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광복 후 귀국해 일본 고등계 형사
사이가 쓰보이를 저격하는 등 일제 잔당을 청산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유일한 발전소인
전북 정읍 칠보발전소 탈환과 지리산을 장악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지난 1951년 당시 18전투대대 대대장이었던 차일혁은 전투대원 75명의 수적 열세를 딛고 국가기간시설인
발전소를 점령하기 위해 대치하던 2500여명의 빨치산을 응징하며 칠보발전소를 사수했다.
1953년 총경으로 승진한 그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돼 그해 9월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연상을 사살하며 사실상 토벌작전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이현상을 사살한
후 인간적인 연민으로 시신을 거둬 화장한 뒤 골분을 섬진강에 뿌리고 장례를 치러 주기도 했다.
그는 ‘이현상 토벌’이라는 혁혁한 전공(戰功)에도 불구하고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총경직에서
승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공적을 인정한 조계종 초대 종정인 효봉스님은 1958년 5월 감사장을 수여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는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날 공덕비 제막식에는 차일혁 경무관의 아들인 화엄사 명예신도회장 차길진 법사와 김장실 국회의원,
전석종 전남지방경찰청장, 서기동 구례군수와 스님과 불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화엄사 주지 영관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고인의 지혜로운 결단으로 화엄사와 천은사 등 고찰들은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면서 “오늘 세워진 공덕비를 통해 차일혁 경무관의 민족문화유산 수호에 대한
숭고한 뜻을 기리고 후손들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만대에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첫댓글 초등학교, 북중학교 동문인 차길환 동문을 사회에서 만난 것은
내가 KBS 기자로 전북도청을 담당했던 때였다.
음으로 양으로 차길환 동문을 돕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도청을 그만둔다고 말했다.
누구와 동업을 하기로 했다는 것,
나는 펄쩍 뛰었다. 이유없이 동업은
안된다고 극진히 말렸고, 내가 사직서를
찾아 오겠다고 했으나 그 고집을 꺾지 못 했다.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삼천동 집을 찾아 왔다.
얼굴은 초췌해졌고, 무언가 부끄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존심이 상할 까보아 조심스럽게 방문
목적을 알아 본 결과 책 한 질을 사달라는
것이었다.
자존심 상하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샀다.
그 뒤 차길환 동문은 초등학교 서클에서 자주 만났는데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목발로 만나야 했다.
그 뒤 희한하게도 목발에 의지하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정기적인 모임에 나왔다.
그 뒤 나는 KBS 연수원으로 자리를 옮겨
미국. 일본으로 연수를 떠나 초등학교
서클과는 인연이 끊어졌고, 귀국후에도
차길환 동문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답답해서 차길진 형님의 단체로 차길환 동문의
안부를 물었더니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알려왔다.
이 자리를 빌어 삼가 고 차길환 동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