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용 일기
인천부읍지 명환(名宦)조에 있는 홍원용 일기
인천학연구소에서 인천부읍지 번역문을 pdf다운로드 했지만 도저히 그래그가 안 되어 다시 옮겨적었다.
인천의 역사와 문물에 대하여 문답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인천부읍지 명환조에 있는 홍원용 일기 번역문
홍원용의 기(記)에서 이렿게 말했다.
"객(客)이 나에게 묻기를 당신은 전에 인천에서 원(院)을 역임한적이 있으니 인천의 사적에 대하여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인주(仁州)가 군(郡)이 된 것은 아주 오래다. 그러나 역사가 오래되어 문적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또 물어볼 만한 노인도 없으니 어떻게 상세히 말해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요(堯)의 노래를 들으면 요의 덕(德)이 성대함을 알고 시경의 대아와 소아를 오래하면 주(周)나라 왕실의 흥성함을 생각하게 되는 법이라지.
더구나 내가 이읍을 다스린 것이 또한 6년이나 되는데 토성의 대략 우역의 설치, 물산의종류, 관호의 변천, 향리의 수, 경내지역의 범위, 도로와 면리의 배치, 민호의 규모, 전야의 현황 등에 대하여 당신에게 대강을 말해주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객(客)이 주요한 토성(土姓)으로 누가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내가 이르기를 문씨, 이씨, 채씨, 하씨, 공씨 등이 대대로 문벌을 이루어 가문의 명성이 자자하네.
문씨의 손녀는 시중 심덕보에게 시집을 가서 성녀(聖女)를 낳으니 곧 소헌왕후이네. 이씨의 자손으로 찬성 문화(文和)의 딸은 판중추 윤번(尹番)에게 시집갔는데 중추(윤번)가 왕실 사위를 얻으니 곧 수양대군이네.
찬성공도 이미 장원하였는데 중추의 아들 성균사예 사균(士均)이 또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네.
또 소경 이문명의 여식은 중국에 뽑혀 들어가 태종 문황제의 빈(嬪)이 되었네.
채씨의 자손 중 병조판서 정연의 여식은 곧 안평대군의 부인이였네.
하씨의 자손으로 길지와 막지는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 이름을 날렸네.라고 하였다.
객(客)이 물산의 종류는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내가 답하여 이르기를 군(郡)은 바다와 멀지 않은 관계로 바다에서 나는 산물이 많네.곧 송어, 조기, 홍어, 농어, 병어, 오징어, 넙치, 전어, 상어, 준치, 갈치, 가물치, 소어, 설ㄷ래어, 망어, 미거이, 장어, 수청어들이 모두 바다에서 나는 것들이네.
조개 종류는 대합, 모시조개, 오합 등이 있고 새우는 큰새우, 중새우, 쌀새우 등이 있어 각기 3가지 종류가 있네. 나머지는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하네.
군(郡)의 남쪽으로 해안이 굽어있어 거기에 어량을 설치한 것이 셋이네.
거기서 잡은 것은 궁중에 진상하는데 쓰네라고 하였다.
객(客)이 이르기를 관호가 올라간 것은 어느 때인지 그 오르고 내려간 것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여 이르기를 군(郡)은 처음에 미추국(彌鄒國)이였네.
삼국시대에 이르러 소성현으로 강등(降等)되었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는 들은바가 없네.
고려 예종 때에 토성 이자겸의 딸이 예종비로 들어와서 인종을 낳았으므로 관호를 높여 인주(仁州)라 하였네.
부노(父老)들 사이 말로는 고려 순종과 숙종 때에 군(郡)의 객사가 대청보다 뒤에 있었는데 어실(임금이머무는곳)을 지었다고 하네.
고려 말에 정창대군이 즉위하자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 받들어 경원부로 승격시키고 호장원(遠)에게 붉은띠를 내려 그 뜻을 기렸네.
임신년 조선 개국 후에는 다시 강등(降等)되어 지군으로 되었고 이에 내린띠를 거두었네. 갑오년에 이르러 주(州)를 고쳐 천(川)으로 하니 이로 인해서 지군사가 되었다고 하네.
객(客)이 말하였다.
역참이 설치된 것이나 아전의 수는 어느 정도인가?
내가 답하였다.
군(郡)동쪽 10리에는 경신역이 있고 33리에는 중림역이 있어 관명을 전하고 있네.
아전의 규모는 현재 50명이 일을하고 있네.
객(客)이 말하였다.
전답현황과 호구 규모는 어떠한가?
내가 답하였다.
전답은 대체로 2600결 정도이고 민호는 대게 3500호쯤 되네.
客이 말하였다.
인천이 포괄하고 있는 경내 땅 가운데 어느곳이 갈라지고 어느곳이 합해졌는가?
내가 답하였다.
옛날에는 7개 부곡이 속해 있었네.
당성현, 장항현, 금천현, 양간현, 양간처, 재양, 분황, 이포 등이 그것이네.
그후 唐城縣은 南陽府라 하였고 장항은 안산군 금천이라 칭하였는데 그전 관호로 인하여 감무를 두어왔네.
다시 지난 갑인년에는 분황과 재양을 덜어서 남양부에 속하게 하였네.
그리하여 홀로 이포만이 부곡으로 남게되어 지금도 본군에 속하고 있지만, 120리나 떨어져 있어서 동서로 남양경계에 걸쳐있네.
객(客)이 말하였다.
사방도로와 면리의 배치는 어떠한가?
내가 답하였다.
객사에서 양화나루까지 75리를 가야하고 노량진까지 90리를 가야하네.
동쪽으로 금천, 안산과는 60리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부평과 30리 떨어져있고 남쪽으로는 바다와 7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제물포 군영과 70리 떨어져 있는데 제물포 군영에 만호를 두었네.
본군(本郡)의 선군(船群)은 100호(戶)인데 각호마다 봉족이 세워져 있네.
방어영의 수군은 60호로 역시 봉족이있고 좌우 각영에 나누어 예속시켜 방수(防守)를 세게하고 있네.
제물포에서 자연도는 10리, 용유도는 30리, 무의도는 2리 떨어져 있네.
이 세 섬들에는 모두 목장을 설치하여 나라에서 쓰는 말을 기르는데 상당히 번식하였네.
자연도와 용유도에는 민호 70호 가량이 거주하는데 소금굽는 동이를 설치하고 소금을 구어 팔아 이익을 남기는데 관아에서는 그 소금을 공물로 가져간다네.
또한 3개 섬에서는 사자발쑥이 많이나서 역시 공물로 바치고 있다네.
객(客)이 말하였다.
과거 이읍을 지키던 사람 중에 누가 현명하였고 누가 그렇지 못하였는지? 부임한 기간 등은 또한 파악할 수 있는가?
내가 답하였다.
정축년 이전까지는 연대가 멀고 문헌도 미미하여 파악하질 못하였네.
그뒤로 교대할 때의 관원, 부임한 기간, 자급의 정도를 대략 서(序)뒤에 기록하여 두었으니 영구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네.
수령들이 잘하고 못하고 탐학하고 청렴하고 한것에 대해서는 본군 30년 동안의 정사에 관한 전적이 남이있으므로 내가 어찌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겠는가?
장차 예부터 지금까지 재직하였던 수령들의 이름을 지목하여 아무개는 청렴하였고 아무개는 탐욕하였고 아무개는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아무개는 백성을 괴롭혔다고 말하고져 해도, 나 자신을 어떤사람 이라고 지목해야 할지 모르는데, 어찌 그 사이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겠는가?
아~! 은나라 예(禮)에 대해서 공자(孔子) 조차 오히려 그 남아 있는 증거가 없음에 근심하였는데 하물며 이렇게 탄환처럼 작은 소읍으로 본시 증거할만한 문헌도 없는 곳에 대하여 어떻게 밝혀서 말하겠는가?
객(客)이 말하였다.
그래 그래.
그대의 말이 바로 옳다.
이에 쓰는 것을 마치고 기록으로 삼는다.
명나라 경봉 원년 경오 9월
보공장군 용기시위사 대호군 지사간원사 남양(南陽) 홍원용(洪元用)이 기록한다.
카폐지기 홍왕식 첨언 ; 규장각에 있던 원문에 인천연구소의 인천부읍지 번역문을 카폐지기가 2019 기해년 6월에 옮겨적었다.
남양(南陽) 홍원용(洪元用) 할아버지는 바로 본 카페지기의 직계 20대조(代祖) 할아버지시고 우리 남양(당성)홍씨(南陽(唐城)洪氏) 인주도령중랑장파(麟州都領中郞將派)의 14세(世) 대종손(大宗孫)이시며, 인천 이문화공(公)의 외손서(外孫婿)시며 정정공(貞靜公) 윤번의 맏서랑(壻郞)이신즉 바로 정희왕후(王后)의 큰형부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맏동서(同壻)시다.
윗글에서 날짜가 경봉 원년이라 했으나 명나라 연호에 경태는 있을지언정 경봉은 없으니 명나라 경태 원년으로 고치고 환산한 즉, 명나라 경태 원년 경오년, 9월. 조선 세종 32년 경오이고 서기는 1450년 9월이며 윗글에서 객(客)이라고 하시는 상대방은 모름지기 세조 임금이 되기 직전의 수양대군일 것입니다.
출처 : 남양홍씨중랑장파 네이버카페 홍왕식http://m.blog.daum.net/dhkdtlr1015/13077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