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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사단법인 담수회의 '淡水' 52집(2023)년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용강서원龍岡書院의 건립과 배향 인물
박영환*
前 교장
Ⅰ. 용강서원의 내력
경북 청도군 이서면 학산1리(모산 마을)에 소재하는 용강서원은 고려말 충신이었던 송은松隱 박익朴翊 선생과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에 맞서 창의를 했던 14의사를 제향하기 위한 밀성 박씨의 소고공파 문중의 서원이다.
전저후고前低後高한 경사지에 전면에는 강학 공간인 정면 5칸 강당講堂과 후면에 정면 3칸 여충사麗忠祠, 좌우에 정면 5칸 용강재龍岡齋 및 정면 3칸 충렬사忠烈祠, 전면에 솟을대문인 숭절문崇節門, 담밖 별도 공간에 14의사 묘정비廟庭碑와 비각 등을 건립했다.
1590년(선조 23), 청도 입향조인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 선생 묘소 아래 묘재를 창건하여 ‘용강재’라 하였으며 1819년(순조 19)에 ‘충렬사’를 ‘용강재’ 경내에 창건하고 14의사 위판을 봉안하여 춘추로 사림士林들이 향사했으며 다음 해에 숭의사崇義祠로 개편하였다.
그 뒤, 1835년(헌종 1), 청도에 거주하는 후손 집에서 송은 선생 영정이 발견됨으로 숭의사에 영정과 위판을 주벽主壁으로 봉안하고 14의사를 배향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사당이 훼철되어 향화를 올리지 못하고 유지遺趾 로만 보존하였다.
1876년(고종 13), 경내에 14의사 묘정비와 비각을 건립하였으며 1879년(고종 16), 모의정慕義亭을 경내에 건립하였고, 1913년 향중의 공의로 송은선생 묘우를 복원하여 영정과 위판을 봉안하고 ‘松隱先生 影堂송은선생영당’이라 편액하여 춘추로 사림에서 향사하게 되니 이때부터 ‘용강재’를 ‘용강서당’으로 승격하였으며 1960년에 강당講堂을 1961년에는 숭절문을 중건하였다.
1987년 14의사 사우祠宇의 이름을 충렬사1)로 환원하였으며 1992년 사림의 공의에 의해 ‘송은선생 영당影堂’을 ‘여충사’로 ‘용강서당’을 ‘용강서원’으로 개편하였으며 1998년에는 고을의 사림들이 논의하여 여충사에 우당憂堂 박융朴融 선생 위판을 함께 봉안하고 춘추로 사림들이 제사를 받들었다.
1998년 8월 3일 충렬사 및 14의사 묘정비가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에는 관리사를 증축하였다.
‘용강서원기龍岡書院記’는 후학後學 순천順天 김철희金喆熙가, 여충사영정봉안문麗忠祠影幀奉安文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청도군수行 淸道郡守 반남潘南 박초수朴楚壽가 지었다. 소고공묘갈명嘯皐公 墓碣銘은 외후손外後孫 종사랑從仕郎 전참봉前參奉 이중경李重慶이, 14의사 합전十四義士 合傳은 형판刑判 이가환李家煥이 14의사 봉안문十四義士 奉安文은 현감縣監 이탁원李鐸遠이 14의사묘정비합명十四義士廟庭碑 合銘은 조봉대부 전행동몽교관朝奉大夫 前行童蒙敎官 김시찬金是瓚이 지었다.
Ⅱ. 배향 인물
1.여충사
1)송은 박익2)(1332〜1398) 선생
송은 선생은 중시조 태사공太師公 언부彦孚의 후예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 은산부원군版圖判書 銀山府院君 영균永均이다.
송은 선생은 1332년(고려 충숙왕 1) 7월 27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삽포리에서 출생했다. 자는 태시太始, 시호는 충숙忠肅3)으로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문학翰林文學, 사재소감司宰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면서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나라의 운수가 다해 고려왕조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우왕, 창왕의 폐위 및 시해, 공양왕의 옹립 등 일련의 역성 혁명 덫에 걸려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묵과할 수 없는 비운의 정치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포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전하고는 낙향했다. 이른바 두문동 72현 杜門洞72賢4)의 길을 택한 것이다.
聞見先天事 지난날의 일들을 듣고 보니
榮名辱世間 영화롭던 이름이 세간의 욕이 되고 있구려
莫言心內思 마음 속 깊은 생각 말할 것 없이
不似早還山 일찍이 산으로 돌아감만 같지 못하리
이렇게 낙향을 했지만 송은은 1년 여 뒤인 1392년 3월 경5)에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포은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복귀하여 같이 일을 하자고 강력히 권유했기 때문이다.
송은松隱 박익朴翊
來訪松溪隱士家 송계 은사집을 찾아 오셨소
夕陽門掩洛花多 석양에 문은 닫혀 꽃은 지는데
樽前問我幽閑意 술두루미 앞에 두고 나의 심정 묻는가
簾外靑山半面斜 발 밖으로 반쯤 비치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오.
포은圃隱
問君何事棲山歸 그대에게 묻노니 무슨 일로 산에 와서 살고 있소.
獨木殘花暎我衣 외나무 그늘지는 꽃잎만 나의 옷을 비치는데
假使幽明遊若此 가령 저승에서도 이승같이 이렇게 놀 수 있다면
千年不死古來稀 천년을 죽지 않는 건 고래에 드문 일이겠지.
송계6)를 찾아온 포은에게 ‘술두루미 앞에서 나의 심정을 묻는가’ 하였다. 포은이 ’무슨 일로 산에 사오‘라는 시구에서 미루어 복직의 의향을 물은 것이다. 이때 포은은 이성계 세력을 견제할만한 목은과 도은 등을 비롯하여 송은도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 전후 시기에 목은도 송계를 방문하여 송은에게 귀경을 하자고 권유하면서 ’그대와 사생을 기약하고 싶다고 했다.7)
이러한 권유로 개경에 올라간 선생은 예조판서8)를 맡고 포은을 도와 이성계 세력에 맞서 고려 왕조를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이방원이 오히려 포은을 살해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때 송은은 다시 낙향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송계에 머물고 있을 때 이태조가 1395년(태조 4)9)에 예폐禮幣10)를 갖추고 예관을 보내 공조工曹, 형조刑曹, 예조禮曹,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어 좌의정左議政 이르기 까지 다섯 차례나 불렀으나 눈이 어둡고 귀가 멀다는 핑계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지 않았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으며,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 [천무이일天無二日 신무이군臣無二君] 충절을 지킨 것이다.
선생 사후 600여년이 지난 2000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가 ‘벽화묘’로 알려져 학계에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99년 9월에 일어난 태풍으로 묘소가 많이 손상되어 2000년 9월 22일 보수 작업을 하던 중 도굴 흔적과 함께 지석誌石 및 화문석花紋石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에 신고를 받은 문화재청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발굴 조사하였다.
이 벽화묘는 1420년(세종2)11)에 축조된 것으로써 봉분의 규모는 가로 605cm, 세로 482cm, 높이 230cm의 고려식 방형묘인데 다음과 같은 발굴 결과를 얻었다12)
고분 벽화의 전통이 조선 초기까지 계승되었으며 인물 풍속과 매죽梅竹이 함께 그려진 유일한 예이다. 여말 선초의 회화, 복식, 기물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벽과 서벽에는 인물과 매죽이, 남벽에는 말과 마부, 북벽에는 박익의 모습을 표현했다. 사면 벽에는 현실 세계 인간들의 모습을 그렸고 천장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일월성신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높으며 벽면과 천정, 현실과 천상 세계는 구분되어 있다. 모두 2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인물들 사이에 매죽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송은 박익의 충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필법이 다른 것으로 보아 동, 서 벽의 화가는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통이 감지되어 규명이 필요하다.
아무튼 조선 초기 무덤에서 고려시대 채색 벽화묘壁畵墓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며 특이한 모습과 화려함은 사료적 가치가 많다. 2005년 2월 5일 국가 문화재(사적史蹟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12월 2일, KBS ‘역사 스페셜’ 프로그램에 ‘발굴 밀양 고분 벽화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방영된 적도 있다.
2)우당憂堂 박융朴融 선생(? ~ 1428)
송은 박익의 장남으로 자는 유명惟明 호는 우당이다.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서 조선 초기에는 벼슬을 하지 않다가 아버지의 유명遺命13)을 받은 뒤 문과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이 때 고시관考試官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은 “한나라 동중서같은 대학자일지라도 이 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극찬 했다.14) 이후 정언正言, 수찬修撰, 전한典翰, 형조좌랑刑曹佐郞, 금산군수金山郡守, 이조정랑吏曹正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함안군수咸安郡守 등을 역임했다.
1424년(세종6년) 경상도 도사都事로 재임 시에는 청도향교 및 각 고을의 향교를 중수하고 제례제법祭禮祭法을 고증하여 정비 제정하고 제기를 일신 보완하는데 힘썼다. 탁영 김일손이 청도 교수직으로 있을 때 향교를 중수하면서 남긴 「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에서 “본군의 학교는 다섯 번이나 옮겼지만 자리를 정하지 못한 채 사찰을 빌려 사용하다가 국초에 지금의 자리에 세울 수 있었는데, 경상도 도사 박융 선생이 큰 힘을 썼다”15)라고 했다.
진주 촉석루에 제영운題詠韻 시가 있다.
촉석루 제영(矗石樓 題詠)16)
晉山形勝冠南區 진주의 형승이 영남의 으뜸인데
況復臨江有此樓 하물며 강을 임해 이 누樓가 있음에랴
列峀層巖成活畫 여러 산과 층암은 산 그림 이루었고
茂林脩竹傍淸流 무성한 숲 푸른 내는 청류를 곁에 했네
靑嵐髣髴屛間起 청람17)은 병풍 사이에 일어나는 듯하고
白鳥依稀鏡裡浮 흰새는 거울 속에 있는 듯하여라
已識地靈生俊傑 인걸은 지령 따라 나는 줄 알고 있지만
盛朝相繼薛居州 성조에 설거주薛居州18)같은 분이 잇달아 났네
촉석루 제영 연대는 촉석루 창건 연대와 같다고 할 것이며 19)이 제영운은 선생의 많은 치적을 치하하는 뜻에서 요청하여 얻어진 시인데, 조선조 시대에서는 가장 오랜된 것으로 차운 시가 33수나 된다. 이렇게 빼어난 시이며 지금도 많은 분들이 애송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2. 용강재
서원 내 용강재는 청도 밀성 박씨 소고공파 입향조인 소고공 박건 선생의 묘재墓齋이다.
공은 우당 박융의 둘째 아들로 밀양에서 청도로 이주했는데 그 시기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세종조 말기, 공의 나이 20세 전후, 병조 판서를 지낸 광산 김씨 김철성金哲誠의 딸과 혼인을 한 계기로 이서면 수야리에 입향한 것으로 짐작 된다.20)
수야리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1673년 이중경李重慶에 의해 편찬되었던 청도의 최초 사찬읍지인 오산지鰲山誌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오산군(청도의 별칭)의 동쪽 5리쯤에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만세가 지나도 깨어자지 않는 터가 있으며 수여현水餘峴의 두 물줄기 사이에 명당이 있다. 수여는 지금의 수야촌水也村이다21)
이 마을은 신라 때부터 형성되었으며 환경적으로 매우 뻬어난 마을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공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봉사와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수야는 물론 모산, 신지, 임당, 남양 등 청도군 관내에 집성촌을 형성 큰 문중을 이루어 살고 있다.
2. 충렬사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창의를 한 송은 선생의 6세손과 7세손인 박경신朴慶新, 경인慶因, 경전慶傳, 경윤慶胤, 경선慶宣, 지남智男, 철남哲男, 선瑄, 찬璨, 린璘, 우瑀 근瑾, 숙琡, 구球 14 공의 창의 정신을 기리며 제향하는 곳이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이 함락되고 4월 18일에는 밀양, 20일에는 청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적들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중요한 길목인 밀양, 청도가 일찍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삽시간에 영남의 6〜7개 읍이 적에게 짓밟히고 말았다.22)
이러한 절대적인 위기에서 밀성 박씨 소고공파 일가는 의병을 일으켜 지역과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을 섰다. 이분들은 청도읍성 탈환을 비롯하여 청도의 곳곳에 침투한 적들을 소탕했고 때로는 인근 고을에 원정을 하기도 했다.
14의사들은 모두 부자父子, 형제, 숙질叔姪, 종형제 사이이다. 문중이 전멸할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그들은 몸을 던졌다. 이는 면면히 이어져 오던 충절 정신이 계승된 것이다. 전쟁 때마다 의병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 일가가 집단으로 의병에 참여했던 것은 시대를 통틀어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열 네 명의 빛나는 행적은 ‘14의사 묘정비’에 새겨져 있다. 23)
충렬사에 배향하는 14의사는 다음과 같다.24)
1)삼우정三友亭 박경신朴慶新(1539~1594)
무과전시武科殿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선천, 안동, 양근 도호부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한 후, 1591년(선조24) 5월 관직에서 휴가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창의했는데 이는 임란 의병의 효시이다. 그 뒤 상경하여 어전에 나아가 아뢰는 자리에 청도 조전장淸道 助戰將에 임명되어 선조의 피란길 향도역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뒤 청도에 내려와 동면과 서면 의병대장과 합세하여 함락된 청도 읍성을 탈환했다. 청도 조전장과 밀양도호부사를 겸무하면서 계속되는 전투의 전상(戰傷)과 누적된 과로로 1594년 6월 5일 순직 하였다. 전투 일지인 『창의일록倡義日錄』을 남겼다. 1605년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공신과 호성원종扈聖原從 2등공신에 녹훈되었고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이다. 쌍둥이 아들 지남과 철남도 창의 공신이다.
2)용연龍淵 박경인 朴慶因 (1542~1592)
운문산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 5월 8일 순절했다. 경신의 동생이며 의병장 선瑄의 아버지이다. 증 사헌부지평贈司憲府持平이다. 아들 선도 창의 공신이다.
3)제우당悌友堂 박경전朴慶傳 (1553~1623)
전쟁이 일어나자 “시운이 불행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기울어진 이때 몸은 비록 상중에 있으나 어찌 작은 허물을 피하여 대의를 허물게 하겠는가, 마땅히 몸을 잊고 충성을 할 것이다.” 하며 부친의 묘전에서 아우 경윤, 경선 삼형제가 같이 맹세 하고 창의하여 동생, 숙질, 수야 동민 100여명을 따르게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와 협력하여 큰 공을 세웠다. 창녕 현감을 역임했고 증 병조판서贈兵曹判書 자헌대부資憲大夫 겸 지이금훈련원사이며 선무원종2등공신이다. 공의 활약을 담은 『창의일기倡義日記』가 전한다.
4)국헌菊軒 박경윤朴慶胤 (1555~1626)
아들 린璘, 구球와 함께 창의하여 청도 매전면 두곡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과 권응수 장군의 팔공산 그 중간에 진을 치고 서로 도우며 큰 공을 세웠다. 공은 전쟁 중에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다.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贈兵曹判書겸 지의금부 훈련원사이요, 선무원종2등공신이다. 형 제우당과 같이 제작한 『배자예부운략排字禮部韻略』은 국가문화재 '보물 917호'로 지정되어 있다.
5)박경선朴慶宣 (1561~1592)
형 경전, 경윤과 함께 참여했으며 적과 싸우다 화살이 떨어지자 맨손으로 싸웠고 적이 오른 손을 자르니 왼손으로 적을 껴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순절했다. 증직으로 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이다.
6)계애溪崖 박지남朴智男 (1565~1626)
아버지 경신을 따라 창의했고 동생 철남과 함께 수야의 대소가 청장년을 인솔하였다. 청도읍성 탈환에 전공을 세웠다. 무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선무원종 2등공신이다.
7)운애雲崖 박철남朴哲男 (1565~1611)
지남의 동생으로 아버지 경신을 도와 청도 읍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충무위 부장忠武衛部將이며 선무원종 2등공신이다.
8)괴정槐亭 박선朴瑄 (1571~1614)
1590년에 관찰사 홍성민이 조정에 보고하여 창릉침랑昌陵寢郞에 제수되었다. 아버지 경인과 함께 창의하여 우익장右翼將이 되었다. 전쟁 중 상처가 매우 심하여 목숨이 위태로웠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으니 적들이 상복喪服을 입은 공을 일컬어 ‘마의장麻衣將’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겸 동지사同知事이며 선무원종3등공신이다.
9)운옹雲翁 박찬朴璨 (1572~1624)
동생 우, 숙과 같이 창의했으며 좌익장左翼將이 되었다.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이며 선무원종 3등공신宣武原從 3等功臣이다.
10)행와杏窩 박린朴璘 (1574~1650)
경윤의 장남이다. 무쇠를 녹여 창을 만들었고 원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충의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병자호란 때는 62세의 나이로 의병에 참여했다.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으며 선무원종 2등공신이다.
11)기포杞圃 박우朴瑀 (1576~1637)
형님인 찬, 동생 숙 같이 공을 세웠다. 별시과別試科에 합격했고 남포 현감을 지냈다. 증 호조참의贈戶曹參議이며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의 군진에 합류하였다. 경기도 광주 쌍령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진무원종1등공신이다.
12)죽와竹窩 박근 朴瑾
성균진사成均館進士이며 창의하여 좌익장이 되었다. ‘창의 맹약문’과 격문을 널리 보내고 청도 운문진을 지켰다. 선무원종2등공신이다.
13)용암 박숙龍巖 朴琡 (1578~1639)
가장 젊은 나이인 15세에 형님인 찬, 우와 같이 창의하여 용맹을 떨쳤다.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으며 선무원종 3등공신이다.
14)박구朴球 (1577~1665)
아버지, 경윤, 맏형 린과 함께 참여했다.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으며 선무원종 3등공신이다.
박씨 일문의 의병활동은 삼창삼순팔의三倡三殉八義로 불려지고 있다. 즉 경신, 경전, 경윤은 창의삼충倡義三忠이며 임란 때 순절한 경인, 경선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우는 순절삼충殉節三忠이고 지남, 철남, 선, 찬, 린, 근, 숙, 구는 거의팔사擧義八士이다.
이상 용강서원의 내력과 여충사와 충렬사에 배향된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곳에 배향하고 있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충절’이다. 송은 박익은 고려가 무너졌을 때 천무이일天無二日 신무이군臣無二君 정신으로 충절을 지켰으며, 그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인 14의사들은 불의 침략으로 국토를 유린하는 왜적을 향해 충절의 의기로 창의를 했던 것이다.
2015년 안동 국학진흥원에서 ‘청도 밀성박씨 소고공파 문중전’이 열렸다. 그 때 주제가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36)이었다. 밀성 박씨 소고공파 후손들은 조상의 그 거룩한 ‘충절의 마음’을 잊지 않고 오늘도 용강서원을 중심으로 그 뜻을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박영환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부산에서 중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 후 고향에 돌아와 ‘청도문화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청도향교지’, ‘청도마을지’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청도신문에 ‘청도지역 서원, 재실 및 고택 탐방’을 연재하고 있다.
청도문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시집 ‘청도에 살어리랏다’, ‘하루를 건너며’, 수필집 ‘종소리의 뜨락에서’, ‘솔바람 초록빛 바다’ 등을 펴냈다. aapyh@hanmail.net
1)처음에는 숭의사를 복원하기 위해 1986년 11월에 기공하여 익년 12월에 준공하였으나 원래의 이름인 충렬사로 바꾸었다.
2) 처음 이름은 천익天翊임.
3)송은 사후 1399(정종 원년) 찬성 변계랑이 시장諡狀을 올려 시호가 내려짐.『송은선생 문집』 권2
4)김광철, 「여말 선초 사회 변동과 박익의 생애」, 『송은 박익선생 벽화묘』, 용강서원, 2012, 160쪽: 19세기 초 간행된 『典故大方』에는 박익이 고향 밀양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5)문경현:「국역 송은 선생 문집 해제解題」, 『국역 송은 선생 문집』, 1999, 30쪽
6)송계는 현재 밀양시 부북면 삽포리鍤浦里이다.
7)「송은선생문집」114쪽 “行尋石逕到松籬 돌길 찾아 걸어 솔 울타리 집에 이르니 / 花落盈衣更上巵 낙화는 옷섶에 쌓여 잔 위에 듣8)는구나/ 願得淸風明月債 청풍명월을 빚으로라도 얻을 수 있다면/ 百年與爾死生期 백년을 그대와 사생을 기약하고 싶구려”
지봉芝峯 황보인皇甫仁은 「유허신도비속지遺墟神道碑續識」에서 ‘선생은 그때 예조판서가 되었다’고 했다.
9)문경현 「국역 송은 선생 문집 해제」: 선생의 오징五徵 시기에 몇 가지 기록이 있으나 선생의 유고를 자세히 살피지 못한 데 따른 1396년은 오류이다. 방촌厖村의 묘표문墓表文에 따라 이태조 4년 1395년으로 보아야 한다.
10)공경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 예로써 주는 물건.
11)실제 사망 연도인 1398년과는 22년의 차이가 난다. 김광철은 앞의 논문 173쪽에서 태종대 이후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해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조성 되었을 때 아들 박융이 새롭게 단장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12)안휘준, 「송은 박익 묘의 벽화」, 앞의 『송은 박익선생의 벽화묘』 책 193쪽 내용을 발췌하여 서술함.
13)『증보 국역 우당문집』, 모우재 간행, 2005, 42쪽: “吾歸王魂 나는 죽어 왕씨의 혼령을 따라가나 汝在李世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게 되었다 旣爲人臣 이미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忠則竭力 힘을 다해 충성을 다하라 先天後天 선천과 후천이라 父子異時 부자 사이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14)『우당문집』 43쪽
15)오산지 「중수 청도학기」 참조.
16)촉석루가 불타버리고 세종조 「地理志續誌」 실려 있다가 최근년에 간행된 「촉석루 시집」에 그 원운은 물론 부차시附次詩 33가 나오게 되었다. 『우당문집』 46쪽
17)화창한 날에 아른 거리는 아지랑이
18)전국시대戰國時代 송나라의 선사. 왕을 선도하고자 왕의 곁에 있었다. 맹자가 이르기를 ‘一薛居州 혼자 어찌하랴’ 하였다.
19)지금 남아 있는 제영 중 고려 충목왕 때 고려 후기 정당문학 청천군菁川君 문량공文良公 정을보鄭乙輔의 제영운이 가장 오랜된 것이다. 이후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규헌葵軒 홍수량洪受湸(1627-1697)의 시도 있다.
20)박홍갑, 『병재 박하징 연구』, 경인문화사, 2008, 38쪽
21)이중경, 『역주 오산지』, 27쬭 ‘道詵踏山記’
22)박홍갑, 『임란공신 박경신과 창의일록』, 주류성출판사, 2020, 37쪽
23)『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 한국 국학진흥원, 2015, 45쪽
24)임진란 정신문화선양회, 『참여후원회 위훈 인명 사적 요약본』, 2017. 및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함.
25)선무원종공신녹권 3쪽 6행 <선무원종 공신 2등>, 行府使 朴慶新
26)「선무원종공신녹권」 <선무원종공신 2등> 17쪽 9행 正 朴慶傳
27)「선무원종공신녹권」 <원종공신 2등> 17쪽 9행 主簿 朴慶胤
28)「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 2등> 17쪽 10행 正 朴智男
29)「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 2등> 50쪽 13행 司僕 朴哲男
30)「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공신 3등>, 105쪽 2행 參奉 朴瑄
31)「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공신 3등>, 105쪽 8행 僉正 朴璨
32)「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공신 2등> 24쪽 5행 主簿 朴璘
33)「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공신 2등> 67쪽 9행 參奉 朴瑾
34)「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공신 3등> 120쪽 5행 奉事 朴琡
35)선무원종공산녹권」 <선무원종공신 3등> 115쪽 6행 部將 朴球
36)이용두,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 한국 국학진흥원, 2015.
참고문헌
보본재, 『국역 송은 선생 문집』, 대보사 1999.
밀성 박씨 우당공파 대종회, 『증보 국역 우당문집』, 모우재, 2005,
동아대학교 박물관, 『송은 박익선생 벽화묘』, 용강서원, 2012.
이중경, 『역주 오산지』, 청도문화원, 2003.
박홍갑, 『병재 박하징 연구』, 경인문화사, 2008.
박홍갑, 『임란공신 박경신과 창의일록』, 주류성출판사, 2020.
임진란 임란정신문화선양회, 『참여후원회 위훈인명 사적 요약본』, 2017.
이용두,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 한국 국학진흥원, 2015.
「선무원종공산녹권」 影印本
첫댓글 감사히 읽고 역사를 배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송은공과 창의 14인의 충절도 역사에 남을 훌륭한 업적이지만, 서원의 위용도 대단합니다.
송은선생의 벽화묘는 역사유적으로 보존하여야겠습니다. 참 귀해 보입니다.
임진왜란... 요즘의 정치를 보며 더욱 가슴이 타들어갑니다.
14인의 창의는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의거입니다.
장문의 사료 감사히 읽었습니다.
용강서원은 제 선대를 배향하는 곳입니다. 마침 원고 의뢰가 있어 정리해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