괄할 뿐만 아니라, 외무경 閔璨鎬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할 만국외교위원으로 선임되어 있었다.
朝鮮民國 임시정부의 수립 사실은 재미 한인사회에도 알려졌는데, 정부이름은 「대한정부 임시정부」였고, 李承晩의 직함은 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 朝鮮民國 임시정부도 천도교단이 직접 그 조직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사정은 국내에 들어온 李鳳洙가 4월 초에 같은 함경도 출신이면서 메이지(明治)대학 동창생인 洪鎭義(洪濤)를 내세워 천도교 쪽뿐만 아니라 뒤에 漢城政府로 알려진 또 다른 임시정부의 조직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과도 비밀히 만나고 있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⑤ 李東輝를 執政官, 李承晩을 總理로
긴박한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할 모태가 될 國民大會 문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결국 국내에서는 朝鮮民國 임시정부에 이어 新韓民國 임시정부라는 또하나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 임시정부를 조직한 세력의 중심인물은 李春塾(이춘숙)이었다.
그는 함경도 출신으로서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하고, 3·1 운동 이전에 洪鎭義와 함께 만주와 시베리아를 여행하면서 文昌範, 尹海 등의 그곳 유력인사들을 만나고 왔었다. 그들은 정부 수반인 執政官으로 李東輝를 추대하고, 李承晩을 국무총리로 하는 각료명단을 작성했다.
이 新韓民國 임시정부를 서둘러 조직하는 데 참여했던 姜大鉉이라는 사람이 자기들이 만든 각료명단과 헌법초안을 가지고 상해에 나타난 것은 4월8일이었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獨立新報」의 4월10일자 호외에는 「경성발 특전」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獨立新報」는 3월28일에 창간한 등사판 일간신문으로서, 서울에서 비밀리에 발행되던 「朝鮮獨立新聞」 등의 기사를 옮겨 싣고 있었다.
〈京城電. 작일(4월9일) 하오 10시에 온 특전을 거한즉 경성에서 우리 임시정부가 다음과 같이 조직되었다더라. 집정관 李東輝, 총리 李承晩, 내무총장 安昌浩 차장 曺成煥, 외무총장 朴容萬 차장 金奎植, 재무총장 李始榮 차장 李春塾, 교통총장 文昌範 차장 玄楯〉.
姜大鉉이 가지고 왔다는 각료명단도 아마 같은 것이었을 것이나 밝혀진 것은 일부분뿐이다.
이 新韓民國 임시정부의 성립 소식은 天津에서 발행되던 「大公報」(4월11일자), 吉林에서 발행되던 「新共和報」(4월15일자), 만주에서 발행되던 「우리들의 편지」 12호(4월22일자)에도 실렸다. 국가 명칭이나 직제는 조금씩 다르고 각료명단에서도 몇 사람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新韓民國 임시정부와 같은 것이었다. 이 소식은 국내에서는 4월17일에야 만주 접경인 鐵山, 宣川, 義州 지방에 뿌려진 전단을 통하여 알려졌다.
상해에 모였던 인사들 사이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물의가 일어났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임시정부의 공식 자료는 〈4월8일에 京城獨立本部로부터 姜大鉉이 李東輝를 執政官으로 하는 각원명단과 임시정부헌법의 원문을 가지고 오니, 다소 紛議(분의: 분분한 의론)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경성독립본부」란 물론 실체가 없는 것이었으나, 상해에 모인 인사들로서는 여간 당혹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 上海에 온 인사들의 주동으로 9일 저녁에 어느 예배당에서 회합이 열렸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5, 60명이나 되었다.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자들 거의 전원이 모인 셈이었다. 그들은 임시사무소 사람들에게 왜 밤낮 33인만 거드느냐, 나라의 법통이 하필 33인에게 있느냐, 만일 33인이 아무 의사도 남겨놓은 것이 없으면 영영 정부조직을 못 하느냐 라면서 분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날 밤은 그러나 그대로 해산했다.
그날 밤을 자고 나자 사태는 매우 심각해졌다. 李光洙의 회고에 따르면, 이튿날 아침 지도자격인 李東寧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상해를 떠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大韓國民議會의 결성에 실망하고 상해로 왔던 李東寧 일행은 임시사무소 사람들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낀 것이었다. 왜냐하면 임시사무소 사람들은 이때까지 그 동안의 일을 이들에게는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순, 이광수 등 임시사무소 사람들은 부리나케 각 여관으로 찾아다니며 마지막으로 오전 10시에 한 번만 더 모이자고 설득했다. 장소는 새로 얻어 놓은 양옥으로 정했다. 이 집은 잔디를 심은 뜰도 넓고, 방도 여럿이 있고, 식당도 큰 것이 있고, 댄스를 할 수 있게 반반한 마루를 깐 큰 홀도 있었다. 모이는 사람들은 이 집을 처음 보고 놀랐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모두 29명이었다.
⑥ 밤을 새운 제1회 臨時議政院 회의
마침 李鳳洙도 이날 상해로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 가서 천도교의 鄭廣朝도 만나고 金性洙도 만났으나, 宋鎭禹, 玄相允, 崔南善 등은 다 잡혀갔다고 했다. 상해에서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정부조직에 관해서는 33인은 아무 말도 남긴 것이 없으므로 상해에 모인 인사들이 좋도록 하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리고 李鳳洙가 가지고 갔던 정부조직 강령과 각원명단에 대해서는 아무 반대할 것도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李光洙는 모인 사람들에게 이때까지의 일을 그대로 보고했다. 이제 상해에 모인 사람들의 뜻대로 임시정부를 건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권총과 막대기를 든 청년들도 있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회중을 보호하고 또 한편으로는 회중을 위협하여 회의를 원만히 진행시키는 역할을 했다.
갑론을박으로 의견이 모아지지 않자 누군가가 『나는 가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청년 한 사람이 문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못 나가십니다. 정부조직이 끝나기 전에는 한 걸음도 이 방에서 못 나가십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수많은 남녀동포들이 피를 흘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시면 밤이 아홉이라도 이 자리에서 정부를 조직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눈물을 뿌리면서 외치는 이 말이 모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청년은 경성의전의 학생대표로 파고다공원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韓偉鍵(한위건)이었다. 그는 며칠 전에 상해에 왔다.
고깃국을 끓여 저녁을 먹은 다음 식당에 앉은 채로 밤 10시부터 정식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회의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李東寧을 의장으로, 孫貞道를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서기로 李光洙와 白南七 두 사람을 뽑았다. 孫貞道는 李承晩이 중앙학원 학생들의 연극을 연출했을 때에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삼았던 한국인 최초의 해외선교사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토의에 들어가 먼저 본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를 부인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부결되었다. 말하자면 강대현이 가지고 온 임시정부안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고 그 안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독립단본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호와 연호를 「大韓民國」과 「民國」으로 결정한데 이어 官制 문제로 들어가서 執政官制를 國務總理制로 쉽게 바꾸어 버리는 것은 집정관제 그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보다도 李東輝가 정부수반이 되는 것을 모두가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뒤이은 국무총리 선거에서 후보자로 李承晩 이외에도 朴泳孝, 李商在, 安昌浩, 李東寧, 曺成煥, 金奎植, 李會榮, 申采浩 등 8명이나 거명되었으나 李東輝를 천거한 사람은 없었다.
⑦ 『李承晩은 李完用보다 더 큰 역적이오』
李承晩을 만장일치로 국무총리로 추대하지 않고 선거를 하게 된 것은 申采浩의 반대 때문이었다. 정식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면 누구를 정부수반으로 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孫貞道인가 玄楯인가가 李承晩이 적임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申采浩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천만부당한 말이라고 소리쳤다.
『李承晩은 李完用보다 더 큰 역적이오. 李完用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李承晩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오!』
『그런 사실을 잘 알아보기도 전에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지 않소』
누군가가 옆에서 이렇게 말하자 申采浩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고 한다.
申采浩는 정식회의에서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어 각자가 국무총리 후보자를 천거할 때에 朴容萬을 천거했다. 玄彰運이 짓꿎게 申采浩를 국무총리 후보로 추천하자 장내에 폭소가 터졌고, 申采浩는 노발대발하여 퇴장했다. 현순은 신채호가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거론하면서 李承晩을 반대하고 나온 것은 하와이에 있는 朴容萬이 申圭植에게 전보로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알려왔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申圭植, 朴容萬, 申采浩 세 사람은 1917년에 上海에서 있었던 大同團結宣言을 주동했었다(「月刊朝鮮」2004년 5월호,「國民會 장악하고 韓人女學院 설립」 참조).
朴容萬은 李承晩이 3월16일에 자신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를 공개한 직후부터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이 발행하던 「太平洋時事」 3월19일자와 22일자에 잇달아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박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의」라고 공격하고, 각 지역으로 같은 취지의 전보를 보냈다. 상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보를 보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하여 上海에서도 위임통치 청원문제가 계속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은 현순이 李承晩에게 보낸 전보에서 그 문제를 거듭 질문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朴容萬은 安昌浩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전에 두 차례나 전보로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문제에 대한 중앙총회의 견해를 질문했다. 그리하여 安昌浩는 上海로 떠나면서 李承晩에게 보낸 편지에서〈(朴容萬이) 멘데토리 문제로 양차 전보로 질문하였기로 安慰하는 말로 답전하였더니, 하와이 지방총회는 내용을 모르고 의혹한 뜻으로 전보하였으니, 大兄께서 통신으로 오해가 없게 하심을 바라나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委任統治 청원문제는 李承晩의 정치생명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었다.
⑧ 『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수립된 上海臨時政府의 첫 각료진은 다음과 같다.
국무총리 李承晩
내무총장 安昌浩 내무차장 申翼熙
내무총장 金奎植 외무차장 玄楯
법무총장 李始榮 법무차장 南亨祐
재무총장 崔在亨 재무차장 李春塾
교통총장 文昌範 교통차장 鮮于爀
⑨ 국무원 비서장 趙素昻
각부 차장들까지 선거가 끝나고 臨時憲章을 의결할 차례가 되었다. 玄楯의 제의에 따라 申翼熙 李光洙 趙素昻 세 사람으로 하여금 30분 안으로 심의하여 보고하게 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헌장 초안이 발견되지 않아서 심의과정에 어떤 수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그동안 上海에서도 헌법초안이 준비되고 있었으므로, 임시헌장에 대해서는 정식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30분 뒤에 전체회의에 보고된 임시헌장안에서는 국민의 의무를 규정한 제6조에 「병역」이 추가되고, 舊皇室의 우대를 규정한 제8조에서 「一生」이라는 기간이 삭제된 것밖에 수정이 없었다.
전체회의에서 가장 오래 논란이 된 것은 바로 제8조였다. 이 조항에 반대했던 呂運亨은 그것이 가결되자 임시정부의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시헌장은
제1조 民主共和制 채택,
제2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으로 통치,
제3조 특권계급 부인(남녀평등권 포함),
제4조 여러 기본권의 보장,
제5조 선거권과 피선거권,
제6조 교육과 납세와 병역의 의무,
제7조 국제연맹 가입,
제8조 구황실 우대,
제9조 생명형과 신체형과 공창제 폐지,
제10조 국토회복 후 1년 내의 국회소집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간략하기는 하나 남녀평등과 사형제와 태형제의 폐지 등 민주국가의 이상적 기본원리를 천명하고 있다. 이 헌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大韓民國은 臨時政府가 臨時議政院의 결의에 의하야 此를 統治함」이라고 한 제2조의 규정이다. 이는 국무총리 李承晩을 비롯한 각부 총장들을 국민의 여망에 따라 미주와 시베리아 지역에 있는 명망가로 추대하면서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은 헌법제정권자라고 할 수 있는 의정원의원 자신들이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밤을 새워 진행된 회의는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계속되었다. 의사일정을 마치고 감격적인 만세 삼창을 부르고 해산할 때에는 회의장인 식당의 동창으로 아침 햇볕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것이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였다.
⑩ 外債얻을 권리 요구
한편으로 미국의 한인사회에서는 현순의 4월4일자 전보로 알려진 대한공화국 임시정부가 동포들의 열광 속에서 이내 현실의 임시정부로 인식되었다. 李承晩은 그 열광을 선도했다. 그 자신도 대한공화국이 실체가 있는 임시정부로 확신했다.
그리하여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다는 소식도 대한공화국의 임시국회가 「의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李承晩은 현순의 전보를 받자 바로 현순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임시정부에서 공식으로 나에게 우리의 운동에 필요한 빚을 얻을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즉시 전보로 보내시오. 서면인가는 뒤에 보내시오.〉
이 전보는 이때의 李承晩이 무엇보다도 재정확보가 앞으로의 활동을 위하여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장 필라델피아 회의를 준비하는데에도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이때는 3·1 운동에 관한 〈격동되는〉 뉴스가 연일 미국언론에 보도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李承晩은 徐載弼과 협력하여 國債를 얻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수립되지도 않은 임시정부가 그에게 국채를 얻을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었다.
李承晩으로서는 다른 한편으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외국 언론에 홍보하는 것도 급한 일이었다. 그는 워싱턴으로 가서 7일에 연합통신(AP)의 기자를 만났다. 이 기자회견의 내용이 미국신문들에 어떻게 보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新韓民報」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워싱턴 4월7일(연합통신으로)= 현금 만주에서 조직된 한국임시정부 내각의 국무경으로 선택된 리승만 박사는 오늘 연합통신을 대하야 말하기를 이번 독립운동에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으로 동양의 처음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겠노라 하더라.〉
李承晩은 자신이 이러한 선언을 했다는 사실을 玄楯에게도 알렸다. 그러한 주장은 평소의 그의 지론이기는 했으나, 그것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경찰의 「극비」 연표는 이때의 그의 기자회견 내용을 두고 재미 한인들이 워싱턴에서 朝鮮臨時政府 外務大臣 이름으로 〈朝鮮은 美國의 제도 및 동일 정신 아래 기독교 독립국을 건설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李承晩의 이 발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일본 정보기관이 上海에서 입수한 4월10일자 「조선공화국 가헌법」이다. 영문 7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제1조는 『조선공화국은 북미합중국의 정부를 본받아 민주 정부를 채용한다』고 되어 있다. 李承晩과 玄楯 사이의 긴밀한 연락으로 이러한 헌법안이 만들어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헌법안의 상당 부분은 임시의정원에서 채택된 임시헌장의 내용과 일치한다.
⑪ 윌슨과 클레망소에 臨時政府 승인 요청
李承晩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필라델피아 한인대회가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를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성원과 협조를 촉구하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물론 그 정부의 국무경인 자기 자신의 위상을 더욱 높여 주는 기회도 될 것이었다.
한편 玄楯은 4월11일에 李承晩의 국채교섭 승인요청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이 위임통치를 청원했는지를 거듭 묻는 전보를 보내 왔다. 李承晩은 현순의 이 전보는 자기의 전보가 일본인들의 방해로 현순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날로 다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완전 독립에 찬성이오. 자금이 필요하오.… 임시정부에서 공식으로 우리 운동에 대하여 국채 얻는 권리를 주는 것을 전보하시오.〉
자금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귀하는 풍족한 재정지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했던 현순의 전보를 염두에 두고 송금을 요청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한편으로 이튿날인 4월12일에 파리로 윌슨 미국대통령과 강화회의 의장인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프랑스 총리에게 대한공화국(The Korean Republic) 임시정부 국무경의 명의로 공문을 보내어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또 강화회의의 4대 강국 행정위원회가 현재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임시정부 강화대사들의 발언권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다.79) 이것은 국제사회에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최초의 문서였다.
李承晩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느냐고 묻는 전보를 보낸 그날(4월11일)에 현순은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전보를 보내어 자신이 이전에 타전한 임시정부는 잘못(wrong)이었고, 「우리의 진정한 임시정부(our real one)」가 새로 수립 중이라고 통보했다.
이 임시정부에는 대통령은 없고, 국무총리(premier) 李承晩, 내무총장 安昌浩, 외무총장 金奎植, 재무총장 崔在亨, 군무총장 李東輝, 참모총장 曺成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에 현순이 통보한 진정한 임시정부란 4월11일에 臨時議政院에서 조직한 大韓民國臨時政府, 곧 上海臨時政府를 말하는 것이었다. 李鍾寬은 이 통보내용을 바로 李承晩에게 타전했다.
현순은 상해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선포된 뒤인 16일에 같은 내용을 李承晩에게 알리고 있다. 李承晩은 현순의 이러한 전보를 일단 무시했다. 이 날은 필라델피아 한인대회가 성공리에 끝나고 있는 날이었다.
필라델피아회의가 열리던 날 「新韓民報」는 1면 제호 옆의 머릿기사 자리에 「바다 밖 동포 일동」 명의로 큼직한 축하 사고를 게재했고, 15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임시 국무경의 공고」를 보도하고 있다.
〈필라델피아 4월14일발 전보=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국무경 리승만 박사는 말하기를 『일본이 년년 백만원 재정을 허비하야 가며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미국에 전도하는 동시에, 우리 국민대회는 장차 일본의 내정을 발간하야 미국에 큰 도움을 주고저 하노라』 하얏다더라.〉
李承晩은 이처럼 아직도 대한공화국의 국무경이었다.
⑫ 10년 만에 재회한 李東寧과 金九
金九 일행이 나흘 동안의 항해 끝에 上海의 포동 선창에 도착한 것은 바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국내외에 선포한 4월13일이었다. 치마도 입지 않은 여자들이 거룻배의 노를 저으면서 선객들을 실어나르는 모습이 신기했다. 안동현에서 배를 탈 때에는 옷을 입고도 추워서 고생했는데, 상해는 벌써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이었다. 등과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도착하던 날은 公昇西里 15호의 어느 동포 집에서 담요만 깐 바닥에서 잤다. 이튿날 金九는 상해에 있는 친지들을 수소문해 보았다.
3·1 운동을 전후하여 상해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모여든 동포들이 1000여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거의가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에서 金九가 알 만한 사람이라고는 李東寧, 李光洙, 金弘敍(김홍서), 徐丙浩, 金甫淵(김보연) 등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金甫淵이 찾아와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날부터 金九는 김보연의 집에서 상해생활을 시작했다.
이동녕은 10년 전에 신민회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이광수는 金九가 실무를 주관한 안악면학회 주최 사범강습회 때에 강사로 초빙되어 교재를 손수 만들어 가지고 열심히 가르쳤었다. 그러나 김홍서와 서병호는 「백범일지」에 전혀 언급이 없는 인물이어서 어떻게 이들과 아는 처지였는지는 알 수 없다.
김보연은 金九가 장연에서 교육운동에 종사할 때에 따르던 경신학교 출신의 청년으로서 몇 년 전부터 가족과 함께 상해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장연에서 3·1운동을 지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장연읍 金斗元의 아들이었다. 김두원은 출옥한 뒤에도 남만주 독립단에서 특파된 李震台(이진태)와 같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김보연의 어머니는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튿날 金九는 김보연의 안내로 李東寧을 찾아갔다. 상해에 도착한 金九에게 가장 감격적인 일은 이동녕과의 재회였다. 이때의 감상을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군을 안내자로 하여 10여 년 동안 밤낮으로 그리던 李東寧 선생을 찾아갔다. 수년 전 梁起鐸의 사랑방에서 서간도 무관학교의 설립과 지사들을 소집하여 광복사업을 준비할 책임을 맡았던 그때에 비해, 10여 년 동안 숱한 고생을 겪은 탓인지 그분의 풍성하던 얼굴에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서로 악수하고 나니 감개무량하여 할 말을 잊었다.〉
일찍이 萬民共同會 사건으로 투옥되어 李承晩과 함께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던 李東寧은 1906년에 北間島로 망명하여 李相卨(이상설) 등과 瑞甸書塾(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동포 2세들을 가르쳤고, 1907년에는 국내에서 安昌浩, 梁起鐸 등과 함께 新民會 조직에 참여했다가, 1910년에 나라가 일본에 병탄된 뒤에 다시 西間島로 망명하여 李會榮, 李始榮 형제와 李相龍 등과 함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이 되었다.
913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그는 大倧敎(대종교)에 입교하고 李相卨의 알선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석 달 동안 투옥되기도 했고, 1914년에는 李相卨, 李東輝 등과 함께 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917년에 李相卨이 사망한 뒤에는 대종교 포교에 전념하다가 1918년 음력 11월의 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선포에 참여했고, 3·1운동이 난 뒤에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大韓國民議會 결성에 참여했다가 上海로 온 것이었다. 이때에 그는 나이 쉰 살로서 金九보다 여섯 살이 위였다.
李東寧은 金九에게 임시정부의 수립 경위와 앞으로의 활동방침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을 것이다. 金九가 상해에 도착한 지 열흘 뒤에 열린 제2회 의정원회의에 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李東寧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李東寧은 金九의 후견인이 되었다.
⑬ 議政院 議員 되었다가 內務部 委員으로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 때의 참가자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4월22일 밤 9시부터 23일 아침 9시까지 열린 제2회 의정원회의에는 1회 회의에 참석한 29명의 두 배가 넘는 69명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회의에서 발언한 사람의 이름이 참석자 명단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이 숫자도 꼭 정확하지는 않다.86) 갑자기 인원수가 증가한 것은 제1회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 국내외에서 상해로 온 독립운동가들이 한꺼번에 참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金弘敍, 徐丙浩, 金甫淵 등을 비롯하여 金九와 함께 상해에 온 金秉祚, 安承源 등도 새로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먼저 국무원 비서장과 내무차장이 제출한 사직청원을 수리한 다음 차장제를 폐지하고 위원제로 고쳐 새로 각부의 위원들을 선출했다. 법무총장에 선출된 李始榮말고는 총장들이 아무도 상해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젊은 차장들만으로서는 국내외에서 몰려 온 많은 인사들을 상대로 임시정부 업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를 이끌어갈 각부 위원은 15인의 선거위원이 선출하기로 했다. 이때에 金九는 李東寧 의장의 추천으로 15인의 선거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모두 7개부의 위원 48명이 선출되었다. 金九는 신익희, 서병호, 윤현진, 한위건 등과 함께 10인의 내무부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사흘 뒤인 4월25일 오후 4시에 제3회 임시의정원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임시정부 역사상 가장 많은 70명이 참가했는데, 金九를 비롯하여 제2회 회의에 참여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전문 13장 57조의 임시의정원법이 의결되었다. 의정원법에 따라 비로소 의원의 자격이 명확히 규정되었다.
의원자격은 대한국민으로 중등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의 남녀로 한정하고, 의원 수는 인구 30만 명에 1인을 기준으로 각 지방별 인구비례로 정하되, 지방에 따라서는 30만 명에 미치지 못해도 1명을 뽑을 수 있도록 했다.
각 지방별 인구비례에 따라 의원의 정원을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함경도·평안도는 각 6명씩, 강원도·황해도·중국령·러시아령·미국령은 각 3명씩으로 총 51명으로 정했다. 해외거주 동포를 배려하여, 국내의 인구비율로나 또 해외지역별로도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러시아, 미주지역 대표를 각각 3명씩으로 한 것은 흥미롭다.
임시의정원은 전국민적인 대표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의원의 선거방법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의정원 의원을 선거해 보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상해에 모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각 도별로 委員選定協議會를 구성하여 5월1일에 각 도별 의원을 선출했다. 해외 각 지역은 그곳에서 직접 대표를 선출하여 파견하는 형식을 취했다.
황해도의 대표로는 金甫淵, 李致畯, 孫斗煥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金九와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김보연과 손두환은 김구의 제자였다. 이치준은 신천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김구와 신천지방과의 연고로 미루어 이치준도 전혀 생소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보연은 재정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손두환은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의욕적인 의정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치준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임되었다.
金九는 이미 내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있었으므로 의원선거에서는 제외되었다. 金九가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는 것은 8월 중순의 일이다.
[출처](31)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작성자 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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