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가 개봉됩니다. 영화의 등장인물 중 배우 송중기가 맡은, 조선인들과 ‘군함도’에서의 탈출을 꾀하는 한국광복군 소속 OSS 요원 ‘박무영’ 역이 눈에 띄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한국 광복군의 활동과 국내진공작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광복군 성립 전례식 도중 지청천 총사령관(좌측)과 김구(오른쪽)의 모습
#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국군 ‘한국광복군’의 창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고 상해에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후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었는데요. 임시정부는 뤄양군관학교와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광복군의 창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을 피해 중국 대륙에서 임시정부가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요.
그런 모든 어려움을 딛고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 정착하게 된 임시정부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의 주도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국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중국 곳곳에서 독립 전쟁을 벌이는 독립군을 바탕으로 이를 조직하였는데요. 지청천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이범석 장군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여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 선언문>을 통해,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발표하며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습니다.
▲ 한국광복군의 훈련 모습
▲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기념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즉각적으로 대일 선전 포고를 준비했습니다.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여 전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와 자주독립의지를 알리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1941)
우리들은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ㆍ영ㆍ미ㆍ하ㆍ가ㆍ호(中ㆍ英ㆍ美ㆍ荷ㆍ加ㆍ濠) 및 기타 제국의 대일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東亞)를 재조(再造)하는 데 가장 유효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아래와 같은 점을 성명(聲明)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2. 거듭 1910년의 합병조약 및 일체(一切)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동시에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
4. 맹세코 일본의 난익(卵翼) 하에서 조성된 장춘(長春) 및 남경(南京) 정권(正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各項)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예축(豫祝)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 원문은 한자로 되어 있음.
▲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대일선전포고문’
이후 한국광복군은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후 영국군과도 연합하여 인도·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광복군은 <광복>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선전과 홍보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확산하여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 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 인도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한 한국광복군
# 한국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 ‘독수리 작전’
일제가 패망의 길을 접어든 1945년, 임시정부는 미군과 손잡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기로 했는데요.
일명 ‘독수리 작전’으로 불렸던 한미연합작전이었습니다. 이때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보내 정예요원으로 훈련시켰습니다.
▲ 국내진공 침투작전 협의를 마친 김구 주석과 OSS 총책임자 도노번 소장
이 작전의 내용은 중국의 시안과 푸양에서 OSS 훈련을 받은 한국광복군에게 각종 비밀 무기를 주어, 산둥(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이들로 하여금 국내의 요소를 파괴하거나 점령하게 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945년 5월부터 중국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서 OSS와의 합작 아래 한반도 침투를 위한 본격적인 군사훈련이 실시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과 OSS는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한미합동지휘본부’를 설치하고 긴밀한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 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 OSS 훈련을 마친 광복군 대원들
#일제의 무조건 항복, 무산된 국내진공작전
국내진공 침투작전 실시 일자는 1945년 8월 29일이었습니다. 경술국치일을 맞아 8월 29일 국내 진공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OSS특수부대원들은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게 됩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당시의 심경을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했다는 비통함을 나타내는 내용인데요.
▲ 일본 패망 후 귀국하는 이범석 장군
우리 힘으로 군대를 창설하고, 대일 선전 포고를 하며 전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렸던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OSS 특수부대원들이 꿈꾸던 독수리 작전의 날개는 채 펼쳐 보지 못하고 접어야 했지만,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무장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기억하고 그들의 애국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4237&cid=46623&categoryId=46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