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방안전 교육이 있는 관계로 연수관 內에서의 일입니다.
앞에서 어떤 아가씨가 분홍색 원피스 차림에 분홍색 구두를 신고
“똑 깍” “똑 깍” 소리를 내면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가씨의 분홍색 원피스가 예쁘네, 걸음걸이도 예쁘네,
똑깍, 똑깍 소리까지도 예쁘네 등등 여러 마음들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햐, 이제 것 이런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고 있다는데에 관심이 없었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 소리가 빤냐띠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직 것 아무 생각 없이 빤냐띠로 되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이런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보면서 계속 신기해 하였습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직접 경험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어나는 마음들이 계속해서 빤냐띠로 가는 것을 봐야만 하나?
아님, 어디서 끊어서 봐야 하는가?
빤냐띠의 역할이 어떻게 빠라마타화 되어 질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연 이틀 소방안전 사이버교육이 있었습니다.
그 교육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반복해서 알아야 하는 내용들,
그리고 마지막 TEST 점수가 60점 이상이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으면 재교육 등 아주 성가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육에 집중하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집중이 잘 되지 않습니다.
집중이 될려고 하면 대상이 마음으로 보이면서 사라져버립니다.
물론 교육하는 실내공간의 특성상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교육에 집중할 때다, 집중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집중을 해야 되겠구나, 우선은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집중’과 ‘집중아님’을 어떻게 잘 구별해야 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 우선 사야도 법문집 Dhamma everywhere에 실린 글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개념(paññatti)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想(saññ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 두십시오. 개념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줄이려고 하고 있지만, 개념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개념이 없다면, 걷거나 계단을 오르는 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상(想/sanna)의 기능이나 그것이 만들어 내는 개념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실재하는 것(paramaha)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사야도 법문은, 질문자의 <그러면서 이 일어나는 마음이 계속 빤냐띠로 가는 것을 봐야 하나? 아님 어디서 끊어서 봐야 하는가? 빤냐띠의 역할이 어떻게 빠라마타화 되어 질까?>라는 의문점에 대한 思慧의 고찰이 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통찰지 수행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손을 대는 것(나의 번뇌로서 개입하거나 상관하고 간섭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뭐가 되었든지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대상으로서 알아차림하는 것이지,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어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알아지는 대로 알면 될 뿐입니다. 관찰하는, 보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일어나는 대상을 많이많이 사띠해서 뒤에서 보는 마음의 힘을 길러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지혜가 자라서 나중에 성장하고 능숙해지면 할 줄 아는 지혜가 알아서 보다 더 넓고 깊게 이해하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빠라마타 지혜가 나는 것이 관건인 것에는, 빤냐띠 법까지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왜 생겨나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하니 사라지는가? 사라졌다면 그게 다 사라진 것인가?
그럼 안 사라지는 것은 또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란 또 무엇이고 어떤 것인가? 양쪽의 이치, 관계에 대해서 알만큼은 다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진정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라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대상이 바뀌게 됩니다. 빤냐띠(속제)도 알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뭐가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에 대해 능숙하게 이해할 줄 아는 지혜,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볼 줄 아는 통찰지, 위빠사나 지혜로서 양쪽을 다 이해해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 알아야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상(산냐)의 작용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을 끊어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해야 하는 겁니다. 쉐우민 큰 사야도께서는 대상을 (끊어서)없애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 인하여 생기는 번뇌를 지혜로서 없애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지혜로 없앤다는 것이 어떤 것을 말하겠습니까? 팽팽한 줄을 잡아당겨서 끊어지게 한다거나 가위로 끊어버리는 의미겠습니까? 마음을 끊어버릴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이나 언어적, 물리적 용어의 의미에만 치우치지 마십시오. 마음이 직접(프랙티스) 작용하고 일하는 것을 사띠를 두고 보면서 경험하고 체험해서 알고 이해하십시오.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이 비로소 常識이 될 수 있습니다.
수행에 있어서 '집중'과 '집중아님'의 관계는 어떤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마음이 작용하는가의 이해문제로 보면 좋을 듯싶습니다. 여기엔 물론 문/사/수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오픈성 내지 공간성과도 연계된다고 보여집니다. 지혜 내는 사띠작용과, 그와 상반된 마음작용의 관심이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여집니다.
대상 쪽만 볼 때와, 대상과 아는 마음 쪽을 함께 보는 차원에서 구별되고 분류되어질 것입니다. 대상과 아는 아음이 항상 함께 해야 된다는 이 관계는 사실, 집중을 할래야 할 수 없는(집중아님) 통찰적 止觀관계이기도 합니다.
일어나는 대상이 뭐가 되었든지 다 받아들여 놓고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그래서 이미 이분법적 경계가 해소된 상태(동시적공간성)의 연기적 관계로서 대상과 아는 마음, 양쪽을 인정하게 됨으로서 비롯되는 관용. 자애, 연민, 이해 등 慈悲喜捨的 양질의 꾸살라-선법이 이끌어 갈 것이기에 말입니다.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죠. 부정하는 마음에서 낄레사, 번뇌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Moha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번뇌는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가 있는 마음에는 결코 지혜는 나지 않습니다. 머리칼 한 올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원인/결과, 연기 법칙이죠.
U수행자/ ‘집중’과 ‘집중아님’의 질문은, 어떤 새로운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면 집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적었습니다. 그냥 읽어서 이해하고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이때 아는 것까지 하면 이해도 안 되고 아는 것에 힘이 들어갈 때는 내용이 사라져서 내용 파악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고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님/ 네, 아직은 보는 법이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동안 뭐든지 볼 때 집중(힘써서)해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띠없이 살아온 세월, 동안을 의미합니다. 아는 것에도 지혜로 아는 것과 생각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이 또한 잘 분류하고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집중한다는 말을 사람들은 언어적, 용어적, 물리적인 의미만을 두고 그 방향으로 무의식적으로 훈습되고 습관들여졌기 때문에 그 생각으로만 행하려고 합니다.
실질적인 마음이 작용하는 걸로서 이해를 해야 하는데도, 대부분 사람들이 언어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로만 생각하고 그렇게 다루어 왔습니다.
어떤 수행자에게 힘을 써서 (대상을) 보았다고 하면 자신은 힘을 안 썼다고 합니다. 힘을 쓰고, 안 쓰고 라는 것도 집중이라는 언어적, 물리적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가 있어야 하고 지혜가 수행하는 통찰, 위빠사나 수행인 것입니다. ‘노력’도 집중하는 것과 이해하는 통찰수행과는 다릅니다. 알고 알고 알기만 하고 알아가는 수행에 있어서는 그다지 힘을 소모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사띠사미디가 이어지고 가속도가 붙어서 지혜가 생기도록 꾸준히 오랫동안 해주면 될 뿐입니다.
보는 마음가짐과 그 작용의 문제입니다.
U수행자/ 네, 어떤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이제 조금 이해가 됩니다. 집중이란 마음의 작용을 모르는 상태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즉 대상과 아는 마음이 없는 상태이군요.
스님/ 한마디로 사띠 없이 보는 것, 보는 마음에 사띠가 없거나 아직 약하거나 나중엔 지혜가 나지 않을 것 같으면 다 모하(Moha)이기에 집중, 힘씀으로 보는 것(인식&지각)이 됩니다.
그래서 보는 마음에 사띠&지혜가 없을 것 같으면(번뇌 있음/함수그래프) 보는 힘이 약하거나, 볼 줄 모르고, 안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質 또한 당연 안 좋겠지요.
U수행자/ 대상과 아는 마음.. 이 관계가 점점 새로운 이해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오온의 의미, 마음작용의 의미, 물질과 마음의 작용, 마음과 마음의 작용 등등 점점 그 의미가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자세하게 본다, 더 예리하고 날카롭다, 사띠가 더욱 조밀해졌다 등 그 뜻이 다양하고 새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 앞으로도 알아야 할 게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 새록새록 재밌고 신비할 게 아주 많아지겠지요. 아울러 수행, 법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 또한 진지하게 새록새록 일어나겠지요?~^^*
U수행자/ 어느 대장경에 관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영국 비구니 스님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탐구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본인도 그 탐구 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수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새록새록 일어나는 것에 탐구심이 불 타 올라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 yes! 그래서 사야도께서도 탐구&연구, 조사하는 수행자들을 더 좋아하고 관심 있게 보시는 듯싶습니다. 인터뷰 때도 서양인들 인터뷰에 더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는 듯 보이는데 이를 두고 한국 수행자들이 불평의 토를 다는 걸 보면..ㅎㅎ 이는 순전히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이나 서적에 나오는 것도 본인이 직접 통찰해서 보면 엄연히 차이가 나고 다르다는 부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 통찰해서 탐구하고 조사해서 이해해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법이 말해주는 걸 듣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에 학문적인 이론서나 주석서 등등은 잘 안 봐지기도 합니다.~^^*ㅋ
U수행자/ 네, 새로운 이해가 자꾸자꾸 생깁니다.
스스로 이해해야 맛깔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