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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풍루 시에 차운하다〔次仁風樓韻〕
세 조정을 우국충정 다하다가 늙었는데 / 憂國三朝白首餘
평생의 충효 모두 헛된 일이 되었어라 / 平生忠孝盡歸虛
첩첩 산이 둘러싼 먼 변방에 운무 짙고 / 山重絶塞多雲霧
하늘 멀리 찬 강가에 고향 편지 드물구나 / 天遠寒江少雁魚
몇 번이나 변경 성에 뜬 달 보며 울었던가 / 衰淚幾看邊月灑
어찌하면 고향에 가 시름겨운 얼굴 펼까 / 愁眉那傍故山舒
백발 모친 계시는 고당이 어른대어 / 依依鶴髮高堂畔
꿈속의 혼 밤마다 고향 집을 맴도누나 / 魂夢連宵繞舊居
[주-C001] 서천록(西遷錄) : 이언적이 57세이던 1547년(명종2) 윤9월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江界)에 안치(安置)되면서부터 1553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지은 시 36제를 수록한 것이다.[주-D001] 인풍루(仁風樓) :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의 성안 서북쪽에 있었던 누대이다.(회재집 제4권)
◈선비 손 부인을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先妣孫夫人文〕
가정(嘉靖) 28년인 기유년(1549, 명종4) 10월 모일에 고애자(孤哀子) 언적은 멀리서 제철 음식을 제수로 갖추어 조카 이순인(李純仁)으로 하여금 현비(顯妣) 정경부인(貞敬夫人) 손씨의 영전에 공경히 제사를 올리게 합니다.
낳아 주고 길러 주신 크나큰 은혜 / 伏以恩深生育
아득한 저 하늘처럼 끝이 없는데 / 昊天罔極
연세 많아 사실 날이 많지 않기에 / 日迫西山
자식 마음 안타까움 더했습니다 / 兒情冞切
관직에서 물러나 약시중 들며 / 休官侍藥
어머님 곁을 차마 떠날 수 없어 / 不忍離側
생존해 계실 동안 봉양을 마쳐 / 庶遂終養
자식 도리 다하기를 바랐었지요 / 以盡子職
제 행실이 신명을 저버렸으며 / 行負神明
제 정성이 하늘을 감격 못 시켜 / 誠未格天
청명한 조정에서 죄를 입어서 / 獲譴淸朝
먼 변방에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 身遭遠遷
어머님과 제가 손을 부여잡은 채 / 母兒相持
울부짖고 통곡하며 영결하는데 / 號哭永訣
하늘과 땅은 슬픈 기색 띠었고 / 天地慘色
귀신들도 모두 눈물 흘렸습니다 / 鬼神亦泣
하늘가 땅끝으로 쫓겨난 뒤로 / 地角天涯
먼 고향 집 소식이 끊기었는데 / 消息斷絶
겹겹의 산과 물이 가로막혀서 / 水阻山重
혼은 녹고 가슴은 무너졌지요 / 魂消心折
꿈속에서는 혼이 가볍게 날아 / 夢魂飄颻
밤마다 집으로 달려가서는 / 夜夜飛馳
백발 모친 앞에서 색동옷 입고 / 華髮斑衣
훤당(萱堂)에서 어머님을 뵈었습니다 / 省侍萱闈
쇠약해진 얼굴은 근심이 짙고 / 衰顔慘慘
흰머리는 못 잊던 모습이신데 / 鶴髮依依
손으로 어머님 몸 어루만지니 / 手撫肌體
예전에 무고하던 시절 같지만 / 宛如平昔
망연히 꿈에서 깨어나 보면 / 惘然驚覺
몸은 먼 변방 땅에 있었습니다 / 身在絶域
한밤중에 일어나 가슴을 치니 / 中宵撫膺
눈물이 고여 줄줄 흘러내리고 / 淚凝成血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어도 / 仰天號籲
하늘 역시 아득할 뿐이었지요 / 天亦漠漠
그나마 실낱같은 목숨 보전해 / 庶存殘性
어머님의 기뻐하는 모습 뵙고자 / 承歡有日
조석으로 말없이 하늘에 빌며 / 晨昏默禱
기적 같은 일 있기를 바랐건마는 / 望幸千一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 不弔昊天
갑작스레 어머님을 앗아 갔으니 / 遽奪所恃
제가 지은 죄악이 극에 달하여 / 罪大惡極
이런 화가 이르고 만 것입니다 / 禍至於此
날마다 집안 소식 기다리는데 / 日望平書
갑자기 부고가 이르렀기에 / 訃音奄至
울부짖다 목이 쉬어 혼절을 하고 / 失聲隕絶
속이 타고 가슴이 찢기는 듯해 / 五內焚裂
땅을 치고 하늘을 불러보아도 / 扣地叫天
끝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 竟無逮及
곧게 자랄 약쑥으로 여기셨으나 / 蓼蓼者莪
약쑥 아닌 다북쑥에 불과했으니 / 匪莪伊蒿
슬프게도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 哀哀父母
저를 낳아 많은 고생 하셨습니다 / 生我劬勞
앉으나 서나 항상 돌아보시고 / 顧我復我
들어가나 나가나 생각하시니 / 出入腹我
한순간도 품에서 떼 놓지 않고 / 未離懷抱
울어 대는 저를 안고 어르셨지요 / 呱呱膝下
갖은 사랑 다 쏟고 힘을 기울여 / 恩斯勤斯
자식을 기르느라 근심하시니 / 鬻兒閔斯
작은 풀의 감사하는 정은 깊지만 / 寸草情深
봄 햇살의 은혜 갚지 못했습니다 / 莫報春輝
매양 한이 되는 것은 한평생 동안 / 每恨平生
어머님 뜻을 많이 어긴 겁니다 / 承順多違
어려서 부친 잃고 배울 곳 없어 / 少孤無賴
강습하고자 하는 뜻 품었는데 / 有志講習
자애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 割慈忍愛
나가서 배우도록 허락하시곤 / 許兒遊學
한땀 한땀 꼼꼼히 옷을 지으니 / 衣縫密密
더디게 돌아올까 해서였지요 / 歸恐遲遲
아침저녁 문안 인사 오래 거르고 / 定省久曠
안부 묻는 편지조차 드물어지매 / 音問又稀
밤이면 등불 하나 마주하고서 / 夜對孤燈
제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지요 / 念兒涕揮
벼슬살이하느라고 객지에 나가 / 及其遊宦
변변찮은 녹봉에 매이게 되자 / 薄祿是縻
해마다 봄가을로 귀성할 때면 / 歲歲春秋
높이 올라 가는 저를 전송했는데 / 登高送兒
멀어져서 모습이 보이지 않아 / 瞻望不及
우두커니 서서 눈물 흘리셨지요 / 佇立霑衣
밤낮으로 대문에 기대선 채로 / 昏朝倚閭
날마다 아들 오길 기다리느라 / 日望兒歸
슬픔으로 상심하고 혼이 녹아서 / 傷懷斷魂
노쇠함과 병을 재촉하였습니다 / 衰疾催迫
나라 위해 몸 바치는 의리가 중해 / 義重徇國
용단 내려 물러나지 못한 까닭에 / 退不勇決
어머님을 봉양한 날 많지 않으니 / 日短奉親
슬퍼하며 뉘우친들 무엇 하리오 / 痛悔莫及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려 / 念此摧心
타는 듯 도려내듯 아프답니다 / 如焚如割
어머님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 當其疾病
자식들이 모두 곁을 지켰었건만 / 子女俱侍
저만 홀로 옆에 있지 못하였으니 / 兒獨不在
그리워하는 마음 어떠했을지 / 默念何已
저승에 계시지만 앎이 있다면 / 冥漠有知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시리다 / 曷時瞑目
정령이 어둡지 않으시다면 / 精靈不昧
바람처럼 순식간에 돌아오시어 / 來返飄忽
아득히 멀고도 먼 변방 고을로 / 絶徼相尋
불원천리 못난 아들 찾아오소서 / 不遠千里
궁색한 집에 박한 제물 차리니 / 窮廬薄奠
생전의 모습 다시 보는 듯한데 / 宛見容止
어느 순간 홀연히 보이지 않고 / 奄忽不見
의용(儀容)이 형적조차 없어져 버려 / 儀刑無迹
슬피 울부짖어도 미칠 수 없고 / 攀號莫追
만산에는 눈보라만 몰아칩니다 / 萬山風雪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 人生斯世
누구나 부모상에 곡하겠지만 / 誰無此哭
만리 밖에 와서 이런 슬픔 겪는 건 / 萬里茹痛
오직 저 하나밖에 없으리이다 / 惟我獨兮
떠나올 때 한 이별이 영결(永訣)이 되어 / 一別終天
이승과 저승으로 영영 갈리니 / 幽明永隔
남들은 모두 부모 봉양하는데 / 民莫不穀
저만 봉양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 我獨不卒
드넓은 저 하늘과 유구한 땅도 / 天長地久
끝이 있고 다할 날이 있을 테지만 / 亦有涯盡
오직 저의 한없는 원통함만은 / 惟此怨痛
뼈가 가루 되더라도 남으리이다 / 粉骨難泯
염을 할 때 널에 기대 울지 못하고 / 斂不憑棺
하관할 때 광혈(壙穴)에 이르지 못해 / 窆不臨壙
자식 된 자의 직분 어그러뜨려 / 子職虧闕
천지간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 負罪天壤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이 몸 / 煢煢一身
살더라도 아무 도움 될 곳 없으니 / 生亦無裨
차라리 어머님을 따라 죽어서 / 願從泉下
모습을 다시 뵙길 바라지마는 / 復見容儀
하늘은 캄캄하고 땅은 아득해 / 天冥地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답니다 / 不知所之
묘소에 서리와 이슬 내리고 / 霜露丘壟
풀이 이미 무성하게 자랐으련만 / 宿草已蕪
슬픔 안고 하늘 끝을 바라보면서 / 慟望天涯
정신을 잃었다가 깨곤 합니다 / 絶而復蘇
아아! 슬픕니다 / 嗚呼痛哉
아아! 슬픕니다 / 嗚呼痛哉
삼가 바라건대 흠향하소서 / 伏惟尙饗
[주-D001] 선비(先妣) 손 부인(孫夫人) : 이언적의 모친 손씨는 본관은 경주(慶州), 생몰년은 1469~1548년이다. 부친은 계천군(雞川君) 손소(孫昭)이다. 자세한 인물 정보는 《회재집》 권6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선비 정경부인 손씨 묘갈명(先妣貞敬夫人孫氏墓碣銘)〉에 보인다.[주-D002] 조카 이순인(李純仁) :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李彦适)의 서자이다. 이언적이 강계(江界)로 유배될 때부터 유배 생활 동안 줄곧 이언적을 모셨던 경백(敬伯)이 그인 듯하다.[주-D003] 곧게 …… 생각하시니 : 이 여섯 구는 《시경》 〈육아(蓼莪)〉의 구절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으로, 부모님이 못난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느라 고생하셨다는 내용이다. 번역은 이 글의 흐름에 맞도록 의역하였다.[주-D004] 작은 …… 못했습니다 : 당(唐)나라 맹교(孟郊)의 시 〈유자음(遊子吟)〉에 “인자하신 어머님의 손에 쥔 실은, 객지로 나갈 아들 옷을 짓는 것. 출발 앞서 꼼꼼히 바느질하니, 행여 더디 돌아올까 염려함이네. 한 치 되는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 봄볕 같은 사랑을 갚기 어렵네.〔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5] 한땀 …… 해서였지요 : 역시 맹교의 〈유자음〉에서 나온 말로, 객지에서 오래 머물게 될 것을 염려해서 바느질을 더욱 꼼꼼하게 했다는 뜻이다. 〈유자음(遊子吟)〉에 “인자하신 어머님의 손에 쥔 실은, 객지로 나갈 아들 옷을 짓는 것. 출발 앞서 꼼꼼히 바느질하니, 행여 더디 돌아올까 염려함이네. 한 치 되는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 봄볕 같은 사랑을 갚기 어렵네.〔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회재집 제6권)
◈죽은 아우 자용을 제사 지내는 글〔祭亡弟子容文〕
가정 32년인 계축년(1553, 명종8) 4월 초하루에 형 급제(及第) 아무개는 멀리서 사자(嗣子) 응인(應仁)을 시켜 제철 음식을 제수로 갖추어 죽은 아우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 자용의 영전에 제사를 올리게 하노라.
아!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내가 자네의 부고를 듣고서 숨이 넘어갈 듯이 슬피 통곡하고 찢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형제간의 정이 애틋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고, 평생에 애통해할 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네.
우리 선친께서 일찍 세상을 버리셨는데, 나와 자네가 모두 어려서 염빈(斂殯)할 때 모두 직접 보지 못하였으므로 염습하고 장사 치를 때 쓰는 물품과 기물(器物) 등에 미진한 점이 많았던 것을 항상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었네.
다행히 선비(先妣)를 40여 년간 시봉(侍奉)하였으나, 안색을 살펴 뜻을 받드는 데는 또 미진한 점이 많았네. 살림살이가 가난하여 맛있는 음식을 자주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봉양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으므로 마음에 항상 개탄스러워하였네. 우리 형제가 모두 자녀가 없었기에, 선비께서 매번 나와 자네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자식이 없느냐.”라고 탄식하시고는 어두운 표정을 짓곤 하셨네. 우리 형제가 비록 선비의 옆에 있어도 선비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으니, 이것이 또 평생의 한 가지 통한이었네.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 분에 넘치는 국은(國恩)을 입어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라고 혼정신성의 봉양을 자주 빠뜨렸는데, 다행히 자네가 선비 곁에서 봉양하며 어김이 없었던 것에 힘입어 내가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네. 그러다가 은총이 과한 데서 재앙이 생겨 정미년(1547, 명종2) 가을 변방 지역으로 쫓겨나 백발의 병든 모친을 멀리 떠나게 되었네. 슬피 울부짖으며 영결하자니 지극히 애통한 심정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자네가 옆에서 극진히 위로하며 봉양하는 것에 힘입어 천리 멀리 이별하는 심사를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었네.
듣건대 자네가 매일 밤마다 향을 피우고 하늘에 빌었다 하니, 형을 사랑하는 자네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을 것일세.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온전히 유지한 것이 아마 그 덕분일 것일세. 그러나 나의 죄가 너무도 큰 탓으로 하늘이 돌아보고 보우하지 않아서 화가 선비(先妣)에게 미쳤으니, 천리 밖에서 부음을 듣고는 오장이 타는 듯해서 땅을 치며 하늘에 울부짖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네.
듣건대 자네가 병이 중한 와중에도 몸을 부지하여 직접 염빈(斂殯)을 하고 장사 치를 때의 물품과 기물(器物)을 후회되는 바가 없이 하였고, 묘소를 조성할 때에도 하늘과 사람이 도와 정성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여묘살이 하는 3년 동안 마음을 다해 전(奠)을 올리는 등,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였다고 하였네. 내가 비록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일을 직접 행하지는 못했지만,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예를 자네가 극진히 하였으니, 내가 비록 있었다고 한들 어찌 더할 바가 있었겠는가.
가까스로 상제(喪制)를 마쳤을 때는 피눈물을 흘리며 상을 치르느라 몸이 극도로 수척해진 끝에 병이 더욱 깊어져서 마른 나뭇가지 같은 형상에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황이었네. 그런데도 나를 잊지 못하여 험한 천리 길을 죽을 각오로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찾아와서 병든 형을 만나 서로 마주 보며 울부짖고 곡을 하며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지. 그러고는 몇 개월을 머무는 동안 간절한 형제간의 정회를 말로 다하기 어려워 마주 앉아 한숨을 쉬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었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서 날씨가 점차 서늘해지자 병이 깊은 몸으로 오래 머물기가 어려웠고,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를 또 견뎌 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부득이 작별하고 돌아가게 되었네. 다시 만날 기약을 하기 어려운 터라 작별에 임해 한없이 참담하고 애통해하니, 천지도 슬퍼하고 귀신도 통곡하였네. 헤어진 후에는 달을 보며 서글퍼하고 구름을 보며 눈물을 훔치면서 단지 꿈에서나 천리 멀리 서로 찾아갈 뿐이었네.
6년간의 애통하고 절박한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주어진 상황을 편히 받아들이고 하늘의 뜻을 즐기고자 나 스스로 노력하였고, 마음을 너그럽게 갖고 병을 조리하기를 매번 자네에게 면려하였네. 자네는 오히려 내가 오래 성은(聖恩)을 입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비통함을 견디지 못하고 밤마다 울며 하늘에 호소하였고, 매번 상소(上疏)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며 죽기를 자처하였네. 내가 화만 부를 뿐 이로울 것이 없다고 만류하였기 때문에 자네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지만, 항상 스스로 한탄스러워하였네.
지난 가을과 겨울에 또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옛사람은 형제가 서로 죽겠다고 다툰 경우까지 있었으니, 제가 목숨을 버릴 각오로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성상을 감격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내가 또 만류하여 하지 못하게 하였네. 자네가 필시 이로 인해 울울함이 쌓인 채 뜻을 이루지 못한 탓으로 병이 점점 깊어져 죽음에 이른 것이니, 자네는 실제로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세. 자네는 어찌 내가 면려한 바를 생각지 않고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나로 하여금 영원토록 다함이 없을 슬픔을 품게 한 것인가.
아! 사람이 누군들 부모를 잃지 않겠으며 형제를 잃지 않겠는가만, 나 같은 경우는 고금에 없을 것일세. 7년 동안 너무도 애통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하늘가 땅끝에 떨어져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자네가 매번 나를 생각하며 밤낮으로 슬피 울부짖다가 끝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일세. 저 하늘처럼 아득한 슬픔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누군들 형제간의 정리가 두텁지 않으랴만, 자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염려하다가 목숨을 잃기에 이른 것은 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바이네. 자네의 효성과 우애가 이러하였으니 의당 귀신과 하늘이 감격하여 우리 형제를 다시 만나게 했어야 할 것인데, 귀신이 돕지 않고 하늘도 막막하여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하늘은 어찌 이렇게도 인자하지 않단 말인가.
선비께서 작고하신 뒤 어느새 6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묘소에 달려가 곡을 하고 묵은 풀에 한 번 눈물을 뿌리지 못했으니, 불효한 죄가 극에 달한 것일세. 내가 이로부터 인간사에 마음을 두지 않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음식을 폐하지 않고 억지로 몸을 부지하며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은 살아 돌아가서 다시 형제자매를 만나 서로 대면하여 한 번 곡을 하고자 함이었네. 그런데 지금 자네가 세상을 떠나 바랄 바가 없게 되었으니, 내가 또 어떻게 이 세상에 오래 살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살아서는 함께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또 함께 빈소에서 곡을 하여 송종(送終)의 예를 다하지 못하였으며, 평생 헤어져 있는 날이 또 많아 베개를 나란히 베고 한이불을 덮고 잔 날이 얼마 되지 않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통한이 하늘에 사무친다네. 지금 자네를 선영 아래에 장사 지내려 하니, 나도 죽어서 자네의 산소 옆에 묻혀 지하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 나의 뜻이라네.
아! 내가 먼 변방에 버려진 지 이제 7년이 되었네. 조상님의 제사 모시는 일을 오직 자네만 믿었는데, 지금 자네가 또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말았네. 그러니 봄가을로 서리와 이슬이 내릴 때면 묵은 풀이 덮인 부모님의 산소를 누가 성묘하며, 사시(四時)와 명절에 가묘(家廟)의 제향을 누가 주관하겠는가. 내가 평생 악을 쌓아 행실이 신명(神明)을 저버렸기 때문에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자네가 지난겨울에 보낸 세 통의 편지는 말이 매우 간절하였고, 소장(疏章)과 상서(上書)의 초고는 또 매우 직설적이고 격렬하였네. 그래서 내가 항상 펼쳐 보며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이제는 어찌 차마 이 편지를 다시 보겠는가.
아! 하늘은 드넓고 땅은 유구하여도 다할 날이 있는데, 나와 자네가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크나큰 슬픔은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수천리나 떨어져서 꿈에서도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자네가 세상을 뜬 지 석 달이 되어서야 부음을 듣고는 멀리 남쪽을 바라보며 애통한 마음으로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네. 오직 바라는 것은 자네와 세세생생(世世生生) 형제가 되어 이생에서 다하지 못한 인연을 다음 생에 또 맺고자 함이라네.
자네는 아는가, 모르는가? 아!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부디 흠향하게나.
[주-D001] 자용(子容) :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李彦适, 1494~1553)의 자로, 호는 농재(聾齋)이다. 형 이언적에게 글을 배웠으며, 1545년(인종1) 학행으로 추천되어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 등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모친 봉양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농재집(聾齋集)》이 있다.[주-D002] 급제(及第) 아무개 : 이 당시 이언적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계에 안치(安置)된 상태였기 때문에 급제로 자칭한 것이다.(회재집 제6권)
회재집 부록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원공(文元公)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명종 20년(1565)에 권간(權奸)들을 축출하고 정사를 크게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많은 노성(老成)한 분과 준걸(俊傑)들을 맞이하여 등용하고, 당시에 죄를 입고 과오를 범한 자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을사년(乙巳年 을사사화(乙巳士禍) ) 이후로 귀양 가거나 쫓겨난 자들이 혹은 서용(敍用)되고 혹은 전직되었으며,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관직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고 의정부 좌찬성 회재(晦齋) 이공은 강직한 도를 행하다가 배척을 입고 별세한 지가 13년이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복관(復官)의 대열에 참여되었다. 세도(世道)는 태평성대를 만나 훌륭한 정치가 날로 새로워져서 수년간에 과거의 나쁜 짓을 깨끗이 씻어 내고 훌륭한 인물을 선발하여 쓰는 것이 진실로 장차 극진하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재앙을 내리어 명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니 신민의 애통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금상 -선조- 께서 즉위하신 초년에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시어 지극한 도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산릉(山陵)의 역사가 끝나자 맨 먼저 큰 은혜를 내려 아직 다 풀려나지 않은 자들을 모두 풀어 주고 관원으로 임용한 다음,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납시어 성학(聖學)을 강론하고 당세의 일을 더욱 자문하였다. 이때에 선비 중에 억울함을 품고 있던 자들로 하여금 모두 머리를 들고 자기의 마음을 토로하여 그동안 숨겨져 있던 사실들을 모두 아뢰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공의 훌륭한 도덕과 문장도 또한 임금께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생의 유서(遺書)를 찾아 수집하라는 명이 내려지고, 얼마 후에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공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또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도록 명하였으니, 아, 공의 도(道)가 이제는 한 세상에 다소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공의 휘는 언적(彦迪)이며, 자는 복고(復古)이고, 자호(自號)는 회재(晦齋)이다. 초명(初名)은 적(迪)인데, 중종께서 언(彦) 자를 가하도록 명하였다. 선계(先系)는 여주(驪州)에서 나왔는데, 그 후 경주(慶州)의 양좌촌(良佐村)으로 옮겼다. 증조의 휘는 숭례(崇禮)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의 휘는 수회(壽會)로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의 휘는 번(蕃)으로 성균 생원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선비는 정경부인 손씨(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9세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차츰 자라자 학문에 힘쓰고 문장을 잘하였다.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다음 해인 갑술년(151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가 얼마 후 정식으로 교서관 부정자가 되었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저작(著作)에 이르렀는데, 할아버지인 참군공(參軍公)이 별세하자 공은 승중(承重)으로서 상을 마쳤다. 그 후 박사로 승진되고 홍문관 박사와 시강원 설서, 성균관 전적과 병조 좌랑, 이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외직(外職)으로 나갈 것을 청하여 인동 현감(仁同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겨우 2년 만에 불려 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병조 정랑과 이조 정랑을 역임하고 문학(文學)으로 옮겨졌다가 장령(掌令)과 보덕(輔德)이 되었다.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24)에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는데, 백성을 대하고 아전들을 다스림에 모두 조리와 법도가 있어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랑하였다. 1년 남짓 있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소환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김안로(金安老)를 끌어들여 동궁(東宮)을 우익(羽翼)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동궁과 친하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제창한 자는 정언 채무택(蔡無擇)이었으며 대사헌 심언광(沈彦光) 등이 이에 부화뇌동하니, 온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 공은 홀로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여 채무택과 의견이 합해지지 못하였다. 이에 채무택은 정언에서 체직되었는데, 바깥 의논들은 공이 딴 의견을 세운다고 비방하여 공도 차례로 체직되고 사예(司藝)가 되었다.
심언광이 공에게 “이군은 어찌 김아무개가 소인임을 아는가?” 하고 묻자, 이공은 “김안로가 동경 부윤(東京府尹 경주 부윤 )이었을 때 그의 처신과 행사를 보니 참으로 소인이었다.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국가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혹자가 “김안로가 비록 조정으로 들어온다 한들 어찌 그에게 큰 권력을 주겠는가. 다만 동궁을 위하여 배려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저 사람들이 만일 들어오면 반드시 국정을 잡을 것이니, 자기 마음대로 용사(用事)한다면 누가 감히 막겠는가. 또 동궁은 한 나라의 신민들이 함께 촉망하는 분인데 어찌 김안로가 있은 뒤에야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심언광은 노하여 가 버리고 마침내 공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파직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 후 7년 만에 김안로가 실패하여 죽자, 상은 공의 충직함을 생각하여 불러 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임명하였다. 그 후 교리(校理)와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의정부 검상에 제수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옮겨졌으며,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고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승진되었다.
무신년(1548, 명종3) 겨울에는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1년 만에 한 지방이 크게 다스려졌다. 공은 비록 늙어서 외직을 청했으나, 국가를 걱정하는 생각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마침 재이(災異)로 인하여 구언(求言)하자 공은 마침내 수천 자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말한 바가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시무(時務)를 조처하는 내용으로서 임금에게 아뢰고 도모한 것이 지극히 충성스럽고 정직하였다. 상은 칭찬과 감탄을 깊이 하시고 명하여 동궁 및 바깥 조정에게 돌려보게 하였으며, 공의 자급을 승진시켰다. 얼마 후 병조참판 겸 세자우부빈객(兵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생각하기를 ‘나의 말씀을 받아 주시니 이것은 다행이지만 마침내 지나친 상이 있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바이다.’ 하시고, 전문(箋文)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후 예조 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자 다시 상소하여 성학(聖學)의 본말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구 아뢰었다.
신축년(1541, 중종36) 가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얼마 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라 의정부우참찬 겸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 판서 및 형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과 우참찬이 되었으며, 안동 부사로 나갈 것을 청했으나 사간원에서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자 인하여 의정부참찬 겸 홍문관제학을 맡았다. 공은 모부인(母夫人)께서 노병이 있어 멀리 곁을 떠날 수 없다 하고 여러 번 돌아가 봉양할 것을 청하니, 상은 위로하고 윤허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오도록 하였다. 공은 더욱 황공하여 외직을 더욱 강력히 청하여 마침내 경상 감사로 나갔다.
갑진년(1544) 8월에는 한성판윤 겸 좌부빈객(漢城判尹兼左副賓客)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불러 우찬성에 임명하였고, 좌찬성 겸 지경연사로 전직되었다. 공은 재차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유지(有旨)를 내려 돈독히 효유하고 인하여 의약품을 하사하였다. 공은 다시 굳게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병이 덜해지자 그제야 조정에 나갈 수 있었다. 공은 양조(兩朝 중종ㆍ인종 )의 융숭한 예우에 감동되어 스스로 길에 올라 서울로 올라갔으니 이는 큰일을 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인종께서 병환이 오래되어 국가의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공은 사석(私席)에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에게 말하기를 “지금 주상께서는 후사(後嗣)가 없고 대군은 나이가 어리니, 어찌 일찍이 건백(建白)하여 대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해서 나라의 근본을 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윤인경은 공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따르지 못하였다.
을사년(1545, 인종1) 7월 인종께서 승하하시자 명종이 순서를 이어 즉위하고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백관 회의에서 윤인경이 “지금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계시니 어느 전(殿)에서 수렴청정을 하여야 하는가?” 하고 물었으나, 좌우의 신하들은 묵묵히 있었다. 이때 공이 말하기를 “옛날 송나라 철종(哲宗) 때에 태황(太皇)과 태후(太后)가 함께 수렴청정하였다. 이러한 옛날 준례가 있으니 굳이 의심하고 물을 것이 없다. 지금에는 다만 수렴하는 의식을 정할 뿐이다.” 하여 의논이 마침내 정해졌다.
8월에 의정부에서 10가지 조항을 써 올렸는데, 첫 번째는 자전(慈殿)께서 성상의 자질을 잘 인도하여 기를 것, 두 번째는 경연관을 널리 뽑아 항상 성상과 더불어 강론하고 자문해서 성학을 성취할 것, 세 번째는 전하가 대행왕(大行王 인종 )에 대하여 자식과 신하의 도리가 있으니 상례(喪禮)에 있어 정성과 효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 네 번째는 궁중을 엄격히 하고 외척을 방비할 것, 다섯 번째는 궁인을 가려 뽑을 것, 여섯 번째는 특지(特旨)를 쓰지 말 것, 일곱 번째는 판부(判付)를 쓰지 말 것, 여덟 번째는 승정원의 직책은 왕명의 출납을 맡고 있으니 내지(內旨)에 합당하지 못함이 있으면 함봉하여 반환하도록 허락할 것, 아홉 번째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 조정 )은 마땅히 일체가 되어야 하니 사문(私門 권문세가 )을 열지 말아서 공평하고 분명한 정치를 할 것, 열 번째는 대행왕은 학문의 효험으로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져 사람들이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승하하시어 금상께서 뒤를 이으셨으므로 국민들은 지금 막 대행왕에게 기대하던 것을 가지고 전하에게 기대하고 있는바 그 실마리가 매우 중요하니 양전(兩殿)께서는 유념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당초에 윤원형(尹元衡)은 윤임(尹任)과 원한 관계가 이미 깊었는데, 임백령(林百齡)과 이기(李芑)는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사림(士林)들을 전복시켜서 자기의 간사한 꾀를 이루려고 하였다. 윤원형은 밀지(密旨)라고 칭탁하고 대간(臺諫)을 유인하여 윤임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간들이 이에 따르지 않자 이기 등은 합문(閤門)에 나아가 아뢸 일이 있다 하여 양전이 즉시 충순당(忠順堂)에 납시자, 재추(宰樞)들을 들어오게 하여 장차 윤임 등에게 죄를 가하려고 하였다. 이때 대비의 노여움이 진동하니 사람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조용히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섬기는 군주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그때에 저들이 대행왕에게 마음을 다한 것을 지금에 어찌 깊이 죄줄 수 있겠습니까. 또 이러한 일은 분명히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선비들이 죄에 걸릴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자들은 두려워 목을 움츠리고 있었으나,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이기 등은 명종이 대통을 계승할 적에 수종(隨從)한 사람들을 공신(功臣)으로 기록하고 위사 공신(衛社功臣)이라 이름 붙였으며, 이날 입시한 재추들을 함께 공신으로 기록하니, 공 역시 이에 참여되었다. 공은 이것을 강력히 사양하며 “어찌 공이 없이 지나치게 상을 받아서 국가의 법을 문란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 공은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선현들의 말씀에 임금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직책에 있으므로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삼가 선현들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 중에서 성상의 덕에 보탬이 되고 오늘날에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발췌하여 조목조목 기록하여 올리오니, 전하께서 진실로 깊이 믿고 힘써 행하신다면 성상의 공업(功業)에 도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였고, 얼마 후 장차 어버이를 문안하기 위하여 가면서 또다시 차자를 올려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히며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고 간신을 멀리 할 것을 바랐으니, 군부(君父)에게 기대한 것이 더욱 깊고 간절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한 자들과는 마치 빙탄(氷炭) 같은 형세라서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돌아간 다음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해서 체직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수개월 후에 이기가 공을 모함하여 아뢰기를 “이언적은 일찍이 세자(世子 인종 )에게 아첨하여 붙고 중종을 배반하였습니다. 써서 올린 10가지 조항은 임금의 손과 발을 묶는 것이며, 유인숙(柳仁淑) 등과 결탁하여 역적들을 구원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이언적은 신에게 은혜가 있으나, 신은 이제 국가를 위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뒤를 이어 공을 논박하자 마침내 공의 공훈과 관작을 삭탈하였다.
정미년(1547, 명종2) 9월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가하자, 공 역시 강계부(江界府)로 안치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선생을 귀양 보낸다는 명을 듣고 서로 울부짖었으나, 공은 태연하여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대부인을 잘 봉양하라. 황천(皇天)이 계시니 나는 오래지 않아 마땅히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다음 해에 대부인이 별세하자, 공은 대부인이 남긴 의복을 가지고 신위(神位)를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어 수척해진 몸으로 삼년상을 다하였다.
공은 곤궁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스스로 편안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짓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그리고 책상에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붙이기를, “나는 매일 내 몸을 세 가지로 반성하노니, 하늘을 섬김에 있어서 미진함이 있었는가? 인군과 어버이를 위하여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었는가? 마음을 가짐에 있어서 바르지 못함이 있었는가?” 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왕명을 가지고 온 관원이 급히 말을 몰아 성으로 들어오자 온 부중(府中)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바르게 앉아 책을 보았으니, 죽고 사는 것을 한결같이 보아 평소의 조행을 바꾸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계축년(1553, 명종8) 11월 을축일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63세였다. 다음 해인 갑인년 봄에 경주(慶州)로 반츤(反櫬)하였고, 11월 갑진일에 흥해군(興海郡) 남쪽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陰山)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사 지냈다.
이보다 앞서 공의 선부군(先府君)께서는 일찍 유학자로 세상에 알려졌고, 본도(本道)의 하과(夏課)에 장원하였다. 성종께서는 그 사부(詞賦)를 가상히 여겨 불러 보시고는 의복과 물건을 하사하고 인하여 국학(國學 성균관 )에 머물러 공부하게 하였다. 그 후 향리로 돌아가 날마다 후생을 가르침으로 일을 삼았으니, 공은 비록 가정에서 직접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 가업(家業)은 진실로 유래가 있었다.
모친인 손 부인은 또 어질고 지식과 사려가 깊었으며, 자식을 사랑한다 하여 가르침과 독려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외숙인 사재(四宰 의정부 우참찬 )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하게 하였고, 또 가난함을 무릅쓰고 멀고 가까운 곳에 가서 공부하게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도(道)에 가까웠고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리하여 세속의 학문 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여 강명하고 실천하여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공부에 힘을 썼다. 27세에 〈오잠(五箴)〉을 지었고 30세에는 또 〈입잠(立箴)〉을 지었는데, 그 말씀은 다 옛 성현들의 간절하고 요긴한 취지였다. 대체로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省察)하며 분함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으며 개과천선하는 데 실제로 종사하였고, 빈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자옥산(紫玉山) 속에 집을 짓고 고요히 지내면서 좌우에는 도서를 쌓아 놓고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이미 전일(專一)하게 오랫동안 공부하니 소견이 더욱더 도(道)에 가까워졌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사랑과 공경이 함께 지극하였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며 음식을 장만하기를 또한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고, 선조를 제사할 때에는 더욱 그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인 언괄(彦适)과 우애하고 사랑하기를 더욱 돈독히 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사람을 대하기를 예로써 하였다. 종족(宗族)을 어루만지고 노복을 어거함에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다. 사람됨이 중후 단정하고 자상하며 높은 지취(志趣)가 있어 묵묵히 하루를 마치니, 사람들은 그 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건의하고 시행한 것이 광명정대하였으며, 언론과 풍지(風旨)는 진실로 권강(勸講)에 대비하고 성덕(聖德)을 돕는 데 보탬이 있었다. 간사한 사람을 배척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함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곧바로 가고 두려움이 없어 비록 옛날의 용감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기개(氣槪)가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스스로 깊이 감추고 숨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저서로는 《봉선잡의(奉先雜儀)》와 《구인록(求仁錄)》, 《진수팔규(晉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혹문(續或問)》이 있고, 또 《중용(中庸)》의 구경연의(九經衍義)를 편수하였으나 미처 책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문집 약간 권이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 박씨(朴氏)로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이신데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종제(從弟)인 경력(經歷) 통(通)의 아들 응인(應仁)으로 양자를 삼았는데 지금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으로 있으며, 서자 하나는 전인(全仁)이요, 딸은 한 사람이다. 전인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준(浚)과 순(淳)이다. 전인은 시서(詩書)를 익히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들을 잘 가르쳐 또한 다 훌륭하다.
공을 장례할 때에는 미처 묘도(墓道)에 비문을 세우지 못했는데 덕업의 빛남은 자연히 가릴 수가 없었으니, 표창하는 예전(禮典)은 실로 간절히 바라는 인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하니 공의 도는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퇴계 이 선생은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은 전함이 없었다. 고려 말엽으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에는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이 도학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았고, 세상에서도 도학을 했다는 명칭을 그분들에게 돌리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를 상고해 볼 때에 대부분 명(明)ㆍ성(誠)의 실제 공부를 다 하지 못하였고 후세에 칭할 때에도 또 연원(淵源)의 증거가 없어서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찾고 따르게 할 수가 없어서 오늘에 이르도록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생으로 말하면 전수받은 곳이 없이도 스스로 도학에 분발하여 속에 간직한 덕이 날로 드러나 덕이 행실에 부합하였고 밝게 글로 써 내어 훌륭한 말을 후세에 전하였으니, 동방(東方)에서 찾아보더라도 거의 그만한 분이 있지 않다.”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도학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잘 말했다고 이를 만하다.
공의 사자(嗣子)인 찰방이 또 신도비문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자, 퇴계 선생께서는 성덕(盛德)을 칭찬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부당하다 하시고 마침내 나에게 명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매우 신중히 여겼고 또한 그 사이에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세히 수정한 뒤에야 확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퇴계 선생이 별세하시자 찰방이 사람을 보내와서 비석이 준비되었다고 말하므로, 마침내 더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행장을 근거하고 아울러 관직을 지낸 차례를 상고하여 대강의 내용을 엮어서 위와 같이 쓰고 명문을 붙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밝은 명을 내리사 / 帝有顯命
사람에게 본성을 부여하셨으니 / 畀人以性
본성의 사덕을 / 性之四德
실제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네 / 實性人秉
기질에 가려 / 蔽氣與質
이 때문에 본성을 잃는 것이니 / 性由以失
배워서 본성을 회복하면 / 學以反之
본성은 하나이네 / 其性則一
아 우리 공께서는 / 嗟惟我公
이 나라에 태어나사 / 生此一方
기운은 넓고 씩씩하며 / 氣寬而莊
덕은 온후하고 강하였네 / 德渾而剛
처음부터 학문을 알아 / 爰初知學
삼가서 닦고 실천하였네 / 愼修懋履
더욱 충양하여 / 亹亹充養
선을 자기 몸에 소유하셨네 / 善有諸己
들어가서는 효도를 다하고 / 入則盡孝
나가서는 충성하여 / 出而移忠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모두 적당하니 / 亦遠亦近
도는 높고 낮음에 다 포함되었네 / 道該汚隆
한때에는 비록 비방을 들었으나 / 一時之詬
만대에는 빛나네 / 萬世之光
선생의 저서를 찾아내어 칭찬하고 추증하였으며 / 搜書褒贈
묘정에 배향하여 양양히 강림하시니 / 配庭洋洋
선왕의 뜻을 / 維先王志
우리 임금님께서 받드신 것이네 / 維我后承
이것을 새겨 무궁한 세상에 보여 주노니 / 刻示無窮
우리 도는 일어나리 / 吾道候興
[주-D001]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 : 조선 명종 때의 정치적 옥사(獄事)로,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불린다. 1547년(명종2)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果川)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겠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빙(李若氷)을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ㆍ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熿)ㆍ유희춘(柳希春)ㆍ백인걸(白仁傑)ㆍ김난상(金鸞祥)ㆍ권응정(權應挺)ㆍ권응창(權應昌)ㆍ이천계(李天啓) 등 30여 명을 유배하였다. 《明宗實錄 2年 9月 18日》[주-D002] 반츤(反櫬) : 외지(外地)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는 것이다.[주-D003] 손중돈(孫仲暾) : 1463~1529. 자는 태발(泰發), 호는 우재(愚齋), 시호는 경절(景節)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고,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원문은 ‘孫仲敦’인데, 《중종실록(中宗實錄)》 및 여러 전적에 근거하여 ‘敦’을 ‘暾’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4]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을 위한 학문으로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칭되는 말이다. 《논어(論語)》〈헌문(憲問)〉에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하였다.[주-D005] 전인은……순(淳)이다 : 원문은 ‘全仁生一子 曰浚曰淳’인데, 한국문집총간 24집에 실린 《회재집(晦齋集)》 부록(附錄) 〈문원공 회재 이 선생 신도비명(文元公晦齋李先生神道碑銘)〉에 근거하여 ‘一’을 ‘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사덕(四德) : 사람의 본성(本性)에 간직되어 있는 네 가지 덕으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가리킨다. 사람은 원래 천도(天道)의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을 받아서 이 네 가지 본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고봉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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