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 잠시 뜻을 얻었노라 /
까불대는 이 시운이 / 나의 등을 내밀어서 / 너를 떠나 가게 하니 /
일로부터 여러 해를 / 너를 보지 못할지나 / 그 동안에 나는 오직 /
너를 위해 일할지니 / 나 간다고 설워마라 / 나의 사랑 한반도야
- 안창호 선생이 조국을 떠나며 부른 이별의 노래 ‘거국가’ 中
마치 연인을 떠나가듯 애틋한 이 노래는, 안창호 선생이 우리나라가 1910년 국권을 상실하기 전인 같은 해 4월, 망명길에 오르며 당시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때 당시 선생은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는데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이후 일제의 무단 정치의 강도가 높아지자, 이를 피해 망명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내일 3월 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순국 79주기로, 서울의 도산공원의 선생의 묘소에서 추모식이 진행됩니다.
▲도산공원 내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안창호 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의 묘소
안창호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얼마 전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서 안창호 선생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서 고군분투한 안창호 선생의 생애에 감동을 받았고 또 뜻하지 않은 곳, 바로 미국 땅 LA에서 발견된 안창호 선생의 흔적을 보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선생의 이름이 걸려 있는 우체국과 공원, 심지어 고속도로도 선생의 이름을 따 명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 안창호 선생을 기리는 장소가 더 많을까요?
그것은 안창호 선생이 해외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선생은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되는데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선생은, 그 곳에서 제대로 된 공동체 없이 살고 있는 한인들을 발견하고 친목회를 결성하여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타국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한인들의 희망이 되어 갔습니다. 이처럼 안창호 선생은 우리 민족이 불편함 없이 해외에서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또한, 입국해서는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를 통해서 일제의 눈을 피해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인 흥사단을 창립하기도 했는데요. 흥사단은 오늘날까지 조직을 이어가고 있는 역사 깊은 단체입니다.
▲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수확 중인 도산 안창호 선생
이처럼 많은 조직을 창립, 운영하며 안창호 선생은 독립운동에 있어 물적, 인적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과 여성들도 독립 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요. 선생은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 안창호 선생이 참여한 1915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
안창호 선생의 생활신조이자 행동원칙은 ‘약속을 꼭 지켜라’라는 것이었는데요.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소년들을 좋아하던 선생은 상해에 있을 때 여러모로 소년단과 왕래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이 선생에게 5월 행사에 쓸 돈이 필요하여 선생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는데요. 그 때 당시 돈을 가지고 있지 않던 안창호 선생은 후에 돈을 갖다 주겠다고 그 소년에게 약속을 합니다. 그 이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발생하였고, 그로 인해 일본은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를 실시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정보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창호 선생은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년의 집에 갔다가 일제의 잠복경찰에게 붙잡혀 한국으로 압송되었고 약 3년 반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안창호 선생의 인품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성한 도산의 수형자 기록카드
그 후 대전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냐고 묻는 일제 경찰 앞에서 안창호 선생은,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했다. 내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의 독립에 대한 염원은 이토록 간절한 것이었고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던 기개였습니다.
내일 3월 10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순국 79주기를 맞아 서울의 도산공원에서 추모식이 열리는데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늘 솔선수범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려 했던 선생의 일생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러한 안창호 선생의 조국을 위했던 마음은 늘 간직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