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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장에 던진 폭탄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침체됐던 한국 독립운동에도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상해 프랑스 조계에 13년간 자리를 틀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프랑스 정부가 더 이상 임시정부를 품을 수 없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우선 항주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곳에 정착할 수는 없었다. 1940년 중경에 안착할 때까지 8년 넘게, 임시정부는 수도 없이 이곳 저곳을 전전해야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자 이동 속도는 더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 임정 요인과 직원들 뿐 아니었다. 가족도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1백수십명이 넘는 대부대가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 관계자와 가족은 목선을 타고 동정호(洞庭湖)를 건너기도 하고,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기도 하였다. 밥을 지어먹어야 하니 이것저것 가재도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중국정부가 지원했고 미주 교포들의 원조가 있었던 데다 중국 물가가 싸서, 김구는“난민치고는 고등난민”이라고 했지만, 몹시 어려운 피난살이였다.
임시정부를 항주로 옮긴 뒤 임시정부는 해체 위기까지 맞았다. 해체를 주장한 것은 1932년 11월 통일전선을 내걸고 좌·우파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그 세력이 주도하여 1935년 7월 결성한 민족혁명당이었다. 7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5명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임정을 사임했다.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는 여전히 국무위원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로써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임시정부 고수를 주장한 세력은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개편했다.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김구였다. 윤봉길 의거 뒤에 상해를 탈출하여 가흥에 머물다 남경으로 옮긴 그는 1935년 11월 국무위원으로 복귀했다. 1933년 3월 임시정부를 떠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그가 2년 반 만에 돌아온 것이다.
한국국민당은 이동녕(1869~1940) 김구(1876~1949) 이시영(1869~1953) 조성환(1875~1948) 송병조(1877~ 1942) 조완구(1882~1955) 차이석(1881~1945) 7인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다. 바로 이들이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1939년 10월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의 홍진과 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유동열과 이청천(지정천)을 추가하여 민족주의 계열의 3당 연립내각을 구성하였지만, 이 때는 임시정부의 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였다.
한국국민당 소속 국무위원 7인 가운데 이동녕·김구·차이석·이시영·조성환의 5인은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했다. 20~30대에 만난 이들은 환갑을 전후하는 나이가 되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다. 그동안 서로 노선의 차이를 보인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참여하여 정부와 의정원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좌파 계열과의 제휴에 부정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독립운동세력 가운데에서도 가장 연로하고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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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끈 김구는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 등을 거쳐, 1940년 10월 헌법개정 이후에는 주석으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한인애국단을 주도하여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이끌어내 독립운동의 전기를 마련한 것도 그였다.
일제의 감옥에 있을 때,“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문도 잘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해달라고”(‘백범일지’) 기도했던 그는, 실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문지기를 자청하였다. 임시정부가 옮겨 다니는 동안 그 대단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돌아갔고, 자신은 그보다 일찍 장사에서‘남목청(楠木廳) 사건’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며 광복군의 창설을 도모했다. 자신은 사회주의 계열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지만,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위해서는 주위의 반대도 무릅썼다. 1939년 5월 좌파세력의 대표격인 민족혁명당의 김원봉과 함께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公開信)’을 발표했던 것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해 7월 좌·우파 7개 정당은 통일회의를 열었으나 실패하였고, 1940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41~42년에는 좌파를 임시정부에 참여시켜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 임시정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김구인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재덕(才德)이 출중한데도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앞에 내세우고 자기는 남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고치도록 이끌었던”(‘백범일지’) 지도자가 바로 이동녕이었다. 초기부터 임시정부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비롯하여 국무총리·국무위원회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동 시기에도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김구의 후견인이었다. 김구는 이동녕이 돌아간 뒤 일이 생길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어른으로 존경 받던 그는 1940년 3월 기강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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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임시정부 해체가 제기됐을 때, 차이석과 송병조는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특히 비서장으로 가난한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던 차이석은 안타깝게도 해방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9월, 환국 준비에 바쁘던 중경에서 작고했다. 목사인 송병조는 1920년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있었는데, 중경에서도 같은 직을 수행하다가 1942년 2월 별세했다. 이 두 사람은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된 뒤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이끌기도 했다.
조성환은 한말 무관학교 출신으로 주로 군사 분야의 책임을 맡았다. 임시정부가 1939년 서안에 파견한 군사특파단의 책임도 그의 몫이었다. 명문 출신 6형제가 국권 피탈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예로 이야기되는 이시영은 임시정부의 재정 조달에 애를 썼다.
조완구는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구황실 우대를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깐깐한 성품으로 청렴했다.
조완구와 차이석의 의복은 무명으로 된 중국식 두루마기 두 벌뿐이었다고 한다.
이동녕·송병조·차이석은 살아 광복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환국한 뒤 김구는 이동녕과 차이석의 유해를 국내로 옮겨 효창원에 모셔 임시정부를 지켜낸 공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