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이 역사연구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펌)
인터넷에 위당 정인보 선생이 역사연구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란 글이 있어서 펌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위당 정인보 선생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사매국노 이병도와 그 한국사매국노 이병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점제현 신사비를 선전하고, 점제현이 평안남도 평강군이라고 조작한 일본인의 조작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요동에 있는 점제현 신사비를 평안남도 평강군에 가져와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고 날조한 왜놈들과 이 점제현신사비를 책에 올려 왜놈들의 날조를 보조한 한국사매국노 이병도는 왜정 때의 밀대(密隊: 왜놈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자들을 밀고하던 놈들)보다 더 심각하게 한국사 왜곡에 협조한 놈입니다.
https://blog.naver.com/dgdragon/222361308452
위당 정인보 선생이 역사연구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
역사 연구의 계기
"나는 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선친께서 늘 "우리나라 역사책을 좀 잘 보아 두어라. 남의 것은 공부하면서 내 일은 너무들 모르더라"라고 말씀하셨건만 다른 노릇에 팔려 많은 세월을 허비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우연히 일인들이 《조선고적도보》랍시고 낸 '첫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장 두세 쪽을 넘기기도 전에 벌써 '분'이 터지면서 "이건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어느 해인가는 일인들이 이른바 "한일 병합 몇 주년"이랍시고 《경성일보》인지 《매일신보》인지에다 기념호를 내었는데 거기에 이른바 '점제비(秥蟬碑)' 사진이 최근 몇 년 내의 대표적인 대사건의 하나로 올라왔다.
... 그것을 보고 나는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것이 저들의 총독정책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으며그들의 음모를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 버리리라"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위당 정인보, <부언>, 《조선사연구》(연세본, 하권). 270쪽)
開天歌 우리가 물이라면 근원이 있고 우리가 남기라면 뿌리가 잇다 이나라 한아비님은 檀君이니
백두산 높흔터에 조선이 서니 聖人의 자최따라 하늘이 텃다 이나라 만드신님은 檀君이시니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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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 선생의 <개천절가> 초고
위당 선생이 역사 연구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의 '한사군 재평양설'을 주장하며 식민통치의 역사적 명분을 강조하려는 책동 때문이었고 1935년 1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한민족의 진짜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위당은 1915년 즈음 상해에서 단재 신채호를 처음 만난 이래 교류를 가지면서 그의 고대사 연구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역사 연구의 이유
"과거는 곧 지금의 뿌리이며 과거의 책은 곧 과거가 남긴 자취이다.. 그런데 이 과거는 묵고 썩은 구태의연한 과거가 아니니 이를 풀어 본다면 곧 '본연의 나[本我]'라고 할 수 있겠다. 말류의 폐해로 그 뿌리에서 어긋나고 또 그것을 버리고 말았다면 그 다음에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본연의 나'를 스스로 입증할 도리가 없으며 또 이러한 스스로에 의한 입증이 아니고서는 언제나 맴돌면 맴돌수록 더욱 미혹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런즉 우리 자신에 대한, 아주 섬세하고도 치밀한 뿌리에 대한 조사야말로 바로 우리가 우리의 '올바른 실체[正實]'로 되돌아가는 밑천인 것이다." (<조선고서 간행의 의의>, 《동아일보》, 1934.9.15)
위당이 말한 '본연의 나'는 일찍이 행촌 이암 선생이 말한 '천하만사가 먼저 나를 아는데 있다(先在知我)'에서의 '나(我)'요, 단재 선생이 말한 '아(我)와 비아의 투쟁'에서의 '아我'이다.
나와 나의 정신, 정체성을 아는 것이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이며, 설령 몸과 나라를 빼앗겼어도 나와 나의 정신(정인보의 '얼'이며 박은식의 '국혼'이며 신채호의 '낭가사상'이며 문일평의 '조선심'이다)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다시 재생(再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