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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敬順王) (대보공28세:신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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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朴 氏) 왕 씨(王 氏) 안 씨(安 氏)
죽방부인(竹房夫人) 낙랑공주(樂浪公主) 순흥안씨(順興安氏)
비(妃) 계비(繼妃) 별빈(別嬪)
┌───┴────┐ 경주김씨 ┌─┴┬──┬──┬──┐ │
① ② ③ (慶州金氏) ④ ⑤ ⑥ ⑦ ⑧ ⑨
일(鎰) 황(金+皇) 명종 (1세) 은열 석(錫) 건(鍵) 선(鐥) 추(錘) 덕지(德摯)
부안 나주 (鳴鍾) (殷說) 의성 강릉 언양 삼척 울산
김씨 김씨 영분공 대안군 김씨 김씨 김씨 김씨 김씨
(마의태자) (永芬公) (大安君)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 에 가면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이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140미터 거리, 약 5분정도 가면 릉 입구가 나옵니다.
신라왕인데 왜 이곳에 묻혀 있지? 궁금증이 먼저 들지 않나요?
화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소박한 쪽에 속하는, 왕릉이라기보다는 일반 귀족의 묘도 이 정도보다는 클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아담한 능이었습니다.
경순왕의 사후에 오랜 세월동안 잊혀졌던 것을 1747년에 왕릉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하게 되면서 다시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경순왕릉의 비로 추정되는 비가 놓여 있는 비각.
마모상태가 심하여 거의 문자가 보이지 않지만 비석의 형태와 약간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에는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민심도 상황도 신흥 고려에 기울자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더이상 볼 수 없었던 경순왕은 신하들과 아들(마의태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건에게 정권이양을 하고 왕위에서 물러납니다(935년).
978년에 경순왕이 세상을 떠나자 경주로 모시기 위해 경순왕의 운구행렬이 경주로 가는 중,
이곳 고량포에 이르렀을 때 경주 민심을 우려한 고려왕실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여 운구행렬을 막았다지요.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왕을 애도하는 마음이 워낙 컸기에 모이면 거대한 폭동으로 이어질 것 같은 우려에 고려 조정에서 경주로의 이동을 막은 것입니다.
결국 이곳 고랑포 언덕에 묻히게 되었고 신라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습니다.
마침 단체로 오신 분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하고 듣고 있는데 모두들 열심히 귀 기울이고 계시네요.
작은 능하나, 비각이 한 채. 재실건물이 한 채.
몰락한 왕가의 씁쓸한 최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네요.
능을 살펴보고 내려가는 길에는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낙엽들이 푹신하게 깔려 있습니다.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듯 세월도 흘러 가을이 깊어갑니다.
주변 관광지로는
1.임진강 주상절리가 있는데 장단적벽이라 하여 송도팔경(松都八景)중의 하나입니다.
2.임진강가에 위치한 고구려 방어성곽인 호로고루성이 있습니다.
3.전곡선사박물관에는 구석기 시대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인류의 진화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연천 경순왕릉(사적 제244호)
위치;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
문의;031-839-2143(연천군 문화관광체육과)
경순왕릉을 돌아보고는 멀지 않은 곳에 망향비빔국수 본점이 있어서 들러보았습니다.
1968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곳은 바로 앞에 훈련소가 있어서 더욱 찾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모두 소면이 아닌 중면을 사용해서 쫄깃함을 더한 국수가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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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문산의 황희선생유적지 반구정과 앙지대를 소개합니다.
http://blog.naver.com/joomeock/221281069719
자유로를 타고 오다가 문산쪽으로 들어 와서 임진강을 따라 달리다 보면 경치가 수려한 곳이 많은데요, 수려한 경치와 더불어 역사적인 현장이 있는 곳인 파주 문산의 가 볼 만한 곳 황희선생유적지 반구정과 앙지대를 소개합니다.
황희선생이 고려 말 개성의 가조리에서 태어 났으며 고려 말.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며 청백리의 표상입니다.(1363년~1452년)
이 곳은 황희선생의 호를 따라 방촌영당이라고 합니다.
현재 반구정은 공사 중입니다.
반구정은 북한산과 개성송악산의 중간지점에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황희선생께서 이방원때 이 곳으로 유배를 왔는데, 황희선생을 한양에서 가까운 곳으로 유배 보낸 것은 특혜 아니냐는 논란이 일자 남원으로 어머니와 함께 유배를 갔다가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유배지었던 이 곳으로 오셔서 고향이 바라 보이는 이 곳에 반구정을 짓고 고향을 바라 보며 사셨다 합니다.
(남원의 광안루도 황희선생이 지었다고 하네요.)
앙지대도 황희선생께서 처음 지은 것이며,
1915년에 반구정을 현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이름 하였다합니다.
앙지대에서 바라 본 임진강과 저 건너편에 장단마을이 보입니다.
방촌기념관 안에는 황희선생의 일대기를 비롯해 선생의 삶과 사상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방촌영당과 반구정과 앙지대는 임진왜란(1592) 때 불행히도 잿더미가 되었다가, 그 후에 선생의 후손가 다시 세워 300년동안 보존되었는데, 또 다시 6.25동란 때 다시 잿더미로 변했고, 그 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합니다.
20년 전까지 황희선생의 후손들이 관리 하다가 시에다 기부체납 했다고 합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 29호이며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 85 번길 3에 위치해 있습니다.
[출처] 파주시 문산의 황희선생유적지 반구정과 앙지대를 소개합니다.|작성자 예원
아이들과 지난주에 파주시 법원읍 쇠꼴마을에 들렀다가 율곡이이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유명한 화석정에 들렀습니다.
파주시에는 가볼만한곳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 임진강 풍광과 더불어 오랜 역사가 깃들여
있는 화석정이 유명합니다.
화석정
임진강가에 세워져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제자들과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세종25년(1443)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이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성종 9년(1478)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14년(1673)에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 되어버리고 말았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한 것으로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아이들에게 파주의 역사교육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찾아 왔습니다.
화석정 바로 옆에는 보호수가 있는데
560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한반도를 지켜 온 세월이
얼마나 굴곡의 시간이였을까요.
저멀리 보이는 강이 임진강입니다.
예전 같으면 수량이 많아서 임진강을
굽이쳐 서해바다로 연결되는데
올해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서
서해바다 뻘처럼 보입니다.
멋진 풍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이이선생님이 머물렀던 곳을
아이들의 가슴속에도 공부의
열정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임진강을 넘어서 보이는 곳이 북한 입니다.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파주의 발전을 기대 합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책한편 읽으면서 선열들이 공부에
매진했던 곳에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냅니다.
화석정의 자태가 아름 답습니다.
와이프와 이이들이 오래된 나무와
화석정을 보면서 한참 토론 중이네요.
사진으로 보는 파주임진 팔경도 있으니
참고해 보세요.
율곡 이이 선생이 8살때 썼다는
화석정 시입니다.
숲속 정장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을 향해 붉구나
산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울고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아이들이 11살과 13살인데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할지? 어떻게 공부에 재미를
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이들과 역사적인 유물이나 위인들이 실제로 살았던 곳을 방문해서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과 애국심을 고취 시키는데 도움되도록 많은 곳을 찾아 다니면서
체험 학습을 늘려 가야겠습니다.
새로운 한주 잘보내시고 얼마남지 않은 2017년 6월도 마무리 잘하세요.
[출처] 파주시 가볼만한 곳 - 화석정|작성자 고양파주공장창고전문
경기도 이야기
- 파주 화석정( 花石亭 ) -
파주 화석정 이야기입니다.
기록 일시 : 2018. 6. 27.
기록 장소 : 파주 화석정 주차장 (네비, 지도로로 보기 : 경기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 152-72 )
율곡선생유적지 → 파주 화석정 → 임진각 → DMZ 안보관광(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도라산역 약 3시간)
파주 법원읍 율곡선생유적지( 옛 이름 자운서원)에서 임진강가에 있는 파주 화석정으로 갑니다.
파주 화석정 가는길은 문산읍 1번도로 통일고가교 분기점 에서 37번도로 동쪽 방향으로 약 3km 우측에 있으며, 파주 화석정 주차장은 무료, 약 15대 정도 주차 가능, 파주 화석정 주차장 진입로는 협소하니 안전운전이 필요한 구간인것 같습니다.
파주 화석정(花石亭)은 임진강가에 세워져 있는 정자로,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61호 이며,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입니다.
세종 25년(1443년)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성종 8년(1478년)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 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전쟁때 다시 소실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경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고 합니다.
파주 화석정은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소나기 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파주 화석정 시 (花石亭 詩) 비
八歲賦詩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 속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파주 화석정에서는 전곡, 연천 방향의 한탄강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임진강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곳이며, 옛 부터 주변에는 장어, 참게, 매운탕 요리가 유명한곳이기 합니다.
파주 화석정에서 임진강 상류를 바라 본 모습입니다.
화석정 아래쪽으로 문산에서 전곡을 잇는 37번 도로와 임진강이 있습니다.
후기소감 : 법원읍 율곡선생유적지, 임진각, 도라산전망대, 도라산역, 제3땅굴과 함께 1일 관광하기 좋은곳인것 같습니다.
파주 화석정을 방문하시는 여행객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글 올린이 : 벌교땅골로 l 작성자 : 타닐츨가 경기도 이야기 처음으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위치 하고있는,
조선조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유적지인 자운서원을 찾았습니다.
파주의 율곡선생 유적지의 입구 입니다.
율곡의 유적지에는 입장료가 있습니다.
유적지인데 입장료가 있어서 의아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부담되는 정도는 아닙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정비가 잘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된 유적지임을 알수가 있고,
오른쪽에는 율곡이이와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동상이 나란히 자리해 있습니다.
율곡 기념관과 자운서원으로가는,
길림길의 어귀에는 솟대들이 하늘을 향해있으며,
다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특징을가진 솟대들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마치 헤엄치듯 길게 뒤로 다리를 내밀은 솟대의 모습도 보입니다.
유적지 매표소의 뒤쪽에는 매점이 함께 있으며,
그곳에서 관리하는듯한 장독대의 모습도 정겹게 보여집니다.
갈림길에서 서원으로 향하는길의 모습으로,
파주는 율곡의 본가인 아버지 이원수와,
강릉이 본가인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세 때에 파주 율곡리로 와서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3세부터 29세까지,
9번의 과거에서 9번 장원급제를 하기까지 어머님 문상기간과 금강산 수도의 4년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학문을 닦았고 벼슬길을 마친 말년에도 이곳에 돌아와 49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거주한곳이기도 합니다.
서원으로 가는길의 초입에 있는,
이이선생(李珥先生)의 신도비각(神道碑閣)으로 약간 언덕위에 자리해 있습니다.
이 신도비(神道碑)는,
조선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로써,
이 비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李恒福(이항복)이 글을 짓고 申翊聖(신익성)이 글씨를 썼으며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 입니다.
멀리 자운서원이 보이며,
자연석에 이곳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세운 기념비가 있습니다.
익어가는 봄날씨에,
화사하게 피어난 명자나무꽃으로,
겸손과 조숙의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운서원(紫雲書院)입니다.
서원의 수문장 격인 솟을삼문으로 자운문(紫雲門)입니다.
자운문(紫雲門)의 현판이구요,
이곳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서원터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1969년에 지방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고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정비를 하였습니다.
자운서원 (紫雲書院) 으로 들어섭니다.
인조 2년(1642)에 시호를 文成(문성)이라 내리고,
숙종 8년(1682)에와서 문묘에 배향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광해군 7년(1615)에,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이 고향인 율곡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紫雲書院(자운서원)을 세웠으며,
1650년 (효종 1)에 ‘자운(紫雲)’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서원의 동쪽에 있는 동재로,
기숙사의 역활을 하기도한 입지재(立志齋) 입니다.
입지재(立志齋)의 현판이구요,
입지재의 방문 위에는,
이곳에 신사임당을 모셨슴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신사임당의 영전입니다.
사임당이 어느 날 꿈에 동해바닷가에 거닐고 있는데,
바다 속에서 한 선녀가 살빛이 백옥같이 흰 옥동자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 율곡을 가졌다 합니다.
율곡이 12월 26일 寅時(인시, 새벽 4시쯤),
강릉 북평촌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는데,
율곡을 낳는 날 밤에도 어머님 사임당의 꿈에,
어디서 난데없는 검은 용이 동해 바다로부터 날아오더니,
사임당이 자는 방 처마 밑 문 머리에 서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에서 깨어나자 곧 율곡을 낳았으므로,
아기 이름을 현룡(見龍, 용이 나타남)이라고 불렀고,
또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 용꿈을 꾼 방)'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입지재(立志齋)에 모신 신사임당의 모습입니다.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 서재인 수양재(修養齋) 입니다.
서재인 수양재(修養齋)의 현판이구요,
동재와 서재 바로위에는,
두그루의 노거수 느티나무가,
강인당을 지키듯 동재와 서재위에 양쪽으로 서있고..
430여년의 세월을 지키며,
자운서원을 바라보고 살아왔을 느티나무입니다.
강학의 공간인 강인당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강인당(講仁堂)입니다.
유생들이 유학의 기본덕목인 '仁(인)'을 익히고 배웠을 강인당(講仁堂)으로,
양 옆에 호위하듯 서있는 두그루의 느티나무가 강인당의 품위를 한층 높여주고 있습니다.
강인당(講仁堂)의 현판이구요,
맞배지붕의 구조로 정면 다섯칸, 측면 두칸의 규모로 되어 있습니다.
강인당의 뒤쪽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있습니다.
율곡, 사계(김장생)의 기호학파를 확대개편하여 대학파를 이룩했던,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의 찬란한 학문과 문장이 그 묘정비에 면면이 새겨져 있으며,
율곡학파의 뛰어난 계승자로서 기호학파의 대세력을 이룩한
우암 송시열 의 문장 솜씨는 여기에서도 충분히 발휘되었다고 할정도로,
율곡선생의 위대함을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 바로 그 묘정비문입니다.
비문은 尤菴(우암) 宋時烈(송시열)이 짓고 글은 당대의 명필
谷雲(곡운) 金壽增(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썼다고 합니다.
계단을 올라 사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은,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은 양측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며,
이이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의 사당은,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배치하였습니다.
사당인 문성사(文成祠)는,
6칸으로 익공계(翼工系) 형식 팔작지붕이며
문성공(文成公)은 율곡 이이의 시호이며,
명종 3년(1548)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29세때 응시한 문과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차례의 장원에 모두 합격하여 "九度壯元公(구도장원공)" 이라 일컬어졌으며,
퇴계 이황이 노력파라 한다면 율곡 이이는 엘리트라 할수 있을정도로 비교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성사의 현판 아래에는,
사당의 역사를 전해주는 중건기 현판이 있고..
사당 안에는 이이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8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5변(籩) 5두(豆)입니다.
제를 모시는 문성사의 재산으로는 전답 2,000여 평과 약간의 대지가 있다고 합니다.
李珥先生(이이선생)의,
아명은 現龍(현룡), 자는 叔獻(숙헌)이라 하고,
호는 栗谷(율곡), 石潭(석담), 愚齋(우재) 본관은 德水(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申師任堂(신사임당) 사에에서 출생했으며,
처음 이름은 現龍(현룡)이었는데 11세 때 珥(이)로 바꾸었다.
명종 19년(1564) 생원시 식년문과에 장원한 이후,
호조, 예조, 이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 부교리, 청주목사,직제학,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소선 유학계의 李滉(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특히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키는 경세적(經世的)인 입장을 취했으며,
당쟁(黨爭)의 조정,10만대군의 양성 및 大同法(대동법), 社倉(사창) 실시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文成(문성)이며 文廟(문묘)와 선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자운서원외 전국 20여개 서원, 사우에 배향되었다.
(참고로 가져온 글입니다)
사당의 왼쪽 뒤편에는,
제을 올린후 제문또는, 축문등을 태우는곳인 망료위(望燎位)가 자리해있고,
사당 앞에는,
한그루의 향나무가 허리를 굽히듯 서있습니다.
서원의 옆문으로 나왔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된 6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등이 있으며,
서원 담장의 왼쪽 윗부분에는,
율곡약수터라고 이름지어진 샘터가 있어서
시원한 생수로 갈증을 달래봅니다.
파주 율곡리는 덕수 이씨의 세거지였으며,
이이가 율곡리라는 지명에서 호를 따 왔을 정도로 선생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미친 곳이며,
율곡은 현실적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성리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율곡이 이끌던 기호학파(畿湖學派)는 당시 이황선생의 영남학파와 함께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근심으로 앞을 내다보는 "십만양병설"은,
현재에 와서도 귀감이 되는 교훈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하는바가 큽니다.
자운서원(紫雲書院)을 나오며 율곡의 뜻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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