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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연경[燕京]과 조선[朝鮮]의 탐라[耽羅]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으로 발길을 옮기며 제[第] 7[七]
이 시대[時代]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들은, 경제적[經濟的]인 번영[繁榮]은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의 역사[歷史]와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자주권[自主權]을 돌아본다면, 그 부끄러운 자화상[自畵像]에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동서[東西]로 일만리[一萬里]를 치달리던 선대[先代]들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과, 도도히 흐르던 장엄[莊嚴]한 역사[歷史]의 맥[脈]은 사라지고, 치욕적[恥辱的]인 식민[植民]의, 거짓과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반[反] 역사적[歷史的]이며, 반[反] 민족적[民族的]인 허구[虛構]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우리의 역사[歷史]로 둔갑[遁甲]을 하여, 국민의 정신[精神]과 혼[魂]과, 자라나는 후세[後世]들의 기상[氣像]을 여지없이 무너트리고 있다.
기록[記錄]으로 전[傳]하는 오천년[五千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속에서, 반세기[半世紀]를 넘도록 선대[先代]의 역사[歷史]와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을 우롱[愚弄]하는 지금의 이 부끄러운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
진실[眞實]의 역사[歷史]위에 사실[事實]이 아닌 거짓의 역사[歷史]를 세우는 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선대[先代]에 대한 역사[歷史]이며, 우리 조상[祖上]님들의 역사[歷史]이며, 우리의 조국[祖國]과 우리 민족[民族]에 대한 역사[歷史]이며, 현재와 미래[未來]의 후손[後孫]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나라의 국본[國本]이 되는 역사[歷史]이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의 운명[運命]과 직결되고, 나라의 근본[根本]되는 소중하고 중요[重要]한 역사[歷史]에 대하여, 왜곡[歪曲]과 변조[變造]와 조작[造作]으로 역사[歷史]의 진실[歷史]를 가리는 그러한 행위[行爲]는, 장구[長久]한 세월의 역사[歷史] 속에서, 찰나[刹那]의 순간이 될 뿐이라는 것을, 지나온 역사[歷史]는 우리에게 수 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 시키려고 만들어 놓은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주구[走狗]노릇을 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 논자[論者]들은, 지나온 역사[歷史]를 거울로 삼아, 역사[歷史]속에서 깊이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 이유[理由]와 대의[大義]는, 천하[天下]에 분명[分明]하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선대[先代]들이 남긴 역사[歷史]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동국[東國]의 역사[歷史]라고 한다. 그것은 천산[天山]과 요동[遼東]과 오늘날의 알타이산맥인 백두산[白頭山]을 기준으로 하여, 그 동[東]쪽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이기 때문이다.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들도, 조선[朝鮮]의 변경[邊境] 지역[地域]은, 이곳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歷史]의 금자탑[金字塔]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는, 극히 일부분만이, 들어나고 있을 뿐이다.
소위 중국[中國]이라고 불리는 역대[歷代]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실체[實體]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疑問]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주장[主張]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問題]는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본 모습을 파악[把握]하고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실체[實體]가 드러나게 되면 스스로 풀리게 될 것이다.
중국사[中國史]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대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은 무엇이었으며, 이에 대한 역사[歷史]의 사실[事實]은 무엇이었을까 ?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본원[本源]은 무엇이며, 그 들의 영역[領域]은 어디였으며, 그 나라들의 종족[種族]은 어디에 근본[根本]을 두고 있었을까 ?
들어나고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만을 보더라도, 고구려[高句麗]의 강역[疆域]이 한[漢]나라의 강역[疆域]과 겹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歷史]에 포함되어 있는 숙신[肅愼]의 고대[古代] 유적[遺跡]들은, 알타이산맥에서부터 시작하여 서[西]쪽으로 흑해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고, 서남[西南]으로는 터키와 이란, 파키스탄, 인도, 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地域]에 걸쳐서 분포[分布]되어 있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 역력[歷歷]히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길과,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과 겹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강역[疆域]과도 많은 부분이 겹치고 있다.
이 지역[地域]들은 대륙사[大陸史]의 강역[疆域]이라고 하는데, 소위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역대[歷代] 나라들의 정체[正體]는 무엇이었을까 ?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에서 가장 크게 영토[領土]를 넓힌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비문[碑文]에 실려 있는 원정[遠征]의 길은, 아직도 우리 역사[歷史]의 비사[秘史]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 수 천편의 기록[記錄]들을 따라가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비밀[秘密]에 가려졌던 원정[遠征]의 길은, 일부가 환하게 들어나고 있다.
호태왕[好太王]이 비려[碑麗]를 원정[遠征]하고 돌아왔던 길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러시아의 일부 지역[地域]과 흑해에 이르는 지역[地域] 이었다는 사실[史實]이다. 이는 원사[元史]나 청사[淸史]에서도 증명[證明]이 되고 있다.
천리[千里]의 요동[遼東] 지역[地域]을 들어서서, 서[西]쪽으로 가면서, 이 지역[地域]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사행[使行] 기록[記錄]에서 설명하는 대로, 장례[葬禮] 풍습[風習], 묘제[墓制], 가옥의 구조, 혼인[婚姻]의 풍습[風習], 등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행[行]하고 있으며, 옛 성곽[城郭]의 유지[遺址]들이 그대로 보존[保存]되어 있어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사실[事實]임을 증명[證明] 하고 있다.
유주[幽州]에 포함되어 있는 주[周]나라 이래의 연경[燕京]의 지역[地域]에는, 그 곳이 연경[燕京]임을 상징하는 칸[汗]의 동상과, 제비를 함께 만들어 세워 놓고 있으며, 연경[燕京]의 옛 성곽[城郭] 유지[遺址]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연경[燕京]의 옛 영화[榮華]를 그려보게 하고 있다. 또한, 엣 산해관[山海關] 자리에는, 산해관[山海關]을 상징[象徵]하는, 조형물[造形物]을 세워 놓고 있으며,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자락이라고 연행록[燕行錄]서 말하는, 그 장성[長城]의 일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연경[燕京]은 오늘날의 알타이산맥의 서남[西南] 지역[地域]에 있었다. 그러므로 압록강[鴨綠江]의 통군정[統軍亭]은, 요동[遼東]과 연경[燕京]인 북경[北京]을 내리 누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경[燕京]은 오늘날의 자이산호의 서[西]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조선[朝鮮]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서, 청[淸]나라가 재화[財貨]를 영고탑[寧古塔]으로 실어다가 쌓아두고 있는데, 만약에 청[淸]나라가 영고탑[寧古塔]으로 쫓겨 가는 일이 생기다면,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에 있는 백두산[白頭山] 북[北]쪽의 길을 빌려 달라고 할 것이라는 말은, 연경[燕京]과 건주위[建州衛]와 백두산[白頭山]의 위치[位置]를, 명화[明確]히 지적하고 있는 기록[記錄]들이다.
고구려[高句麗]의 본래 평양[平壤]은, 요동[遼東]과 경계[境界]를 하고 있었다.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요동[遼東]의 난민[難民]들은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백성[百姓]들이며, 평양[平壤]에서 이를 받아들여 구휼[救恤]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는 것은, 평양[平壤]과 요동[遼東]은 같은 지역[地域]에 있었으며, 그러므로 조선사[朝鮮史]에서 평양[平壤]도 연[燕]의 지역[地域]에 포함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平壤]을 백아강[白牙岡]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사실[事實]의 기록[記錄]이다. 평양[平壤]에 있는 묘향산[妙香山]은, 산[山]의 허리부터 봉우리에 이르기까지 흰 암석[巖石]으로 되어 있으며, 사백리[四百里]에 걸쳐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맞는 기록[記錄]들이다.
이 산[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천산[天山]의 줄기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뻗어 들어가는 중국[中國]과 카자흐탄의 접경[接境] 지역[地域]인, 이리 카자흐자치주의 남[南]쪽 지역[地域]이며, 이식쿨 호수[湖水]의 동[東]쪽 지역[地域]이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를 포함하여,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설명하고 있는 지역[地域]들을 따라가면서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역사서[歷史書]들은,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거짓이 수 없이 혼용[混用] 되어 있음을 새삼 깊이 느끼게 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 남방[南方]의 바다 속에 있었다는 제주도[濟州道],......... 신라[新羅]가 황룡사[皇龍寺]의 구층[九層] 탑[塔]을 세우며 평정할 원[願]을 세우는 아홉 나라중의 탐라국[耽羅國],......... 조선사[朝鮮史]의 최남단의 바다 속에 있다는 탐라[耽羅]인 제주도[濟州道]는, 어느 지역[地域]에 있었을까 ?
현재 남아서 전[傳]하고 있는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따라가며, 이러한 기록[記錄]들이 설명하고 있는 지역[地域]에는, 과연 탐라[耽羅]에 대한 설명대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부합[符合]되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제주[濟州] 사람 김만일[金萬鎰]이 1만[一萬] 필[匹]이나 되는 많은 말을 기르면서 한라산[漢拏山] 일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기언[記言]
사방[四方]
탐라지[耽羅誌]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 있는 작은 나라인데, 너비가 400리이고, 해로[海路]로 970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본래 구이[九夷]의 일종이다. 상고[上古]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그곳 사람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세 시조[始祖]가 터를 닦은 곳을 상도[上都], 중도[中都], 하도[下都]라고 한다. [중략]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와 고청[高淸]이 처음으로 신라[新羅]와 교통[交通]하였는데, 이때 객성[客星]이 신라[新羅]에 나타나니 신라왕[新羅王]이 고후[高厚]를 성주[星主]라고 부르고 고청[高淸]을 왕자[王子]라고 불렀는데, 왕자[王子]는 총애하는 자에게 붙이는 명칭[名稱]이다. 당초 두 고씨[高氏]가 바다를 건너와 탐진[耽津]에 정박하였기 때문에 국호[國號]를 탐라[耽羅]로 하도록 명하였다. 후세[後世]에 백제[百濟]에 항복하여 탐탁라[耽乇羅]가 되고 은솔[恩率]의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 뒤에 좌평[佐平]이 되었다. [중략]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에 원[元]나라가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소, 말, 낙타, 노새, 양을 방목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20년에 총관부[摠管府]가 혁파되어 다시 고려[고려]에 소속되었다. [중략]
고려[高麗]는 제주목[濟州牧]을 설치하였는데, 6년 뒤에 원[元]이 다시 군민만호[軍民萬戶]를 설치하여 내구마[內廐馬]를 방목하다가 곧이어 폐기하였고,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원[元]이 다시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으나 원[元]이 망하자 다시 고려[高麗]에 소속되었다. [중략]
주[州]와 현[縣]이 모두 산기슭과 바닷가에 있어 토지가 모두 모래와 자갈인데 주[州]의 치소[治所] 옆에 있는 광양[廣壤]만이 붉은 진흙이다. [중략]
그곳에서 재배되는 곡물[穀物]은 기장, 피, 콩, 보리이고, 생산되는 물화는 빈주[璸珠], 대모[玳瑁], 나패[螺貝]이고, 잡히는 어물은 전복, 상어, 웅어인데 태생[胎生]이고 알로 낳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과일은 귤[橘], 유자[柚子], 등자[橙子], 감자[柑子], 치자[梔子], 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난다. [중략]
탁라[乇羅], 화탈[火脫], 여서[餘鼠] 사이는 바닷물이 시퍼렇고 심한 바람과 높은 파도가 잦다. 매해 봄과 여름에 남[南]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면 높은 돛대에 큰 돛을 단 배가 무수히 지나간다. 이곳은 흑치국[黑齒國] 오랑캐가 중국[中國]과 교통하는 길목이고 또한 바다 건너 여러 만이[蠻夷]의 물화[物貨]가 교통하는 곳이다. 서남[西南]쪽으로는 백해[白海]가 바라보이는데 최부[崔溥]가 표류[漂流]하여 동풍[東風]을 타고 7일 만에 백해[白海]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너머는 대유구[大琉球]가 있다. [중략]
난중잡록[亂中雜錄]
복수[復讎] 의병장[義兵將] 전 현령[縣令] 고종후[高從厚]가 한 것은 다음과 같다.[復讎義兵將前縣令高從厚云云]
제주[濟州], 정의[旌義], 대정[大靜] 3고을, 고성[高姓], 양성[梁姓], 문성[文姓] 3가 문호의 모든 어른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太古] 때에 인물이 생기기 전인 시초[始初]에 하늘이 세 신[神]을 한라산[漢挐山] 밑에 내려 보내시건대 고씨[高氏], 양씨[梁氏], 부씨[夫氏]요, [중략]
감히 사노[寺奴]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수의 싸움을 하려 하나 본도[本島]에는 공사[公私]간에 파멸되어 군기[軍器]와 전마[戰馬]를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 3고을에는 물력[物力]이 홀로 완전합니다. [중략]
농암집[農巖集]
서석산[瑞石山]은 호남[湖南]의 여러 산 가운데 특별히 높고 큰데, 그 위에 오르면 한라산[漢拏山]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가친[家親]이 낭주[朗州]에 귀양 가신 뒤로 해마다 찾아가 안부[安否]를 살폈는데, 그때마다 그 산 밑의 길을 지나가면서 드높은 모습을 보고 웅장[雄壯]하다고 생각해 왔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탁라[乇羅]라는 나라는 먼 바다 가운데 위치[位置]하여 장기[瘴氣]가 심하고 토질도 척박[瘠薄]하므로 흉년[凶年]이 잦은 곳이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자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겨 더욱 부지런히 보살피는 뜻에서 곡식을 실어다가 먹이기까지 하니 불평하는 백성[百姓]이 없고, 모두 다 감격한 나머지 은총[恩寵]에 감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조[國朝]의 제도로 보아 그곳 공물[貢物]로는 감귤[柑橘]과 말[馬]뿐이어서 해마다 중동[仲冬]이면 공사[貢使]가 서울에 오게 되는데, 금년에는 때가 되어도 공사[貢使]가 오지 않고 [중략]
높고도 아득한 한라산[漢拏山]이 縹緲拏山
깊은 바다에 꽂혀 있음이여 挿重溟兮
남극[南極]이 지표에 나타나 南極出地
수성을 볼 수 있음이여 見壽星兮 [중략]
동계집[桐溪集]
그렇습니다. 영주[瀛洲]의 전역은 바닷속에 있는 궁벽한 섬이지만 이곳 대정현[大靜縣]은 바닷가가 더욱 가깝고 지형[地形]이 낮아서 장독[瘴毒] 기운이 세 읍[邑] 중에서 가장 심합니다. 봄여름의 교차 시기부터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려서 갠 날이 없고 사나운 바람이 무시로 불며 장무[瘴霧]가 잔뜩 끼면 지척에서도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동문선[東文選]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
정이오[鄭以吾]
至高乙那十五世孫。高厚與其弟高淸。將朝見新羅。有客星先現 [중략]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인 고후[高厚]에 이르러 그의 아우인 고청[高淸]과 장차 신라[新羅]에 조회하려 하는데, 객성(客星)이 먼저 나타났다. [중략]
及前朝太祖統三之初。星主高自堅。王子梁且美。卽良乙那之後。改以梁聲相近也。世一朝見。太祖待以優渥。晝日三接。飮食供帳。殆擬王者。自率從至於櫂夫。賚予稠疊。 [중략]
전 왕조[王朝]의 태조[太祖]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직후에 성주[星主]는 고자견[高自堅]이요, 왕자[王子]는 양차미[梁且美]였으니 곧 양을나[良乙那]의 후손[後孫]인데, 양[梁]으로 고친 것은 음[音]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 세대에 한 번씩 조회하기로 하였는데, 태조[太祖]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여 낮에 세 번씩 접견하며 음식과 접대하는 범절이 거의 임금과 비슷하게 하였고, 데리고 온 사람과 사공에 이르기까지 물품을 중첩[重疊]으로 내렸다. [중략]
比及至元八年辛未夏。神義軍三別抄。叛入耽羅。二十年癸酉夏四月。國家濟師。討之盡殲。以高適爲留揔管。特令安集餘民。[중략]
지원[至元] 8년인 신미년[辛未年] 여름에 이르러 신의군[神義軍]과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탐라[耽羅]에 들어와서, 20년인 계유년[癸酉年] 여름 4월에 나라에서 군대를 물을 건너보내어 그들을 토벌하여 모조리 없애버리는데, 고적[高適]으로 유총관[留摠管]을 삼아 특히 남은 백성[百姓]을 위안하여 모아들이게 하였다. [중략]
是年秋。上臨軒策士。得宗對策。中乙科十三人。明年。襲星主。累轉爲司憲監察,刑曹都官佐郞,禮曹佐郞。[중략]
이해 가을에 임금께서 대궐에 나앉으시어 친히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득종[得宗]이 대책[對策]을 지어 을과(乙科)에 제13번째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성주[星主]의 작을 세습받고, 여러 번 옮기어 사헌[司憲] 감찰[監察], 형조 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중략]
戊戌秋七月。奉使歸故鄕。士林榮之。得宗謂以吾曰。吾宗肇基毛興之穴。自新羅式至于今。世襲星主。服事王家。赤心無已。而俛仰陳迹。非托之文字。懼其湮沒。無以示來裔。然世次譜牒不全。姑以大槩爲請。[중략]
무술년[戊戌年] 가을 7월에 사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가니 인사들이 모두 그를 영광[榮光]스럽게 생각하였다.
득종[得宗]이 이오[以吾]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이 모흥혈[毛興穴]에서 기초를 세운 이후로 신라[新羅]로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성주[星主)의 작위를 세습하였고, 국가[國家]를 섬기어 충성심이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잠깐 동안에 옛 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記錄]으로 남기지 아니하면 그것이 모두 없어져서 장래의 후손[後孫]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세대의 차서라든가 족보[族譜]의 기록[記錄]이 완전하지 못하여 우선 대략을 적어서 부탁한다. 하였다. [중략]
동사강목[東史綱目]
갑인년[甲寅年] 공민왕[恭愍王] 23년[二十三年]
왕[王]이 대답할 길이 없어 드디어 제주[濟州]를 토벌하기로 의논하고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전함 3백 14척과 날랜 군졸 2만 5천 6백여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최영[崔瑩]은 도병마사[都兵馬使] 염흥방[廉興邦], 양광도[楊廣道] 원수 이희필[李希泌], 변안열[邊安烈], 전라도[全羅道] 원수 목인길[睦仁吉], 임견미[林堅味], 경상도[慶尙道] 원수 지연[池奫], 나세[羅世], 삼도조전원수[三道助戰元帥] 김유(金庾)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군대가 나주[羅州]에 이르자, 최영[崔瑩]은 영산[榮山] 폐현[廢縣]으로, 지금의 나주부[羅州府] 남[南]쪽 10리에 있다. 에서 열병[閱兵]을 하고, [중략]
안[安],........ 원[元]나라 때 유진[留鎭]과 목마[牧馬]의 일로 원[元]나라 사람들이 제주[濟州]에 와서 거주한 자가 매우 많았고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원[元]에서 죄인 40명을 이곳에 유배[流配]하였다. 그래서 제주[濟州]에는 원[元]나라 사람의 자손[子孫]이 많다. [중략]
지금 조[趙], 가[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씨들의 호적[戶籍]이 원[元]으로 본관[本貫]을 삼는 것이 이것이다. 명[明] 초기에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제주[濟州]로 이주시켰는데 지금의 원[元], 양[梁], 안[安], 강[姜], 대[對]씨들의 호적[戶籍]이 운남[雲南]을 본관[本貫]으로 삼은 것이 이것이다. [중략]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원[元] 세조[世祖]가 탐라[耽羅]를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의 요충으로 삼고 또한 마음을 많이 쏟았다. 이에 그 땅에다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세우고 군사 1천 7백 명을 파견하여 둔진[屯鎭]케 하였다. [중략]
목은집[牧隱集]
자안내의하평운남표[子安來議賀平雲南表]
한라[漢拏]의 산빛이 아스라이 푸르스름한데 漢拏山色望蒼然
그 아래로 만리 길 금릉[金陵]으로 배 떠나네 下有金陵萬里船
물길은 희부옇게 끝도 없이 펼쳐지고 水道微茫不知畔
돛단배는 경주하듯 경쾌하게 내닫누나 風帆飄忽似爭先
힘으로 육조를 개통시킨 운남[雲南] 지역이요 力通六詔雲南地
위엄이 삼한[三韓]을 진동시킨 해외의 바다로세 威振三韓海外天 [중략]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
마가귀[馬價貴]
수십 년 전에는 관[官]에서 기르는 말이 9천 필 남짓했는데, 지금 와서는 3천 7백 필이나 더 늘어났다고 하니, 이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이다.
그러나 나라 안의 말 값은 자꾸 뛰어올라서 옛날에 비교하면 거의 갑절도 더 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제주도[濟州道] 안에 있는 세 고을만 해도 개인 사사로 기르는 말이 얼마든지 많다.
자본이 넉넉한 백성[百姓]은 혹 수백 필까지 길러서 온 국내[國內]에 매매시키게 되고 관[官]에서 기른 말은 다만 중국[中國]에 공물[貢物]로 바칠 뿐이다. 하지만 한라산[漢羅山]이 아주 높고 험해서 말이 한 해 동안에 백여 필씩 떨어져 죽게 된다. [중략]
성호전집[星湖全集]
서삼석설후[書三石說後]
남[南]쪽으로 한라산[漢拏山]에 오르니, 북[北]으로는 마한[馬韓]과 백제[百濟]의 옛 터전이요, 동[東]으로는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오르는 것이 보이고, 서[西]쪽으로는 중국[中國]의 강소(江蘇)ㆍ절강(浙江)과 통한다. 그 남[南]쪽은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 붕새가 날아다니고 고래가 헤엄치며 다닌다. 이때 마침 두 팔 겨드랑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발밑에 물결이 치면 홀연히 배를 타고 멀리 떠나고픈 마음이 생긴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군명[郡名], 무진[武珍], 무주[武州], 광주[光州], 해양[海陽], 익주[翼州], 화평[化平], 무진[茂珍], 익양[翼陽]. 서석[瑞石]
형승[形勝],..... 전라도[全羅道]의 거읍[巨邑]이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있다. 모든 봉우리는 중첩하고 온 골짜기는 구불구불 하도다.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있다. [중략]
남국[南國]의 웅장한 번진[藩鎭]이다. 이집[李集]의 시[詩]에, 광주[光州]는 남[南]쪽 지방의 가장 큰 번진[藩鎭]이라 하였다. [중략]
한 도[道]의 요충지[要衝地]이다.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있다. [중략]
산천[山川],....... 무등산[無等山] 현[縣]의 동[東]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며,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雄壯]하게 50여 리에 걸쳐 있다.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 경상도[慶尙道]의 남해[南海], 거제도[巨濟島] 등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山] 서[西]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척[百尺]이나 된다. 산[山] 이름 서석[瑞石]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 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
건치연혁[乾置沿革],........ 본래 제주[濟州] 동도[東道]인데 본조[本朝] 태종[太宗] 16년에 제주[濟州] 안무사[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서 한라산[[漢拏山] 남[南]쪽 넓이 90여 리의 땅을 쪼개어 동[東]쪽은 정의[旌義]를 삼고 서[西]쪽은 대정[大靜]을 삼아 모두 현감[縣監]을 두었다. [중략]
배추[裵樞]의 기문[記文]에,......... 전라[全羅] 한 도[道]의 토지[土地]의 넓은 것과 인물의 많은 것이 제주[濟州]가 그 반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곧 예전 탐라국[耽羅國]이다. 한라산[漢拏山]이 가운데에 웅거하여 제주[濟州]는 산[山] 북[北]쪽에 있다. 산[山]의 동[東]쪽 서[西]쪽이 모두 90리 거리이고 산[山]의 남[南]쪽은 또 더 멀어서 백성[百姓]이 왕래하려면 반드시 이틀 밤을 자야 하고 관청[官廳]에서 공문[公文]을 보내면 며칠 후에야 이른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
하담[河澹]의 기문[記文]에,......... 통첩[通牒]하기를, 성곽[城郭]은 단단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한두 부로[父老]와 더불어 이 언덕을 두루 순시하여 흙을 헤아리고 땅을 정하니, 장정[壯丁]들이 자식처럼 와서 공사[工事]에 참가하여 한 달도 못 되어 성곽[城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를 당하여 경영이 정밀[精密]하지 못한 것이 한[恨]이다. 하였다. [중략]
고려[高麗] 말기[末期]에, 다스리고 어거하는 것이 방향이 없었고 거둬들이는 것이 한이 없었으며, 또 우리 민족[民族]이 아닌 종족[種族]이 섞여서 갑인[甲寅]의 변란[變亂]을 불러, 무기는 바다를 덮고 시체는 땅을 뒤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 바야흐로 이제 밝으신 성상[聖上]께서 위에 있어 교화[敎化]을 행[行]하고 풍속[風俗]이 바뀌어져, 집집마다 순박한 풍도[風度]를 회복[回復]하고 사람마다 충효[忠孝]의 뜻을 품었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샘물 맛이 좋고 땅이 비옥[肥沃]한 곳에 나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정하여, 양을나[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夫乙那] 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여, 비로소 오곡[五穀]을 파종하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마다 부유[富裕]하고 번성해졌다.
형승[形勝],....... 북[北]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南]쪽으로 높은 산[山]을 대하였다.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에, 집집마다 귤[橘]과 유자[柚子]요. 곳곳마다 준마[駿馬]로다. 하였다. [중략]
정이오[鄭以吾]의 서[序]에,...... 본토에서 탐라[耽羅]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속국[附屬國]과 같다. 하였다. [중략]
귤[橘],........ 금귤[金橘],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왜귤[倭橘], 청귤[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는데, 청귤[靑橘]은 열매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 [중략]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역대전고[歷代典故]
충렬왕[忠烈王] 3년에 목마장[牧馬場]을 만들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제주[濟州]에 목장을 설치하고 10만 필의 몽고[蒙古] 말을 풀어놓아 번식하게 하고, 다루하치[達魯花赤]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 토지[土地]를 곧 고려[高麗]에 주고 해마다 공물[貢物]을 바치게 하였다. 동문광고[同文廣考] [중략]
일찍이 원[元] 나라 순제[順帝]가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 보존[保存]하고자 하여 공장[工匠]을 섬 안에 보내 크게 궁실[宮室]을 짓도록 하였다가, 계획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명[明] 나라 군사에게 몰려 북[北]쪽 개평[開平]으로 달아났다. [중략]
공민왕[恭愍王]이 영전[影殿]을 짓는 역사에 원[元] 나라 공장[工匠] 원세[元世] 등 11명을 제주도[濟州道]에서 부르니, 개성[開城]에 이르자, 원세元世] 가 재상에게 말하기를, 원[元] 나라 황제[皇帝]가 토목 공사를 일으키기 좋아하다가 민심[民心]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천하[天下]를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에 우리들로 하여금 제주도[濟州道]에다 궁궐[宮闕]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섬에 들어와 보전[保全]하기도 전에 나라는 망[亡]하고 몸은 도망쳐 우리들을 이 모양으로 의식[衣食]을 잃게 했습니다. 원[元] 나라는 넓은 천하[天下]를 가지고도 백성[百姓]을 수고롭게 하다가 패망[敗亡]하였습니다. 고려[高麗]가 비록 크지만 인민[人民]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제공[諸公]은 임금에게 아뢰소서. 하였다. 동문광고[同文廣考] [중략]
남사고[南師古]가 말하기를, 백두산맥[白頭山脈]이 동[東]쪽의 대해[大海]로 들어가 일본이 되고, 남[南]쪽의 대해[大海]로 들어가 탐라[耽羅]가 되었다. 하였다. [중략]
한라산[漢拏山] 마루에 오르면 하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데, 곧 유구[琉球]의 지경[地境]이다. 서남[西南]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이 가깝고, 북[北]쪽으로는 강진[康津, 해남[海南]과 접하여 세상[世上]에서 수로[水路]가 9백 리라고 일컫지만 실은 4백여리[四百餘里]라 한다. [중략]
홍재전서[弘齋全書]
운곡도박일제제주해신문[運穀到泊日祭濟州海神文]
한 점의 작은 섬을 一點小島
이름하여 영주[瀛洲]라고 부르니 號曰瀛洲
그곳에선 귤[橘]과 유자가 우거지고 厥包橘柚
공물[貢物]은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준마일세 厥貢驊騮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머리를 조아리고 守臣稽首
백성[百姓]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 고생함을 아뢰자 奏庶艱食
내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予不遑息
그 자리에서 곡식을 배에 싣도록 명했네 立命船粟
절미에 허리를 길게 펴겠고 長腰浙米
연맥에 기름이 흐르듯 하네 流脂燕麥
중류[中流]에서 배의 봉창을 들어 보니 中流擧篷
한라산[漢拏山]이 지척[咫尺]에 보이네 挐岑咫尺
고대일록[孤臺日錄]
계사[癸巳]
추칠월[秋七月]
二十一日癸酉余來家見天兵三人云是雲南人也路遠十萬里離家 八箇月云云 [중략]
7월 21일 계유[癸酉],...... 나는 집으로 오는 길에 명[明]나라 군사 3명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운남[雲南] 사람들로서 여기서 거리가 10만 리나 떨어져 있으며, 집을 떠난 지가 8개월 되었다고 한다. [중략]
성호사설[星湖僿說]
천지문[天地門]
하원북류[河源北流]
성수해[星宿海]가 운남[雲南]의 서북방[西北方] 1천 5백 리 지점에서 나와 물이 남[南]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또 동[東]쪽으로도 흐르지 않았으며 중국[中國]으로 꺾어 들어갔으니[折入於中國], 반드시 큰 산이 곤륜산[崑崙山]의 남[南]쪽에 뻗어 있어 지세[地勢]가 높기 때문에 물이 북[北]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南]쪽으로 달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운남[雲南]의 서[西]쪽이 곤륜산[崑崙山]과 수구한문[水口捍門]이 된 것이니, 우공[禹貢]에, 흑수가 남해[南海]로 들어간다.[黑水入南海]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중략]
연원직지[燕轅直指]
십구성도리재부[十九省道里財賦]
사천성[四川省]
距京師西南五千七百里。東西三千里。南北三千二百里。東界湖西。西界生番。南界雲南。北界陝西。領府十二,直州八,州一,縣一百十二。地丁雜稅銀共六十九萬四千三百餘兩。倉穀一百三萬二千三百餘石。[중략]
북경[北京]에서 서남[西南]으로 5700리 떨어져 있다. 동서[東西] 3000리, 남북[南北] 3200리이다. 동계[東界]는 호서[湖西], 서계[西界]는 생번[生番], 남계[南界]는 운남[雲南], 북계[北界]는 섬서[陝西]이다. 부 12, 직할주 8, 주 1, 현 112를 거느린다. 지정 잡세(地丁雜稅)는 은 도합 69만 4300여 냥, 창곡 103만 2300여 석이다. [중략]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 범서[梵書], 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진자정[陳子鼎]이 말하기를,.......... 운남[雲南]의 영취산[靈鷲山]에 수많은 사찰[寺刹]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대개 천축국[天竺國]의 영역[領域] 안에 있다. 이곳은 옛날 아육왕[阿育王]의 봉강[封疆]으로 그가 일찍이 8만 4천 개의 탑[塔]을 세웠고 대리석으로 된 탑기[塔基]도 수백 개나 되었는데, 모두가 그의 구지[舊址]이다. [중략]
송[宋] 나라 건덕[乾德] 2년에 사문[沙門] 3백 명에게 조칙하여 천축국[天竺國]에 들어가서 사리[舍利] 및 범서[梵書]를 구해오게 한바, 개보[開寶] 9년에 비로소 그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노정기[路程記]에, 외봉[巍峯], 계족산[鷄足山], 우바국다석실[優婆掬多石室], 왕사성[王舍城], 취봉[鷲峯], 아난반신사리탑[阿難半身舍利塔], 필발라굴[畢鉢羅窟]이 있다. 했다. 하였으니, 지금 상고[相考]하건대, 모두가 대리국[大理國]의 고적[古蹟]이다. [중략]
대개 그 당시 서번[西番]을 경유하여 천축국[天竺國]에 들어갔다가 되돌아 동[東]쪽으로 대리국[大理國]에 도착한 것은, 남조[南詔]가 이미 몽씨[蒙氏]의 땅이 되어서 검촉[黔蜀]의 길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중략]
백고통[白古通]에, 석가[釋迦]가 이해[洱海]에 있으면서 여래[如來]의 자리를 증득[證得]하였다. 했고, 불전[佛典]에는, 석가[釋迦]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서로 일치한다. [중략]
또 석가[釋迦]가 죽을 당시[當時]에는, 가섭존자[迦葉尊者]가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있다가 뒤에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계족산[鷄足山]과 영취산[靈鷲山]은 서로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데다, 필발라굴[畢鉢羅崛]의 사리탑[舍利塔]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니, 통기[通紀], 유양잡조[酉陽雜俎], 오선록[吳船錄], [구당서(舊唐書)가 모두 일치한다. [중략]
그렇다면 이른바 불국[佛國]이라는 것은 곧 전남[滇南]의 이해[洱海]에 있는 나라로, 8월달 밤에는 바다에서 산호수[珊瑚樹]가 나서 두어 길의 높이로 자라는데 어부들은 다 볼 수 있으며, 금사강[金沙江]의 양쪽 언덕은 모두 백사[白沙]인데, 불서[佛書]에 이른 항하사[恒河沙]가 바로 이것이다. [중략]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서장[西藏]은 사천[四川], 운남[雲南] 지방의 변두리에 있는데, 동[東]쪽에서 서[西]쪽까지의 거리는 6천 4백여 리이고 남[南]쪽에서 북[北]쪽까지의 거리는 6천 5백여 리이다. 동[東]쪽으로는 사천[四川] 경계[境界]에 이르고 동남[東南]쪽으로는 운남[雲南] 경계[境界]에 이르며, 서[西]쪽으로는 서역[西域] 회부[回部] 지방의 대사막[大沙漠]에 이르고, 북[北]쪽으로는 청해[靑海] 경계[境界]에 이르는데,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1만 4천여 리가 된다.
조공[朝貢]하는 도로는 사천[四川]을 경유한다. 납살성[拉薩城]은 타전로[打箭鑪] 서북[西北]쪽 3천 4백 80리 거리에 있는데, 바로 당[唐] 나라 때 토번[吐蕃]에 건아[建牙]한 곳으로 지금은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 곳이다. [중략]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설명[說明]하는 탐라국[耽羅國]인 제주도[濟州道]는, 한반도[韓半島]에 있는 제주도[濟州道]가 아니다. 옛 대리국[大理國]의 지역[地域]은 지금의 운남[雲南] 지역[地域]이 아니라, 인도의 불교[佛敎] 성지[聖地]인 영취산[[靈鷲山]이 있는 인도의 중부[中部] 지방[地方]이었다.
지금의 운남[雲南]과 대리[大理] 지역에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천지[天池]가 있고, 고을나[高乙那] 후손[後孫]의 동상과 양을나[良乙那]의 고대[古代] 우물이 보전[保全]되어 있으며, 백척[百尺] 높이로 수십개의 돌 기둥이 솟아 있다는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의 서석산[瑞石山]이 있으며, 붉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제주[濟州]의 광양[廣壤]에 대한 기록[記錄]과 틀림이 없는 지역[地域]이 넓게 펼처져 있다.
또한, 제주[濟州]에 원[元]나라의 성씨[姓氏]가 많다고 하는데, 그 몽고[蒙古]의 후예[後裔]들이 버젓이 기념탑[紀念塔]을 세우고 이를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의 지역[地域]에 있는 유서[由緖] 깊은 고적[古蹟]에는, 모두 남해[南海]라는 명칭[名稱]이 붙어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남해[南海]의 지역[地域]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제주[濟州]에는 여러 개의 성곽[城郭]이 축조[築造] 되었다고 기록[記錄]은 전[傳]하고 있는데, 지금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보전[保全]하고 있다. 고을나[[高乙那]의 후손[後孫]들이 세운 동상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문관[文官] 복장[服裝]과 똑 같은 모습이다. 제주[濟州]는 말의 고장답게 지금도 목장[牧場]에서는 군마[軍馬]로 쓸 수 있는 말들이 많이 뛰놀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탐라[耽羅]는, 지금의 인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의 국경[國境] 지역[地域]과 중국[中國]의 운남[雲南], 대리[大理] 지역[地域]에 걸쳐 있던 큰 나라였다.
또한 바다의 한 가운데 있던 섬이 아니라 바다를 접하고, 내륙[內陸]의 대해[大海]에 걸쳐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新羅]는 황룡사[皇龍寺]의 탑[塔] 세우면서, 탐라[耽羅]를 평정[平定] 할 아홉 나라 중에 네 번째로 기록[記錄]하고, 원[願]을 세웠던 것이다.
이 곳의 농촌 지역[地域]에는 밀집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니는 농민들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밀집 모자는, 6 ~ 70년대에 우리나라의 농촌에서 만들어 쓰던 밀집 모자와 똑 같다. 조선사[朝鮮史]의 탐라국[耽羅國] 이었던 이 지역[地域]에는, 운남[雲南]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고인돌이 이어지고 있는데, 한반도[韓半島]에 있는 고인돌과 그 형태[形態]와 구조[構造]가 아주 똑 같다.
조선사[朝鮮史]에서, 제주도[濟州道]와 전라도[全羅道]의 기록[記錄]중에, 귤[橘]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은, 당시[當時] 조선사[朝鮮史]의 강역[疆域]을 웅변[雄辯]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佛敎]의 성지[聖地]가 있는 영취산[靈鷲山]이 있는, 지금의 인도가 운남[雲南] 지역[地域]이라는 것은, 또 하나 당[唐]과 명[明], 청[淸]의 실체[實體]에 대한 일부를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탐라[耽羅]가 남송[南宋]과 왜[倭]의 요충지[要衝地]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탐라국[耽羅國]이 이러한 지역[地域]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구국[琉球國]이 지금의 오끼나와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며, 역사[歷史]의 왜곡[歪曲]이다. 남송[南宋], 당[唐], 명[明], 청[淸] 이라는 나라들은, 탐라[耽羅]의 서[西]쪽,......... 천산[天山]의 서[西]쪽, 알타이산맥의 서[西]쪽에서 활거하던 나라들이다.
조선사[朝鮮史]의 강역[疆域]과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 하나 하나 들어날 때마다, 비사[祕史]에 묻혀서 암흑[暗黑]속에 가리워진 우리의 역사[歷史]는, 그 본 모습을 밝게 들어 낼 것이며,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허구[虛構]와 실체[實體]도 분명[分明]히 들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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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운남성 에서 출생한 마하위라 그가 북방의 서가모니로 역사젹 변장을 했지요 운남성 이 중천축국 입니다 북천축이 카스피해 이고 이란 페르시아 지역 사위대성 있던 신라가 있던 지역 이 남천축 인데 남천축이 더 남하하여 운남으로 가서 중천축이 되고 쎄일론이 서천축이 되며 동천축은 앙코르와트 입니다 이 대목 문헌자료를 이 글에서 찾게 되어 너무 감사 합니다 펌 하여 갑니다
환국고려 님은 운남성이 지금의 인도라고 하시는데 아닐겁니다 현재 지나의 운남성에 계족산이 있어 관광객이 엄청 몰려 가고 있고 가섭존자가 그 산의 굴속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입정에 들어 장래 수천년 후에 오신다는 미륵을 기다린다는 겁니다 이것 조차 꾸민 짓 거짓뿌리 일까요? 궁금합니다 한말씀 기다립니다
환국고려님 글 잘 읽었습니다... 상고의 중국은 카자흐스탄 지역이고 근세의 중국은 서안 낙양일대 라고 정리하면 되겠씁니까... 그리고 의문점은 개경이 중경인데 현 북경이 된다고 하시면 중경이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의미는 없는 건가요..
최남석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금 지나의 운남성에 계족산이 있다면, 이것은 인도에서 옮겨온 지명일 것입니다. 영취산과 계족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성지인 영취산은 본래의 그 자리인 지금의 인도에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이 글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불교의 역사를 따라가며, 불교의 역사를 진실로 밝힌다면,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의 실체를 밝히는 광명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최선생님께서는 스님이라고 하시는데, 본인이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쓰는 것을 넓게 양해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산해관[山海關] 자리에는, 산해관[山海關]을 상징[象徵]하는, 조형물[造形物]을 세워 놓고 있으며...>
산해관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지금 우리앞에 놓여 있는 사서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서들의 진위를 밝히는 일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을 따라서, 그 사서가 말하는 지역들을 조사하여 검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운남성은, 조선사에서 설명하는 탐라국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을나의 후손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원나라 시절의 몽고 후손들이 기념비를 세우며 운남성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들은 제주에 유배된 몽고의 후손들이며, 이들은 운남을 본관으로 한다는 역사의 기록은 맞는 말입니다.
앵무와 공작이 제주의 토산(土産)이라 하는데 이를 보면 제주는 현 중국대륙 남부(아마도 현 해남도..?)임에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탐라가 그렇게 큰 나라이니 제주는 그 일부일수 있겠군요..
<붉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제주[濟州]의 광양[廣壤....> 현 우리나라의 제주도에 붉은 흙이 없지 않나요...
여러 번에 걸쳐 자치통감을 인용했는데, <운중(雲中)도호는 적중(토노번 주변)의 남쪽과 서남지방이다> 이곳은 타클라마칸 남쪽과 서남지방이 되는데, 자치통감의 주석편에서 설명하고 있지요. 압록강 하류 용만에는 조선시대 바둑판같은 5만호의 주택이 들어서 있는 대도회지라고 했고, 통군정은 백척의 높이를 자랑하는데, 이곳에는 "해동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하며, 산해관에는 천하제일관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의 동쪽 근교에는 환희령이 또 있어야 합니다. 제주와 탐라! 반도의 제주도는 그 지세와 면적과 삼국의 요충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짝퉁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역사속의 운남과 제주는 인접 지역 입니다. 설명이 부족한 내용들은,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는대로 보충하여 올리겠습니다.
한희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전도가 뒤바낀 역사 속에서 고려의 삼경과 조선의 삼경을 찾는다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에서 고려의 개성을 중경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를 밝히는 것은, 현재 우리앞에 놓여진 전체 사서들의 기록을 따라 그 진위를 확인 해야 할 것입니다. 북경이 고려의 개성임을 증명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와 그를 입증할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버젓이 지금의 북경에 있습니다.
조선에서 개성을 중경이라고 부른 것은, 개성이 나라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고려의 삼경을 저울과 저울추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는 남경에 대한 기록은, 고려 송악의 위치를 정확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고의 중국은, 카자흐스탄, 신강성 서북지역, 카자흐스탄의 서남 지역이 맞다고 본인은 확신하고 있으며, 이에 준하는 역사의 기록에 따른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중국이라고 하지만, 역대 중국이라는 나라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연행록에서 말하는대로, 요, 순, 우, 탕의 흑취모를 빼고 나면, 반은 오랑캐의 족속 입니다.
다산 선생의 말씀대로, 이미 동국이 모두 옮겨와 전승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중국에서 구할 것인가라는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서안과 낙양은 근세의 중국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지나의 대륙을 통털어 역사에서 말하는 삼각산이 있는 곳은, 지금의 서안 북쪽 밖에 없습니다. 논제는 조금 다르지만, 중국이 조선이냐, 조선이 중국인가 ? 하는 문제들은, 차차 명확히 밝혀 지리라 사료 됩니다.
조선사의 진실은 대략적인, 영토적인, 변경지방등을 확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그 나머지들은 조선사 안에서 해결하는 일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걱정은 조선의 진실을 찾자는 것이 아닌 엉뚱하게도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정권이나 학계는 친일과 친일사관을 공고히 하는데 여념이 없을 뿐더러, 작금엔 친일분자들이나 그 후손들이 교묘한 말 장난으로 이를 미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친일 옹호론자들은, '조선사의 진실' 이런 이야기는 유언비어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륙조선이란 말은 어느 정도 관심있는 분들은 한 두번 들어봤다고 할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입니다
맑은영혼님께서 말씀하시는 산해관의 조형물은, 망해정의 옛터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긴 창을 가로 질러 세우고, 몽고군들이 쓰던 모양의 칼을 가로질러 세워 통과하는 문을 형상화하고, 안으로는 달리는 기마군의 활기찬 동상을 높이 세워,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것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얼마 안되는 요서의 광야에는, 연행 사신들이 언덕위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가, 산해관과 그 앞 바다를 바라보던, 넓고 큰 바위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맞고 있습니다.
반도사관인 식민사관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쓸자격이 없는 사관 입니다. 대한의 한은, 큰 韓이라는 뜻인데, 이는 삼한의 78개국이 있던 대륙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지금 남아 있는 사서만으로도, 반도에 존재할수 없는 것이 삼한이며, 이를 이어받은 것이 大韓인데, 반도사관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 본인은 일찌기 역사의 진실을 찾으며, 반도사관의 역사와 이를 국사로 하는 한국의 사학에 대한 기대를 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또한 국가의 정치에 대한 기대도 버린 오래 되었습니다. 역사와 정치도 그러하거니와,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에서, 인문학이 죽어가는 막장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결과 입니다.
인문학이 천대받고 죽은 나라에서, 올바른 품성을 지닌 훌륭한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인문학은 본래 역사와 철인들의 가르침이 근본인데, 역사의 전통과 그 맥이 끊긴 한국의 오늘날 현실은,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문학이 무너지고 역사가 무너진 나라의 정치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 한국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 귀결점은, 역사가 무너진 것이 그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 자기나라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나라의 전통과 역사와 자신의 조국을 부끄러워 하며 초라하게 생각하고, 외세의 문물만을 숭상하는 풍조가 헤어날 수 없게 된 것은, 무엇 때문 이겠습니까 ?
조선사를 무너트린자들이 목적한 바가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자아와 자주를 잃어버린 학문은 외세의 뒤를 흉내내는 빈 껍대기일 뿐이며, 이러한 것을 배우고 자란 후세들이 어떤 모습 이겠습니까 ? 내일을 알려고 한다면, 오늘을 돌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한의 뒤를 이은 대한민국이 본연의 모습을 찾을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입니다. 그 것은 지나온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