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학파의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는 청교도 신학, 부흥, 선교를 추구했다/ 김홍만
홍치모 교수는 구학파는 부흥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신학파는 부흥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구학파는 부흥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부흥주의를 반대한 것이다. 구학파와 신학파가 갈라선 당시 구학파 신학자인 루이스 치즈맨은 지적했다.
“구학파에 대한 잘못된 인상 하나가 팽배하고 있는데 그것은 구학파가 부흥을 믿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학파와 신학파의 차이점은 부흥의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진정성에 대한 증거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구학파는 진정한 부흥을 추구했다. 구학파는 제1차 영적 대각성의 실천적, 신학적 유산과 철저한 칼빈주의, 청교도 신학에 근거한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나단 디킨슨의 부흥 신학을 계속 고수하고 있었다. 구학파의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는 참된 부흥을 추구했고, 19세기에 학교 내에서 상당히 여러 차례 부흥을 경험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는 개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실제로 1848년 뉴저지의 테넌트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 알렉산더 교수는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3명의 신학생을 그 교회에 보내 그 일들을 돕게 했다. 더욱이 제2차 영적 대각성이 일어난 후 1857-1858년 뉴욕에서부터 대부흥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될 때도 구학파가 부흥 신학을 주도했는데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던 제임스 알렉산더는 청교도 회심 신학을 근거로 해서 참된 부흥을 이끌기 위한 부흥 교범을 출판하기도 했다.
1860년 구학파의 총회록은 1857-58년의 대부흥이 교회에 참된 경건을 가져다 주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구학파의 신학자인 찰스 하지도 참된 부흥을 지지했으며 더불어 신학파의 부흥주의에 대해서는 감정주의이며 부흥의 참된 열매인 경건을 얻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렇게 구학파가 진정한 부흥을 추구한 반면 신학파는 부흥주의를 추구했는데 신학파의 부흥주의는 찰스 피니를 옹호하고 지원하였다. 찰스 피니의 부흥주의는 신학적으로 나다니엘 테일러의 신 신학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신학파 신학자인 사무엘 베어드는 찰스 피니의 부흥주의를 옹호하면서 그의 신학은 테일러주의, 실천적인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했다. 따라서 구학파는 찰스 피니의 부흥 신학과 방법론의 위험성을 지적, 경고했다. 즉 찰스 피니의 부흥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한 자기 신뢰와 잘못된 거짓 확신에 거하게 하므로 교회에는 거듭나지 못한 자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경고했다.(아키발드 알렉산더, 사무엘 밀러, 애쉬벨 그린, 에드워드 그리핀)
여기서 밝혀야 할 사실 하나는, 미국의 제1, 2차 영적 대각성과 1857년의 대부흥 때의 가르침의 핵심은 청교도의 회심 신학으로 매우 교리적이면서 경험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한국 장로교회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의 청교도 신학은 그 효과로 1903-1907년의 대부흥을 일으킨다. 따라서 차성한 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적 대각성이나 한국의 대부흥이 어떤 지적인 것을 무시하고 감정적인 것에 치우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한국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적, 역사적 전통은 미국의 영적 대각성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청교도 신학과 이어지기 때문에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적 특성과 열매들을 살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청교도 신학과 그 실제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징 속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청교도 신학, 부흥, 선교이다. 이것은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역사적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즉 미국 장로교회는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제1차 영적 대각성을 체험했고(신파) 인디언 선교와 국내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독립 후 다시 청교도 정신의 회복운동 가운데 제2차 영적 대각성을 맞이했고, 그것의 산물로 해외선교가 이루어졌다. 19세기 중엽에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수없이 유입되고 교회가 영적으로 위기를 맞자 다시 청교도 신학으로 돌아가면서 1857-58의 대부흥을 경험하고 국내 선교와 해외선교는 더욱 힘을 얻어 1884년 한국에까지 복음이 들어오게 된다(구학파).
따라서 선교사들은 청교도의 신학으로 훈련된 바 영혼 구원에 있어 성령이 일하시는 원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성령이 일하시도록 인간의(선교사의)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한국 장로교는 미국 교회가 세 번이나 경험했던 것과 같은 대부흥을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은 청교도 신학이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인도에서 부흥을 가져다 준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 영국 교회가 부흥의 효과로 선교를 감당했던 것처럼 한국 장로교회도 부흥을 체험한 후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된다.
따라서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청교도 신학과 청교도 회심 신학을 근거로 한 부흥 신학이었으며 이로 인해 선교와 전도에 힘쓰고 경건이 있는 교회가 되었다.
김홍만,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청교도 신학’, pp 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