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테러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글 : 2015-1-10
번역 : 정민(탈근대철학연구회 연구원)
정말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는가?
샤를리 엡도에서 벌어진 학살 이후로 우리 모두가 큰 충격 속에 있는 바로 지금이 남아 있는 용기를 끌어모아 내 생각이란 것을 해볼, 딱 알맞은 때다. 우리는 당연히 자유의 본질에 대한 공격으로서, 이번 학살을 단호히 비난해야 한다. 그리고 학살을 저지른 자들을 비난해야 한다. (“그건 그렇지만 사를리 엡도가 이슬람 신도들을 너무 심하게 모욕하고 도발하긴 했어.”식의) 숨겨진 경고문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치단결한 전지구적 분위기만으론 부족하다. 우리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해봐야 할 그 생각은 범죄에 대한 천박한 상대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한 행위를 비난하기에는 서방세계에 사는 우리는 제3세계에서 끔찍한 학살들을 저지른 범죄자들”이라는 따위의 신비로운 주문 같은) 심지어 그것은 많은 서구의 자유주의 좌파들이 이슬람포비아로 보일까봐 두려워하는 그 병적인 공포와도 상관이 없다. 이런 거짓 좌파들에게는, 어떠한 이슬람에 대한 비판도 서구의 이슬람포비아를 표현한 것으로 공공연히 여겨진다; 살만 루시디도 불필요하게 이슬람신도들을 도발하여 종교적 처형 명령 파트와(『악마의 시』라는 살만 루시디의 작품에 나타난 모하메드에 대한 묘사에 불만을 품고,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1989년에 시아파 교도들에게 살만 루시디를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림. *번역자 덧붙임)에 처해졌다는 식으로 (적어도, 아주 조금은) 루시디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공공연히 여겨졌던 것 말이다. 그러한 입장의 결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거다: 서구의 자유주의 좌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죄책감을 파고들수록,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들은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숨기려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여겨질 뿐이라는 것. 이러한 이치는 완벽하게 초자아의 역설을 재현한다: 당신이 대타자의 요구에 더 많이 복종할수록, 당신은 더더욱 죄책감에 빠지게 되고, 마치 만약에 당신이 이슬람에 더 관용적일수록, 그 감내하라는 요구는 자꾸 강해질 것이라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내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너무 과하게 반응하지도 말고, 너무 공공연하게 학살의 여파를 이야기하지 않는, 끔찍한 하나하나의 지나가는 사건으로서 대응하자”는 식의 사이먼 젠킨스(1월 7일자 가디언지에서)의 노선을 따라 중용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샤를리 엡도에 대한 공격은 그저 “그냥 지나가는 끔찍한 사건”이 아니다. 이 일은 명확하게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기획을 따른 것이며, 게다가 분명히 훨씬 더 큰 흐름의 한 부분이다. 만약 그것이 맹목적 이슬람포비아로서 항복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물론 우리는 지나치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패턴을 가차없이 분석해야만 한다.
테러리스트들을 영웅적 자살 광신자들로서 악마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필요한 것은 이러한 악마적 신화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서구의 문명이 어떻게, 아무런 열정도 없고 어떠한 헌신도 없는 냉담한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인간의 방향을 따라 움직여 왔는지 인식했다. 삶에 지쳐 꿈꿀 줄도 모르는 그는, 오직 편안함과 안전함만을 추구하며,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으로써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으려 한다: “때때로 즐거운 잠을 위해 약간의 독이 필요하지. 나중엔 즐거운 죽음을 위해 많은 독을 쓸 수도 있어. 사람들이야 낮이나 밤이나 작은 즐거움들을 찾는 법. 하지만 항상 건강도 신경 써야 하지. ‘우린 결국 행복이란 걸 발견했지.’라고 최후의 인간들은 말하더니, 눈을 한번 깜빡였다.”
이러한 니체의 문구는, 모든 게 허용되는 제1세계와 그것에 대한 정반대의 입장을 추구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반응 사이에, 그리고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풍요로운 삶과 초월적 명분에 생명을 바치는 근본주의적 삶 사이의 차이를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차이로서의 적대야말로 바로 니체가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불렀던 것 사이의 그 적대 아니겠는가? 우리 서구에 사는 니체주의적 최후의 인간들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걸고 자기 파괴에 이를 때까지 투쟁하는 삶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일상적 즐거움 속에 빠져 살고 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재림”이라는 시는 현재 우리의 곤경을 완벽하게 나타내준다: “가장 선한 자들은 신념을 잃었다. 바로 그때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가득 차 있다” 이 시구는 바로 지금의 무기력한 자유주의자들과 열렬한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훌륭한 묘사 아닌가. “악한 자”들이 인종차별주의적, 종교적, 성차별적인 광신에 헌신하는 동안, “선한 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열렬히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정말 들어맞는가? 명백히 테러리스트들에게 부족한 것은, 티벳의 불교신도들로부터 미국의 아미쉬 교도들을 이르는 진정한 근본주의자들에게 분명한 이런 특징이다: 진정한 근본주의자는 시기심과 분노가 없다는 그 점, 무신자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말이다. 만약 오늘날의 소위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이 진리에 이르는 길을 이미 찾았다고 믿는다면, 왜 그들은 무신자들에게 위협당한다고 느끼는가? 왜 그들은 무신자들을 시기하는가? 진정한 불교신자가 서구의 쾌락주의자를 만나면 그는 쾌락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쾌락주의자의 행복 찾기란 자멸적인 것임을 자애롭게 지적할 뿐이다.
진정한 근본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유사-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은 무신자들의 죄악으로 가득 찬 삶을 심하게 성가셔하기도 하고, 그것에 의해 호기심을 느끼고 매혹당하기도 한다. 그 죄악으로 가득 찬 서구인들과 싸우는 와중에, 그들은 자기 본연의 유혹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곤경에는 예이츠의 진단이 부족한 이유가 여기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품고 있는 그 격정은, 사실 진정한 신념 부족을 증언한다는 것. 주간 풍자 신문의 멍청한 캐리커처 하나에 위협받는다고 느낀다면 이슬람 신도들의 믿음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는 소비지상주의 문명세계의 맹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의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의 보호수단에 대한 필요나 그들 자신의 영적 우월성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과 관련된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우리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은밀하게 자기 자신을 열등하다고 여기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우월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그 생색내는 듯한 정치적 올바름이 단지 그들을 더 분노하게 하고 그들의 적의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되는 이유이다. 문제는 문화적 차이가(그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노력 또한) 아니다. 문제는 정반대의 사실이다. 그 근본주의자들이 이미 우리처럼 되었다는 것, 그들이 이미 우리의 기준을 내면화했으며, 그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근본주의자들이 진정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인종차별적 신념이다.
이러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최근의 융성은 발터벤야민의 오래된 혜안, 바로 “모든 파시즘의 부상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이 맞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파시즘의 부상은 좌파의 실패가 맞다. 하지만 동시에 좌파가 일구어내지 못한 혁명적 가능성, 불만들이 잠재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소위 “이슬람-파시즘”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는 없는가? 급진 이슬람주의의 부상은 이슬람 국가들안의 세속 좌파의 사라짐과 정확히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파키스탄의 한 지방인 스왓 밸리를 탈레반이 점령했던 2009년 봄으로 돌아가 보면, 뉴욕타임즈는 탈레반이 몇 안 되는 부농지주계급과 그들의 소작농들 사이에 심각한 균열을 활용한 계급 투쟁을 조장했다고 보도했었다. 그러나 만약에 탈레반이 농민들의 가난을 “잘 이용해서 광범위하게 아직도 봉건적으로 남아있는 파키스탄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면, 도대체 미국이나 파키스탄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 탈레반들이 했듯이, 자기 땅이 없는 농민들의 가난을 “잘 이용해서” 그들을 돕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사실의 슬픈 함의는 파키스탄의 봉건적 질서들은 자유민주주의의 “태생적 동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의 핵심가치가 뭔가? 자유, 평등 등이 아닌가? 모순은 이것이다. 자유주의 그 자체는 근본주의자들의 총공세에 대항할 충분한 힘이 없다는 것. 근본주의는 일종의 반응, 자유주의의 진짜 결함에 대한-물론 잘못된 반응으로서의-반응이다. 좌파 그 자체에게, 자유주의는 좌파 스스로를 천천히 붕괴시킬 요인이다. - 좌파의 핵심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좌파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 핵심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유주의는 급진좌파의 형제애적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것만이 자유주의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을 휩쓸고 있는 근본주의를 물리칠 유일한 방법이다.
샤를리 엡도 학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한계 없는 자유를 뽐내는 자기만족을 버리고, 자유주의의 관대함과 근본주의의 갈등이란, 결국 -두 양극단이 서로를 전제하고 정립하는 악순환으로서-거짓 갈등이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이미 1930년대에 파시즘과 자본주의에 대해 했던 그 말은 -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길 원치 않는 자들은 파시즘에 대해서도 입을 닥쳐야 한다는 그 말 - 현재의 근본주의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입을 닥쳐야 한다.