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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유산록(立巖遊山錄)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지음/ 김희준 역주
1) 가고 싶은 입암
입암(立巖)은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을 제향하는 곳이다. 선생은 본래 인동(仁同) 사람이지만 입암의 수석(水石)을 아껴서 입암에 왕래하고 머물다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지금 선생의 문집 중에 있는 <입암기(立巖記)>가 이런 일을 전한다. 내가 일찍이 이 글을 숙독하고 그곳을 그리워하여 한 번 가고자 하였지만 경향으로 길이 어긋나서 실행하지 못했다. 경주(慶州) 부윤이 되었을 때 입암과 경주의 지경이 서로 접하였기에 일찍이 꿈속에서조차 그곳에 가보지 않음이 없었지만, 날이 차고 발이 얼어 진실로 나막신 신고는 갈 수가 없었다. 회포가 답답하여도 그 일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
나는 이제 관직에서 물러나 영천에 산다. 영천은 입암이 있는 고을이다. 매번 박호여(朴皥如)와 안군경(安君敬)과 짝하여 초(楚)나라와 조(趙)나라가 합종(合從)한 일을 두고 토론하다가 몇 번이나 해가 중천에 떴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점차 또한 입암에 갈 것을 약속하며 말하였다.
“세상에는 일이 있게 마련이니 뒷일로 하여 구애받을 수 없다.”
그 때 이(李) 상사(上舍:생원) 명윤(命尹)이 자리에 있다가 강하게 입암에 가기를 요청하며 말하였다.
“이번 길은 이틀 걸리는 거리이니 말이 피로할까 걱정됩니다. 어찌 저의 집에서 쉬어 가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입암에 가는 의논을 정하고 모임을 파했다.
2) 포은 선생을 뵙다
이틀 뒤에 군경과 같이 말을 나란히 하고 집을 나섰는데, 전 별장(別將) 김진기(金振紀)와 장년의 노비 일선(一善), 아이 노비 오천(五天)이 따랐다. 이때는 경진(병와 48세, 숙종 26, 1700)년 음력 4월 19일이었다.
정오 무렵에 천평(泉坪)에 닿았다. 가랑비가 처음 개고 보리 이삭이 거의 누렇게 익어 갔다. 가뭄이 든 농촌의 형편은 먹을 근심이 없는 곳이 없었다.
처음으로 큰 내를 건너자 입암의 하류였다. 나의 집 앞에서 거슬러 올라간 시내였다. 군경이 말하였다.
“여기서부터 입암 까지는 끝까지 이 물을 따라가는데 위태로운 잔도(棧道)와 암초(暗礁)가 있어서 얼마나 힘들 것인지 모릅니다. 이 때문에 여기가 험한 길로 소문이 났습니다.”
내가 말했다.
“자네는 신진(新進)으로서 출발하는 처음에 이미 평지의 쉽지 않음을 아니, 세상살이에 근심이 없다고 이를만하다.”
북쪽으로 바라보니 우항촌(愚巷村)이 있고, 서쪽으로 바라보니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있었다. 우항촌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선생의 태생지인데, 마을 앞에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그 비는 홍무 기사년(공양왕1, 1389)에 새긴 것이다. 성화 정미년(성종18, 1487)에 손순효(孫舜孝; 1427 - 1497)가 꿈에서 포은 선생을 뵙고 그로부터 점지 받은 비석을 땅에서 파내어
사진4. 포은 정몽주 초상(임고서원 소장)
마을 앞에 다시 세운 것이다.
임고서원이 있는 마을 이름은 본래 도일(道一)이지만 지금은 양항촌(梁項村)으로 고쳐 부른다. 마을에 포은 선생 부친의 묘가 있고, 선생이 여묘 살이 하던 터가 완연하다. 가정 계축년(명종8, 1553)에 고을 사람들이 임고서원을 고천 북쪽 부래산(浮來山)에 세웠지만, 임진왜란 때 불탔다. 만력 임인년(선조35, 1602)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숭정 임오년(인조20, 1642)에 다시 장 여헌(旅軒) 선생을 배향하였다.
고려 5백년의 바른 기운이 우항촌 한 골의 남북 사이에 배태되고 온축되었기에, 아! 가히 성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도학의 연원이 된 땅이다. 이 골이 없었다면 나는 야만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는 실로 주나라의 수양산(首陽山)이고 노나라의 니구산(尼丘山)이다. 흠모하고, 찬탄하고, 두려워하고, 격려하고, 어여뻐하고, 정다워 하기를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다. 우리들이 윤리를 잃지 않고, 어질게 되고, 서로 더불어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임고서원의 문루에 앉아보니, 내가 전에 와서 오른 곳이었다. 삼가 사당을 알현하고 포은 선생의 유상(遺像)에 절하였다. 유상에는 선생의 기운의 정수가 삼엄하여, 마치 나의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나의 얼굴을 맞대고서 간곡히 타이르는 가르침이 있는 것만 같았다.
호여가 우리를 앞서서 길가의 양항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원임(院任) 성후원(成後元), 유생(儒生) 이목(李穆), 이정의(李挺義)와 같이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모두 이르자 함께 조옹대(釣翁臺)에 올랐다.
대는 문루 앞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데 층층 지어져 봉수대 같았다. 대의 터는 깊은 못이 에워쌌고 곁에는 맑은 도랑이 있었다. 대의 깨끗하고 맑은 기운이 시원하였다. 처음에 흥취가 일어서 나를 향한 답으로 정엄(鄭淹)이 시를 읊었다.
“꽃 속 제비와 꾀꼬리는 아래 물가 나무에 있고,
버드나무 주변에는 거위와 오리가 강성(江城)을 새롭게 하네.”
참으로 진실한 기록이었다. 술을 몇 잔 마시고 일어나니 자리의 객들이 진실로 바란 것이었다. 점심밥을 서원 요사채에서 먹었다.
사진5. 퇴계의 성리군서 기증 발문(임고서원 소장). 퇴계의 예서 글씨는 희귀하다.
서원에 비치된 서적들은 여러 향교, 서원들 중에서 으뜸이었다. 역대 왕들이 하사한 것, 퇴계(退溪)가 보낸 것, 전후의 관찰사들과 군수들이 보낸 책들이 자못 많다고 이를만하였다. 장부를 살펴 찾아보다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와 퇴계(退溪)가 그에 차운하여 화답한 것을 먼저 보았다. 대개 내가 사는 집 앞 시내와 뒷 바위를 따라 마침 아홉 굽이 일곱 여울이 있기에 지금 두 선생이 읊은 시를 베껴서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반성하고자 하였다.
해질 무렵에 호여, 군경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원동(仙源洞), 덕연(德淵) 등지를 거쳐서 말을 타고 입암 아래 입구인 임리동(林里洞)에 달려 닿았다. 여울 위로 수십 길의 절벽을 이고 있으며 아래로는 거의 백 그루의 늙은 버드나무가 그늘을 이루었다. 돌 잔도(棧道)가 벼랑 따라 나 있고 시냇가 모래는 길을 감싸니, 이 또한 그윽한 맛이 뛰어난 곳이었다. 어찌 빨리 달려 이곳을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산에는 호환(虎患)이 많은데 해가 저물려고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경계심을 잃을까 두려워 억지로 채찍을 가해 골로 들어서니 곧 뽕밭과 삼밭 세계였다. 밭가는 소와 쟁기질 하는 농부가 들 사이사이에 있고 연기 피어나는 띳집이 산간 계곡 골골마다 있었다. 바라보자니 그림 병풍이 은은히 비치는 같아서 눈이 즐거웠다. 내가 두 벗에게 말했다.
“좁고 묶여 길이 없을 것이라 의심했는데, 산이 열리니 홀연히 마을이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동감하였다. 곧 원각리(圓覺里)에 다다라서 하루를 묵었다.
이곳은 이 상사(생원) 명윤(命尹)의 집이었다. 비록 빼어나게 기이한 경관은 없지만 홰나무 그늘과 돌과 너럭바위가 있고 산의 풍취가 골에 가득하여 또한 족히 소풍 나온 사람들이 즐거워할 만한 곳이었다.
주인은 닭을 잡아 밥을 하였다. 나가서 두 아들을 보았다. 나와 같은 티끌세상의 ‘반졸(飯卒)’은 비록 성문(聖門)의 ‘하인(下人: 騶率)’도 바랄 수 없지만, 이 상사의 풍치(風致)는 ‘은자(隱者: 植杖翁)’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 혹시 과거시험이 있어서 집 앞에 용을 새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과연 이 상사가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명백(李命伯), 이명계(李命啓)는 이 상사에게 무리로 따르는데, 늙은 유생 이명직(李命稷), 이명석(李命奭), 정시희(鄭時喜), 소년 정석규(鄭碩逵) 모두가 원근의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앞뒤로 와서 뵙거늘 지극히 공손하였다. 이른바 ‘서로 뜻이 통하는 것(傾盖)’이 옛과 같았다.
초봄에 촌사람이 범에게 잡아 먹혔다는 소문을 들었다. 노복들에게 밤에 나다니지 말도록 일렀다. 다들 말하였다.
“자네는 진짜 촌사람이다. 어찌 겁을 내는가.”
나는 말하였다.
“죽은 이의 뼈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다시 까부는가? 앞에서 낭패를 당한 일이 뒤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촌사람들로 하여금 그 낭패를 듣고 그런 일을 경계토록 하였다. 그 죽음을 보고 그런 일을 경계하도록 한 것이다. 내가 오늘 노복들을 경계시키지 않아서 어찌 거울삼지 않고, 경계하지 않은 자와 더불어 앞뒤로 같은 길에 빠지게 하겠는가? 하물며 저 으르렁거리는 맹수가 특히 한 결 같이 간악할 뿐이다. 흉악하기가 왕망(王莽)과 동탁(董卓) 같고, 포학하기가 예(羿)와 한착(寒浞) 같다. 호시탐탐 노리고 틈새를 타기가 ‘이 고양이’ 의부(義府)이고, 민첩하고 신속하기가 가화(賈禍)의 사도(似道)이다. 몰래 엿보고 숨어서 공격하기에 어디에 엎드려 있는지, 어느 때에 나타날지 모르는 즉, 보통은 임금이 근심하지 않는 일이지만 산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근심거리이다. 모두 호여와 군경 자네들이 앞으로 관직에 나아가면 어전(御前)에서 호환(虎患) 대책을 제기하기에 힘쓸 바이다.”
자리의 객들이 함께
“예, 그렇습니다.”
하고 말하며 자리를 파했다. 이날은 40 리를 갔다.
3) 열송재에 묵으며
20일 맑음. 이(李) 진사 명원(命元)은 명계의 형이다. 20년을 기이한 질환으로 정신이 소진되고 살이 빠졌다. 고을에 유부(兪跗), 편작(扁鵲) 같은 명의가 없어서 치료하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그 병에 대한 처방약을 들을까 싶어서 출발할 때에 나를 찾아와 인사하였다. 빛나는 외모가 아낄만하였다. 내가 이치로서 그를 격려하여 말했다.
“자네의 성급한 성품이 굳세고 방정함을 넘고, 그릇된 생각과 지나친 염려가 이런 병을 빚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마음을 화평하게 하고 심려를 평이하게 하여 근원을 평탄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약 처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여보라.”
이명윤, 이명계, 정석규가 또 더불어 동행하였다. 구미(龜尾), 일견(逸牽) 등의 촌을 거치는데 산을 끼고 들을 띠며 갔다. 길을 따라 물과 돌이 정자가 될 만하고, 대(臺)가 될 만하고, 닿는 곳마다 녹음을 이루었으니, 앉기에 좋고, 한둔(露宿)하기 알맞았다. 혹은 말을 세우고 말뚝으로 하고, 혹은 경치를 가리키며 헤아리고 완상하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서 돌아보았다.
독송정(獨松亭)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누운 반송(盤松)이 길가에 우뚝하게 서 있는데 굴곡진 것이 교룡(蛟龍) 같고, 헝클어진 솔잎이 노승(老僧) 같았다. 그 그늘에 자리 잡으면 사오십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참으로 김충암(金冲菴)이 이른바
“백성을 목말라 죽게 하는 불볕을 가리려고 하여,
장신을 구부려 바위 골짜기를 멀리 한다.”
는 것이었다.
다만 그 가까운 북쪽 한 가지가 바람과 눈에 눌려 부러져서 도끼로 베어냈다. 굳세고 곧고 높은 절조가 있었다. 옛말에 ‘송백(松柏)은 세한 연후에 잎이 마른다.’고 일컬었지만, 오히려 바깥 사물에 구부러지고, 절조를 빼앗겼으니 진실로 바람과 눈에 의한 고난이었다.
냇가에 돌병풍이 있고 병풍 아래에 반석이 있었다. 층층이 산의 뼈대이고, 물가에 앉을 수 있었다. 힘센 노복이 업고 물을 건너는데 돌 모서리를 딛는 발이 미끄러워 엎어질까 염려되었다.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 발이 넘어져도 바로 위험한데 하물며 벼슬길에서야?”
등나무 넝쿨을 잡고 벼랑을 따라 오르는데 걸음이 극히 어려웠다. 위태로운 곳을 거치고 험난한 곳을 건너서 모두가 소나무 아래의 돌 위에 모였는데, 깨끗하고 반질하여 자리를 깔지 않고도 앉았다.
이명계가 말을 잘하여 고을에 이름났다. 매번 호여와 익살을 부리는데, 나는 그 단서를 숨기고 그 기세를 도와서 우스개로 삼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 - 1572)의 <두류록(頭流錄)>에 말했다. ‘항간의 이야기 또한 한 산중의 좋은 일이다.’라고 한 것이 먼저 얻었다고 이를 만 하였다. 정엄은 또한 약속한 사람인데 우항리에서 부터 뒤쫓아 왔다.
충익위(忠翊衛) 이시발(李時發), 임고서원 노비 동천(同千)은 평소에 물고기를 잘 잡기로 이름났다. 모두가 ‘물총새(魚狗)’라고 불렀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서 광주리 가득 은비늘이 파닥거리는 것이 볼만하였다.
진사 이명윤, 이명계 형제가 먼저 가까운 촌에서 밥을 지었다. 회도 치고 국도 끓였으니 그 반찬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상하가 두루 앉아서 마시고 먹고 또 이화주(梨花酒)로 술을 마시니, <<장자(莊子)>>에서 ‘가까운 교외에 가는 자는 세 끼 밥만 가지고 갔다가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부르다’라고 한 그대로였다. 율시 한 머리를 읊었다.
“양산 같은 소나무 밑의 자리 곁에 작은 시내가 있고,
어여쁜 신록이 피는데 여린 고사리와 꽃향기라.
회 아래 뛰는 비늘은 가는 은실이고,
술잔이 전하는 뜬 거품은 잣 술 향기라.
바람 앞에 떨어지는 버드나무 꽃가루 잔설인가 의심되고,
바위 속에 피어난 꽃에 저녁놀 비친다.”
출발에 임하여 ‘물총새’를 다시 불러 상류 어디가 어장인가를 물었다. 이때 버드나무 가지가 처음으로 날리고, 바위 위의 꽃이 만발하였다. 맛있는 산나물을 캐는 여가에 또한 앞길에서 다시 그물을 칠 생각이 있었다. 그러하니 시어(詩語) 그대로였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비둘기가 병아리가 되려 하는데 깃과 나래가 완전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노비 아이에게 놀라서, 떨어지는 물을 날아 건너가는데 겨우 건너편 기슭에 올랐다. 내가 그놈을 가련히 여겨서 옛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앉아서 탄식하여 말하였다.
“태산같이 높은 나무 위에서 태어났지만 오히려 목동의 근심이 있는 것인가? 그 있을 곳을 잃고 스스로 둥지를 뒤엎는 환란을 취했으니, 가히 우리들의 먼 생각을 불러일으킴이 있다. 다만 나는 새가 사람을 의지하여 그 변고에 편안함을 얻었으니, 이른바 두려운 것이 두려워할 수 없고, 두렵지 않은 것이 두려운 것인가?”
정석규가 인사하고 돌아갔다. 좌중의 여러 벗들이 차례로 가는데, 산세가 점차로 좁아지고 바위 모양이 점차로 기이하였다. 이 골짜기를 겨우 지나자 저 골이 또 나오고, 한 굽이가 지나자 또 한 굽이가 나오며, 만상(萬象)이 다시 만상을 낳았다. 눈에 어지러운 것이 침류(枕流)의 괴이한 바위가 아님이 없었고, 또한 귀에 어지러운 것이 모두가 수석(漱石)의 우는 여울이었다. 마디마디 전진하였고, 걸음걸음이 아까웠다.
또 절구 한 머리를 읊었다.
“계곡 따라 저녁이 다할 때까지 객이 참됨을 찾으니,
면면이 기암이고 굽이굽이가 새로워라.
사람이 지령(地靈)이고 이곳에 살면 주인인데,
모름지기 다른 날 다시 객이 되지 말아야 하리.”
시냇가 길을 따라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어부가 그 산의 봄이 온 비밀을 걱정하지 않으니 골속의 모든 사람이 혹 나를 어부로 여기는 듯하였다.
검단(檢丹)에서 지평(知坪), 수전동(水田洞), 광천(廣川) 여러 마을을 지나 문암(門巖)의 동구로 곧장 들어갔다. 세이담(洗耳潭), 도덕방(道德坊), 초은동(招隱洞), 야연림(惹烟林) 모두가 길가의 명승지가 아님이 없었는데, 다 여헌 선생이 명명한 곳들이다. 곳곳의 한가로운 풍취가 볼수록 정신을 상쾌하게 하였다. 시를 읊으며 말몰이를 저절로 멈추게 하니 두 눈이 모두 현기증이 났다. 오직 해가 기울려고 하는 것만이 한스러웠으니, 무단히 뜻이 방자하게 되어 율시 한 머리를 지었다.
“맹렬한 더위 정오가 되어 변하고,
느티나무 버드나무가 몰래 하늘을 갈무리하였다.
빽빽한 푸름을 푸르게 하느라 체질이 만 번이고,
성근 푸름을 돕느라 천 번을 쌓는다.
시내 소리 맑아서 골을 삼키고,
상쾌한 숲 바람이 자리에 스며든다.
젊은 모임이 곧 노인을 쉬게 하고,
돛 자리에서 잠들어 옮기지 않는다.”
시냇물 가운데에 입암이 있는데 가까운 북쪽에 계구대(戒懼臺), 기여암(起予巖)이 있고 아래쪽에 상두칠석(象斗七石)이 있었다. 두 바위 사이의 돌 틈 곁에 거북이의 평평한 배와 같은 것을 터로 삼아서 5도리 3칸 집을 지었는데 동쪽 방은 열송재(悅松齋), 서쪽 방은 우란재(友蘭齋)라고 하였다. 그 가운데를 비워 일제당(日躋堂)이라고 집 이름을 삼았다. 여헌 선생이 띳집을 지은 곳이라고 전해오는데, 서원을 세운 뒤에 유림에서 새로이 누정을 지어 옛
사진6. 입암, 입암정사(일제당, 우란재, 열송재), 계구대, 기여암, 상두석, 소로잠
편액을 달았던 것이다. 옥빛, 붉은 빛 단청이 바위틈에 가만히 드리웠다. 바라보니 그림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또 절구 한 머리를 읊었다.
“입석 틈에서 도학을 닦고 갈무리하였으니,
구름 가운데의 집을 바라보니 그림 속 누각이라.
당년의 흥취를 찾아서 물과 산을 탐방하자니,
산은 절로 푸르고 푸르며 물은 절로 흐르더라.”
손(孫) 처사 여두(汝斗)는 멋스러운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자연을 너무 좋아하여 생업을 돌보지 않고 아름다운 경계를 만날 때 마다 머물러 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금 또 바위 물가로 옮겨 거주하다가 나의 걸음을 알고 그 자식 손시억(孫是檍), 손시장(孫是樟), 손시의(孫是椅), 손시가(孫是榎) 및 마을의 권륙(權稑), 권려(權穭)가 단(壇) 위에서 맞이하여 주었다. 나의 곤고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가련히 여겨서 내일 여헌 선생의 사당을 알현하라고 하였다. 내가 말했다.
“그대들은 잠자리가 정해진 연후에 어른을 뵙는가? 나는 비록 불민하지만 감히 악정자(樂正子)가 되고 싶지 않다.”
사진7. 여헌 장현광 초상
*여헌의 제자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선산부사 때 화공을 보내 그림
사진8. 입암정사 열송재 편액
원장, 이명윤, 호여, 군경과 함께 서원 묘우에 참배하고 여헌 선생의 영정과 지니시던 지팡이를 뵈오니 선생의 기운이 응결되어 있고, 선생의 기운의 정수가 배어났다. 얼굴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이 있고 희끗희끗한 수염이 선생의 60대 후반의 모습 같았다. 돌아와 일제당의 열송재에서 묵었다. 이 날 40리를 갔다.
4) 구인봉에 올라
21일 맑음. 권목(權穆), 권화(權和), 권득정(權得貞), 권득준(權得準)은 동네 사람들이다. 정시찬(鄭時贊)은 걸출한 사람이었다. 구미동(龜尾洞)에서 와서 어제 저녁부터 산사(山寺)에 머물고 있었다. 모두가 기쁘게 와서 만나고 나의 걸음에 동행할 계획이었는데 상하 50여인이 되었다. 함께 서원에서 밥을 먹으며 말했다.
“학교의 예규가 가히 선비를 기르는 두터움을 볼 수 있다.”
<<여헌집(旅軒集)>>을 펼쳐 다시 <입암기>를 상고하니 과연 일찍이 널리 본 것들이다. 아무 산 아무 물이라도 가히 역력하게 볼만한 곳이었다.
밥을 먹고 약정한 여러 벗들과 먼저 기여암에 올라갔다가 계구대에 내려와 앉았다. 가지가 처진 성근 솔이 수십 길 절벽에 유별나게 서 있는데 전전긍긍 벼랑에 매달려 있었다. 못이 깊었다. 어찌 ‘나를 일으키고(起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戒懼)’ 것이 아니겠는가?
입암 한 주먹이 그 앞에 치솟아 있는데, 사방이 10여 장(丈)이고 상하가 7-8심이며,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이며, 모나지 않고 뚫려 있지도 않았다. 바라보면 둥근 같고, 다가서면 네모난 같았다. 그 기세를 험하게 하는 것은 뒤로 구름이 머무는(雲屯) 높은 바위가 있고, 그 얼굴을 마주하여 앞에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구인봉)가 있다. 왼쪽으로 산지령(產芝嶺)이 있고, 오른쪽으로 소로잠(小魯岑)이 있다. 이 모두가 <입암기>에서 이름 붙인 모습이니 어느 겨를에 내가 하나 둘 이야기하겠는가?
서원 건물은 북쪽을 등지고 앉아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점점 비탈진 곳이 곧 만활당(萬活堂)의 옛터였다. 만욱재(晩勖齋), 수약료(守約寮), 주정협(主靜夾)이 모두 좌우전후에 베풀어져 있었지만 곧 산가(山家)가 좁아서 요사를 현재처럼 옮겨 세웠다. 내가 좌객(座客)들에게 일러 말했다.
“아깝다! 선생 당시에 아침저녁으로 보시던 곳인데, 풍수가(術士)의 말에 면모를 바꾸었으니 우리들의 수치라고 해야겠다.”
앞에서 잡아주고 뒤에서 도와주며 내려가 휴로단(休老壇)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걸어서 구인봉(九仞峯)에 올랐다. 봉우리는 입암 앞면에 있는데, 모아져 솟아 있으니 험준하여 발걸음이 극히 어려웠다. 내가 바야흐로 산을 예의 주시하는데, 사람들 모두가 나의 등산을 우려하였다. 내가 말했다.
“천리도 발아래에서 시작한다. 누가 일찍이 익재(益齋)의 시를 본적이 있는가? ‘천천히 걸어도 끝내는 또한 산꼭대기에 이른다.’ 내 어찌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아홉 길의 산을 쌓는 공을 이지러지게’ 하겠는가?”
혹은 앞서고 혹은 뒤따르고, 서로 붙잡아주고 서로 밀어주며 절정이라고 하는 곳에 올랐다. 위태로운 것은 입암에 비슷하게도 미치지 못하였지만, 그 높이는 입암의 배는 되었다. 사방을 둘러싼 층암이 서고 서며, 웅크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일어선 듯 엎드린 듯 하고, 병풍 같고 가게 같았다. 상투를 튼 것, 등뼈가 나온 것이 나는 봉황 같고, 누운 소 같고, 창고 같고, 누대 같고, 모양은 움푹하여 솥 같았다. 색은 고와서 짙붉은듯하여 푸른색을 배제 하였다. 눈썹먹을 닦아서 눈썹이 뜨고 머리를 드러내었다. 들쑥날쑥하게 조산(朝山)의 머리꼭지에 숨은 듯 비치는 것으로 격진령(隔塵嶺), 정운령(停雲嶺), 함휘령(含輝嶺)이 눈앞에 둥글게 벌려 있었다.
발돋움한 것, 엎드린 것, 가운데가 구멍처럼 파인 것, 머리가 양산 머리처럼 솟아난 것, 삐딱한 것 같으나 빼어난 것, 범처럼 웅크린 것, 달리는 말 같은 것, 앉은 승려 같은 것, 모자를 쓰고 가는듯한 것, 물위에서 노는 오리 같은 것, 가파른 바위, 깎아지른 절벽, 끊인 벼랑, 곧은 돌이 발아래에 서 있었다. 평야를 굽어보니 곳곳이 평지가 열렸고 아득한 땅이었다. 머리는 학봉(鶴峯)에서 일어나서 꼬리는 조월탄(釣月灘) 바깥에까지 뻗쳤다. 휴로단은 길게 비탈져 있어서 웅덩이 같고 불꽃같았다. 언덕의 숲은 서로 가려 이지러졌다.
메벼, 찰벼, 메조, 차조를 수확하지 않는 곳이 없고, 봇도랑과 밭두둑이 새겨져 있고, 마을이 옷 입은 듯 하며, 사이사이 서로 가려 있는데, 그 사이에서 농부들이 쟁기질하고, 호미질하고 있었다. 밭 갈고, 김매고, 거두어들이는데, 한 때 잠깐도 쉴 틈이 없었다. 경운야(耕雲野)는 모양마다 번갈아 나타나고, 빛깔마다 다르니 과연 자연의 조화가 무궁하였다.
밑의 한 층이 대를 이루니 피세(避世)라고 이름 하였다. 다시 휴로단을 찾아 내려가니 발걸음이 자못 멀어졌다. 모두가 말하였다.
“이제부터 곧장 내려가는 지름길이다. 힘든 발걸음이 염려스럽다.”
내가 말하였다.
“조심하여 걸으면 봄 얼음판도 건너갈 수 있는데, 하물며 몇 척의 산길 정도야 어떻겠는가?”
김진기로 하여금 앞서 가게 하고 그를 뒤따랐다. 두절된 산의 발치가 골짜기를 이루어 발걸음이 비록 어려워도 사람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아서 모두가 순조로이 내려왔지만, 한 사람이 돌 위에서 엎어졌다. 내가 말했다.
“험준한 것이라도 조심하면 안전하고, 평지도 얕보면 엎어지니 이치의 기세가 그런 것이다. 앞으로 이렇게 하산하는 마음으로 늘 삼가고 신중하여도 오히려 넘어지고 깨어지는 우려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대에는 상, 중, 하 3단이 있는데 둘레는 맑은 여울로 둘러있고, 돌이 매끄럽고 물결이 고요하여 유리 자리를 깔아 놓은 것 같았다. 혹은 양치질하고, 혹은 씻을 수 있으니, 아름답지 않은 땅이 없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머리를 읊으니 오직 뜻대로 되고 또 ‘혹은 문채 나는 바둑판에 옥 바둑알의 쩡쩡 울리는 소리가 물 밖으로 울려 퍼지니,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나무꾼이 거의 어찌 신선이 아니 될 것이며, 호천(壺天)과 동부(洞府)’도 이 보다 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소반의 음식을 하류에서 보내왔는데 듣건대 입암서원 손여두 원장(院長) 집에서 장만한 것이라 한다. 무리 모두가 배불리 취하니 과연 산중의 귀한 물건이었다.
뱀 한 마리가 참새 둥지를 덮쳐서 그 한 마리를 삼키고 나머지 새끼들이 흩어져 떨어지고 달려 내려갔다. 약자의 살은 강자의 밥이 되는 것이(弱肉强食) 자연의 기세라 할지라도, 모든 생명을 취하는 것은 또한 자연이 심하게 꺼리는 것이다. 음습한 독성을 가진 악당 두목으로 하나로도 심한데, 오히려 만족을 모르고 벼랑에 붙어서 내려와 다른 새끼들을 찾으려고 하니 진실로 눈 가진 사람은 함께 미워하는 바가 되었다. 김진기와 어린 노복이 돌을 던져 그 놈을 죽였으니 또한 유쾌한 일이었다. 처음엔 보고 분하였는데 끝에는 오히려 말하였다.
“어찌 그대의 손과 같이 쾌활하게 천하의 큰 간특한 놈들을 모조리 쳐 죽이지 않는가.”
손 원장이 말했다.
“위쪽에 욕학담(浴鶴潭)이 있는데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좌중에는 혹 동조하는 자가 있고 혹은 해가 저문다고 만류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 상엄대(尙嚴臺)를 지나고 낙문사(樂聞寺) 앞에 이르렀다.
절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있어서, 그 풍경이 옥이 부딪히는 것처럼 쟁쟁하여 참으로 이른바 정토세계였다. 전각과 당우가 비록 남아 있으나 담장은 모두 허물어졌다. 모두가 말하였다.
“여헌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에 창건되어 곧 입암서원에 소속되었다. 경상좌병영(兵營)의 침탈을 받아서 승려들은 모두 흩어지고 서원 또한 끝내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절이 심산유곡에 있어도 서원에 소속되어 의당히 관청의 잡역이 미치지 못할 것 같은데도 절집이 텅텅 비어 버렸는데, 하물며 촌민들의 3력 2공(三力二公)이야 오히려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또한 협곡의 백성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범이지만, 끝내는 하찮은 걱정거리는 오히려 관청에서 말미암는다. <<예기(禮記)>>에 이르지 않았는가? ‘가혹한 정치는 과연 범보다 사납다.’ 나 또한 욕되게도 7번 고을 원을 했지만 백성의 억울한 마음이 우리 문 밖에서 거의 두드린다. 이 절과 같이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진 곳이 무릇 얼마나 될 것인가?”
돌이켜 스스로를 살피자니 나도 모르게 놀라웠다.
돌을 밟고 숲을 뚫고 지나 무리를 이끌고 욕학담(浴鶴潭)에 이르렀다. 못의 기세가 서리 쳐 있고, 흰 돌이 땅을 덮고 있었다. 계곡물은 느리게 흘러 못이 되고, 급하게 흘러 여울졌다. 혹은 물길이 나누어지고 갈래졌으며, 혹은 합쳐서 한 갈래가 되어 흘렀다. 혹은 나무 그늘에 숨었고, 혹은 돌을 지나며 보이고, 혹은 크고, 혹은 작으며, 혹은 깊고, 혹은 얕았다. 옷깃을 여미고, 띠를 두르고, 굽어 돌아서 폭포가 되고, 낭자하고, 수면이 매끄럽고, 깊게 출렁이고, 밝고 깨끗하여, 한 점 티끌의 누추함도 저절로 이를 수 없었다. 참으로 검은 새가 눈처럼 씻겨 질만한 곳이지만, 화식(火食)을 하는 속세의 아전은 견디기 부끄러웠다. 절구 한 머리로 자조(自嘲)하며 말했다.
“욕학이란 이름의 못 돌은 등천하려 하고,
산 가득 어지러운 폭포수 층층이 희다.
가련타 십만 양주(楊州)의 객이여,
다시 나부끼며 달 아래 오름이 없구나.”
내가 일찍이 양주(楊州)의 절제사가 되었던 까닭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말했다.
“한스럽게도 젓대가 없어 왕자교의 생황이 쓸모없게 되었구나.”
정엄이 말했다.
“나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여기에다 ‘녹의홍상’을 더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좌중이 크게 논박했다. 갑자기 서원에서 술 한 동이가 왔다. 내가 말했다.
“누가 가져오게 했는가?”
정엄이 말했다.
“제가 누군지 모르나 이 술이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부터 어리석고 열등한 자의 이름을 뺀다.”
무리가 모두 배를 잡고 경하했다.
진세박(陳世搏)은 본 적이 없는 벗이었다. 오로지 한 달음에 받들어 초대하였다. 홀연히 푸른 숲 가운데에서 왔으니 또한 즐겁지 않았겠는가? 또 술 항아리와 술통을 들고 왔는데 항아리는 거북이 모양이고, 술통은 삶은 자라 같았다. 자라는 술을 깨우고, 거북이는 응당 술을 빨아들이니 또한 얼마나 기이한 것인지 몰랐다.
돌 위에 어지러이 앉아 소년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더니 또한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있었다. 산촌의 막걸리가 잔을 가득 채우고, 옥룡(玉龍: 여울물)이 무릎을 핍박하였다. 조금 취해 높이 읊조리니 우주가 유유(悠悠)하였는데, 이것은 과연 어떤 시절이었던가? 비록 유면화(劉綿花)를 좌중에 있게 하여도 단연코 장안에서 임금이 내리는 단술을 그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날 나는 정말 즐거웠다. 소호(小戶), 대짐(大斟)과 ‘탁족(濯足)’, ‘탁영(濯纓)’을 하느라 서녘의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줄 몰랐다. 또 칠언절구 한 머리를 읊었다.
“쌓인 비취빛 층층 구름이 저녁 빛에 가깝고,
옥류 흐르는 깊은 곳에 술잔이 나른다.
장편 가사 짧은 노래는 통속으로 부치고,
골짜기 가득 맑은 빛은 대략 돌아가게 한다.”
서원 노비 네댓 명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왔다. 서원 앞에 돌아왔을 때 마침 촌사람이 모친 장례를 하고 있는데 노소가 모두 길가에 모여 있었다. 일행 중에 서로 조롱하고 헐뜯어 말했다.
“어찌하여 조문하러 들어가지 않는가?”
내가 말했다.
“노래를 했으니 곡하지 않는다. 소당(蘇黨)의 의론을 일으킬까 두렵다.”
또 열송재에서 묵었다. 행보하며 술을 마신 일은 15년 이래 일찍이 없었다. 노곤하여 잠에 빠져들어 산마루 위로 달이 뜨고, 새벽이 오는 줄 몰랐다.
5) 호연정 오는 길
22일 맑음. 어제 저녁 원촌(院村) 사람의 상사(喪事)를 입암 앞길에서 만났는데, 바라보이는 곳에서 상여를 멈추고 제물을 차리고 꿇어 앉아 절하는 예절을 하여 또한 나도 부끄러웠다. 좌객 중에 혹 조롱하는 자가 있었다. 내가 말했다.
“거주하는 백성의 집이 대강 지은 것이 처마가 없고, 서민들의 상복이 오히려 옛 심의(深衣)를 답습하였으니 남녘의 풍속이 질박함을 숭상한다고 족히 말할 만하다. 하물며 저들은 제물 등을 올리는 예를 행하니, 상민의 상이라 할지라도, 칭찬은 해도 웃을 수는 없다.”
곧 여러 벗들과 더불어 시를 지어 오늘 여행을 기록하였다. 내가 먼저 읊었다.
“시 읊조리며 말 몰아 저녁에야 그윽한 바위에 이르니,
도체(道體)는 청명하고 경물(景物)은 한가롭다.
들은 경운(耕雲)이라 이름 하였으니 봄과 짝이 될 만하고,
여울은 조월(釣月)이라 명명했으니 밤에 의당히 낚시할 만하다.
한 구역의 형승이 보는 곳마다 다르고,
구인봉(九仞峯) 공부는 걸음마다 어렵다.
문득 세속 인연을 웃어도 사라지지 않는데,
위로 노닒이 다시없어서 석인(碩人)이 너그럽다.”
여러 벗들이 시를 차례로 이루었다.
급하게 다시 휴로단에 앉아서 밥을 먹고 술 몇 잔을 마시고 말을 몰아 나섰다. 권륙, 권려 각자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먼저 합류대(合流臺)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맑은 시내가 흐르고, 흰 돌이 가지런하였다. 두 물의 자락이 합하고 높은 병풍바위에 향기론 풀이 나 있으니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몇 잔의 술을 마신 뒤에 손여두, 권목, 정시찬, 권륙, 권화, 권려, 손시억, 손시장, 손시의, 손시가, 권득정, 권득준과 서로 헤어져서 다시 왔던 길로 접어들었다. 거치는 모든 곳이 흥미가 전에 비해 더욱 깊어졌다. 돌 하나 물 하나에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 졌다. 한 번 보았기 때문이었다. <<선경(仙經)>>에서 이르는 바, 7정 중에서 오직 애정(愛情)이 가장 좋은 것으로 치는 것이 정말 잘못된 말이 아니었다.
수전동(水田洞)은 경주 땅이다. 내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길을 정비한 것이 자못 근엄하였다. 내가 호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경주부윤으로 재임할 때 행정을 베푼 것이 은혜롭지 못하였는데, 백성들의 정이 지난 뒤에 더욱 진하여 낯이 붉어진다.”
독송정(獨松亭)에서 잠시 쉬었다. 비둘기 집을 보니 둥지가 비어 있었다. 한 번 패망한 뒤로 이와 같이 교훈을 삼으니 누가 비둘기가 보잘것없다고 말할 것인가 하였다. 정오 무렵에 구리내(求理內)의 성암(城巖)에서 쉬었다. 바위는 큰 하천 가에 있는데, 높이가 50장이 되고, 너비가 수백 칸은 되어, 길게 드리워져 있지만 벽이 자못 높지는 않았다. 내가 말했다.
“대장부의 몸과 마음이 이러하지 못한 즉 모두가 구차한 것이다.”
가까운 곳의 사인(士人) 김이일(金以一), 이명직(李命稷), 이명석(李命奭), 정시희(鄭時喜), 정석지(鄭碩趾), 정석재(鄭碩載), 정석붕(鄭碩鵬), 정석규(鄭碩逵), 정석관(鄭碩寬), 이명백(李命伯), 이명주(李命周), 이영화(李永華), 김성천(金性天), 김명천(金命天) 등 10여인이 장막을 치고 술과 밥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출신(出身) 정석명(鄭碩明)이 또한 먼저 와서 기다렸다. 그들 중에는 안면이 있거나, 이름을 듣거나, 이름과 안면을 따로 알거나, 성과 이름이 모두 낯선 자가 있었다. 나의 여행 또한 심히 피곤하여 더디고 빠르기가 헤아리기 어려워도 물과 돌이 쉴 만하였다. 탐문(探問)하여 와서 이와 같이 기다리니 우리 영남의 인심이 두터움을 볼 수 있었다.
김공(金公) 이일(以一)은 연세가 80세이다. 머리는 학처럼 희고, 얼굴은 아이처럼 맑으며, 밥을 잘 드시고, 걸음도 좋으니, 참으로 나라의 상서로움이었다. 얼굴을 대하니 나도 모르게 절로 마음이 공손하고 슬하에 있게 되었다.
유생 이명직(李命稷)은 자못 풍수지리설에 밝았다. 내가 말했다.
“많기도 하구나! 온갖 잡술이 이미 3황(三皇) 5제(五帝), 주공(周公), 공자(孔子) 이전에 나타났지만 오직 이 풍수지리설만이 장자방(張子房)에게 조금 보이고, 이순풍(李淳風)에게서 성행하였다. 과연 이것이 정도(正道)라면 여러 성인들이 어찌 단서를 내지 않았겠는가?
옛날에는 인심이 어리석어서 부모의 시신을 구렁텅이에 내버리고도 눈이 편안하고 마음이 태연하다가, 여우의 밥이 되고서야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시신을 덮으니, 비록 그 마음이 고졸하여 장례를 근엄하게 하지는 않아도 또한 그 화복이 없었음을 징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릇 사람이 보배 그릇을 얻어서 갈무리하여도 혹 그것이 긁히고 깨어질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효자의 마음으로 그 어버이의 유체를 장례하는 것인 즉 이것은 진실로 어떤 정리(情理)인가? 어떠한 예절도 털끝만치도 소홀할 수가 있으랴.
땅이 좋고 나쁜 것은 선유(先儒)가 모두 말하였다. 곧 그 기운이 모이고 기운이 흩어진다는 설을 가지고, 저것도 안락하고 이것도 안락하게 하려는 계획으로 삼고, 무릇 누가 불가하다고 하여도 장지(葬地)에서 이익을 바라니 이 또한 무슨 까닭인가?
부자의 골육지간에는 같은 기운을 나누어 가졌다. 양쪽은 상해를 줄 단서가 없는 즉, 그 뜻을 외쳐 그 아들을 타이르는 것은 혹 그럴 이치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가 병들어도 자식이 아프지 않고, 자식이 아파도 아버지가 아프지 않으니, 설령 좋은 땅을 얻어 장례하여 과연 <<청오경(靑烏經)>>의 말과 같이 할지라도, 죽은 자의 기운은 이미 끊어진 것이다. 결코 이어줄 사다리가 없는데도, 오히려 모든 것이 장지에서 말미암는다고 말하니, 어찌하여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일찍이 그 화복의 설을 세밀하게 연구해보았는데, 분명히 이것은 축교(笁敎, 불교)이다. 저 윤회하여 삼생이 되는 것에서, 전생은 사후의 정신이 없어지지 않다가 마침내 다시 몸을 받아서 현생이 되고, 현생이 죽게 된다. 또 다시 후생이 되어 끝없이 순환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이른바 윤회이다. 과연 이런 설과 같다면 사후의 남은 기운은 가히 골육의 친족에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유교의 정론에 따르면, 이기(理氣)의 생사를 관찰한 즉 현상은 무슨 기운이며, 추리하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주자(朱子)가 산릉(山陵)의 일을 논한 것은, 다만 땅의 좋고 나쁨을 말하여 부모의 장례에 삼가도록 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이와 같으면 자손에게 복을 주며, 이와 같으면 자손에게 해롭다고 말했겠는가? 그 본래의 뜻을 궁구하지 않고, 그 논지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일을 들어서 그런 것을 증명한다며 말하기를, ‘선유(先儒) 또한 이것을 법으로 삼았다’고 하니, 아! 또한 얼마나 심한 것인가.
만약 저것이 안락하면 이것도 안락하다는 설과 같다면, 단정해 말해 저 몸이 안락하다면 이 몸도 안락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저 몸이 안락한즉 이 몸이 복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산천이 기특하고 수려함을 잉태한다는 설은 옛사람에게 있었다. 좋은 산악의 기운을 얻어서 살면 생양(生養:낳고 기름)을 배태한다고 하면, 신백(申伯)과 미산(眉山)의 초목이 마른 것은 가히 분명한 증거가 된다. 가만히 생거(生居)의 정기를 말하면 과연 그런 이치가 있는 것이다. 죽어서 남은 기운이 산 자의 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또한 무슨 책에 보이는가?”
혹자가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대가 경주에서 음사(淫祀)를 철거할 때 먼저 성황(城隍)에게 고하고 음사들을 불 지른 것은 또한 화복의 권세를 기신(紀信)에게 돌렸는데, 지금 하필이면 이 법을 배척하여 이어짐이 없다고 말하는가?”
내가 말했다.
“음의 기운이 굽어(屈) 땅으로 돌아가서(歸) 귀(鬼)가 되고, 양의 기운이 펼쳐져(伸) 하늘로 날아가서 신(神)이 되는 것인즉, 음양 두 기운이 어울리어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이른바 ’양능(良能)’이라 하는 것이 민속에서 말하는 바의 귀신이 아니다. 복선(福善)과 화음(禍淫)의 천리가 밝고 밝은데, 저 이른바 경주의 총사(叢祀)들은 삼천년 세월이 흘러오며 숭봉처가 수십 곳이 되었다. 없음을 가리켜 있다고 이르며, 더러운 것으로써 예를 삼으니, 원근에 여파가 미치고, 서로 간악하게 속여서, 신도(神道)의 속임을 입은 것이 오래되었다. 그 허망함을 분명히 알았더라도, 오히려 차마 깨뜨리지 않아서 습속이 이미 고질이 되었고, 점차로 신도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성황에게 제사를 지내고 고한 것이다. 비록 전체적으로 귀신의 뜻이란 것이 없다는 것을 따를지라도, 또한 그렇게 하여 민중의 마음을 위안한 것이었다. 만약 그 화복을 두려워하고서 그렇게 했다면 처음부터 하필이면 강제로 하였겠는가?”
헤어지면서 이명윤, 이명계 또한 뒤떨어졌다. 다만 호여, 군경, 정엄, 진세박(陳世搏)과 더불어서 같이 임리동에 이르렀다. 나무 그늘에서 좀 쉬었는데 해가 서녘으로 저물고 있었다. 정석명이 멀리서 마중 와서 접대하는데 정말로 힘을 다하였다. 우리의 여행을 돌아보면 모두가 객이었다. 곧 그 집에 가니 즉 이른바 선원동의 환귀촌(還歸村)이었다. 꽃을 키우고 대를 심은 것이 자못 원림(園林)의 그윽한 정취가 있었다. 이날 50리를 여행했다.
6) 내연산을 꿈꾸며
23일 맑음. 정석달(鄭碩達)은 주인의 종제(從弟)로서 평소에 조검(操撿)한 선비였다. 해질 무렵에 내견(來見)하여 비록 인품이 어떠한지 몰랐으나, 듣건대 어버이에게 혼정신성(昏定晨省)하고 새벽에 사당을 배알한다고 하니 족히 가상한 것이다. 그 아들 정원양(鄭元陽)은 나이가 이제 16세인데, 이미 배움을 향한 뜻이 있어서 <<서경(書經)>>의 <기삼백주(朞三百註)>를 스스로 해독하니 지극히 사랑스런 아이였다. 다만 그 기상이 너무 부족하여 채우고 기르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내가 말했다.
“장경(長卿)은 천하를 주유한 뒤에야 비로소 가슴이 열렸다. 군은 모르지기 때때로 혹 산수 간을 방랑하여 그 기운을 기르는 것이 좋겠다.”
출발할 때, 정엄, 진세박이 길이 갈라져 어지러이 돌아갔다. 다시 임고서원에 이르렀는데, 원임(院任) 성후원, 이목, 죽림(竹林) 성하구(成夏耇)와 경주의 옛 아전 장흥경(蔣興慶), 서진(徐津)이 먼저 만나 정성을 베푸니, 모두가 예부터 바라던 것이라 환대하는 뜻이 두 손 가득하였다. 다과(茶菓)로 점심을 먹고 출발하며 서원의 책 300여 권을 빌려 왔다. 더불어 모인 객들과 호여와는 헤어지고 군경, 성하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경주 유생 권경기(權慶基) 등 3인이 머물며 기다리고 있었다. 군경, 성하구는 잇따라 돌아가고 온 집이 쓸쓸하였는데, 마침 관직 생활 할 때의 옛 얼굴들이었다. 그들과 다시 나막신 신고 내연산(內延山)의 산수를 답파하려고 도모하였다. 산령(山靈:산신)과 지온(地媼:지신)은 나의 마장(魔障)이 아니니 과연 형악(衡嶽)의 구름이 걷힐지 모르겠다. 이것으로 기록을 삼는다.
-<<甁窩先生文集>> 卷13 雜著 <立巖遊山錄>(韓國文集叢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