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하천(夏泉) 시총(詩塚)
1)시총비명병서
詩塚碑銘幷序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叅賛官柏巖鄭公詩塚 贈淑夫人 寧越辛氏祔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백암 정공 시총 증 숙부인 영월신씨 부
詩以塜亡於禮之禮也 詩(시)로써 무덤을 삼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다
先儒論招魂而葬者曰魂歸天魄歸地 선유들은 초혼하여 장사 지내는것 을 논하여 말하기를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육체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苟無體魄廟祀之而己魂氣不可得以葬也 참으로 체백이 없다면 사당에서 제사 지낼 뿐이다 혼기는 장사 지낼 수가 없는 것이다.
然則矢復而衣招者皆不可以塜獨詩者象其人者也 그런즉 화살로 복을 부르고 옷으로 초혼 하는 것은 모두 무덤을 할 수가 없으되 다만 시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 하는 것이다
可以當體魄以詩塚其亦不悖於禮乎 오직 시 만이 그 사람을 그릴 수 있어 체백에 해당할 수 있으니 詩塚(시총)도 역시 예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世必以葬骨爲幸葬詩爲不幸然 세상에서는 뼈를 장사 지내는 것을 가하다 여기고 시로써 장사 지내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나
纍纍荒原葬骨何限而終歸於朽滅 그러나 쓸쓸한 황원에 뼈를 장사지내는 것이 하고 많을 테지만 이는 마침내 썩어 없어 지는데 돌아갈 뿐이고
其人與詩終古而不朽者茲塚也何其偉哉 그 사람과 시 라는 것은 마침내 오래 되어도 썩어 버리지 않을 것 이니 이 무덤 이 얼마나 위대 하겠는가
公諱宜藩字衞甫其先烏川人鼻祖 高麗樞密院知奏事諱襲明 공의 휘는 의번이요 자는 위보이다.그 선조는 오천 사람으로 비조는 고려 추밀원 지주사인 휘 습명이다
六嬗而典工判書仁彦徙永川生光厚 本朝工曹判書 6대를 내려와 전공 판서 인언이 영천으로 옮기었다 다음 광후는 본조의 공조 판서이시고
其會孫從韶吏曹佐郎有文章節行於公爲五代祖 그 증손의 휘는 종소이시니 이조좌랑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이 있었으니 공에게 5대조가 된다.
曾祖諱次諱祖諱允良遊退陶門 再除寢郎不赴 증조는 휘가 차근이고 조부의 휘는 윤량이니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침랑에 두 차례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考諱世雅 贈兵曹判書行黃山察訪 부친의 휘는 세아로 병조 판서에 증직 되었으며 황산도 찰방을 지냈다.
妣一直孫氏縣監致雲之女以嘉靖庚申生公 모친은 일직 손씨로 현감인 치운의 따님으로 가정 경신년에 공을 낳았다
天資峻整又服義方之訓常靖處讀書脫略外務 공은 천성적인 자품이 준수하고 단정하였으며 또 의방의 교훈에 복종하여 항상 고요하고 정갈한 곳에서 독서하고 바깥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지내었다.
見蒼頭飼牛問誰牛蒼頭 笑曰郎君不知自家牛乎 사내종이 소 여물을 주는 것을 보고 누구 소냐고 물으니 하인 종이 웃으며 말하길 “낭군께서는 자기 집 소도 모르십니까.”라고 할 정도였다
以親命赴擧魁鄕試乙酉中司馬聲名蔚然非其志也 부모님의 명을 받고 과거에 응시했는데 향시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며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명성이 퍼졌으나 그가 지향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愛柏巖泉石築壇風詠沉潜庸學頗 有所自得 백암의 자연을 사랑하여 단을 쌓고 시를 읊조리며 중용 과 대학 을 깊이 연구하여 자못 자득한 바가 있었다.
壬辰奉父母避兵于山中百里負米以供焉 임진년에 부모를 모시고 산중에 피난하였는데 백 리를 등에 쌀을 지고 가서 봉양하였다.
及聞三京失守判書公雪涕倡義公從焉竭力賛畫 삼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판서공께서 눈물을 씻으며 창의하자 공이 이를 따라 힘을 다해 계획을 도왔다
每遇賊必皷勇先登 적을 맞닥뜨릴 때마다 반드시 북을 치고 용감하게 선봉에 섰다
時賊據永川公隨判書公登馬峴瞰賊屯因風縱火燒殺賊無遺遂復永川 당시 도적들이 영천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공이 판서공을 수행하여 말을 타고 마현 고개에서 적의 요새를 살피다가 풍세를 따라서 불을 놓아 적을 모조리 태워 죽이고 마침내 영천을 회복 시켰다
八月二十一日進攻慶州賊與左節度朴晋兵合判書公爲先鋒 8월 21일에 경주에 있는 적을 치러 진격하였는데 좌절도사 박진의 군대와 연합하고 판서공이 선봉이 되었다.
薄城下賊開門逆戰義兵殊死戰賊大䘐不能支乃 성 아래에 가까이 갔는데 적이 성문을 열고 역습하였다. 의병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도 크게 기세가 꺾여 지탱하지 못할 형세였다.
以奇兵出背後衝晋軍晋敗走義兵亦隨而潰 이에 기병을 배후로 내보내 박진의 군대를 치니 진의 군대가 패주하였고 의병도 따라서 후퇴하다 궤멸하고 말았다.
判書公陷賊陣與賊方力戰公大呼奮釰突圍而進賊大亂相失 판서공이 적진에 빠져서 적과 함께 힘껏 싸우고 있는데 공이 크게 외치며 칼을 뽑아 날래게 돌진하여 적을 에워싸니 적이 크게 혼란하여 우왕좌왕하였다.
判書公賴以出圍公不知也猶橫突徧求 판서공이 이 틈을 타서 적진을 탈출 하였으나 공은 이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좌우로 충돌하며 두루 찾아다녔다.
出而復入者三身被數十創 그리하여 드나든 지 세 번 만에 온몸에는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었으나
猶怒馬而前彎弓射賊賊應弦而倒 오히려 말을 채찍질하여 앞서서 전진하고 활시위를 당겨 적을 향해 화살을 날리니. 적이 활을 받고서 꺼꾸러졌다.
旣而所騎馬中丸爲賊所執賊欲降之公罵不絶口而死 좀 있다가 탔던 말이 탄환에 맞아 결국 적에게 포위 당하고 말았다.적이 항복을 받고자 하였으나 공은 적을 꾸짖으며 굴복 하지 아니 하고 죽었다.
方公之三入也顧其奴億壽曰軍敗父亡吾當死汝則去 바야흐로 공이 세 번쩨 들어갈 적에 그 종인 억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군대가 패하고 부친도 돌아가셨으니 나는 죽어야 마땅하나 너는 도망가거라.”하였다.
之億壽泣曰君臣父子奴主一也遂從而死異哉 그러자 억수가 눈물을 흘리며“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은 한 몸입니다.” 하고 따라 죽었으니, 기이하도다.
招諭使金公誠一聞公死驚歎曰茲非二百年培養之遺化歟遂狀聞于朝 우순사 김공 성일이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탄식하며 말하기를,“이것은 200년 동안 성인의 도리를 배양해 온 유화가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조정에 장계을 올려 보고하였다.
上嘉之贈戶曹正郎 임금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호조 정랑에 증직하고
一時交游爭爲 之誄判書公裒哀詞虛堋于騎龍山先兆壬坐原 한때 교유했던 친구들이 다투어 글을 만들어 조상 하는데 판서공이 애사를 모아서 기룡산 선영아래 임좌 언덕에 장사 하였다.
人謂之詩塚 사람들이 "詩塚(시총)"이라 일컬었다.
後恭人辛氏祔焉 뒤에 공인 신씨를 그곳에 부장하였다.
諸老先生如鄭寒岡申梧峯稱道公忠孝在遺集可考也 정한강(한강 정구)과 신오봉(오봉 신지제) 같은 여러 원로들은 공의 충성과 효성을 칭찬한 것이 유집에 있어 살펴볼 수 있다.
今上壬子因公之玄孫重器上言 贈左承旨 상이 임자년에 공의 현손인 중기가 상언한 것으로 인하여 좌승지를 증직하였다.
辛氏系寧越叅奉德麟之女無嗣以季弟守藩子好禮爲後縣監 신씨는 계보가 영월로 참봉 덕린의 따님이다.후사가 없어서 막내 아우 수번의 아들 호례로 아들을 삼으니 현감이시다.
生三男一女時相時僑時諶護軍女適呂爾和側室子二人時傑時振內外曾玄五十餘人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상과 시교, 시심이며 시심은 대호군이시다.딸은 여이화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시걸과 시진이며 내외 증손 현손이 50여 명이다.
嗚呼忠孝壯烈之氣乘風霆貫日月以山河爲棺棹以天地爲塋域無所往而不在 아, 충효의 장렬한 기개는 바람을 타고 올라 해와 달을 꿰뚫고,산과 하수로써 관곽을 삼고 하늘과 땅으로써 무덤으로 삼아서,가는 곳마다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니
彼一抔之虛實又何足論也 저 한줌의 흙이 虛(허)하고 實(실)한 것을 또한 어찌 족히 말할 필요가 있으리오.
然孝子歿不忘親忠臣死不忘國 그러나 효자는 죽어서도 부모를 잊지 못하고 충신은 죽어서도 나라를 잊어 버리지 않는다 하니,
茲乃先公之所封樹 榮贈之所表揭靈其焉往其必徜徉於斯矣 이에 선공께서 만드신 바요 영광된 증직을 드러내 표창한 바이니,신영은 그 어디로 가겠는가 반드시 이곳에 노니시라.
銘曰 다음과 같이 명한다.
謂國埀亡而亡其身 身亡而國不亡 忠哉 臣 나라가 망하였다 하고서 자기의 몸을 망쳤으나
그 몸은 죽었지만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충성스런 신하이여
謂父己死而辦其死 身死而父不死 孝哉子 아비가 이미 죽었다고 하여 죽음을 각오하였는데
그 몸은 죽었으나 아비는 죽지 않았으니 효성스러운 아들이로다
殉 君親而非吾有 身死綏如死牖 군주와 부모에게 순직 하고서 죽고서도 내가 차지하지 아니하고 몸이 죽어 버린 것을 마치 문 닫듯이 하고
依 君親而幽吾宅 詩以葬如葬魄 임금과 부모를 의지해서 내 무덤을 만드는데
詩(시)로써 장사를 지내는 것이 체백으로 장사지내는 것과 같이하는구나.
山可崩 海可渴 茲塚之兀 詩耶誄耶 不死公者節耶 산은 무너질 수가 있고 바다는 마를 수가 있으나 이 무덤의 높음이여 詩(시)야 祭文(제문)아 공의 절개는 죽지 않을 것이다.
嘉善大夫 龍驤衞副司直兼弘文館提學 同知義禁府 春秋館事 吳光運 撰
가선대부 용양위 부사직 겸 홍문관 제학 동지의금부 춘추관사 오광운이 글을 짓다.
崇禎後再甲申五十年十月日立
-湖叟先生實紀
*吳光運(1689-1745):1714년(숙종 40) 사마시를 거쳐, 1719년 증광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說書)에 올라 연잉군(延仍君: 뒤의 영조)의 서연관(書筵官)이 되었으며 승지를 지냈다. 1728년(영조 4)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校理) 및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서문을 썼다. 『약산만고(藥山漫稿)』가 있다.
2)경주성 수복 전투 기록
8월 초 박진이 권응수를 돌격장으로 삼아 직접 인솔하여 경주에 주둔한 적을 토벌하고 정대임과 나(정담)는 용감하고 날쌘 기마병 천여 명을 선발하여 비안과 용궁에 주둔한 적을 다 격멸했다.
15일 회군하여 하양 자인의 남은 적을 격파하고 진군하여 경주에 도착했다. 병사 박진은 도내 병사를 거느리고 과감하게 공격 못하고 미루어오다가 안강에 머물면서 공격할 기회를 관망하고 있다가 마침 우리와 합세하였다.
8월21일 경주성을 포위하고 서문을 격파하니 적군은 동남 문으로 도망쳤다. 아군은 북을 울리며 성중에 들어갔고, 조금 후 오시 경에 적병이 크게 동문에 이르니 성중은 진동하고 아군은 공포에 떨었다.
박진 군이 먼저 붕괴되어 서문으로 앞 다투어 탈출했다. 정대임이 참전용사들에게 말하기를 “동남문으로 달아나라! 서북은 방비하고 있다. 이것이 살아날 수 있는 옛날 주아부의 전술이다. 지금 군중의 정세가 무너져 비록 능히 막지 못할지라도 만약 서문으로 탈출하면 반드시 패망 한다.”고 하였다.
즉시 나(정담)와 더불어 정예병 수백 명을 인솔하여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동문으로 탈출하여 분황사 소로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적병이 서천 숲속에 잠복했다가 아군을 포위했다. 박진의 병력이 먼저 무너져 패배함에 영천 의사 최인제, 정석남, 김대해, 김연, 정의번, 이일장, 손현 등 수십 인이 다 순절했다.
박진은 권응수, 박의장 등을 시켜 군졸을 점검하고 안강에 돌아왔다. 이날 정대임과 정담은 박의장과 더불어 궁사를 연합하여 밤에 성 밑에 잠복했다가 진천뢰를 발사하여 성중 적진에 떨어뜨리니 적이 무엇인지 몰라 주워 모아 보다가 조금 뒤에 폭발하니 천지가 진동했다. 파편을 맞아 넘어져 죽은 자가 30여명, 파편을 맞지 않은 자는 역시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조금 뒤에 일어나 놀라서 검을 먹고 이것이 다 신력이라고 하였다.
이날 밤 적은 모든 군중을 데리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주하였다. 박진은 경주성에 나아가 남은 곡식 만석을 획득하고 마침내 복성했다.
이후부터 경상좌도 각 읍이 차차 수복되고 좌도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 영천복성의 공로라고 믿어진다.
영천 복성의 날 김윤국과 박진은 다 자기들의 공로라고 속이고 조정에 보고하여 관군만 상직을 받았고 의병의 공로를 몰라서 의병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것이 다 후세에 징비할 일이다.
-복재 정담, 임진난중일기
3) 현대시
詩塚
이종암(시인, 포항 대동고 교사)
말조심의 뜻으로 전해져오는 언총(言塚)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만나고는 캬- 무릎을 치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았건만, 얼마 전 한 평론집 서문에서 만난 시총(詩塚)은 왜 그리 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던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백암 정의번의 무덤. 시총의 주인공 백암공은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적에 포위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훗날 시신도 찾을 수 없어 그 아비가 아들의 옷과 갓을 들고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하여 빈소를 마련하고, 생전에 뜻을 나누던 지우(知友)들의 애사(哀詞)를 모아 관에 담아 묻으니 세상 처음 시총이 나온 바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기룡산 기슭 십만 평의 영일 정씨 하천묘역. 장방형 묘역에 돌올하게 솟은 80여 기의 무덤들 거대한 책 속의 무슨 글자들만 같다. 시총을 찾아가 비문을 손으로 찬찬히 읽고는 엎드려 절하니 사람 묻은 곳보다 더 깊은 무덤이다. 무덤 속에 있을 여러 편의 시와 공을 추모하며 봉분을 둘러보는데, 홀연 나비 두 마리 무덤을 열고 푸르륵 날아오른다. 나비 허공으로 날아간 궤적에 일순간 펼쳐진 문장을 나는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고 태산보다 크나니, 육신이 없어져도 마음은 남아 時空을 초월하여 通한다.> 무덤 속 백암공과 지우들이 남긴 시들도 나비처럼 날아올라 하늘의 별로 빛나는가. 어둠이 깔리니 열사흘 달빛 아래 하늘의 별과 땅 위 시총의 상응이 무한정 좋다. 시공을 건너는 저 시들은 비바람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겠다. 무덤 속 하얀 언어들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꾸 내게로 건너온다.
*나는 정진규 시인의 시집『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2009)에서 언총(言塚)을, 그리고 박현수 교수의 평론집『황금책갈피』(예옥,2006)에서 시총(詩塚)을 만나 이 시를 쓸 수 있었다.
개밥바라기塚
시를 묻어둔 무덤이라고 요즘 막 세상의 이목을 받고 있는 시총(詩塚) 바로 앞자리에 작은 무덤 하나 놓여있다. <忠奴億壽之墓>, 영일 정씨 문중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 붙들려간 주인을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한 노비를 어여삐 여겨 문중의 하천묘역 안에 고이 모셔놓은 것. 함께 죽은 주인의 무덤 시총보다 턱없이 작은 게 얼핏 보면 개집 같고 무슨 단추 같기도 하다. 이 작은 무덤의 사연을 세상에 내민다. 시총에 시가 있다면 노비 억수의 무덤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가. 시총의 주인처럼 노비 억수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면 이 무덤 속에는 대체 무엇이 묻혀 있는가. 마음이겠다. 주인을 구하려는 노비 억수의 마음, 그의 죽음을 안타깝고 고맙게 여긴 영일 정씨 문중의 따스한 마음이 여기에 있을 터. 그러면 이는 마음을 모셔놓은 심총(心塚)이다. 마음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여 세상의 빛깔을 바꾸게 한다. 또 마음의 깊은 자리는 세월을 넘어 이승과 저승에까지 이어져 썩지 않는 끈이 된다. 주인의 무덤 시총 앞 <忠奴億壽之墓>는 초저녁 초승달 위에 피어난 별, 개밥바라기를 닮았다. 개밥바라기塚이라 이름을 붙여드린다. 시총과 개밥바라기총 어울림의 앉음새가 하늘의 그림 같다. 개밥바라기총, 세월이 가도 그 자취 없어지지 않고 빛도 잃지 않겠다. 총, 총,.
9. 용계서원(龍溪書院)
원각리(圓覺里, 용산리) 소재.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1392~1480]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토곡동(土谷洞)에 건립되어 경은 이맹전을 비롯한 생육신을 배향하였다. 1786년에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노항동(魯巷洞)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7월 영천댐 건설 공사로 현 위치로 옮겨졌다. 그러나 『경북서원지』에는 1684년에 이맹전을 모시기 위하여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1759년에 생육신 조려,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용계 서원은 3칸 대문채를 통하여 들어가면 강당이 있고 그 뒤에 사주문을 통하여 사당으로 출입하도록 하고 사방으로 낮은 담장을 두른 속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가지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이익공계(翼工系) 형식의 5량 가로 건축된 누각식의 팔작집이다. 낮은 기단 위에 누마루를 높이 짜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전면 1칸과 측면에 툇간을 만들고 밖으로 난간을 둘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으며 가구는 3량 가이다.
용계 서원은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서원의 주변에는 경은 선생의 불천위 제사(不遷位祭祀)를 지내는 부조묘(不祧廟)와 제단(祭壇)이 있다. 용계 서원은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누각 형태의 강당은 흔하지 않은 모습으로 건축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계 서원 [龍溪書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0. 충효재(忠孝齋)
1)산남의진(山南義陳)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 의병 부대.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이 광무황제로부터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 부대이다. 초기에 정용기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1906년 9월 그의 석방을 계기로 의병진을 재편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신돌석(申乭石) 등 인근의 의병들과 연합작전을 벌이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의병진은 대장 정용기 이하 참모진이 전사하였다. 그 후에도 산남의진은 정환직과 최세윤(崔世允)을 중심으로 1908년까지 경상북도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반일 감정은 극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대표적인 의병 부대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원용팔·정운경·박장호 등의 부대, 경상도의 김도현·유시연·신돌석 등의 부대와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 의병, 전라도의 최익현·백낙구·고광순 등의 부대, 그리고 양서 지역의 우동선·전덕원의 부대가 있었다.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은 아들 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1906년 3월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했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 선봉장 홍구섭, 후군장 서종락, 좌영장 이경구, 우영장 김태언, 연습장 이규필, 도포장 백남신 등이 포진되었다.
산남의진은 영해 지방의 신돌석 의병부대를 후원하고자 북으로 진군하던 중, 경주 우각(牛角)에서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간계로 정용기가 체포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중군장 이한구가 지휘하였으나 7월 하순 경 해산하고 말았다.
1906년 9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포항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초 영일군 죽장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의병진은 괴멸하고 말았다.
그 후 정환직이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었으나 일본군의 추격과 탄약 및 식량의 부족으로 해산하였고, 대장 정환직은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되어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최세윤(崔世允)이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거동사(巨洞寺)에서 대장에 취임한 후 산남의진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1908년 7월까지 유격 활동을 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산남의진은 영남 지방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의병부대로 인근 지역의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고,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전개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남의진 [山南義陣]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충효재(忠孝齋)
충효재는 1905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영천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의 충효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네 이름을 검단동에서 충효동으로 고쳐 1923년에 건립하였다.
정환직[1843~1907]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정치우(鄭致右),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암(東巖)으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를 보내며 구국거의(救國擧義)의 뜻을 전하였다.
1907년 10월 7일 아들이 입암에서 영천 수비대소속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적군의 총탄에 의하여 순절하자, 의병장에 올라 국민들의 반일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다 결국 잡혀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용기[1862~1907]는 한말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의병장 정환직(鄭煥直)의 아들이다. 1906년 아버지가 고종으로부터 항일 거병의 뜻이 담긴 밀지를 받자 아버지에게 거병을 간청하였다. 1907년 10월 입암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 충효재 [永川忠孝齋]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백년만의 초청장(수필)
김희준
오월 마지막 날 나는 강호혁 님(47)과 그의 조부 산소가 있는 상옥 마을에 다녀왔다. 돌아 나오는 길, 천령산 샘재에서 굽어보는 동해바다 먹구름 위로 보름달이 붉게 오르고, 저녁 안개 속에 어링불(魚龍沙:영일만 모랫벌)의 불빛이 아스라이 깜박였다. 호혁 씨의 아들 형구의 중학시절이다. 수행평가 과제로 제출한 ‘나의 역사’에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가한 증조할아버지의 흑백사진 한 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진을 확대해 향토의 역사가 낳은 해월, 석곡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학교 사회실에 네 해째 걸어두고 있다. 형구는 전교학생회장을 하였고, 고교에 진학해서는 고려대학에 입학했다. 호혁 씨는 오늘이 마침 형구의 생일이라 하였다.
한국 현대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현충일, 6·10만세운동, 6·15남북정상회담, 6·25한국전쟁, 6·10민주항쟁, 기념일들이 유월에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무력을 앞세워 약소민족을 식민지로 삼은 제국주의에 대항해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동시에 사회 혁명과 민주화, 통일을 추구한 20세기 백년의 역사는 자연 환경이 근원적으로 파괴되는 21세기의 우리 삶에도 지구 자기장처럼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과 청이 각축하고, 이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충돌했다. 미국은 필리핀을, 프랑스는 베트남을, 영국은 인도와 미얀마를 침략할 때, 동학 농민 40만은 일제와 피어린 항쟁을 하다 스러져 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주권이 강탈당할 때다. 고종 황제는 시종하던 동엄(東?) 정환직(鄭煥直, 1844-1907)에게 제나라 경공(頃公)을 진나라 군 손아귀에서 방추보(?丑父)가 구한 <<사기>>의 ‘화천지수(華泉之水)’ 이야기를 물으며, 의병을 일으키라는 ‘짐망’(朕望: 짐은 바란다.) 두 자의 비밀 조칙을 내렸다. 동엄은 당시 일본공사와 친일역도의 내정 간섭을 탄핵하고, 구월산 동학 농민군들을 기지로 해산시키며, 도찰사로 경주부의 탐관오리를 조사하였다. 백범 김구가 동학의 소년 접주로 해주성을 공격하다 구월산 패엽사를 근거지로 활동할 때였다.
만민공동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며 애국 활동을 하던 아들 단오(丹吾) 용기(鏞基, 1862-1907)는 대장이 되고, 동엄은 총수가 되어 각지에 격문을 돌려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영천, 포항, 청송을 중심으로 맹활약을 한 ‘산남의진’ 의병이 1906년 3월에 일어난 것이다.
영천 충효리의 본진을 중심으로 경북 동남지역 원근의 각 지역 산악을 근거지로 하는 분진이 세워졌다. 경북 북부 지역의 신돌석 의병부대와 남북에서 활약한 산남의진은 강원도로 북상하고 이어 서울로 진공해 왜적을 몰아내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였다. 의진은 지방유생·농민·전직관료·전직군인·포수·광부·품팔이 등 양반과 평민 신분의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 하였다.
모병 소식을 전해들은 상옥의 강대근(姜大根, 1891-1957)은 친구 이규칠(李圭七)과 함께 그날로 영천 자양면 충효리 본진으로 찾아갔다. 정용기 대장은 15세에 이미 기골이 장대하고 마을에서 이웃의 어려움을 발 벗고 나서 도와주는 의기 장부로 소문이 난 17세의 강대근을 접견하고는 선봉대에 배치시켰다.
의진은 기록상 57회의 치열한 접전을 했다. 청하, 흥해 읍성을 3번이나 점령하고, 장기, 청송, 의성, 신령 읍성을 불 지르고 무기를 탈취했다. 청송 신성리, 건천, 자양, 북안, 신광, 기북, 주사산, 비학산, 남동대산, 북동대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청송 월매, 두마, 상하옥, 영양, 영덕, 일월산, 청도 운문산 등지에서 선전을 하였다. 영덕 유암, 청송 고아실, 팔공산 접전에서는 많은 희생이 났으며, 광천, 청송 도평 전투에서는 냇물이 의사들의 피로 물들었다. 보경사, 천곡사, 법광사, 해봉사, 기림사, 은해사, 대전사, 운문사 등 많은 사찰이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18세기에 중수된 운주산 안국사와 보현산 비상사는 전쟁 중에 불탔다.
자양 전투에서는 연병장 우재룡(禹在龍) 등이 적을 추격해 자양 분파소장과 적졸 3인을 잡아 목을 쳐 매달고 배를 갈라 쓸개를 이한구와 같이 씹으며, 을사오적과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고기로 여겼다. 다음날 왜병이 충효리 동엄, 단오 선생의 집을 불태웠고, 단오 대장은 그 적을 추격해 죽였다.
청송 방면에서 죽장면 입암(立巖)으로 들어 온 왜적을 포위 섬멸하려는 작전을 하던 중 뜻밖의 전투가 일어나, 많은 의병들이 밤새 산화했다. 새벽에 촌가에 들어가 군사들을 막 먹이려다 들이닥친 왜적의 총탄에 단오 대장, 이한구(李韓久) 중군장, 손영각(孫永珏) 참모장을 비롯한 본진의 많은 의사들이 희생되었다. 1907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독립운동사상의 대혈전이었다.
45세에 먼저 순국한 아들의 주검을 보고 조금도 슬퍼하지 않으며, 64세의 백발 노장 동엄 선생이 흩어진 의진을 수습하여 청하, 의흥, 흥해, 영덕 등의 읍성을 공략하며 노도와 같은 항쟁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청하, 청송, 기북 삼면에서 압박해 오는 적에게 북동대산에서 7일간 포위되었다가 청하 각전(角田-뿔밭-불밭-火田-내연산 수목원 터에 있었던 심양리)에서 동엄 선생이 체포되어 영천 조양각(朝陽閣) 아래 금호강에서 1907년 음력 11월 16일에 총살당했다. 선생의 절명시가 눈물겹다.
사진10. 정환직 유묵
身亡心不變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며,
義重死猶輕 의는 무거우나 죽음은 가볍도다.
後事憑誰託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까,
無言坐五更 말없이 새벽까지 앉았노라.
동엄, 단오 부자 양세(兩世) 대장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생존한 의사들이 일제강점기에 참동계(參同?)를 맺어 일제의 눈을 피해 불탄 집터에 충효재를 세웠다. 광복의 고유제를 올리고, 마을 이름도 해방 뒤에 검단리에서 충효리로 고쳤다. 양세 대장은 포은(圃隱) 정몽주의 방손이고, 임란 영천성 수복 의병장 호수(湖?) 정세아의 파손이다.
지난 토요일 오후 혼자서 충효리 양세대장의 산소에 참배 다녀왔다. 멧비둘기 구슬피 울고 흰 찔레꽃이 피어 창천(蒼天)의 의혼(義魂)인양 하였다.
이후 의진은 흥해 학전의 선비 최세윤(한)<崔世允(翰)>을 거동사(巨洞寺)에서 3대 대장으로 맞아들이고, 각 분진에서 독립적으로 항쟁했다. 최세윤은 일찍이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어난 을미의병 당시 포항 의병을 이끌고 안동의 김하락(金河洛) 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했던 터다. 1908년 7월 최세윤 대장은 장기 용동에 은신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의진은 해산되어 지하로 잠복하고, 또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서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체포되어 형산강을 지날 때 왜적에게 더러운 죽음을 당하기 싫어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랜 옥고 끝에 1916년 11일간의 단식 끝에
50세로 순국하였다. 아들 산두(山斗)는 일제에게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죽고, 부인 윤씨는 옥바라지를 하여 원수의 밥을 먹지 않게 하였으며, 남편의 체백을 고향에 모셨다. 양세대장과 최세윤 선생은 조선 양반의 ‘노블레스 오블레주’의 꽃이었다.
강대근은 본진이 무너진 이 무렵 이세기(李世紀)가 통솔하는 보현산(普賢山)부대에 소속되어 항쟁하던 중 1908년 봄 죽장면 일광에서 패하여 동료 의사들이 거의 죽고, 선생은 중상을 입었다. 여러 날 만에 소생하여 청송·영양 산간에 숨어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어쩔 수 없이 상옥 본가로 돌아왔다. 대삼(大參)으로 개명하고 항쟁의 불씨를 내면에 간직하며 살다 광복을 맞아 설분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발총을 가진 왜병에 맞서서 화승총과 죽창과 단검과 맨주먹으로 혈전을 했던 선생은 1957년 향년 67세에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화승총을 단지에 넣어 상옥 본가 뒤란 감나무 아래에 묻어 간직하였다.
해방이 되었으나 당장 독립되지 못하고 산하와 조국은 다시 냉전이라는 세계체제의 희생물이 되었다. 땅과 사람은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 광기와 불신의 시대에 선생의 조카 둘을 포함하여 상옥 사람 10여명은 ‘보도연맹(保導聯盟)’ 이라는 허울로 끌려나가 안강 육통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맏아드님은 오덕리에서 일주일간이나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제국주의의 망령이 겨레의 자아를 일그러지게 한 저주였다. 일제 강점과 냉전체제라는 역사의 거대한 격랑 속에서 형구의 증조할아버지는 침묵을 강요당하였다. 심지어 손자가 동네 반장을 맡은 것도 심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유월 초하룻날, 나는 기북면 오덕리 강말남(82세) 할머니를 뵈러 갔다. 강대근 선생의 2남3녀 자녀 중 생존한 막내 따님이다. 마을에는 ‘북관(北關:길주)대첩’을 거둔 임란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별장 애은당(愛隱堂)이 있다.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는 다만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만 들은 기억을 들려주었다. ‘혼인하여 영천 고경 미룡리 친정에 머물 때 사방에서 밤마다 총성이 들려왔고, 신랑이 장총을 메고 다녀갔다.’ 고 한다.
할머니 내외분 옆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제52회 현충일 추념식 초청장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대통령으로부터 6·25 참전 용사 증서를 받은 김국원 할아버지(83세)에게 온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다시 보니 ‘강말남 귀하’에게 보낸 ‘포항시장 박승호’님이 보낸 것이었다.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고, 양세 대장의 사손(嗣孫)인 정희영(鄭喜永)이 비명을 찬한 묘비가 산소에 세워졌다. 올해부터 법령이 바뀌어 따님에게도 보훈 연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1908년 봄 일광 전투에서 강대근 선생이 중상을 입은 이래로 대한민국 정부가 호국 영령 추념식에 그 따님을 초청하는 2007년 올 여름까지 꼬박 일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56년 만에 남북을 잇는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달렸다. 어찌 감격스럽지 않은가! 내 고향 마을에도 영천 남부 구룡산(九龍山)부대장 이형표(李亨杓) 선생의 산소와 기념비가 있다. 이 땅 높은 산, 험한 고개, 깊은 골 그 어디엔들 의사들의 의로운 피 스며있지 않겠는가. 짙붉은 석류꽃잎으로 겨레와 청사의 제단에 흩뿌려진 충혼의백들이시여! 오늘 현충일 진혼곡을 흠향하소서!
11. 입암서원(立巖書院)
1)입암28경
여헌선생문집
-입암(立巖)에 대한 기문
-입암(立巖)에 대한 설
-입암 정사(立巖精舍)에 대한 기문
-입암(立巖)에서 13수를 읊다.
○ 학욕담(鶴浴潭)
산은 낙문사 뒤에 있는데 / 山在樂聞後
이곳에 학욕이란 못이 있다오 / 有潭名鶴浴
학 또한 영물인데 / 鶴亦物之靈
그림자 끊기니 언제나 한번 목욕할까 / 影斷何嘗浴
-입암(立巖) 오언장편(五言長篇)
-정사(精舍)
-계구대(戒懼臺)
-피세대(避世臺)
-앞시내
-박인로(朴仁老)의 무하옹 구인산기(無何翁九仞山記) 뒤에 쓰다.
2)입암가
蘆溪先生文集 [立巖歌 二十二章]
-立巖 時旅軒張先生寓居本郡北立巖。公嘗從遊。代旅軒作此歌。
無情히서바회有情야보이다最靈吾人도直立不倚어렵거萬古애곳게선저얼구리고칠적이업다
江頭에屹立니仰之예더옥놉다風霜애不變니鑽之예더옥긋다사람도이바회면大丈夫가노라
卓然直立니法바담즉다마구깁흔峽中에알리잇사자오랴努力躋攀면奇觀이야만니라
-精舍
草屋두세間을巖穴에부쳐두고松竹두빗치病目애익어시니이中에春去秋來를아므젠줄모로다
-起予巖
夫子의起予者商也라드러더니오起予者말업바회로다어리고鄙塞던미암이절로새롭다
-戒懼臺
戒懼臺올라오니믄득졀로戰兢다臺上애살펴보며이치저홉거든못보고못듯히야아니삼가엇지리
-吐月峯
峯頭에소슨이이山中의비취노다九萬里長天이멀고도놉건마高山이揷天니돌우흐로나덧다
-九仞峯
巍巍九仞峯이衆山中에秀異코야下學工程이이山하기갓건마엇디라이제爲山은功虧一簣게오
-小魯岑
南魯岑이일홈을뉘라서지은게오夫子登臨도이東山아니런가萬古靑山이只麽히놉하시니아모줄모로다
-避世臺
名利예지업서오막집고訪水尋山야避世臺예드러오니어즈버武陵桃源도여긔런가로라
-合流臺
合流臺린물이보기예有術다彼此업시흘러가고左右에逢源니分時異合處同을이臺下애아라고야
-尋眞洞
尋眞洞린물이巖下애구븨지어不舍晝夜야亭子압드러오니어즈버洛水伊川을다시본여라
-採藥洞
솔알아들아네얼운어가뇨藥러가시니마도라오렷마山中에구룸이겁후니간곳몰라노라
-浴鶴潭
浴鶴潭근물에鶴을조차沐浴고訪花隨柳야興을고도라오니아무려風乎舞雩詠而歸들블을일이이시랴
-數魚淵
淵泉이하말그니가고기다보닌다一二三四를낫낫치혜리로다童子야새물에고기를다시헤여보아라
-響玉橋
磯頭에누엇다가라니이다靑藜杖빗기집고玉橋를건너오니玉橋애근소를자새만아놋다
-釣月灘
낙대를빗기쥐고釣月灘라려불근역귀헤혀고알안시니아모려桐江興味불을주리이시랴
-耕雲野
沮溺의가던밧치千年을묵어거구을허혀드러두세이렁가라두고生涯를足다사가마부거업노왜라
-停雲嶺
停雲嶺라보니天中에두렷괴야陟彼崔嵬면五雲蓬萊보련마病目애눈물이얼니바보기아득다
-産芝嶺
産芝嶺올나오니一身이香氣롭다四皓商山도이芝嶺아니런가山路애구룸이깁흐니아모줄모로다
-隔塵嶺
隔塵嶺하놉흐니紅塵이머러간다득이먹은귀싯슬록먹어가니山밧긔是是非非를듯도보도못로다
-畫裏臺
江上山린긋솔아너분돌해翠嵐丹霞ㅣ疊疊이둘러시니어즈버雲母屛風을그린여라
[주-D001] 미 : 마
3)입암서원(立巖書院)
1657년(효종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3년(숙종 29)정사진(鄭四震)을 추가배양하고. 그 뒤 권극립(權克立)·정사상(鄭四象)·손우남(孫宇男)을 모시게 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3년에 강당이 복원되고 1974년에 묘우가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3칸의 강당과, 부속건물로 1605년에 설립된 일제당(日躋堂), 1609년에 설립된 만활당(萬活堂) 등이 있다.
묘우에는 장현광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권극립·정사상·손우남·정사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부속건물은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다.
이 서원의 일원에서는 매년 2월 하정(下丁 : 세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유물로는 장현광의 영정과 마상도(馬上刀)·지팡이·좌장(坐杖) 등이 있다. 이 서원의 일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내의 향나무는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입암서원 [立巖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