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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코사크 합창단이 부르는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 돈 코사크 합창단과 <스텐카 라진>에 대하여는
맨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 돈 강
[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의 탄생지를 찾아 ]
<고요한 돈 강>의 작가 숄로호프의 고향인 뵤쉔스카야로 가기 위해 이 마을이 속한 러시아 연방 로스토프 주의 주도(州都)인 로스토프에 내립니다. 로스토프는 돈 강 강변의 도시입니다.
로스토프의 인투리스트 호텔의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의 벽에 시멘트로 새긴 대형 부조가 눈에 띕니다. 말 앞에 코사크병 차림의 젊은이와 물통을 땅에 놓은 여인이 나란히 선 상입니다.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의 남녀 주인공 그리고리와 악시냐입니다.
* 로스토프
이것은 <고요한 돈 강>의 첫머리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제1부 제3장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러 나온 그리고리와 물을 길러 온 악시냐가 처음 대면합니다. 이 극적 해후 장면은 앞으로 뵤쉔스카야까지 여행하는 동안 무슨 음악의 주제처럼 되풀이 되풀이 만나게 됩니다.
돈 강을 긴 다리로 건너면 좌안의 수영장에 인파가 빽빽합니다. 여기서 상류 쪽으로 조금 올라간 수풀 사이의 강언덕에 말을 탄 그리고리와 물지게를 진 악시냐의의 상면 신이 대형 동상으로 영원히 멈춰 서 있습니다. 돈 강의 상징물입니다.
* 말을 탄 그리고리와 물지게를 진 악시냐
뵤쉔스카야까지는 로스토프에서 350km의 거리요, 철도도 없는 오지이지만 하루 한 번 왕복의 비행기편이 있습니다. 비행기는 야크 40형 36인승입니다. 대평원 위를 납니다. 돈 강이 한동안 따라오다가 꼬부라져 달아나 버립니다.
* 뵤쉔스카야 마을
꼭 1시간 만에 뵤쉔스카야에 닿습니다. 하늘에서 본 뵤쉔스카야 마을은 돈 강을 옆에 끼고 평평한 들판 가운데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습니다. 활주로는 초원 속에 외가닥입니다. 공항 청사라야 시골 역사(驛舍)같습니다.
좁은 대합실에 숄로호프의 커다란 사진과 함께 <고요한 돈 강>의 장면 삽화들이 걸려 있습니다. 뵤쉔스카야는 인구 1만 명 정도의 촌읍인데 비행장이 있는 것부터가 숄로호프 때문이요, <고요한 돈 강>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항에서 마을까지는 3km밖에 안 됩니다. 뵤쉔스카야 거리는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입니다. 높은 건물도 없고 차도 드뭅니다. 이따끔 코사크 모자를 쓴 노인들이 눈에 뜁니다. 주민은 거의가 코사크 후손들입니다. 코사크 노래의 합창, 기마에 능하던 코사크들의 경마경기 풍습이 아직 이어져 옵니다.
숄로호프의 문학세계, 특히 <고요한 돈 강>을 이해하자면 먼저 코사크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 19세기 말 러시아 대화가(大畵家) 일리야 레핀이 그린 <터키의 술탄에게 답장을 보내는 코사크들>
코사크는 본래 15세기 후반부터 지주들의 압제에서 도망쳐 나온 농민들의 집단입니다. 코사크란 말은 '자유인'이란 뜻의 터키어에서 유래합니다.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코사크들은 주로 돈 강과 그 지류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17세기 말에는 코사크촌이 120군데나 되었습니다.
생업은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면서 흑해나 카스피해까지 나가 약탈 행위도 일삼았습니다. 돈 강 유역은 말의 명산지라 코사크의 생활은 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이들을 국경 경비에 이용하기 위해 무기와 곡물을 지원했습니다.
터키, 폴란드와의 전쟁 때는 이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러시아 내부에서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황제(짜르)에 의해 반혁명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혁명과 내전을 거치는 동안 코사크들의 입장은 참으로 특이했습니다.
돈 강 상류의 가난한 지역과 하류의 잘 사는 지역, 같은 부락에서도 부농과 빈농끼리의 계급적 대립이 심해 코사크 동지끼리, 친척끼리 적군과 백군으로 갈려 피를 피로 씻는 처참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 시기의 코사크의 운명을 그린 것이 <고요한 돈 강>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 후 뵤쉔스카야를 중심으로 한 돈 강 지역에서 반소비에트 폭동이 일어났고, 이 폭동이 진압되자 코사크란 명칭이 폐지되면서 500년에 걸친 코사크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현재 돈 강 유역 주민의 80%가 코사크 후손입니다.
마을의 중심 광장가에 솔로호프 문학박물관이 있습니다. 하얀 2층 건물입니다. 1913년에 세워진 후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중학교였고, 마지막 해에 솔로호프가 바로 이 학교에 다녔습니다.
* 멀리 숄로호프의 문학박물관과 광장에 성당이 보입니다
<고요한 돈 강>에 이 건물이 등장합니다. 번갈아 가며 적군과 백군의 본부가 됩니다. 실제로 혁명과 내전기를 통해 이 건물은 적군과 백군의 본부로 쓰였고, 양군 사이에 주인이 일곱 번이나 엇바뀌었습니다. 아픈 역사의 증인입니다.
뵤쉔스카야의 문학박물관 앞은 광장이 넓습니다. 옛날 코사크들이 모여 집회를 하던 시장 광장이요, 지금도 마을의 중심 광장이 되어 있습니다. 광장의 한쪽 가에는 녹색 돔의 성당 건물이 높다랗습니다. 이 광장이 <고요한 돈 강>에 나옵니다.
뵤쉔스카야는 거리가 바로 <고요한 돈 강>의 페이지요, 길이 소설의 행(行)인 마을입니다. 지금 작품의 책장 위를 걷고 있습니다. 성당 뒤쪽을 돌아나가면 돈 강입니다. 돈 강 앞에 섭니다.
마을은 높은 언덕 위고 강류는 저 아래쪽입니다. 강줄기가 한눈에 조망됩니다. 강폭이 꽤 넓습니다. 그래서 유유히 그리고 고요히 흐릅니다. 강가의 선착장에는 기름을 실어 나르는 큰 배가 한 척 기대어 있습니다. 하류 쪽에서 지류가 한 가닥 합류합니다. 건너편 강기슭은 강물을 감싸듯 숲으로 덮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라보는 돈 강의 묘사가 <고요한 강>의 제2부 제10장에 나옵니다.
* 돈 강
<고요한 돈 강>에서 주인공 그리고리가 사는 돈 강변의 코사크 촌 타타르스키 촌은 강 건너 숲에 가려진 바즈코프스카야 마을의 가명입니다. 이 마을에 그리고리의 모델이 살았습니다.
그리고리의 모델은 두 사람입니다. 솔로호프가 플레샤코프스키 마을에 살 때의 셋집 주인이던 드로즈도프 집안에는 파벨과 알렉세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이 형제가 <고요한 돈 강>에서 멜레호프네의 페트로와 그리고리 형제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평시의 그리고리의 모습이고, 군대에서 복무하는 그리고리의 모습은 바즈코프스카야 마을에 살던 하를람피 예르마코프라는 인물을 복사한 것입니다. 예르마코프는 1차 대전 때 졸병에서 군관이 된 비상한 사람이었습니다. 혁명 후 내전 때 적군과 백군 사이를 왔다갔다하다가 1927년 백군 봉기에 참가한 후 총살당했습니다.
<고요한 돈 강>은 제1부 제1장의 맨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멜레호프네 집은 마을의 맨 끝에 있다....엷은 녹색으로 이끼 낀 백악의 바위 사이로 급한 비탈을 15미터쯤 내려가면 바로 강변이 나온다. 동쪽으로는 타작마당을 둘러싼 버드나무 울타리 바깥으로 게트만스키 가도가 뻗어 있고 갈림길 옆에는 작은 예배당이 있다.....”
이 서두의 묘사가 바로 바즈코프스카야 마을입니다. 게트만스키 가도는 당시 돈 강 유역의 코사크촌을 우크라이나와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간선도로였습니다. 바즈코프스카야 마을 남쪽에는 이 게트만스키 가도와의 교차점에 지금도 작은 예배당이 남아 있습니다.
* 돈 강 지도(아래 쪽에 로스토프와 돈 강이 보입니다)
<고요한 돈 강>은 돈 강이 주인공이나 다름없습니다. 숄로호프 문학의 정신으로 흐르는 돈 강은 모스크바 남쪽 중앙러시아의 구릉에서 발원하여 러시아 공화국의 여러 주를 지나 아조프 해에 유입되는 전장 1,870km의 장류입니다.
중류 이하는 흐름이 완만하여 ‘치히이 돈(고요한 돈 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웁니다. 8,9세기경 알란족이 코카서스 쪽에서 북상하다가 이 강을 보고 “돈,돈(물,물)”하고 외쳤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뵤쉔스카야는 돈 강의 중간쯤입니다. 여기서의 강폭이 180m 내지 210m 가량 되고 수심은 11m까지 내려갑니다. 강에서는 잉어, 붕어, 메기 등이 낚입니다. 강변의 나무들은 참나무, 백양나무, 오리나무, 버드나무 등입니다.
* 뵤쉔스카야에 있는 숄로호프 동상
뵤쉔스카야의 집들이 뜸한 숄로호프 거리에 숄로호프가 <고요한 돈 강>을 쓰기 시작하여 제1권(제1,2,3부)을 탈고한 집이 남아 있습니다. 자그마한 초가입니다.
숄로호프 거리의 <고요한 돈 강>을 기필한 집에서 한 집 건너가 이 작품의 제2권(제4,5부)과 제3권(제6부), 그리고 <개간된 처녀지>의 제1권을 써낸 집입니다. 이 집이 1987년부터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청색 나무에 하얀 덧문들이 달린 2층짜리 건물은 아담합니다. 전형적인 코사크의 주택이라는데, 낮은 아래층이 물건 두는 곳간이고 위층의 살림방은 뜰에서 바로 올라갑니다. 2평쯤 되어 보이는 마룻바닥의 좁다란 방이 <고요한 돈 강>을 쓴 서재입니다.
* 숄로호프의 서재
숄로호프의 생가를 찾아 크루질린스키 부락으로 갑니다. 얼마 안 가 오른쪽으로 저만큼 높은 바위 언덕이 보이고 그 마루에 커다란 매가 한 마리 날개를 펴고 앉아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없는 초지의 고대(高臺)입니다. 벨라야 언덕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매는 숄로호프를 기념한 조각상입니다.
언덕 위에 서니 숄로호프의 영토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의 작품의 무대들이 시야에 깔렸습니다. 땅은 그야말로 무대처럼 평평하고 그 복판을 한 줄기 돈 강이 금을 그으며 흐르고 있습니다. 강 건너편이 숄로호프가 살단 뵤쉔스카야요, 이쪽이 <고요한 돈 강>의 그리고리가 살던 타타르스키(실제명 바즈코프스카야) 마을입니다.
* 젊은 시절 숄로호프 가족사진
이 언덕은 혁명 후 뵤쉔스카야에서 백군 봉기가 일어났을 때 적군 부대가 진을 쳤던 자리입니다. <고요한 돈 강>에서는 그리고리가 백군 봉기부대를 향해 저 멀리 보이는 초원을 지나가는데 적군이 이 언덕의 포대에서 발포를 합니다.
크루질린스키의 숄로호프의 생가는 마을에서 나가 앉은 집입니다.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갈대 지붕에 하얀 회칠을 한 토벽의 건물은 코사크식 농가로 역시 반지하층이 달려 있습니다. 잔디밭 뜰이 제법 넓습니다.
* 생가
약 20평 넓이의 자그만 집에는 숄로호프가 태어난 침대, 그가 자라던 요람, 소 털로 만든 장난감, 4세 때 어머니와 찍은 사진 등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 숄로호프가 태어난 방
숄로호프의 무덤은 그가 마지막 살던 집 정원 가운데의 백화나무 그늘에 있습니다. 바위 모양의 묘석에 이름만 새겨있습니다.
* 숄로호프의 무덤
[ 미하일 숄로호프와 <고요한 돈 강> ]
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는 소비에트 문학 시대의 가장 큰 작가로 손꼽힙니다.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소연방 최고회의 대의원까지 지내며 공산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사회주의 사상성이 일관된 작품들을 썼습니다.
14년 만에 완성한 대하 소설 <고요한 돈 강>은 돈 지방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코사크부대를 이끄는 그리고리의 전전(轉戰)과 정열적인 유뷰녀 악시냐와의 사랑을 줄기로 혁명과 내란의 격동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 돈 코사크 합창단 ]
돈코사크 합창단은 1921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당시 러시아를 탈출한 코사크인들이 조직한 남성 합창단입니다. 세르게 야로프가 창단하여 60여 년 동안 이끌었습니다. 러시아 내전에서 적색 혁명군에게 패배한 백색 군대의 중위였던 야로프는 콘스탄티노플 부근의 터키 수용소에서 40여 명의 합창단을 조직했습니다.
교회 등에서 합창 공연을 하다가 불가리아에서 정식으로 합창단을 창단하여 1923년 오스트리아 빈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1만 회 이상을 공연하였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하다가 1936년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습니다.
1930~1950년대에 전 세계를 순회 공연했습니다. 러시아 민요와 종교 음악 등을 남성 특유의 테너 고음과 깊고 낮은 베이스 저음이 어우러진 넓은 음역으로 힘차게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979년 해체되었다가 1991년 창립단원이었던 반야 훌브리카와 게오르그 팀첸코가 재창단하였고 창립 멤버의 2~3세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합창단의 단원은 지휘자인 훌브리카를 포함해 15명입니다
[ 스텐카 라진 이야기 ]
16세기 돈강 하류의 비옥한 땅엔 코사크(Cossack)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로운 독립 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으나 17세기 중엽, 세력을 확대하던 러시아의 황제(짜르)가 이곳으로 쳐들어왔지요. 그리하여 힘없는 코사크의 나라는 러시아 짜르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이후 1670년, 코사크 족중에 의적 로빈 후드같은 사나이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이라는 인물이 짜르에 저항하는 농민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스텐카 라진은 젊어서 전쟁에 나가 싸운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농노와 도시 빈민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나서 1차 반란을 일으켜 볼가 강의 무역선단이나 황실의 배를 습격하고 상인들의 상품을 탈취했으며 죄수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까지 원정하여 여러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또 노예시장을 파괴하여 수천명의 노예를 풀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후 2차 반란에서 그는 귀족과 지주 및 상인들에 대항하는 원정을 벌여 봉기의 열기를 러시아 전국으로 퍼뜨렸습니다. 7천명의 코사크 사나이들은 차리친, 사마라, 아스트라한, 사라토프 등을 차례로 손에 넣습니다. 혁명군이 심비르스크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짜르의 군대를 만나 패하면서 스텐카 라진은 간신히 돈강 가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스텐카 라진은 짜르에게 충성하는 배반자들에 의해 체포되고 짜르의 군대에 끌려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비록 농민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스텐카 라진의 위업은 민요로, 그림으로, 춤으로 만들어져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옵니다. 러시아 민중들의 전설이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