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이 신 자
길가 패인 웅덩이를 눈 속 물줄기가 돈다
모여서 멈추는가 했더니 아주 잠깐 한바퀴 빙 정적을 깰 뿐이다
어제 고요하게 다가 와 커다랗게 어지럽히던 생각들도 그랬다
아침이 되어 또 다른 문제를 기다리고 있음을 확인할 때
비로소 어제의 시간이,
과거의 시간들은 함부로 물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내 안을 한 바퀴 빙 도는 동안만 나의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 자리에서 일시적인 혼돈을 담아낸 방금 전 나도,
지나간 시간들은 함부로 물어서는 안된다
지름길
이 신 자
횡단보도는 항상 저만치, 소비적이었다
잔디밭을 뚫고 나온 아이들은
훨씬 더 가깝게 건너편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만의 게임,
약간의 스릴은 그들 방식의 횡단보도였다
그 법칙은 누구도 허물지 못한 공식이었다
그랬다
그렇게 수년을 견뎌온 그 공식이 어느 날 무너져 버렸다
어리석은 자동차 하나
한 아이의 행방을 빠르게 구겨버린 것이다
지름길,
아이들이 뚫어 놓은 보이지 않는 풍습이
크고 둔감한 질서에 의해 어느 한 순간 가볍게 붕괴되었고
다시 잔디가 들어찬 그 길엔 변명처럼 보도블럭이 높여졌다
가을 밤
이 신 자
이별을 얘기하던 날처럼,
낮은 태양이 한 계절을 뜨겁게 달구며 저물고 난 여름의 끝
귀뚜라미 짙은 갈색으로 울어대는 가을, 초입
또 다시 찾아드는 마음속 진통 몇 알
힘없이 손 내밀며 건네준 주문 같은 약속 하나
잘 살아야 해
희미한 다짐으로 돌아섰는데
지금의 나는 그 말을 기억하는 걸까 그 계절을 기억하는 걸까
해마다 한번 씩은 찾게 되는 장소
나는 잠시 몇 개의 일들과 약속들을 베란다에 내려놓고서
귀뚜라미 그 얼얼한 기억 속으로 떠난다
서정리역엔 그리움이
이 신 자
비오는 날 손 흔들어 주며
기차를 타던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지금도
내 눈에 비가 내려 서정리역에 간다
바람 부는 날 열차를 타면
차가워진 손 포켓에 넣어 녹여 주던 사람이 있었다
노을빛 바라보다 몸이 추억을 느낄 때면
서정리역에 간다
그리고
서정리역 지나는 기차,
그 안 어딘가 엔
겨울을 내려놓고 가는 화물칸이 있다
그 겨울
다시 서로의 눈동자에서 뜨거워지고
어느 역에선가 비가 되고 바람이 되어
만나게 될 것만 같아 무작정 서정리역에 간다
하지만 12시 7분 기차는 떠나고
서정리역엔 빈 철로를 바라보는 내 마음 홀로 서 있다
아침의 활자들
이 신 자
물구나무를 서고 싶다
부패한 정치와 그 숲의 사람들
그리고 지폐들과 위조되기 쉬운 욕망들
아침부터 세상을 향해 컹컹 짖어대는 활자들,
물구나무를 서고 싶다
어디 살아갈 이유가 될 만한 소리 없을까
성난 활자들에 밀려 젖은 채 구호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는,
물구나무를 서야 겨우 보이는 그들의 풍경
난 지금 어느 기사의 모서리를 헤집으며 삶을 도모하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자리, 이것도
물구나무를 서야만 읽혀질 사연 아닐까
사랑하며, 감사하며
이 신자
사랑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살갗 부비며 살아가는 가족들에서부터 매일 만나는 이웃들,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으며 나눠야하는 사랑,
한사람의 작은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이렇게 고르게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은 기술 중에 고등기술이다.
누구나에게 가족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없고 또 누구나에게 연인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없고 또 누구나에게 늘 이웃 같은 정만 나눌 수도 없다.
이 사람은 가족, 이 사람은 이웃, 이 사람은 연인으로 구분하여 골고루 나누며 사랑을 한다.
‘암’ 이란 친구를 만나 병원 생활을 오랜 기간 해 왔다.
그 긴박함과 며칠씩 함께 숨소리 고르며 지낸 정 때문에 지금도 안쓰러운 마음으로 만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며 돌아오는 길에 주어진 하루 동안에 내가 나눠야할 사랑의 종류와 색깔들의 다양성에 대해 잠시 되짚어 보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아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이가 있어 행복한 순간의 벅찬 환희를 한쯤은 다 경험해 보았을 테고 또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무뎌지는 마음이 서로의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점점 내면의 떨림은 퇴색되어 지는 것 같아 아쉬운 때 ‘사랑과 감사‘ 란 이름 하나 깊이 우려내 보면 어떨까?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끓어오르던 정열과 지칠 줄 모르던 사랑의 고백들이 있었고 밤낮 구분 없이 새벽부터 엎드려 무릎 꿇는 시간이면 감사로 눈물이 흘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함께 하는 세월의 길이가 길어지면 누린 은혜도 더 커서 감사할 이유도 점점 더 커졌으련만 어째 메마른 가슴과 마른 눈자위만 남게 되었는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다보면 분명 처음보다 더 많은 것들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으련만 조금이라도 내게 불리하다 싶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단 한 번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불안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아파서 흰죽 한 사발을 끓여 놓고 밥상 앞에 앉아 그동안 먹고 살아감에 있어서도 감사가 부족했음을 새삼 느꼈다.
늘 먹는 밥이니 당연히 먹어질 줄 알았다. 잠깐의 소화 불량에도 나 스스로의 의지로는 밥 한 공기조차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육체이다.
그렇기에 살아 숨 쉬는 동안 주변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음식을 감사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내 앞에 펼쳐 놓으신 분께 더욱 감사하며 가슴 따뜻한 눈물을 회복하게 해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오늘도 하루도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이것이 끊임없는 나의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