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하 시인, 신작 시집 『물 속의 사막』 발간
우주적 상상력과 실존적 시간의식
명상과 관조의 깨우침과 울림
김윤하 시인의 신작 시집 『물 속의 사막』이 문학아카데미시선 323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집에는 제1부 <은행나무 유리화> 제2부 <산토리니 스케치> 제3부 <골방의 고백> 제4부 <코끼리 동화책> 제5부 <시인의 에스프리>에는 고명수 시인(전 동원대 교수)의 해설 「우주적 상상력과 실존적 시간의식」이 수록되었다. 고명수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해 “예민한 감각의 촉수로 절제된 이미지를 추구하는 김윤하의 시는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는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자연의 비의와 존재의 신비를 드러낸다.”며 새시집 발간의 의의를 새겼다. 더불어 박제천 시인은 “좋은 시는 이처럼 우리에게 상상력의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보여준다. 그 시공의 맞물림 속에서 우리는 마법과 같은 변신의 모험을 맛본다.”며 시집 상재를 상찬하고 있다.
예민한 감각의 촉수로 절제된 이미지를 추구하는 김윤하의 시는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는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자연의 비의와 존재의 신비를 드러낸다. 자연을 가까이 하며 어둡고 소란스러웠던 마음의 소리가 환해지는 경험을 한 시인은 지금 여기와 다른 예외적 삶의 순간을 탐색한다. 오랜 시간의 상처를 털어내고 약동하는 순수지속의 순간에 도달하여 충만한 시간을 탐구하던 시인은 존재들과의 참된 만남을 통하여 안식과 지복의 순간에 도달한다. 온전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은 화자는 말의 풍요와 개화를 꿈꾸며 찬란한 언어의 봄을 기다린다.―고명수(시인)
시인은 ‘희미하게 밑그림이 그려진/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여행 스케치북’의 ‘밑그림을 따라 윤곽선을 그리고/ 0.3밀리 컬러팬으로 채색을 한다.’(산토리니 스케치)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이중섭이 떠오른다. 화가의 손에서 물고기가 뛰어놀고 물고기와 어우러지는 어린이가 튀어나오듯 시인의 손에서는 ‘담장이 생기고/ 담장을 넘어온 나무는 “스퀴글 스트로크로 꼬부꼬불 나뭇잎이 무성해진다” 좋은 시는 이처럼 우리에게 상상력의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보여준다. 그 시공의 맞물림 속에서 우리는 마법과 같은 변신의 모험을 맛본다. 김윤하 시인은 2004년의 첫시집 『나의 붉은 몽골여우』 2014년의 두 번째 시집 「북두칠성 플래시몹」이 보여주듯 시인의 상상력이 불러일으킨 자장과 미학적인 변주를 통해 그의 시 쓰기 방식이 시단에 충분한 전범이 될 만하다는 상찬을 받은 바 있다.(같은 해 한국시문학상 수상)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 시집 『물 속의 사막』을 통해 이제껏 시인이 추구하던 상상력에 명상과 관조를 더함으로써 사물이 내재한 형이상의 비의(秘意)가 얼마나 보다 진폭이 강한 울림과 깨우침을 전해줄 수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같다. “멀리 작은 성당의 몸이 파랗게 피어나도/ 자줏빛 절벽이 솟아나”듯 금방이라도 우리 옆에 절벽 위의 꽃을 꺾어드릴까 수로부인에게 수작을 거는 헌화가의 노옹이 서 있는 듯한 마법의 상상력마저 햇살이 되고, “낮은 대문 너머 지중해/ 따둣한 표정이 새파랗게 잔잔해 지는” 시집이다.―박제천(시인)
▶프로필: 서울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졸. 2000년 『문학과의식』 등단
시집 『나의 붉은 몽골여우』『북두칠성 플래시몹』
2014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E메일: kyh0346 전)010-2885-8034
▶문학아카데미: 03084 서울시 종로구 동숭4가길 21, 낙산빌라 101호
tel) 764-5057 fax) 745-8516 ▶B5판·반양장 108쪽/ 값 10,000원
<시인의 말>
때때로
슬프고, 외롭고, 행복하다.
행복은 늘 뒤늦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를 꼭 껴안고
더 멀리 오래도록 걷고 싶다.
2022년 상강
김윤하
<김윤하 시인의 좋은 시>
<연꽃을 위한 에튀드>
비 오는 장자호수공원 안, 길고 둥근 연못
연잎 대가 이리저리 휘어져 있네
둘레돌 곁의 수초 앞으로 연잎 하나 쓰러지네
수초가 품으로 받아안네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하늘로 쳐들자
안도의 초록빛 숨소리가 터지네
생명수 같은 물방울이 입술로 굴러내리네
비로소 연잎이 환하게 눈웃음 치네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드는 동심원
연꽃 속에서 여기저기 솟아오르네.
<천지자연경天地自然經>
호수 안에 작고 둥근 섬
몇십 마리 왜가리가 새하얗게 앉아 있다
버드나무로 뒤덮여 있는 왜가리 안식처이다
숨어있던 왜가리 한 마리 나무 속에서 빠져나와
낮게 허공으로 날아오르다 한쪽 발이 물속에 빠졌다
왜가리는 보이지 않는데
발 빠졌던 흔적이 수면에 둥글게 물결 진다
발 한쪽 담갔을 뿐인데
순간 꺼냈을 뿐인데
둥근 물결처럼 발목 잡는 손길 느껴질 때.
누구에게나 있다.
<산토리니 스케치>
희미하게 밑그림이 그려진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여행 스케치북이 있다
밑그림을 따라 윤곽선을 그리고
0.3밀리 컬러펜으로 채색을 한다
연분홍 낮은 담장이 생기고
담장 넘어온 나무는
스퀴글 스트로크로 꼬불꼬불 나뭇잎이 무성해진다
멀리 작은 성당의 돔이 파랗게 피어나고
자줏빛 절벽이 솟아나고
화분 속 나무가 페더링 스트로크로 쑥쑥 자라난다
낮은 대문 너머 지중해
따뜻한 표정이 새파랗게 잔잔하다
내리긋는 짧은 페더링이 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햇살이 되는 섬
계단을 따라 구불구불 손으로 걷다 보면
작은 하얀 집들 사이로 햇빛과 바닷물이 눈부시게 넘치던
그곳이 가만히 나를 부른다
그 섬의 내가 나를 부른다.
<매직 루주>
내 입술에는 분위기가 없어 루주를 바르지
연두, 노랑, 파랑, 보라, 하얀 루주는
어떤 색을 발라도 붉은색으로 변하지
바다 빛깔을 발라도 빨강
풀잎 빛깔을 발라도 빨강
오늘 내 입술 산도와 온도는 바닥보다 가라앉아
상큼한 레몬빛 노란색을 바르지
노란색이 빨간색으로 변한 흔적은
컵에도 묻지 않고 마스크에도 묻어나지 않지
입술을 열면
노을처럼 핏빛 말語꽃이 피어나길 기대하지
덧칠할 수록 더욱 붉어지는 말꽃이 피기를 꿈꾸지
비가 오는 말꽃, 눈 내리는 말꽃은
붉은색 하나로 통하지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네게로 가는 비밀의 색
그립다는 전언이지.
<코끼리 동화책>
코끼리 똥으로 만든 종이는 질감이 꼭 한지를 닮았다
소화되지 않은 풀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큰 눈망울을 껌벅이며 쏟아낸 풀, 열매, 나뭇잎이 잘 삭혀진 냄새를 벗고 바다를 건너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쿵쿵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에 가슴이 뛰었다 나무 기둥 같은 다리가 걸어간 밀림이 펼쳐졌다
큰 귀를 펄럭이듯 세상 모든 좋은 단어가 몰려왔다 코끼리 울음 닮은 지진이 나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크고 검은 글자 속에는 향기로운 똥이 된 풀, 똥이 된 과일, 똥이 된 나무껍질이 살아 숨쉬었다
하루치 먹이가 만들어낸 똥 종이, 책장을 뒤적일 때면 코처럼 길고 긴 발효 냄새가 났다
아이들이 꿈꾸는 이야기가 숲길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나도 잠시 아이가 되어 코끼리 똥으로 만든 동화책을 뒤적이며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