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을 맨몸으로 맞선 열부 남양홍씨 부인
- 기자명봉화일보인터넷신문
- 입력 2022.01.02 19:37
- 수정 2022.01.2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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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면 양곡리 쌍현마을 홍씨와 몸종 정심의 묘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봉화문화연구회 홍씨(1655.10.12-1685.5)는 본관이 남양홍씨(唐洪)로 한상윤의 소설 “홍문안집이야기”에서 주인공 홍은제洪恩濟로 나오는 인물로서 유학자 홍이원洪爾遠, 창령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5대조 홍길민洪吉旼은 조선개국공신으로 명나라 황제를 찾아가 조선국왕의 국새를 받아온 인물이라 한다. 대대로 서울과 경기지방에서 살다가 부친 대에서 낙향하여 명호면 양곡리 쌍현에서 살았으며, 열녀 홍씨의 산소도 그곳에 있다. 이때 홍씨는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이미 효성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영특하고 조행이 훌륭한 여자의 기풍이 넘쳐흘렀다. 임자(1672)년에 충북진천의 이명인李命寅에게 출가하였는데, 남편이 본래 병약하여 처가에서 요양 중 병이 낫지를 않아서 결국 수레에 실려서 본가로 돌아갔다. 진천이 멀어 나흘의 일정이라 홍씨는 근심과 걱정으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아직 출발도 하기 전에 남편의 부음이 먼저 도착하였다. 홍씨는 죽고 싶은 마음에다 첫 인사도 못 드린 시부모를 빨리 뵈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아 진천으로 가면서도 길에서 죽고 싶기도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남편의 관이라도 한번 끌어안아 봐야 하겠는지라 죽음을 참고 도착하여서는 여러 차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을 시도하였다. 어느 날에는 집안사람들이 들으니 그 목소리가 이상한지라 급히 달려가 목줄을 풀고 약을 먹여서 살려내었다. 이로부터 치밀하게 감시하여 다시는 그런 짓을 할 틈이 없었다. 시아버지 세중世重도 몸소 죽 그릇을 들고서 울면서 알아듣도록 타이르기를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이와 같이 죽을 입에다 떠서 넣어드렸던 일이 있다.” 고 하였다. 홍씨가 그 성품이 이미 효성스러운지라 시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죽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슬프고 비통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남편의 제사를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였으며, 또 사사로이 시아버지를 봉양하기를 맛있는 음식과 고운 옷으로 받들어서 모시었다. 그 행동거지가 바르고 결백하여 세상 사람들 보다 높이 뛰어났는데, 시아버지가 이를 고마워하면서 감동된 표정을 지으며, 이웃들이 이를 칭송하기를 입에서 떼지를 않았다. 탈상을 하고나서 7년 동안이나 고기를 먹지 않다가 병이 나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시아버지가 억지로 권유하여 먹였다. 시집 집안이 비록 부유하기는 하였으나 명망을 떨치지는 못했었다. 그러다가 홍씨가 들어와서 매우 검소하고 기품 있게 생활하면서 초라한 모습에서 대가의 모습으로 갖추어 나갔다. 시아버지가 이를 중하게 여겨 그에게 가산을 맡아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시아버지가 두 번이나 장가를 들었다가 상처를 하고 첩을 얻어서 살림을 도맡아 하도록 했는데, 첩이 하루아침에 홍씨에게 빼앗기고 보니 속으로 마음이 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처에서 얻은 시동생 이명기李命基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일찌감치 자신의 소생을 홍씨의 후사로 들여서 부를 얻을 생각을 하고 자주 그러한 뜻을 내비추었는데, 홍씨가 급하지 않다며 미루자 명기부부가 형수가 다른 뜻이 있는 거라고 의심하기시작하면서 첩과 더불어 크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본래 홍씨가 병이 잦았는데, 몸소 집안 살림을 살다보니 더욱 낫지 않고 오래 끌었다. 그때 시동생이 “내가 밖에 나가서 알아보니 금년의 운세가 나쁘니 집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홍씨가 듣고서 그러는게 좋겠다고 여겨 그의 말대로 외부로 나가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이들이 꾸민 모략에 넘어가게 되었다. 마침 귀양을 가 있던 시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이때 시동생이 “ 형수가 은밀히 남몰래 간음하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며 고하였으나 시아버지 세중이 거짓말일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도 첩은 오히려 더욱 이를 밤낮으로 부추기는지라 시아버지도 끝내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681년(신유년. 숙종8년)왜병이 쳐들어온다고 헛소문이 퍼지자 홍씨 친정에서 진천이 병사들의 통로가 될 것이 두려워 친정에 문안토록 하여 여종은 집을 지키도록 하고 근친을 떠났다. 이 틈을 타서 시아버지 세중이 여종인 정심貞心에게 “너의 주인의 간음한 사실에 대하여 바른대로 고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며 무수히 매질을 하였으나 자백을 받지 못 하였다. 이에 시아버지 세중이 진천관아를 찾아가 고하였으나 자신은 그날로 갇히고 관아에서 영남에다 통문을 띄워 홍씨를 체포하여 압송하였다. 이때 종형 만제萬濟가 동행하였다. 진천에서 잘 잘못을 가리는 것이 믿을 수 없다고 시아버지 세중의 건의로 청주관아로 옮겨서 받게 되었는데, 홍씨는 일만자一萬字가 넘는 진술서를 써서 냈다. “구부舅婦(시아버지와 며느리)사이의 송사는 인륜의 극악한 변고로써 만약 그분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면 사지를 찢기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달게 받겠지마는 그러나 이 일은 간사한 무리들이 시아버지를 속여서 그렇게 된 것으로 그 말들이 참으로 망극하여 이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지금 죽더라도 저승에 가서 불결한 귀신이 되는 것만은 면하고 싶습니다.” 마침내 심문이 시작되어 동헌 아래에다 병풍을 치고 관비와 세중의 여종을 시켜 홍씨의 젖가슴과 배를 살피게 하였더니 관비와 세중의 여종의 말이 틀리는지라 이 말을 전해들은 홍씨가 추관推官(형벌을 관장하는 관원)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어째서 저를 조사한 사람들의 말이 틀립니까? 여자가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나 지금은 그렇지 못 하니 몸소 한번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하면서 스스로 몸을 내어보였다. 이에 관원이 이 일은 중대한 사건인지라 샅샅이 살펴본 결과 태흔胎痕이라곤 없는 처자의 몸이었다. 신문하던 관원이 이를 윗사람에게 보고하고 즉시 정심과 함께 석방하였다. 홍씨가 구금되어 갇힌 지 여러 달이 되었으니 옷매와 머리를 손질하지 못해서 이가 개미떼처럼 들끓었다. 집에 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양친과 신문관에게 글을 올렸다. “불효한 딸이 재앙이 닥쳐서 부모님께는 근심만 끼쳐드리고 멀리 떨어진 땅에서 떠나게 되었으니 죄스럽고, 남편의 위패를 의탁할 곳이 없어 통한이 됩니다.” 하고 신문관에게는 “시아버지께서 남들로부터 기만을 당한 것 일뿐 실제로 자신의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저승에 가서도 시아버지를 뵙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감히 청하건대 이러한 마음을 가련하게 여기어서 우리 시아버지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여 주소서” 했다. 그날 밤 홍씨는 자결을 하고 이를 발견한 여종이 종형 만제에게 알리고 만제가 신문관에게 알렸다. 만제가 운구하는데, 연도의 양반 사대부들도 “열녀 홍씨의 장례”라며 장정들을 동원하여주었으나 친정집에서 사양하고 노복들로 운구하게 하여 명호면 양곡리 쌍현마을 앞산에 장사지냈으며, 주인을 따라 자결한 몸종 정심이도 그 옆에다 안장을 했다.(안내: 홍길민 20세손 춘양면 의양리 홍순벽) 봉화일보인터넷신문 rkd920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