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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파키아오(Manny Pacquiao) vs 터만(Keith Thurman) 세기의 권투 대결 2019,7,20
2019,7,20
Manny Pacquiao, The only eight-division champion in boxing history
※파키아오(Manny pacquiao 40세 61전 39 KO) 8 체급 챔피언 타이틀 보유자,
10번의 타이틀 획득, 11번 타이틀 획득(기록경신), 복싱 역사상 최초의 기록.
※터만(Keith Thurman 30세 22 KO) WBC and WBA 웰터급 통합 챔피언
※파키아오(Manny Pacquiao 40세) 115:112, 115:112, 113:114, 2:1 판정승
2019,7,20
Manny pacquiao WBA welterweight championship after scoring a split-decision win(2:1) against Keith Thurman(30세 22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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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파키아오(Manny Pacquiao) vs 터만(Keith Thurman) 웰터급 챔피언 세기의 대결
파키아오(Pacquiao) 70전 61승 39 ko 40세
터만(Thurman) 29승 29승 22 ko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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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아오(Manny Pacquiao) vs 터만(Keith Thu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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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설의 파키아오(Manny Pacquiao) vs 터만(Keith Thurman) 1-6
사진 Manny Pacquiao, The only eight-division champion in boxing history 1-5
※파키아오(Manny pacquiao 40세) 115:112, 115:112, 113:114, 2:1 판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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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outube 8체급 석권, 전설의 복서 매니 파퀴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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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youtube 파키아오(Manny pacquiao) vs 터만(Keith Thurman)
Full Fight Highlights Hammer TV 2019.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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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파키아오(Manny Pacquiao) vs 터만(Keith Thurman) 권투 대결
전설의 파키아오(Manny Pacquiao) 이야기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 40세 39 KO)는 필리핀 영웅으로 칭송되며, 8체급 석권이라는 복싱 역사상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한 살아있는 복싱의 전설이다. 최근까지 현대 복싱의 아이콘은 그였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영웅이다. 세계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복싱계 뿐만이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최상위권에 오랫동안 있는 인물이다. 2010년 필리핀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현재는 상원의원으로 정치인으로서도 활동 중이다. 잠시 은퇴를 했지만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서 필리핀 사람들에게 많은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 빈민가 소년에서 국민 영웅까지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의 일대기를 설명할 때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길거리를 전전했고, 무작정 상경한 뒤 링 위에 올라 두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스포츠스타로 꼽히는 그는, 조금 보태서 조국 필리핀에서는 신(神)과 거의 동급 대접을 받는다. 파퀴아오를 잘 모르거나 복싱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전 세계를 뛰어넘어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별한 감동과 매력이 있다.
● 맨발로 빈민가를 헤매던 어린 시절
파퀴아오는 1978년 12월 17일,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제너럴 산토스 시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가끔 TV로 접하는 동남아 시골 마을의 헐벗은 어린 아이가 바로 파퀴아오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퀴아오는 코코넛 나무로 지붕과 벽을 만든 야자나무 오두막집에서 홀어머니와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빈곤과 싸운 어린 시절이었다. 이른 새벽마다 어머니의 묵주 기도를 들으면서 “우리가 자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하는 물음을 날마다 마음에 품었다고 파퀴아오는 회상한다.
5살 때부터 바닷가에 나가 일을 했다. 어부들의 일을 돕고 물고기를 나눠 받았다. 12살에는 아예 소년 가장이 됐다. 초등학교 6학년을 중퇴하고, 길거리에서 도너츠와 담배 등을 팔았다. 복싱을 처음 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얹혀살던 삼촌에게 처음 복싱을 배웠고, 동네 공원에서 스파링도 벌였다.
파퀴아오는 복싱에 재능을 보였다. 금방 두각을 드러냈고 나름 대전료도 받았다. 첫 대전료는 단돈 2달러였다. ‘2달러’를 대전료로 받던 소년이 훗날 한 번의 경기로 얼마를 받게 될 지는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13살이 되던 해, 파퀴아오는 사흘 동안 밀항선을 타고 수도인 마닐라로 상경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시 파퀴아오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죄송해요 어머니. 마닐라에 가겠다고 하면 허락을 안 해주셨을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해야 우리가 돈을 벌 수 있어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소년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부모님 전상서를 남기고 서울로 향하는 이 레퍼토리는 우리에게도 딱히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아니, 가난을 겪었던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다. 13살 소년이던 파퀴아오에게 복싱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두 주먹에, 그야말로 모든 걸 걸었 다. 그렇게 기적같은 커리어가 시작됐다.
● 두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다
링에서 먹고 자며 복싱을 연마한 파퀴아오는 1995년, 18살의 나이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사실은 18살이 아니라 16살이었다. 18살 전에는 프로에 데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이를 속였다. 몸무게도 기준 체중에 모자랐기 때문에 주머니에 무거운 잡동사니를 잔뜩 넣은 채 저울 위에 올랐다고 파퀴아오는 회상한다.
이후에는 연승 가도를 달렸다. 데뷔 첫 해에는 10번 싸워 10번 모두 이겼다. 단 한 차례 부상으로 인한 패배를 제외하고는 데뷔 2년만인 1997년 동양타이틀을 획득했고 3년째인 이듬해 드디어 첫 세계타이틀(WBC 플라이급)을 따냈다. (*재미있는 것은 파퀴아오의 연승 상대에 우리나라 선수들도 있었다. 96년과 97년, 2000년에 각각 우리나라의 이욱기, 이성열, 채승곤 선수와 맞붙었는데 모두 KO 또는 TKO승을 거뒀다)
체급을 올려 슈퍼밴텀급에서도 세계챔피언을 차지한 파퀴아오는 5차 방어까지 성공한 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가 될 명트레이너 프레디 로치를 만난다. 프레디 로치는 한때 잘 나가던 복서였지만 몸을 혹사한 탓에 파킨슨 병을 앓고 있었다. 어쨌든 이 명트레이너는 천재 선수의 재능을 금방 알아봤다. 55kg의 자그만 소년을 세계 최고의 복서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6월, 파퀴아오는 역사적인 라스베가스 데뷔전을 치른다. 상대는 ‘남아공의 킬러’라고 불렸던 IBF 슈퍼밴텀급 세계챔피언 레드와바였다. 당시 방어전을 치러야 했던 레드와바는 2주 전까지 도전자를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파퀴아오는 이른바 ‘급조’된 상대였다. 당시 중계방송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상대는 매니 파카이...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파퀴아오”, 멀리 필리핀에서 온 조그만 복서의 이름을 캐스터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파퀴아오는 링 위를 지배했다. IBF 세계챔피언 레드와바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다시피 했다. 여유 만만했던 흑인 복서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고, 보다 못한 주심은 6회 TKO를 선언했다. 송곳 같은 펀치를 끊임없이 쏟아 붓는 파퀴아오의 인상적인 경기 스타일에 라스베가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지도를 높여가던 파퀴아오는 세계 중경량급 복싱을 호령하던 ‘멕시코 3인방’ (안토니오 바레라, 에릭 모랄레스,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을 잇따라 꺾으며 세계적인 복서로 자리매김했다. 그것도 대부분의 경기를 일방적으로 주도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페더급 최강으로 꼽히던 바레라는 파퀴아오에게 얼마나 두드려 맞았던지, 바레라의 트레이너가 눈물을 흘리며 경기를 중단시킬 정도였다. 주 무대였던 미국 복싱 팬과 전문가들도 키 169cm의 이 조그만 아시아 출신 복서에게 열광했다. 그동안 미국 복싱 선수들이 넘지 못했던 멕시칸의 벽을 파퀴아오가 넘자 대리만족을 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질 때 지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펀치를 쏟아붓는 저돌적인 파이팅은 모두가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 정상에서 대결…“파퀴아오 보호법을 만들자”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파퀴아오는 2008년 12월, 세계 최고 수준의 거물과 만난다. 미국 국적의 ‘골든 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가 그 상대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호야는 6체급에서 10번의 세계 챔피언을 지냈고, 은퇴 이후에도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그야말로 ‘전설’로 꼽히는 선수다. 당시 호야는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세계가 주목할 만한 대결이었다. 일각에서는 파퀴아오가 ‘멕시코 3인방’을 줄줄이 꺾자 히스패닉계인 호야가 싸움을 제의했다고도 한다.
이 대결이 얼마나 주목을 받았는지, 역설적으로 파퀴아오의 조국 필리핀에서는 반대 운동까지 일어났다. 파퀴아오는 이미 필리핀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어 있었고,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파퀴아오가 호야에게 질까봐, 아니, ‘맞아 죽을까봐’ 염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퀴아오가 플라이급에서 출발한 단신(短身)이었던 반면, 호야는 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파퀴아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선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국가의 자부심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파퀴아오의 경기 출전을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될 정도였다.
막상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시작되자 우려는 환호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사정없이 코너로 몰아붙였다. 호야의 얼굴은 라운드를 거듭할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 8라운드가 끝나자 호야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됐고, 주심은 결국 파퀴아오의 TKO 승리를 선언했다. 복싱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 국회의원, 농구 감독…최고의 스타가 되다
파퀴아오는 그렇게 한동안 전성기를 이어가며 세계적인 복싱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복싱이 침체된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못한 면이 있지만, 파퀴아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최상위권에서 오랫동안 있었다) 조국 필리핀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파퀴아오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나라 전체가 마비 상태가 될 정도. 필리핀 정부군과 반군도 내전을 멈추고, 범죄율도 제로로 떨어지고, 거리에는 차가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필리핀 일부 지역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때도, 이재민들이 모여 파퀴아오의 경기를 보는 장면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2009년에는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격인 필리핀 하원 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사실 파퀴아오는 이전에도 하원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는데, 상대 후보의 선거 표어가 “파퀴아오를 더러운 정치판에 들이지 말자”였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파퀴아오와 함께 찍은 사진을 포스터로 내세우고 어떻게든 인연을 맺으려고 한다. 필리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파퀴아오, 그 다음은 파퀴아오의 코치인 프레디 로치, 그 다음이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끊임없이 대선 출마설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연예계에서도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았다. 가수로 앨범을 내고 영화에도 출연했다. 엄청난 횟수의 광고 출연으로 ‘파퀴아오 경제 효과’를 따로 추산할 정도다. (우리나라의 김연아 선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지난 2014년에는 프로농구팀에 감독으로 참여했고 농구 선수로 실제 경기에 출전하기도 하며 다양한 행보를 이어갔다.
폭넓은 행보만큼이나 통 큰 선행도 잊지 않았다. 지난 2013년에는 태풍 하이옌으로 고통받는 이재민들을 위해 대전료로 받은 191억 원을 전액 기부했고 지금도 파퀴아오 재단을 통한 자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끊었다고 선언했지만 한때 술과 투계(鬪鷄)도박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탈세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퀴아오는 적어도 필리핀 안에서는, 신(神)에 가장 다가선 인물이라고 한다.
● 파퀴아오: 끝없는 도전
외도에 너무 힘을 쏟았기 때문일까, 파퀴아오는 이후 잠시 내리막길을 걷는다. 지난 2012년 치른 2경기에서 모두 패배를 당하며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던 마르케스와의 경기에서는 6회 충격적인 KO 패배를 당했다. 턱을 맞고 완전히 드러누운 파퀴아오의 모습에 ‘이제 끝났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파퀴아오는 보란 듯이 재기했다. 곧바로 이듬해 브랜든 리오스를 상대로 웰터급 챔피언벨트를 되찾았고 이후에도 연승을 거두며 복귀 이후 3연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지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나이도 불혹인 40살에 다다랐다.
그리고 파퀴아오는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기의 대결’ 앞에 섰다. 21세기 최고의 복서로 꼽히는 ‘무패 전설’ 메이웨더가 그 상대다. 5년 동안 말만 무성했던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더 적은 대전료를 받기로 하고 (물론 그 액수도 천문학적이지만) 언더독(Underdog), 즉 도전자의 입장에 섰다. 도전자의 입장이 불만족스럽지 않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도전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오히려 더 동기부여가 되고 용기와 집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파퀴아오의 인생은 ‘도전’ 그 자체로 요약된다. 필리핀 빈민가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상경해 링 위에 올랐고, 세계무대를 두드려 세계챔피언이 됐다. 플라이급부터 끊임없이 체급을 올려 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한 것은 인간 한계에 도전해 그것을 넘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딱히 잘 생기지도 않았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필리핀 출신의 이 자그마한 남자에게 세계가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굳이 세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감동을 느끼고 이 남자를 응원할 수 있는 건 그가 걸어온 길, 또 그의 이야기가 가진 힘 때문이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남자의 성공 신화, 대결의 승패를 떠나, 파퀴아오의 ‘끝없는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경량급으로 대전료 2000만달러를 넘긴 최초의 선수! 그는 필리핀이 배출한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37)다. 파퀴아오는 2011년 ESPN이 조사한 스포츠 스타 부자 순위에서 MLB 뉴욕 양키스의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함께 3200만 달러(약 350억원)를 벌어들여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을 선정했는데, 이 중 스포츠 선수는 골프의 타이거 우즈, 테니스의 나달, 복싱의 파퀴아오 3인이었다.
이제 파키아오(Manny pacquiao 40세 61전 39 KO), 8 체급 챔피언 타이틀 보유자, 10번의 타이틀 획득, 복싱 역사상 최초의 기록 보유자는 터만(Keith Thurman 30세 22 KO) WBC and WBA 웰터급 통합 챔피언과 2019년 7월 20일 라스베가스에서 세기의 대결을 벌인다, 11번 타이틀 획득으로 또 한 번의 기록경신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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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파키아오(Manny Pacquiao) vs 터만(Keith Thurman) 웰터급 챔피언 세기의 대결, 2019,7,20
파키아오(Pacquiao) 70전 61승 39 ko 40세
터만(Thurman) 29승 29승 22 ko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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